글사랑
-29-.
"어디가 이상해서 왔지요?"
여자머리에 검사장치를 하면서 여검사원이 묻는다.
" 작년 11월 어느 날 갑자기 오른 쪽 머리가 번쩍 휘들리더니 간헐적으로 그런 증상이 와서요”
" 요즘도 그런가요?"
" 요즘은 좀 나아졌는데요."
검사원의 손이 부지런하게 움직인다.
그물 같은 것을 머리에 씌우더니 부분적으로 집게를 꽂고는 집게 아래에 무슨 약을 바르는 듯하다.
" 저리 침대로 가서 누우세요." 여자는 시키는 데로 눕는다.
검사원은 모니터를 보면서 여자에게 이리저리 하라고 한다.
“눈을 감으세요. 뜨세요.예..다음은 눈을 꼭 감으세요 강한 빛에 눈이 부실거에요.”
여자는 힘을 다해 눈을 감는다. 검사원이 무엇을 비추는지 여자 눈 안에 섬광이 비치는 것 같다.
갑자기 자신이 혼자 검사받으러 온 것이 후회된다. 자기가 이렇게 병원 진료침대에 누워 있는 것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언뜻 불안한 것이다.
“예,이제는 오른손을 올리세요. 주먹을 쥐세요. 펴세요." 다음은 왼손으로 똑같이 반복을 요구한다.
“숨을 깊게 내리쉬고 들이마시세요..."
몇 번을 반복하자 여자는 점점 지치는 듯 하다. 점점 들이마시는 힘이 빠진다.
" 예, 이제는 보통으로 쉬세요”
검사원의 지시대로 하는데 모든게 귀찮아 지려 한다.
" 자! 이제 검사 마쳤습니다. 일어나세요. 결과 진단서는 여기로 보낸 린다 박사에게 전문으로 보내겠습니다.나가셔서 대기실에 기다리면 나탈리 박사가 다음 과정을 진료 할 것입니다."
" 예...그런데, 제가 지금 무슨 검사를 받은 것인가요?"
" 아! 두뇌신경 검사입니다. 신경과의 기본검사이지요."
여자는 대기실로 나와 기다리며 이어폰을 왼쪽에만 끼고 음악을 듣는다.
오른쪽 귀는 자유롭게 놔두어 자신의 이름을 불리우면 들을 수 있도록.
몇곡을 들었는지 시간이 좀 지나가자,한 여자 의사가 그녀를 부른다.
의자에 등을 대고 누우란다. 오른쪽과 왼쪽 턱밑에 크림을 교대로 바르면서 초음파검사를 하는 것이다.순간 자신이 큰병에 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 모두 좋습니다. 일어나시지요, 모든 다른 검사가 끝나면 다시 만납시다.”
"예,안녕히 계세요."
여자는 의사와 헤어져 거리로 나온다. 저녁이 되기전 다섯시경 거리는 퇴근하는 차량으로 붐빈다.
5월의 따스함이 조금 나른하게 느껴진다.
천천히 걸으며 조금 전 검사를 상기한다.
2주 전 신경과 의원에서 만났던 여의사 나탈리는 그때 여러가지 검사를 해오라고 적어 주었었다.
여자는 곳곳에 매주 월요일에 예약을 하고나서 출장을 다녀왔고 오늘이 바로 그 첫 번째였다.
다음 주는 심전도 검사이고 ,한 주 쉬고 그다음 주는 MRI검사가 있다.
MRI 검사를 위해 사전에 혈액검사도 받아놓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들을 종합한 다음 신경과에 갈 것이다.
2주 전부터
다음 남은 달까지
6주간을 합하면 총 8주간이 걸리는 것이다.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고 검사받는 것이지만 혹시라도 어려운 병이라면?… 가상을 하니 좀 내려앉는다.
별일 아닐 거야! .. 생각하며 아무에게도 말 안했었는데..그런데 왜 맘이 자꾸 약해지는 거지?
조금 더 걷다가 대학옆 카페에 들어가 앉는다. 젊은 대학생들이 오손도손 얘기들을 나눈다.
딸애가 보고싶다.
