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열정 그리고 광기
전혜린
1934.1.1~ 1965.1.10
삶에서 그무엇을 추구하는 자세,
이를테면 평범과 피상의 것 저 너머의 절대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다는 것.
그자체는 아무 결실도 업적도 아니다.
우리 뇌에 불에 데인 것과 같은 강열한 화인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 저편으로 날아간 전혜린은
그의 생애에 이룬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무섭게 깊은 사랑,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죽고 싶은 환멸"등을 추구하는
무서우리만큼 비범한 삶의 자세 때문에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 있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전혜린의 생을 통해 이룬
몇 권의 번역서, 유고로 출간된 수필집,일기문 따위는 문학이전의 습작 수준이다.
"1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업적으로서는 너무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레닌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가리켜"로자는 혁명의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빌려 우리는 전혜린을 이렇게 말 할수 있을 것이다.
"전혜린은 인식에의 갈망으로 불타오르는 독수리였으며, 영원히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한 지인에게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려줘!"라고 속삭였던 전혜린.
점성술과 운명학을 믿고 가끔 점을 치며"운명의 위대한 저울 위에" 내던져진 제 운명을
불안한 시선을 번득이며 가늠해보던 전혜린은 31세로 요절하며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을 휘발시킨다.
1965년 1월 9일 토요일
하늘의 푸름은 마치 수정처럼 맑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의 창가 자리에 밤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성이
오후 들어 몇 시간째 며칠 전에 내린 잔설을 이고 있는 바깥 풍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다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대학이 방학중이었기 때문에 다방 안은 한산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문을 열고 다방 안으로 들어섰고, 검은 스카프를 한 채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손을 흔들었다.
"세 시간이나 여기서 기다렸어!"
그날 약속 없이 학림다방에 들렀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덕희가 전혜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다방 한가운데에 놓인 난롯가로 자리를 옮겨 앉아 토요일 오후를 담소로 보냈다.
저물 무렵 학림다방을 빠져나와 명동에 있는 은성으로 갔다.
은성은 당시 문화 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유명한 대폿집이었다.
은성에는 소설가이자 <연합신문>문화부장인 명동백작 이봉구가 앉아 있었다.
명동의 모나리자나 돌체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음악듣다가도
"술 좀 마셔 봐야겠어요. 어떤 것인가를 음미해보자는 거지요."라며,
두부 집에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크고 검은 눈동자를 번득거리는 전혜린을 이봉구는 또렷이 기억했다.
여러 사람이 합석에서 두어 시간 동안 떠들어댔던 그날의 술자리는 매우 유쾌했다.
전혜린은 무척 고조되어 보였고,다른 날과 달리 더 자주 웃고 더 큰소리로 많은 말들을 했다.
곧 수필집을 낼 예정이고, 책제목도 정했다고 했다.
전혜린은 이덕희에게 귓속말로 "제목은 나중에 너한테만 알려줄게"라고 속삭였다.
그는 국제 펜클럽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 그 때문에 건강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거야."
짧은 겨울해가 지고,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뒤 은성에서 나온 전혜린과 이덕희,
동행했던 후배 등은 한잔을 더 하기 위해 신도호텔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성에서 신도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전혜린은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걸로 구했어!"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척 달뜬 음성이었다.
신도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전혜린은 몇 차례나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젊은 소설가들이었던 김승옥, 이호철등과 합세한 전혜린의 일행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소음과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전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 취한 눈치였지만,담배를 피우면서 다리를 건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것이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담배를 쥔 손톱 밑은 때가 까많게 끼어있고, 누군가는 그 불결란 손톱을 " 검은테가 둘러진 부고"라고 일컬었다.
10시쯤 되었을 때 전혜린이 홀연히 일어서더니 입구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사라졌다.
그것이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다음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의 신문은 1단짜리 여섯 줄 기사에서 "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독일 문학가"인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헨 유학 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 미수 경험이 있던 전혜린의 죽음이 수면제 과용으로 말미암은 사고사였는지,
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 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혜린의 사후,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지만 그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전혜린은 평안남도 순천에서 1934년 1월1일에 전봉덕의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천재였다.
