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신은 지난 날을 상고해봅니다. 가뭄과 흉년이 들기는 신주를 묻는 해로 시작하여 4년 동안에 곡식은 낫에서 물러났고 음식은 솥에서 떠났으니, 남편을 가지고 좁쌀과 바꾸고 내외간은 마주 울고, 자식을 팔아 살기를 꾀하고 부모는 서로 헤어졌으며, 떠돌아 다니는 사람은 길을 덮었고, 굶어 죽은 사람은 거리를 메웠습니다.
백곡스님은 여기서 붓을 놓았다.
좀 쉬어야겠다.
밖에서 풀벌레 소리가 나지막히 들려왔다. 한여름의 왕성한 울음이 아닌 걸 보면 가을이 깊은 모양이다. 며칠 밤낮을 뛰는 가슴 잠재우며 평상심을 불러들이느라 애쓰면서 상소문을 마련해온 탓에 눈두덩이 파여지는듯이 당겨왔다. 이제 조용히 마지막 몇 구절만 덧붙이고 나서 상께 올려야겠다고 생각하니 온 몸이 무너져오는 것 같았다.
백곡의 왼손바닥으로 오른쪽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목 뒤가 뻐근하니 당겨온다.
스승께서는 함부로 허리를 굽혀 앉지 말라고 늘 가르치셨지. 나이가 들어서인가. 며칠 밤낮을 책상 위에서 필묵과 씨름하다 보니 저절로 등허리가 굽어지고 어깨가 쑤셔오는구나.
스님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아직도 분노의 불씨가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음을 스님은 스스로 감지할 수 있다. 이십년이 넘도록, 아니다, 삼십년이 가깝도록 마음 재우는 길에 정진해왔건만, 이렇게도 성난 마음의 파도가 잦아들 줄 모르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장지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찬 바람이 머리를 식히고 지나간다. 툇돌 위에 가지런히 벗어 놓을 짚신을 신으려 하는데 몸이 휘청 흔들렸다. 백곡스님은 무의식 중에 기둥을 붙들고 기대어 섰다. 이틀간 곡기를 끊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선응사미가 달려왔다. "시님, 시님." 울먹이며 말을 말을 잇지 못하는 사미의 목소리가 애잔하다. "괜찮다. 걱정말고 어서 네 할일이나 마저 하여라." "시님, 이렇게 맹물만 드시고 공양을 안 하시니 기운이 다 떨어지시잖아요." "괜찮다지 않느냐. 조선 사람들이 모두 굶어 죽는 세상인데 내가 이틀 쯤 안먹고 지낸다고 무슨 일이 나겠느냐.큰 일이다. 천지가 타들어가고 살아 있는 목숨들이 다 죽어가고 있으니" "그래도 시님께서 건강하셔야 저희들이 기운을 내지요." "그래, 그러마. 어서 네 일이나 보아라."
백곡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선응의 눈동자를 지긋이 내려다 보았다. 선응사미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잡았던 백곡의 어깨죽지에서 두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내고는 합장하여 반배하고 돌아섰다.
아직도 변성기가 되지 않아 계집아이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선응이의 뒷모습을 보면 앞으로 장정이 되려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강보에 싸인 놈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여 데리고 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기티를 벗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대견스럽기 한량없는 일이다.
아마도 선응 이놈이 저녁 공양 후 자기 할 일을 접어두고 일없이 내 방을 쳐다보며 앉아있었음이 분명하다고 백곡은 생각했다. 벌써 보름째 방의 불을 밝히고 소장을 준비하느라 밤을 세우는 일이 허다했는데 선응이는 그 때마다 백곡의 처소와 마주한 요사채의 마루에 걸터앉아 마치 신장처럼 긴 밤내내 자신을 지켜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터였다.
백곡은 조용히 툇돌에서 발을 내려 딛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조금만 조절을 하면 이 어지러움도 가실 것이다. 끼니 때마다 밥상 앞에 앉는 것은 마음 여린 백곡에게 여간 감당하기 힘든 일이 아니었다. 4년째의 흉년으로 이제는 더 남아있는 곡식도 없었다. 백성들은 나무껍질이나 풀뿌리로 겨우겨우 연명을 하고 있으며 그나마도 없으면 앉아서 굶어죽는 형편이었다. 다행히 함경도는 가뭄이 덜 해 그곳에서 실려 오는 낟알로 온 백성이 겨우겨우 연명은 하고 있지만, 그것도 양반네나 그 가솔들의 일이지, 8천에 속하는 천민들에게는 없는 일이나 매한가지였다.