딸애는 작년 가을 '독립하고 싶어' 선고 하듯이 말하고 얼마 지나 여자를 떠나 나갔다. 여자는 '무슨 대한독립만세?' 라는 섭섭한 생각도 잠시 들었으나 이제는 혼자서기를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자그마한 아파트를 구해 내보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더니 어느새 초여름이 되어간다.
인생도 이렇게 흘러오고 가는 것이리라.
여자 자신이 딸나이 때를 생각하니 세월이 곱을 넘어 이리도 흘러온 것이다.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았었지?
옆좌석의 젊은이들이 왁자하니 웃는소리에 정신을
가다듬는다.
딸애에게 전화한다.
...응. 엄마.
왜? 아참, 엄마 오늘 병원 갔었지?
괜찮아?
아니 야가 알고 있었네.. 내가 언제 말했었나? 요즘 건망증이
생겨서리.
...그렇지 뭐..검사결과는 두고
봐야 하고..
...엄마, 우리 만날까? 어디야 거기?
...여기는 대학근처 .. 스타북스
...아이, 엄마가 언제부터 스타북스에 다녀 ㅎㅎ
딸애의 깔깔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덩달아 여자도 환해 진다.
...그냥 집에 갈게.. 저녁이 금방 되는데, 너도 쉬어야지..
...그런데, 엄마가 나 보고 싶어 전화한것 같애서.. 정말 괜찮어요
? 우리 오마니!
언제부터인가 딸애는 응석을 섞어 '오마니' 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재미있어 했다.
...응, 보고 싶어 전화했었는데, 이제는 괞찮아.
내래 니 가시내이 목소리 들었으니께니 ㅎㅎ
...오마니 그럼 조심하여 집에 가시와요.
...너도 몸조심 하고 .. 차오! 마이네 토흐터! (안녕! 내 딸아!)
여자는 카페를 떠나 집으로 가는 대신 방향을 돌려 천천히 시내 쪽으로 걷는다. 스테판 성당 쪽으로 가는 길에 과일점에 들어가 체리 한 봉지를 산다. 언제부터인가 꼭 가야 될 그곳을 오늘 가야겠다고 갑자기 생각이 드니 로렌스 교수가 즐겨 먹었던 체리가 떠오른 것이다.
성당 광장은 여행자들로 여전히 붐빈다. 언제나 지나던 곳이 오늘 따라 더 붐비는 것 같다.
그들을 피하듯 광장을 가로 질러 좁은 길로 들어선다.
얼마만이지.. 이 길을 걷는 것이 ...골목 중간의 한 집앞에 선다. 가만히 주소판을 바라보다 가방을 연다. 언제나처럼 작은 주머니를 열어 열쇠를 찾는다.대문 열쇠구멍에 열쇠를 집어넣는다. 열린다.
아! 아직 그대로이네..
안 마당에 들어서니 성당의 첨탑이 보인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올라간다. 가슴이 점점 뛴다.
얼마 만이지?
로렌스 교수의 아파트문앞에 선다.
내가 왜 여기를 왔지?.. 가자 . 이제는 아무 소용도 없잖아.
돌아선다. 바로 그때 건너편 아파트의 문이 열린다.
"오! 제이드! 안녕!"
여자는 역광으로 비치는 그곳에서 나오는 실내
빛에 눈이 부셔 누군지를 알아볼 수가 없다.
"나야. 나!
잉그리드."
"어머. 안녕.. 오랫만이구나 "
"그런데, 지금 제이드가 여기 오는 중이야? 아님 왔다 가는
중이야?"
"방금 왔어, 여기에 놓아 둔 것을 찾아 가려고..."
"그래? 그동안에 통 안보여서
나는 한국으로 간줄 알았는데.. 아직 있었구나.. 하나도 안 변했네..."
잉그리드 ! 네가 바라는 것이 바로 내가 한국으로 돌아 가는 것이었는데, 아직도 그러니?