일제 식민지의 악랄한 수탈에 모두들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에
혜린은 백러시아계 양복점에서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흰 원피스를 입었다.
그의 부친은 서너 살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쳤다.
맏딸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 때문에 그의 부모는 자주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어린 혜린에게 아버지는 신이었다.
훗날 전혜린은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겐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나를 무제한하게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라고 회고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전혜린은 조선총독부 고급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떠나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의 신흥 도시인 신의주로 이주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6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경기여중에 입학하여 학창시절을 보냈다.
전혜린의 천재성은 부친의 영향과 천혜의 환경,
그리고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된다" 는 사춘기 시절부터의 정신 속에서 키워졌다.
범용함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전혜린이 보여준 처절한 고투의 정신은 '전혜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언제나 극점을 추구하는 전혜린의 정신은 범속한 일상이 주는 권태를 못 견뎌했고,
언제나 " 미칠 듯한 순간,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이 드는 찰나, 충만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갈망했던
그의 눈빛은 광기로 번득였다.
"물질.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영아기부터 싹트고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병" 이었다.
그 때문에 젊은 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때 홍역처럼 전혜린 신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전혜린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당시 수학 과목은 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과락이 있을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터라
전혜린은 사정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되었다.
수학을 0점 맞았는데도 전체에서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전혜린은 대학 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령에 의해 부산에 세워진 전시연합대학교 임시 가교사에서 수업을 받았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전혜린은 경기여고 시절의 단짝 주혜가 다니는 문리대에서
오든이나 엘리엣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했다.
법학 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 그리고 온갖 것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다.주혜와 헤어진 지 6년이 지난 뒤의 일기장에 전혜린은 다음과 같이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다.
주혜와의 우정, 회색 노트, 영도 가교사에서의 산보, 배, 바다, 부두..... 그리고 서울에서의 같이 보낸 시간....
산집, 해바라기를 한 송이 저 바구니에 넣어서 나의 동굴같은 방에 갖다 주었던 주혜....
그리고 주혜가 떠나던 날에 나의 마를 줄을 몰랐던, 한없이 흐르던 눈물. 결국 그때가 영 이별이었던 모양이다.
편지는 아무 소용없다. 아름다운 꽃이나 손수건 같은 힘밖에는 없다.
주혜가 보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더라도... 그래도 꼭 만나고 싶다. Before I shall die....
마침내 21살 되던 해인 1955년, 전혜린은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을 때 뮌헨 하늘은 축축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회색빛이었다.
전혜린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강렬한 인식욕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전혜린은 뮌헨대에서 그토록 동경하던 문학과 철학의 세계로 깊이 빠져든다.
뮌헨대에서는 독일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터키.이집트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은 검소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스웨터 바람이고 여자들은 검은 스커트에 검은 양말,검은 머릿수건, 길게 늘인 생머리가 제복이었다.
훗날 전혜린의 저 유명한 검은색의 옷과 검은색의 스카프는 그 시절 습관의 연장이었다.
"온갖 물질의 결핍과 가난과 노동, 식사 부족, 수면 부족에도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촌음을 아껴 노력" 하는 독일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경쟁했고,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돼있는 생활" 에 대해 전혜린은 만족했다.
전혜린은 독일 유학 중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싸구려 번역과 고국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한 번은 생활비가 완전히 바닥이 나서 그는 한 주일 동안 일생 처음으로 완전히 굶었다.
훗날 혜린은 "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 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체험한 굶주림이었다.
전혜린은 1959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서울대,이화여대,성균관대에서 강의를 맡는 한편 번역 작업을 했다.
헤르만 헤세, 하인리히 뵐, 에리히 케스트너,루이제 린저 등의 독일 작품들이 전혜린의 번역으로
나라 안에 소개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4년 독일 유학 중 결혼한 남편과 합의이혼한 후 전혜린은 몇 번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다.