8천의 하나인 스님네들에게 있어서랴. 선왕이신 효종대왕께서 승하하시고 새 임금이 보위에 오르신 뒤로 해마다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가며 강토를 휩쓸고 있다. 한해도 아니고 두해도 아니고 벌서 네번째 해가 된 것이다.
추수할 계절인데 거두어들일 것이 아무것도 없다. 조정에서는 근년들어 해마다 진휼어사를 호남과 경남에 보내어 흉년의 실상을 알아보고 여러가지 구황책을 내놓곤 하였지만 실제로 백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은 적었다. 임금은 팔도에 직접 조서를 내려 재해가 극심한 곳에 대해서는 세, 공 등의 역과 초군, 군포등을 경감해 주라고 명했다.
지난 2월에는 진휼어사로 호남에 내려갔던 이숙이 현종 앞에 나아가 흉년으로 굶어 죽은 자 1백42명이며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9백98명이라고 보고하였다.
원자가 태어나고 왕비 및 대왕대비, 왕대비의 존호를 올리는 겹경사가 있었던 제작년에는 경상좌도에 큰 물이 져 1백20가구가 물에 잠기고 70여명이 떠내려갔다는 보고가 있었다. 엄청난 수해로 민간의 전답이 무너지고 벼곡식이 잠기어 그 피해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의 사치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이런 상소가 올라기도 했다.
`사치의 폐해는 도둑의 폐해보다도 더 심합니다. 속담에 `궁중에서 높은 상투를 좋아하니 사방이 상투를 한자로 높이더라'고 하였거니와, 이 사치풍조를 치유하는 정책은 다른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 다만 위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질 낮은 옷입기를 주 문왕같이 하고, 거친 밥 먹기를 하우같이 하여 검소함을 근본으로 삼는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조세감면은 한 문제같이 하고 백성 쉬게 하기를 진 도공같이 하고 나서야 사치의 풍습을 조금이나마 고치고 구렁텅이에서 허덕이는 백성을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백곡스님은 자신의 처소 앞마당에 서서 망연히 하늘을 쳐다보았다. 이런 시련이 지난 천 삼백년동안 한번이나 있었습니까.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견디기 힘든 화두를 내리시는 겁니까.
백곡은 차리리 짐승처럼 울부짖고 싶었다.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딩구는 것보다도더 무서운 것은 하루하루 옥죄어 오는 조정의 불교탄압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이 땅의 모든 스님네는 의지할데를 잃을 것이고, 빈 절의 부처님은 오늘날 구덩이에 쳐박혀 나딩구는 시체들처럼 언젠가 이사람 저사람의 발길에 채일지도 모르는 일인것이다.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미래였다.
누군가에게 힘껏 소리지르고 싶었다. 이제 어찌하라는 것입니까. 살기등등하도록 검푸른 하늘에는 별이 총총 백곡의 가슴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인지 그저 무심히 반짝이고 있는데, 동정성 근처에는 객성 하나가 밝은 빛을 뿌리며 떨어져 내렸다. 옛부터 객성이 자주 나타나고 하늘에 이변이 있으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는데…
작년에는 월식마저 있었다. 광해조에는 이렇게 참혹한 화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들어왔다. 그 때는 배곡이 태어날 무렵이었으므로 갓난아이가 그 처참함을 기억할 리 없는 일이지만, 날이 가물어 농사일이 걱정스러울 때면 스승과 동양위 주변의 어른들은 하나같이 악몽같았던 광해조의 재변을 이야기하곤 하였다. 그럴때 들려온 한숨소리 다음에는 언제나 "객성이 자주 들어 걱정일세"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언제 끝날 시련인고. 백곡은 검푸른 하늘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보았다.