그리고 너는
여전히 여기 살고 있구나... 여자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잉그리드를 잠시 바라본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시절에 빛나던 금발머리는
어느새 잿빛 은발이 더 많이 섞여있고, 피부는 건조하여 초로의 길에 들어선 것이 역력하다. "그럼, 잉그리드 즐거운
저녁 맞이해, 나가려고 하던 것 같은데..안녕 !" 서둘러 인사하고 돌아서서 문을 연다. 현관으로 들어서니 익숙한 냄새가 그녀에게 인사하는
듯하다. 현관 바로 앞의 작은 탁자 위에 놓인 검은 전화기도
여전하다. 여자는 천천히 거실 쪽으로 들어간다. 아! 시간이 정지된 곳이야 ..여기는
. 피아노 두 대도 여전히 있다. 피아노 앞으로 간다. 그냥 선 채 건반뚜껑을 연다. 띵! 한 손가락으로 친다. 단말마적인
그 소리가 여자를 어딘가로 끌어간다. 의자에 앉아 치기시작한다. 얼마가 지났을까? 피아노 치기를 멈춘다. 어느새 저녁이 내려 어두었다. 전등을 안 키고 있어 시계를 볼 수가 없다. 띠리리링 ! 띠리리링 ! 갑자기 전화벨이 울린다. 꼭 누군가가 피아노
멈춤을 기다렸다가 벨을 울리는 듯 하다. 여자는 어둠 속에 일어나 피아노 위의 스텐드전등을 밝힌다. 갑자기 눈이 너무 부시다. 스텐드 갓 위로 빛이 나가 천정을 밝힌다. 천정의 장식된 석고의 문양이 빛의 강약에 따라 더욱 더 음영이 선명하다. 다시 오른쪽 머리의 현기증에 어찔하다. 전화벨이 또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전화를 받으러 가는 대신 손가방 안에 들어 있는 휴대폰을 집어내어 시간을 본다. 9시가 넘어서고 있다.문자가 2개 들어와있다는 표시가 빨갛게 빛나고 있다. 그대로 다시 가방 안에 집어놓고 주위를 살펴본다. 소파로 가서 앉는다.전화벨은 멈추고 고요하다.눈을 감고 편히 소파에 기댄다. 처음으로 이곳에 오던 날이 영상처럼 지나간다. 노이발덱의 로렌스 교수의 집을 방문하고 그로부터 이곳 시내의 개인교습실 열쇠를 건너 받았었다. 현수의 자조섞인 목소리가 바로 어제인냥 들린다. "그런가? 언니? …. 좌우지간 좋다...언니는 입학시험준비도 필요없고, 여행도 맘대로 해도 되고,유명한 성악가가 반주부탁하며 여러 편리를 봐주고...나는 언제 언니처럼 여유있어질까? 시험에 붙어도 한참 공부해야하고... 유학비도 그렇고..." 그래.. 그때는 정말 운명의 바람이 점점 빠르게 불어 쳤었지. (계속)
기다리고 기다리던 글이 올라왔네요.
요즘은 댓글도 게을리써서 그냥 넘어가는 곳이 많지만 옥인후배가 올려주는 음악과 글을 엄청 기다리는 사람이에요.
슈베르트의 밤과 꿈!
대학 2학년 윤학원 선생님과 함께 하는 마드리갈 합창단 반주하던 시절에 소프라노와 합창이 함께 했던 곡!
동아콩쿨과 겹친 창단공연때문에 교수님께 엄청 혼나고....
난 솔직히 콩쿨에 전혀 나가고 싶지 않았거든요.
3학년 때 나가긴 했지만 2차예선에서 바흐의 프렐류드를 실수로 반복해버리고서는 결과도 안보고 집으로 가버렸지요.
어찌나 시원하던지.ㅎㅎㅎㅎㅎ
음악은 너무나 좋았지만 음악계의 풍토에 들어가기도 전에 질려버린 난 계속 할 생각을 일찌감치 접은 상태였으니까요.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방자한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지가 무슨 세상을 잘 안다고?
얼마든지 길은 있었는데 말이지요.
그냥 운명이라고 생각해요.
휘셔 디스카우와 제랄드 무어에 빠져서 슈베르트의 가곡집을 사다가 열심히 연습하기도 했었지요.
요즘 연습 안하고 살았는데 슈베르트 소나타에 휠 꽂혀서 오늘부터 도전이에요
유명옥 선배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이번 글은 올리는데 무척 뜸을 드렸어요.
제 딸애가 강력하게 올리지 말라고 하네요..( 다 읽지도 않고 지레 걱정ㅠㅠ )
하긴, 저도 홈페이지라는 한정된 곳에
어느 만큼 제가 자유롭게 글을 보여줄 수있을지 점점 신경쓰여 지고요.
