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쌓이지 않는 눈 속에 


                                                                           김옥인 



" 어머니, 샤갈의 마을엔 삼월에도 눈이 온대죠?"

말라버린 낙엽이 흩어지는 산장은 앙상한 자태를 드러낸 채 스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는 때였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산장 풍경에 조화된 음성이 퍼지고 있었다.

" 그래. 샤갈의 마을엔 삼월에도 눈이 오면..... 아! 우리도 언제 그런 곳에서 살고 싶지?"

부드러운 부인의 음성이었다. 나는 퇴색된 낙엽 위를 감각없이 걸어가 소년의 뒤에 섰다.

부인은 나를 보고 흠찟하였으나 곧, 말할 수 없이 낮고 부드러운, 그러나 어두운 표정으로,

" 오셨군요. 이 겨울이 다 가도록 즐겁게 지내 주십시요. 개학이 삼월이라죠?"

나는 부인의 얼굴에 시선을 줄 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소년이 시선을 나로 향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소년의 시선은 다시 부인을 향했다.

부인은 침착히 웃음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차츰 촛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소년은 그제야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는 듯이 계속 부인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 오신다던 분이신가요?"

부인은 목인형마냥 고개를 약간 끄덕일 뿐 나에게는 의자에 앉으라는 얘기도 하지 않았다.

아마 외부 손님의 발길이 끊어진 지가 오래되어서 그들 모자는 무척이나 당황하는 빛이었다.

소년은 이국적인 정서를 풍기는 눈에 병적인 미소를 감추고 통나무 의자에 앉아서는 상앗빛 가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부인은 엷은 색의 긴 옷을 길게 늘어뜨리고 소년의 화구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후, 나의 산장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소년의 친구가 될 겸 소년에게 피아노 가르치기 위해 대학교수의 소개로 겨울방학동안 산장에 찾아 온 것이었다.산장은 언제나 조용한 음율이 흐르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 때면 으례히 들려오던, 부인의 가라앉은 듯한 애절한 노래소리는 소년의 눈망울과 함께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이다.

소년의 화실엔 샤갈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샤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늘이 온통 회색빛이던 어느날,

소년과 나는 소년방에 들어 갔었다.

내가 산장에 온 후로 처음 들어 가는 것이었다.

응접실에 두었던 피아노를 소년의 방으로 옮겼기에 소년방에서 피아노 가르치기 때문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소년은 자기방을 보여주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보랏빛 커텐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소년은 피아노를 치다가도 자꾸 커텐 쪽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나는 소년이 피아노에 열중하는 순간에 커텐을 들췄다.

거기엔 상앗빛 액자가 놓여 있었다.

소년의 손이 멈춰졌다.

그리곤 빨개진 두 볼을 감추이며 뛰어나갔다.

나는 쫓아 나가려던 발길을 멈추고 액자를 보았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3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靜脈)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三月)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년과 부인의 얼굴이 포개진 그림 위에 하얀 글씨로 쓰여진 김춘수 시를 끼운 액자였다.


"샤갈의 마을엔 삼월에도 눈이 온다죠?"

어느 결엔가 소년이 들어와 있었다.

소년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고 큰 눈망울 속에서 반짝이는 액체는 진주같은 구슬로 맺혀지고 있었다.

아름다왔다.애처럽고도 깨끗한 모습이었다.

헐거워진 바램도, 지쳐버린 원망도, 시새움도 소년의 모습에선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침체한 느낌가운데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맑은 기액 속에서 정원을 거닐었다.

바람은 점점 세차게 불고 있었다. 영영 겨울이 계속될 듯 싶었다.

하늘은 별도 없이 외롭게 높아만 갔었다.

걷기를 계속하던 나는 내가 처음 산장에 왔을 때 소년이 앉고 있었던 통나무에 앉았다.

세상이 환해 오는 것이었다.눈을 감아 버렸다.

소년의 음성이 들려 오는 것 같았다.


" 샤갈의 마을엔....."


아! 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불안안 마음이 들어 급히 소년의 방으로 달려 갔다.

소년은 이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가슴에는 상앗빛 액자가 품겨져 있었다. 소년은 무표정이었다.


"이 곳에도 삼월에 눈이 왔어요"


그러고 보니 그날이 삼월 초하루였다.


"이곳이 샤갈의 마을이 될 수는 없는 거죠? 저 흩날리는 눈 좀 봐요. 하나도 쌓이지 않잖아요. 

겨울도 이젠 가버렸어요. 당신도 이젠 떠나겠지요. 그럼 모든 게 마지막이겠군요."

어느 새 소년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난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였지만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라 소년의 눈만 쳐다 보고 있었다.

그 후 다시는 소년의 얼굴에서 미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얼마 후 소년은 흩날리는 눈마저 멈춘 날 밤에 표정없는 얼굴로 눈을 감았다.


 개학을 맞아 교정에 돌아 온 나에게 엽서 한 장이 왔었다.

"쌓이지 않는 눈 속에 이렇게 서 있습니다" 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주위를 살폈다.아무도 없었다.불안했다.

산장을 찾았다. 부인이 혼자서 소년의 방에 앉아 있었다. 

도시로 나오기를 권했으나 부인은 상앗빛 액자를 나에게 줄 뿐,

" 겨울이 지난 지금에도 눈 쌓인 속에서 존재하고 싶었습니다" 라고 

옛날의 소년같은 음성으로 말하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 후 내 방에서 그 액자는 떠나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난 오늘에 나는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소년과 닮았슴을 느꼈다.

이제, 나는 소년과 부인과 같이 표정 없는 얼굴이 되어 버렸다.

" 무표정의 쌓이지 않는 눈 속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