인습과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연하 제자와의 사랑도 있었다.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와 모교인 서울 법대 강단에 선 '교수' 전혜린과 질풍노도와 같은 스무살의 '제자'법학도는
독일어 강의가 있는 매주 수요일에 만났다.
그들은 가장 첨예한 정신과 정신의 맞부딪침에서나 일어나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시를 써서 갖다 바치고,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여교수는 편지를 써서 제자이며 연인인 청년에게 건네줬다.
그들은 서로의 타오르는 혼에 경탄했고 서로를 찬미하며 정신의 충일 속에 취해 있었다.
어느 날 청년에게 가문의 모든 꿈을 걸고 있는 시골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전혜린을 만난 이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제발 자신의 아들과는 헤어질 것을 호소했다.
청년은 그 모친의 간곡한 만류를 받아들여 전혜린과 결별을 선포했다.
그때 전혜린은 시니컬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
"네가 날아올 땐 난 네가 독수린줄 알았는데,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새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왜 너를 이렇게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너의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죽기 사흘 전 전혜린은 '장 아제베도'라고만 알려진 익명의 누군가에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중략)... 나도 생명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중략)...나를 살게 해줘"라고 썼다.
그것은 익사 직전의 사람이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이고, 절규였다.
일찍이 인생의 악덕을 눈치채고 지식의 황홀경 속에서만 헤엄치며
" 식은 숭늉같고 법령집 같은 나날"을 탈출하는 꿈을 하루도 쉬지 않고 꾸었던 전혜린은 너무 빨리 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그의 재능과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그 내면에서 남김없이 갉아먹어 버렸던 것일까.
전혜린이 익명에게 썼던 두 통의 편지는 끝내 부쳐지지 않은 채 죽었다.
1934년 1월 1일 일요일에 태어난 전혜린은 1965년 1월 10일 일요일에 생을 마감한다.
글 장석주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서른해 넘게 시인, 소설가,문학비평가, 방송진행자,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저 (나무처럼)
참조:
윗 본문을 퍼올수가 없어서
직접 전체문장을 타자치며 쉽게 읽게 줄띄기를 했습니다.
몇몇 부호와 한자는 저의 문자판에 없어서 생략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옥인 후배님,
Happy New Year!!!!!
올려준 글을 쉬지않고 끝까지 읽어 내려 간 것은 마치
잊고 지냈던 고향 친구의 소식을 접한 느낌 같은 게 와 닿았기 때문일 겁니다.
전혜린, 고등학교 시절 내 영혼을 뒤 흔들었던 여인.
지금그녀에 대한 얘기를 다시 읽어보니 왜 그렇게 그녀에게 미쳐있었는지...
한 때는 그 녀가 번역한 루이제 린자의 '생의 한 가운데'에 나오는 여주인공 니나가 넘 멋져서
나름 니나를 흉내내려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우.ㅎㅎㅎ
또 재미있는 사실은 나의 미국 이민 보따리 속에 그 녀의 책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지요.
2년 전(죠지아에 살 때)에 시간 여유가 생겨 다시 그녀의 책을 읽었는데
사춘기 때 받은 그런 감동은 전혀 없었고 다만 그녀에 대한 깊은 연민 같은게 짙게 남았었지요.
그녀의 일기를 보면, 그토록 심한 우울증을 오랜 시간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꼬.
후배님 덕분에 잠시 나의 젊은 시절로 또 여행을 했네여.
아릿한 아픔들이 되살아 나는, 그래서 자주 찾아보고 싶지 않은 지점들이
전혜린에 대한 추억과 함께 묻혀있는 그 곳들.....
정성스레 올려 주는 후배님의 글을 뉴욕에서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 기억하시길!