그런데, 어제는 "밤과 꿈" 을 듣다가
한참 전에 먼저 써 놓았던 앞글에다 조금 더 연장해 뒷부분을 쓰고서는 '걍'하고 올렸어요 ㅎㅎ
저에게는 지금도 이 곡은 몽환적인 곡으로 여러가지 추억이 많은 곡입니다.
슈베르트가 바로 제 옆에 있는 것 같아요....
'밤과꿈'에 연유된 얘기와
'운명'이라고 표현하신 선배님의 말씀에 많은 공감을 합니다.
선배님 점점 날씨가 추워지는데 건강 조심하세요
-30.-
현수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와? 로렌스 교수가 종이가방에 담아 준 악보책을 펼쳤다.
첫장을 펼치자 만년필 글씨가 보였다.
"친애하는 아인,
당신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당신의 반주로 같이 불려질 노래는 슈베르트를 기쁘게 할 것임을 믿습니다.
1989년 초여름 비인에서
당신을 경애하는
파울 로렌스"
그의 글을 스펠링 하나하나 풀어 읽듯이 천천히 읽었다. 그녀의 가슴은 벅차왔다.언제 그가 이 글을 적었을까 잠간 아연해졌다.
그래!악보책을 넣어줄 가방을 찾는다고 책을 가지고 잠간 나갔다 돌아왔었지..그는 믿는다고 한다. 그 누구가 나를 이 사람처럼 믿었던 적이 있었던가...라고 생각하니 불원천리 이곳에 있는 스스로의 상황에 놀라웠다.
남편을 떠나 한달 이상 살아본 적이 처음이다.여기 온 후부터 처음 경험하는 것의 연속이다. 그런데, 모든 것들이 속히 익숙해 짐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다음날 소연학생에게 여행계획을 세우려고 연락했다.얼마 전 소연과 또 다른 자매가 같이 잘츠부르그에 여행할 계획이라는 것을 들었던 것이 떠올랐다.또한 조금이라도 현재에서 거리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고 싶었다.그러나 그 학생이 며칠간 교수레슨을 받어야 한다고 한다.공부하는 학생을 방해하고싶지 않아 그럼 기다리겠다고 했다.
며칠간 시간이 나자 로렌스 교수의 시내 아파트를 찾아 나섰다.주소를 집어들고 스테판 성당 쪽으로 가니 지난번 현수와 갔었던 이태리 레스토랑 근처에 있는 것이다.모짜르트의 '휘가로 하우스’를 거쳐 골목을 한번 더 지나 돌아서서 몇 발자국가니 번지를 적은 숫자가 보였다.열쇠로 큰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당 한가운데는 커다란 나무가 잎이 무성하게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그 이파리 사이로 보이는 하늘에는 스테판 성당의 첨탑이 아주 하늘 높이 솟을 듯이 뾰족해 보였다. 같이 따라온 딸애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 본다.
ㅡ 엄마! 여기가 어디에요? ... 눈으로 묻고 있다.
"은지야 여기가 로렌스 교수님 집이야. 엄마가 연습 좀 해야하는데,우리 은지는 그동안 심심해서 어떻하지?"
"엄마 걱정하지마. 여기 가방에 인형놀이 담아왔어."
"아니, 엄마가 연습하러 오는 걸 알았어?"
"응!엄마가 지난번 로렌스 교수님이 준 가방을 들고 나오길래.."
허!.. 딸애의 눈치에 기가막히다. 미안하다. 어린 것이 벌써부터 엄마를 배려하고 있다니...
"은지야 고마워! 오늘은 잠시만 연습할께. 그리고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약속!"
마당 한가운데 서서 모녀는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두리번 거린다. 제일 가운데 나무를 주위로 ㄷ 자모양으로 난간이 있다.한벽만이 난간이 없다.난간에는 아기 자기한 꽃들이 심겨진 화분들이 걸려있다.아파트 호수를 찾아 계단을 올라간다.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이 오르내렸는지 석조계단 중간 부분이 움푹 파여있었다.
드디어 아파트 문앞에 도달아 난간 밑으로 마당을 보니 정적이 감돌 뿐이다.