벌을 내리시나이까. 조상의 신위를 모래 속에 파묻고 비구니를 강제로 혼인시킬 뿐아니라 지나가는 스님을 재미로 두드려패는 이 못된 세월을 질책하시고자 함입니까. 그러나 너무 가혹합니다. 굶어 죽는 이런 아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으며 신음하는 백성들은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런 가혹한 벌을 내리십니까.
잘못이 있다면 저 유학을 따르는 무리들의 무도함에 있습니다. 혼조에 지은 궁궐은 부수는 것까지 무어라 하겠습니까마는 부처님을 안치한 절을 부수고 심지어 불을 지르며 무참하게 스님들을 내쫓고 있으니 어찌 하늘에서 내리는 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벌을 내리시되 가련한 백성을 생각하소서.
글:노명신 삽화: 김영만
옥인 후배!
명신이의 <구슬아>가 등장하여 깜짝 놀랐어요,
명신이와 저는 <앤과 다이아나>로 서로 부르며 소녀시절의 가장 진한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워낙, 이 사람의 사랑은 뜨겁구요....
저의 우정은 따듯한 편입니다.
<구슬아> 단행본으로 묶은 것 나에게 있구요, 물론
가토릭시보사 기자 시절 그 신문에 연재한 <플랑크톤>, 신춘문예 당선작 <빛깔과 냄새>
유족들이 연전에 묶은 3권의 책들.... 모두 나에게 있습니다.
한국 오시면 한번 만나요!
아님 제가 유럽행을 하는 수도.....
궁여지책으로... 복사본으로 만나시게 하는 수도 있어요......유족들은 사본제작을 저어할 것 같아요.
그리고, 인일10 노명려 박사가 그 동생이고, 인일3 노명주 선배가 그 언니인데.... 동창회에서 얼굴본지 오래되었어요
.
저는 절친 둘을 상당히 일찍 여웠습니다.
1)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에 다니다가 졸업도 않고 미국 유학생과 결혼한 은순이.... 어이없이, 대학졸업한 다음해 정도에 (1975)
지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최근 그 남동생 소식을 들었는데 제고-서울의대 출신인 이철희.... 이 사람이 현재 분당서울대병원 원장이라네요. 명망이 있는 분입니다.
2) 그리고 명신이, 명신이는 이대 정외과를 나왔어요.
명신이는 금남로 한가운데 서방님이 운영하시던 사업체에서 광주사태 다 겪고, 눈에 콕 집어옇고(1980)
신흥개발지였던 방배동으로 이사하여 아이들을 리라국민학교 비롯, 최고 개인교습 습득시키고는
1985 내가 대전으로 직장을 정하니 여름 장마 때마다 방배에서 대전 도마동을 차몰고 생일축하로 내려오곤 하였죠.
명신이가 세상 뜬 것은.... 2000.5. 즉 48세......
3) 이 아까운 친구들의 생명력을 모두 합쳐서 살아내야 한다고
마음에 빚으로 품고 지냅니다.
.
유순애 선배님!
노명신 작가님의 글을 올리기 전에 선배님께 미리 여쭈어 볼까? 라고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발표된 글은 이미 나름대로의 생명력이 있어
독자들에게 글자체로서 전해짐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에
용기를 내어 이렇게 올렸습니다.
위에도 제가 글을 올리게 된 내용을 썼었지만,
7년 전부터 유선배님의 글을 읽고 노명신 작가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는 차에 요즈음 인일 동문님들 중에 작가되시는 분들의 글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전 자유게시판에 10기 박성실 후배의 ' 여행 작가' 에 게재된 글도 옮기었었습니다.
중화中華의 바람, 비상飛上하는 붉은 열정의 거리/ 수필가 박성실 ( 인일여고 10회)
노선배님의 책은 기회가 되면 장만할 수 있겠지요.
무리하게 복사판으로 구하지 않더라도
노명신 작가 서거 20주년쯤에 출판되어지기를 기대해봅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읽은 상테에서도
노명신 작가님의 글체라든가 그분의 자료수집의 집요성등은 충분히 다가 옵니다.
저처럼 글로 만나는 사람은 글 속에서 주제를 통하여 만나고 있지요.
48세가 되시던 2000년 5월에 하늘나라로 가셨다니 이제 16년째가 다가오는군요.