전혜린 번역 책목록:
1. 1956년 프랑수와즈 사강의 '어떤미소'
2. 1958년 에른스트 슈나벨 '안나 프랑크 - 한 소녀의 걸어온 길'
3. 1959년 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
4. 1960년 에리히 케스트너'파비안'
5. 1961년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6. 1963년 H. 게스턴 '에밀리에'
7 1963년 W. 막스모프 '그래도 인간은 산다'
8. 1964년 하이린히 뵐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9. 1965년 하인리히 노바크 '태양병'
하인리히 뵐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후에 수필집의 제목으로 인용된다.
작품집:
1. 1966년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 1968년 비장일기모음 '이모든 괴로움을 또다시'
3. 1976년 수필집 '목마른 계절' 위의 1과 2를 한권으로 추림
Glenn Gould 1932-1982
글렌 굴드는 캐나다인으로서
전혜린이 세상에 태어나기 2년전에 태어나서 그녀보다 17년을 더 살았다.
그가 50년 생애에 쌓아논 업적은 20세기 현대 연주법에 새로운 귀감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대의 여인이었던 전혜린은 살아 생전에 그의 연주를 들었었을까?
19세기를 일컬어 이성의 시대라고 한다.
데카르트로부터 발현되고 칸트와 헤겔에게 계승된 근대적 이성은 찬미와 숭배의 대상이었고, 이상향이었다.
근대적 이성은 과학을 낳았고, 프랑스 대혁명을 낳았다.
이성은 거칠 것이 없어보였고, 근대적 낙관론이 낳은 최고의 예술적 산물, 낭만주의와 에펠탑이 등장했다.
그들은 과학의 은혜로 인해 전세계를 누비며, 땅들을 점령하고, 그리고 끝없이 부유해질 것만 같았다.
헤겔은 자신이 살고 있던 시대가 역사적 변증의 마지막 과정이라고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19세기 중엽부터 근대적 이성에 대한 반작용이 나타났다.
니체와 바그너, 스메타나가 등장했으며 낭만주의(Romanticism)는허무주의( Nihilism)나 민족주의로 변질되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인상주의(Impressionism)라고 통틀어 부르는 미술사조는,
허무주의가 결합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Realism)간의 다툼이었다.
그들은 이성에 회의했고, 또한 집착했다.
반 고흐와 세잔느는 저물어 가는 근대성의 마지막 대표주자였다.
역사를 통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이 있는데, 사상의 균열은 경제적인 균열과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19세기는 탐험가의 종말을 고한 시대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점령할 토지는 나오지 않았고, 근대적 이성의 피해자들은 부풀려진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깨닫기 시작했다.
경제공황과 제1, 2차 세계대전은 이성의 사망을 알리는 사건이었으며, 현대를 선포하는 신호탄이었다.
'상실의 시대'의 하루끼 무라카미,
'분노의 포도'의 죤 스타인 백,
'위대한 개츠비'의 Scitt Fitzgerald,
'생의 한가운데'의 루이제 린저,
그리고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의 헤밍웨이 등등,
제 2차 세계대전의 충격을 허무감으로 표현한 작가들을 전후작가,
그리고 이세대를 일컬어 Lost Generation 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시대에 전혜린은 살았었다.
( 참조:지금 이탈리아로 여행 갑니다.
다녀와서 전혜린 시대의 인물을 대조하며 좀더 올리겠습니다. 안녕히...)
옥인 후배
Lost Generation의 파급 효과는 엄청 컸지요.
제가 몸답고 있는 종교계에도 특히 Missioary Movement의 축이 바뀌는 걸 보면서요.
이탈리 여행 후 좋은 글 기대합니다.
함정례 선배님 안녕하세요.
여행 잘다녀 왔어요.
이번 여행중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과연 역사적으로 어떻게 후에 정의가 지어질까?
시간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있지요.
그러나 이 흐름에도 시대에 따라 걸림목과 건널목이 있어
고조를 이룬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각분야를 총 망라해서 많은 업적을 쌓아놓은 인물이 있고요.
여기서 어떻게 모두 열거 할 수 있겠어요.
특히 저는 전문 글쓰는 사람도 아닌데요...