아파트문을 연다.현관으로 들어선다.현관왼쪽에 기다란 거울이 걸려있다. 그리고 거울 옆의 탁자 위에 골동 전화기가 놓여있다.열쇠를 전화기 옆에 놓다가 ?아인에게' 라는 자기 이름이 쓰여진 쪽지를 발견한다.
?어머! 얼른 집어들고 펼쳐본다.
"경애하는 아인,
당신이 왔군요... 편하게 지내요.
부엌에 과일과 간식이 있으니 들고요.
은지를 위해서는 몇가지 장난감을 준비해 두었으니 가지고 놀아도 되고요.
혹시 더우면 창문을 열고 연습해도 됩니다.
제가 관리인에게 미리 얘기 해 두었어요.
그럼 즐거운 시간을 갖기를 ..
파울."
쪽지를 읽고 나서 여자는 기분이 야릇하다.그가 어디선가 그녀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일단 피아노가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복도를 조금 지나자 커다란 유리로 되었있는 여닫이 문으로 빛이 나와 환하다.그 문을 열고 들어 서니 피아노 두대가 놓여있다.들어가는 쪽의 정면으로 피아노를 지나니 거기도 커다란 유리 여닫이 문이 있다.문을 여니 넓직한 공간에 화분들이 가득하고 소파와 앉을 자리들이 넉넉히 놓여있다.거기에는 허리높이 위로 유리 창문으로 전면이 되어있어, 바로 아까 마당에서 보았던 나무의 웃동이가 손에 잡힐 듯하다.
?엄마! 와! 여기 너무 좋아.나 여기에서 놀게.여기 방문을 닫으면 엄마 피아노 소리도 잘 안 들릴 것 같은데..“
? 그럴래? 그런데, 화장실 먼저 찾아보고...“
? 엄마! 여기 문이 있는데, 피아노 방으로 안 나가도 될 것 같아“
여자가 그 문을 열고 나가니 커다란 방이 또있었다. 그방을 통해 나가니 아까 복도가 나오고 거기 오른쪽에 화장실이 있었다. 조금 더 복도를 가니 왼쪽으로 방하나를 지나 부억문이 열려 있었다.부억 안 식탁 위의 커다란 도자기 식기에는 빨간 체리가 듬뿍 있었다.
아! 요즘이 체리철인가 보구나..
대충 집구조를 파악하고 딸애를 유리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리를 잡아주었다.
"은지야, 화장실 가는 길 이제 알지? 그럼 여기서 놀아. 졸리면 자도 되고"
"응, 엄마!"
여자는 피아노 방으로 돌아온다. 한쪽 벽에는 천정부터 마룻바닥까지 서가로 꽉 차여있는데, 그 중간에 오디오장치가 되어있으며 여러가지 LP레코드 , CD들이 즐비하다. 또 다른 한쪽 벽에는 그림 몇점이 붙여있고 편안해 보이는 소파가 놓여 있는 앞에는 기다란 얕은 탁자가 놓여 있다.탁자위에는 몇가지 책자들이 놓여있다.
피아노에 앉아 악보를 펴 놓는다.딸애가 있는 유리방 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강해서 악보 보기가 힘들다.중간에 있는 커텐으로 유리문 반을 막아 빛을 조절한다.악보가 제대로 보인다.천천히 치기 시작한다.
여자가 치고 있는 겨울나그네는 슈베르트가 마지막으로 작곡한 연가곡으로서 첫 번째 시작곡이 '구테 나흐트' 라는 제목이다.
"잘 자!"라는 밤인사로 시작하는 시인의 맘을 그려 보았다. 대학시절 교직과목으로 가창시간에서 딕션공부로 독일어 가사를 배울때 교수님이 예를 들어서 가르쳤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사람의 잠재의식은 참으로 신기한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슴에도 불구하고 기억나는 것이 꼭 호수에 돌을 던지면 잠시 후에 수포가 뽀로로 떠오르는 것과 같다니...
전체 24곡 중에서 많이 불려지는 '보리수'는 한국인의 애창곡이다.
반주에서 빠르게 현란하게 움직이는 것은 보리수 이파리를 연상하는 것은 아닐까?