그분의 따님이 어머니를 기리며 내문집을 발간한 다음
어머니 친구분들에게 전한말을 읽으면.....
....자신이 원하는 삶에 항상 솔직하셨던 어머니를 생각하면,
새벽잠에서도 눈이 번쩍 뜨여진답니다.
지금도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아쉬운 일이지만,
어머니 인생 자체의 완성도와 아름다움은
참 짧고 진한 그 자체라,
전 사실 어머니가 무지 부럽답니다.....
따님으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는 성공한 어머니였슴이 여실히 나타납니다.
주위에 일찍 세상을 떠난 분들의 유족이 있는데요.
떠난 사람보다 남은 사람들이 더 안타까울 때가 종종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인생의 명제를 더욱 떠오르게 됩니다.
어디서 왔는가? 어디에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부디 유가족들의 평강을 기원합니다.
제가 비엔나에 와서 부전공의 하나로 비교문학을 하며
소시적 아버지의 반대로 문학의 뜻을 접었던 것을 뒤늦게 채워나갔습니다.
그러나 글을 쓴다는 것은 쓰고 싶은 욕구와는 별개이므로
선뜻 시작하고 야무지게 마무리 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며
아버지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자신의 딸애에게 닥쳐올 어려운 삶을 미리 막으셨었구나 싶습니다.
그래도 저처럼 뒤늦게 출발하였으나
온 정성을 다해 글사랑하시는 분들과 같이
노명신 작가의 글을 읽으며 나누고 싶어서 올린 글에
유순애 선배님께서 이렇게 진솔하신 댓글을 주셔서
송구합니다. 그리고 매우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분의 친구를 그리워하는 선배님께 위로가 넘치시기를 기원합니다.
1) 그립죠, 어마어마하게 그립고.... 너무 일찍 헤어진 것 억울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서 자주 대화합니다. 물론 은순이와 명신이는 너무 다른 사람이라... 마음 속 dialoqgue 역시 서로 아주 다릅니다.
은순이는 일찌기 별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방님이 된 그분을 사귀는 동안 받은 별칭인데 芸(풀향기 운), '운'이라고 부르신 내력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2) 명신이의 필명은 [김지인] 이고, 딸래미 이름이 지인이... 즉 한지인 입니다.
엄마에 대해서 아주 제대로 알고 있구나... 슬거롭다..... 싶습니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은 생략합니다.
3) 인일 출신 작가들을 알고자 하신다니... 인일7에 글쓰는 이들이 여럿이에요.
아동문학가 김영희는 제 초등 시절의 친구입니다. 눈이 크고 독특한 매력이 있죠. 지금 강원도 산간 어디에 집짓고 지냅니다.
소설가로 등단한 또한명 지명제가 있습니다.
지명제 필명은 윤명제 여요. 약20년간 청량리 정신병원에서 상담을 한 이력이 독특합니다.
그러다보니... <아줌마, 비밀인데요...> 이름의 책, 청소년 상담기를 묶어 내기도 했답니다.
고 노명신 작가가 인일 7회 졸업생이라는 것을 2009년 인일 홈피에 가입하면서
유순애 선배님께서 쓰신 먼저 간 동창을 회고하는 글을 통해 알았었습니다.
IQ 최고는 노명신, 그리운 명신이...
노명신 글 모음집이 나왔네
오늘은 좀 더 그 분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하여
창간 8주년 기념 중편 불교소설 공모 당선 가작-구슬아 ... 라는 작품을 읽게 되었습니다.
연재소설인데 전편을 읽을 수는 없었으나 1, 3 ,4, 7,10, 12, 13편과
'연재를 마치며 작가의 인터뷰' 내용 등등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이곳에 제일 첫편을 옮겨봅니다.
이 작품 이전에 대학시절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 소설 '빛깔과 냄새' 로 등단했다고 하는데
그 작품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얼마 전에는 유가족들이 고인의 글을 모아 출간했다고 합니다.
기회가 되면 꼭 이 문집을 구하여 읽으려고 합니다.
생전에 접하지 못 하였으나
이 분의 글을 읽으며 존경의 마음을 가 지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