비엔나에서 한때 비교문학을 공부하면서도
한국문학과는 접한적이 없었어요.
좀더 공부를 계속 했더라도
한국문학이 이 나라말로 번역이 된 것이 별로 없어서
한국문학을 이쪽문학과 비교하기가 힘들지요.
공부를 떠나서 이문열씨 작품을
독일에서 열리는 서적 박람회에서 소개한 독일어 번역으로 읽으면서
우리 한글을 번역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느꼈어요.
언어의 뉴앙스가 결여된 것은 문학적 세계에서 커다란 손실이지요.
이번에 전혜린님의 주기일즈음에
한국 곳곳에서 다루어진 기사를 보면서
새로운 내용보다는 한편으로는 긍정하기 어렵게 구사되는 양상에 멈칫해졌어요.
그래서 집중해서 찾아보며 저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어요.
선배님께서 관심가지고 들러 주시니 고마워요.
전혜린과 프랑스와즈 사강(1935~ 2004)
전혜린은 1955년 뮨헨유학을 떠났다.당시 만 21세였다.
위의 번역작품 목록을 보면
1956년 프랑스와즈 사강의 '어떤미소'를 번역했다.
바로 이 시점은 전혜린의 유학생활 1년이 지났었으며,
전혜린 보다 1년 늦게 태어난 사강의 두번째 작품이었다.
일년이라는 나이차이에 이미 세계적인 명성을 차지한 사강의 작품을 번역하면서
전혜린은 어떠했을까?
1954년 만 18세의 소녀로 두달여만에 쓰여진 처녀작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하고
2년뒤인 1956년 두번째작품으로 '어떤 미소' 썼다.
나는 이 날짜의 연관에서 놀라웁기 그지 없다.
전혜린이 어찌 유학1년이라는 짧은 동안에 번역을 할 수 있었을까?
이미 한국에서 부터 언어에 능통되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또 다른 놀라움은,
번역은 제 2의 창작이다. 어느면으로는 창작이상의 노력과 열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창작은 작가스스로 의도를 적어가지만,번역은 주어진 문장을 다른 언어로 표현해야하며
번역가의 의도가 배제해야하는 스스로의 내면의 충돌과 싸워야 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잠깐 전혜린의 삶을 살펴보면,
유학 6개월후에 뮨헨에서 이미 집안에서 정해놓았던 법학유학온 K씨와 결혼을 했다.
전혜린은 유학생활, 결혼생활 동시에 번역까지 한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그녀가 얼마나 시간을 쪼개며 번역작업을 했을까하는 경이감이 드는 것이다.
그녀의 수필에 자주등장하는 '인식욕'을 불사르면서
사강의 작품을 번역 하면서 그녀가 느꼈을 것을 유추해 본다.
당시 유럽의 전후작가들은
유럽의 커다란 영향으로 두각된 Lost Generation의 잃어버린 세대의 감정과 더불어,
미국으로 부터 건너온 Beat Generation에 호기심을 나타내기 시작한 시대였다.
미국에서 2차대전 후에 시작되었던 비트족양상은 후에 히피, 동성연애, 종교해방등 인류에 경종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 언급하고자 하는 시기는 비트족이 50년대 출발 되던
전혜린과 사강이 살았던 시대의 것이다.
그 시대의 전세계 젊은 세대들은 미국의 재즈나 팝뮤직으로 부터 일종의 호기심을 넘어
참여의 양상도 나타냈다.
사강이 프랑스 문단에 등장하기전 문학사조는 실존주의가 팽배했다.
싸르트르와 카뮈를 대표주자로 실존 문학이 ,문학은 반드시 철학적으로 좀 무거운 사색을 나태내는 것으로 되었었다.
이런 전통으로 내려오던 프랑스 문단을 사강이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소설이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철학적 고뇌나 탐구가 전혀 없이 일상의 권태와 세속적인 연애심리가 주로 였다.
사강의 소설이 베스트 셀러가 되며 세계곳곳에 번역 되어진 이유중에 바로 이점이다.