얼마 전까지 연연히 연한 하얀빛 가까운 연두색내지는 연노랑색으로 피어나던 비엔나 거리 곳곳의 보리수나무 꽃의 향기가 새삼 상기 되었다. 한국에서 못 보던 보리수 나무를 처음 보며 가슴이 둥둥 설레이기 까지 되었었다.
그래! 이렇게 모든 것을 수용하고 경험하자.기회는 이렇게 오는 것이잖아..
그런 맘이 들자 차분해지기 시작했고 비엔나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차근차근히 성악부분 선율과 피아노 반주곡을 비교하며 쳤다.
유리방이 너무 조용하여 치기를 중단하고 그쪽으로 가서 문을 연다.
어쩌나!
딸애가 소파에 쪼그리고 잠들어 있다.햇빛은 어느새 옅어지고 저녁을 향하고 있다.가만히 아이를 안는다.가슴이 저르르해진다.
이 아이는 왜 이리도 엄마를 이해하려고 하는가? 왜 떼를 쓰지 않는가?
아이가 뒤척이다 눈을 방긋 뜬다.
"엄마, 이제 연습 끝났어? 아이,참! 내가 잠시 깜박했네.. 엄마! 오늘 친곡이 참 좋아요, 가만히 듣다가 잠이 오더라고요 호호"
아이는 흥분하거나 기분이 좋으면 언제나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말한다.여자는 아이를 더 힘껏 안아준다.
" 엄마 ! 왜 그래요? 아이 숨도 못 쉬겠네.."
" 은지야, 우리 이제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 어서 일어나"
딸애가 놀며 흐트러 놓았던 소파를 정리하는데 현관 벨소리가 난다.
"엄마 누구지?" 딸애가 말하더니 벌써 현관 쪽으로 뛰어간다. 여자는 마저 방정리를 마치고 현관 쪽으로 간다.현관 앞에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누구신가요?"
"저는 이집 전체 관리인 마르쿠스입니다. 로렌스 교수님께서 부인이 오시면 불편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아 달라고 부탁을 하셨었어요"
"아, 그러세요 괜찮아요. 오늘은 이제 가려던 참이었어요."
"예, 그러잖아도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길래 이래 찾아 온 것입니다. 내일도 오시나요?"
"예, 그럴 것 같은데요."
"그럼 내일 또 아름다운 음악을 듣겠군요, 반가웠어요."
"예, 저도.. 그럼 안녕히"
여자는 현관문을 닫고 연습실방으로 가서 정리한다. 딸애는 졸졸 따라 다닌다. 여자가 딸애의 머리를 막 헝크린다.
"엄마! 지금 복잡해요? 맘이?"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하니?"
"그냥 .. 아니, 내 머리 헝크린 것 처럼 ..그런 것 같애서요.."
"호호 우리 예삐가 여우가 다 되었네.. 자, 이제 가자 "
대문을 나와 네모진 돌 골목길을 걷는다.딸애는 깨꿈질하며 두 개씩 건너 뛴다.
골목길을 다 나와 모퉁이를 돌려는데 마주 들어오던 여자와 부딪히며 딸애가 쓰러진다. 부딪힌 여자는 커다란 사다리꼴형 악기케이스를 들고 있다. 여자가 딸애를 부등켜 안으며 그 맞은편 여자를 올려다 본다.
" 아니! 무슨애가 이리 촐랑거리누 .. 체!"
상대여자는 너무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모든 것이 딸 탓인 듯 말한다.
"무슨 말씀을 그리 하시는지요. 당신이 모틍이를 틀며 앞을 보기 전에 당신의 악기케이스가 먼저 들어오다가 우리 애와 부딪힌 것이 아닌가요?"
"......."
상대 여자는 무안한 듯한 눈빛으로 외면하려다가 다시 여자를 쏘아 보며 여자가 들고있는 악보가 들은 가방을 보더니 깜짝 놀란다. 낯익은 가방?
" 아니? 당신은 파울이 말하던 그 한국여자이지요?"
"...."
파울? 누구? ... 아! 로렌스 교수의 이름이지
" 맞지요? "
" 글쎄요. 한국 여자가 비엔나에 저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 아니에요!.당신이 맞어요! 어린 딸애랑 지낸다는 이미지!! ㅎㅎ 제가 그리던 상상 그대로네요 . 참! 이렇게 만나다니.... 제이름은 잉그리드에요 "
"예,.... 저는 당신에 대해서 들은 적이 없어요. 그럼 이만 실례할께요. 은지야 어서 가자"
여자는 웬지 상대 여자가 선듯 맘에 안 들어 본인의 이름을 말 안하고 돌아선다.
"잠간만요!..혹시 화나셨어요?"
"아니요,.. 그러나 기분 좋은 것도 아니네요... 우리 그냥 갈께요"
여자는 기분이 점점 상한다. 노골적으로 의사를 전하는 잉그리드때문에. 그리고 천연듯이 마주 받아치지 못하는 자신의 행동에.
-31.-
딸애와 서둘러 잉그리드를 피하듯 그곳을 떠나 성 스테판 성당광장으로 왔다. 저녁 거리는 여전히 활기찼다. 일단 노천 카페에 앉았다. 지나는 사람들을 보는것도 즐겁다. 이제 한달정도 살았다고 여행자들이 다니는 모습을 보니 미소가 져진다.
"엄마! 왜 웃어?"
"응 ... 저기 사람들이 우르르 다니는 것이 우스워서 .."
"엄마 저사람들은 바쁜가보다. 그지? 그냥 걷네. 우리처럼 쉬지도 않고"
"그런가 보다... 참! 은지야 배고프지? 엄마가 맛있는 것 시켜줄게.. 혹시 특별히 먹고 싶은 것 있니?"
"다 먹고 싶어요. 배가 무지 고프거든요."
"그럼 아까 말하지 그랬어. 엄마 연습 그만해도 되었었는데.."
"엄마, 이상하게 교수님집에서 엄마 피아노 소리 들으니까 서울에서 듣던 거하고 달라요. 왜 그렇지요?"
"어머 그러니? 뭐가 다르지?"
"노래를 따라 하고 싶더라고요... 엄마가 한손으로 노래만 칠때 ㅎㅎ"
"와우! 우리 예삐가 제법이야.. 그럼 한번 그 노래 불러 볼래?"
"아이, 엄마는 사람들이 듣잖아요. ㅎㅎ"
여자는 딸애랑 얘기하면서 행복하다. 서울에서는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없었다. 애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일을 했고 애가 집에 돌아오면 친정아버지가 여자 귀가할 때까지 돌보아 주었었다.이제 다시 서울에 가면 그런 생활이기다리겠지...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이 참으로 소중해진다.
"엄마 무슨 생각해?"
"응 ... 그냥 행복해서 . 은지랑 이리 둘이서 오손 도손 얘기를 나누니까 ㅎㅎ"
"엄마, 그런데 현수이모는 바뻐요? 보고 싶다 "
정말 그 가시내가 연락이 없네.. 로렌스 교수를 만나고 돌아 온후 통화가 한번도 없었다.
" 은지야 , 너 혼자 여기 있을 수 있지? 엄마가 공중전화하고 올께. 이모한테"
" 정말 ? 어서 하고 오세요"
여자는 공중전화복스로 가서 현수에게 전화를 건다.한 여섯 번이상 벨이 간 다음에서야 연결이 된다.
...여보세요
...현수야, 안녕! 나야!
...아, 아인 언니구나..
...어디 아프니? 목소리가 힘이 없네.
...그냥 힘이 없어 ,, 다 귀찮고.
...그럼 나와. 내가 저녁 사줄게. 은지가 이모 보고 싶다네.
...어딘데?
...스테판 성당 앞 노천카페.
...음... 언니, 오늘은 그냥 집에 있을래, 고맙지만..
얘가 많이 아픈가... 아니면 나를 꺼리나?
...그래, 그러면 푹 쉬어.
...참, 언니 언제 여행가?
...한 사나흘 후에.. 왜?
...언니가 집비우면 내가 언니네 있어도 돼?
...왜? 무슨 일 있니?
...나중에 애기 할께, 언니 은지랑 즐거운 저녁! 챠오!
전화를 마치고 나서 카페로 돌아와서도 현수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무슨 일이 있는것이지?...
딸애는 현수가 못 나온다니까 실망이다. 애가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느긋이 케른트너 거리를 걷는다. 가게 안으로부터 나오는 전등빛이 부드럽게 거리를 비춘다. 어린이 놀이기구상가 앞에서 딸애가 서더니 꼼작을 안한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인형유모차를 보고 있다.