실존주의 문학에서 느끼던 "무거운"것에 대한 염증을 갖었던 때에,
문학이 주는 가볍고 경쾌한 카타르시스 효과에 독자들은 매혹을 가진 것이다.
소설이란
원래 이성보다는 감성을,모럴보다는 본능을 추구하는 문학형식이다.
그런데 실존주의 문학은 독자들에게 이성과 모럴을 강요했고 철학서적처럼 딱딱한 표현으로 독자들을 피곤하게 했다.
프랑스는 원래 대하소설이 유명한 나라다,
빅토르 위고의 '래 미제레블' 이나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등등
명작품은 모두 대하소설의 양식으로 되어있다.
사강은 소설을 무척 짧게 썼다.분량으로 보면 중편소설 정도이며,
문장도 단문이고 역사의식이나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짧디 짧은 사강의 소설이 세계를 장악했다는 것은,
바로 그녀의 독창성으로 인정 받으며 , 사강의 신화을 이루어 낸 것이다.
전혜린이 사강의 작품을 스스로 선택하여 번역했었는지,
아니면 당시 어느 출판사의 요청으로
한국에서도 대중의 호응도가 높은 인기작가의 작품을 번역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전혜린의 내면을 그녀가 뮨헨에서 쓴 수필집에서 찾아보면
그녀는 싸르트르의 실존 문학에 심취했었다.
반면 죽기 직전 하루전날 그녀가 서울의 명동의 한곳에서 지냈던 면을 보면
비트족의 한면도 보이고 있다.
물론 시기가 9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있지만...
그녀에게는 두가지 양면성을 가졌었다는 것이 나타난다.
전혜린과 사강을 정리해보면,
전혜린은 한국의 일제강점기와 동족상란을 겪었으며,
휴전된 2년후에 유럽을 찾아간 문학도로서 5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다시 귀국하여 5년여를 더 살다 이세상을 떠난 한국의 지성인이라고 볼수있다.
일기나 에세이의 곳곳에서, 편지의 어느 곳에서나 날카로운 자기 성찰을 보인다.
하지만 그녀의 무의식에 도사리고 있는 <권위에의 예속>은
그녀의 필생의 소망 이었던 한편의 작품을 쓰고 싶다는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것은 완전에의 집착 때문이다.
그녀 말마따나 조금의 유머도 틈입할수 없었던
그녀의 지성-이것은 넓은뜻으론 심적 방어라 할수있다.-은 작품을 쓰기엔 너무 방어적이었다.
지성의 너무 많은 지배, 그것은 철학적, 관념적,아니면 명상적
태도를 지향 할수는 있어도 적어도 작품세계로의 전개에는 부적합할 경우가 많다.
그녀의 일기나 수상록의 곳곳에는 보들레르, 헷세, 지드, 빠스테르나끄, 린저, 니체, 등
최고의 문학인이나 철학가에 대한 경도와 더불어 그들의 글의 단편들이 실려있다.
또한 그녀는 그런 몇몇 작가들의 번역문학으로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가 된다는것은 그런 누구를 몰라도 가능하다.
너무 많은 지성의 소유자는 그 권위에의 콤플렉스 때문에 작품을 쓰지 못한다.
작품을 쓰기엔 너무나 지성적인 것이다.
반면,
사강은 프랑스의 부유한 가문출신으로 파리 소르본느대학에서 공부하다
´18세에 '슬픔이여 안녕!'으로 일약 스타 작가로 부상하며 학업을 중단하고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다.
전후 10년간의 실존주의의 유행이 지나가고 파괴의 의욕도 건설의 의도도 사라진
메마르고 권태로운 청춘을 묘사한 까닭에 새로운 작가로 인정 받았다.
사강은 부드러움과 딱딱한, 장난과 진지함의 양면을 보이고,
사랑할 수도 사랑받을 수도 없어 고독을 택하는 주인공을 통해 때때로 희미한 환멸과 권태를 표현하고 있다.