" 은지야, 저거 가지고 싶으니?"
" 응! 그렇지만 우리 다시 한국 갈건데 뭐..."
아니, 야가 한국 갈 생각을 이리도 하고 있네.
" 그렇지만 네가 원하면 사서 쓰다가 가져가면 돼."
" 정말요, 엄마?"
" 우리 여행 다녀온 다음에 사줄게.. 알았지?"
오페라 앞에서 전차를 타고 한 정거장 지나 왕궁정원 앞에서 내려, 길 건너편에서 57A번 버스로 갈아 타니 딸애가 졸기 시작한다. 서울에서는 유치원 스쿨버스나 엄마 아빠의 승용차타며 쉽게 다니던 애가 이 곳에서 대중교통만을 타고 다니니 피곤한 것이리라. 오늘 따라 애가 딱해 보인다. 내일 부터는 애를 위해 시간을 더 나누어야겠다 싶다.
세 정거장만에 집근처 정거장에 버스가 선다. 조는 애를 깨우기가 어려워 애를 뒤로 업는다. 가방을 든 손으로 애의 궁둥이를 바치는데, 제법 방댕이가 통통하다. ㅎㅎ무겁네?
4층 꼭대기 까지 끙끙 거리며 올라갔다.집안으로 들어오니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애를 우선 침대에 누윈 후 수화기를 든다.
...당신 어디를 그리 다니오?
남편의 볼멘 소리가 들려온다
...오늘 피아노 연습한 후 저녁먹고 들어 왔어요.
...그랬소? 몇 시간전 부터 몇 번이나 전화했었는데 통화가 안 되어 걱정했구먼.별일이 없으면 됐구.. 그런데, 은지가 보고 싶어서 어쩌지..내가 일 때문에 날아 가기도 그렇고.."
...당신 오늘 왜 그러셔요 .. 혹시 약주를 과하게?
...아니, 당신 뭔 소리 하는 거요. 에비가 딸자식 보고 싶은게 당연한 거지. 눈에 밟혀서리...
그렇겠지.
남편은 딸애가 잠투정하면 런닝샤스 안에 집어 넣고 직접 살의 따뜻함으로 애를 달래어 재워 주었었다.
...여보! 내가 괜히 여름 연수를 신청했나 봐요.. 그냥 지금이라도 포기하고 한국 갈가요?
...아니, 그럴 정도는 아니요.. 참지 뭐..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지내요. 여기 생각은 하긴 하오?
"......"
남편이 이렇게 핵심을 찌르는 질문을 한 것은 드문 일이다.
...그렇잖소,, 전화도 내가 하고 당신은 받기만 하잖소?
"........"
...내가 미리 앞서 가는 생각인지 모르지만, 당신은 그곳이 좋은가 보오. 적응도 잘 하고..
...여보, 당신 더 자야지요 지금 새벽인데.. 저도 피곤 해요
...그럽시다. 내일은 은지와 통화 좀 하도록 해 주구려..
...예,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통화를 마치고 잠자는 딸애의 옷을 갈아 입히며 남편의 말들을 곰곰히 생각한다.
결혼생활 중에 남편이 출장가면 집에서 혼자 있는 때는 종종 있었으나, 이번처럼 여자가 남편을 떠나와 한 달 가까이 지낸 것은 처음이다. 그런데,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남편이나 한국 식구가 그립지가 않다.
왜 그럴까?
여자에게 무심한 듯 대하던 남편의 딸애에 대한 그리움 표현이 사실은 아내를 그리워함의 간접표현이 아닐까? 여자는 실소를 한다...아니? 무슨 분석을 하는게야. 지금.
모든 일들은 남편이 처음부터 계획하고 우리 모녀를 이곳으로 보내왔고 형편에 따라 나는 좀 더 머물다 귀국하면 모두 원점으로 돌아 가는게지...
그런데,
이제 다시는 원점으로 돌아가지 못 할 것이라는 예감이 여자를 붙잡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가곡 " 밤과 꿈"
Schubert - "Nacht und Tr?ume" Fischer-Dieskau, Moore
Dietrich Fischer-Dieskau (baritone)
Gerald Moore (pian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