2차 대전 후 발생한 문학적 인플레 끝에 남발되고 있던,
누구에게나 자기 본성을 드러내놓는 지나친 자아 노촐,
너무나도 많은 빈혈의 청춘고백, 유희적 타락 묘사를 일삼는 등의 "낭만주의"를 만들어내는
위조자들의 틈에 사강도 예외없이 끼여 있어야 했다.
그녀는 추상적이며 냉혹한 언어를 통해
몇 가지 패덕적인 연애 사건을 펼쳐나가는 통속 작가라는 불명예를 걸머지는 도리밖에 없었다.
사강의 작품에는 사랑과 행복에의 강인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난해한 비약이나 이미지의 얽힘이 없어 막히는 데가 없다.
조르주 상드에서 시몬 드 보봐르에 이르는 여성 문학의 전통 속에서 사강의 작품들은
"동화된 실존주의"의 좋은 예다.
현대 여성의 의지가 대중에게 큰 호소력을 지닌 것이다.
사강은 전혜린보다 39년을 더 이세상에 머무렀다.
두여인이 살아생전 30년을 동시대의 여인이지만,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은 사뭇 다르다.
어쩌면 전혜린은 사강의 작품을 번역하며 원작자의 삶을 동경하지는 않았을까?
몇년 후에 귀국해서는,
사강의 자유분방한 활동범주가 되는 프랑스와는 전혀다른
한국의 4.19 와 5.16을 겪으며
도저히 분방하게 표현할 수 없는 권위의 예속에서 혹 뜨겁게 자유를 갈망하지는 않했을까?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가 번역했던 책의 제목 "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처럼
지금도 우리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거야."
.... 라고 건강진단을 받은후 했던 전혜린말이 오늘 따라 선명히 들려오는 듯하다.
요즘 온 몸이 결리는 가운데
아.. 이렇게 나이들어가는구나... 앞으로 점점 더 그렇게 되겠지...생각하니
조금은 서글퍼 진다.
전혜린은 잠이 안와서 잠오는 약을 먹을정도로 신경은 쇠약했으나
스스로 괴물처럼 건강을 느끼던 젊음이 충만했었다.
나도 젊음이 영원한 줄 알았었다.
어느날 부터 하얀 머리가 생기고...
생리가 멈추고...
그래도 맘은 여전히 청춘이었다고 할까?
살아가면서 자연처럼 연륜이 쌓이는구나.. 자위하면서
삶을 받아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오늘처럼 내몸이 정신을 따라주지 않는 때가 오면,
음악을 온집안 울리게 틀어놓고
아침부터 이불보를 바꾸고
세탁기를 몇번 돌려가며 기분전환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떠오르는 것이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거야."이다.
나도 그런 적이 있었었지....
이런 나이들어 몸이 불편해지는 것을 모르고 세상을 떠난 전혜린,
그녀 자신에게는 어쩌면 나은 것이었을까...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내일은 날씨가 화창했으면 좋겠다.
호청이불을 빨아 풀을 빳빳이 매겨
화창한 볕에 말린후
입으로 물을 뿌려가며 숨을죽이고
방망이 두들기던 한국에서 살던 때가
오늘 같은 날은 그립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 청춘이 그리운게다...
일기변동이 심한 4월이 빨리지나고
햇살이 눈부시는 5월이 오면
나도 기지개를 활짝피고 대지에 또한번 굳건히 설수 있으리라 ...
작은 소망을 가지며 토요일 저녁을 조용히 맞이한다.
전혜린!
덕분에 위의 글들을 감사의 맘으로 소중한 맘으로 읽어 내렸습니다.
김호숙 선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요즘 그 글을 대하는 마음은 예전 같지 않지만
우리의 젊은 시절 열망이 무엇인지? 낭만이 무엇이지?
갈망하는 마음을 함께 할 수 있었음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녀가 그렇게 갈 수 밖에 없었음이
하여 이 후의 삶의 소중함을 느낄 수 없음이
또 그녀라면 이즈음의 삶을 어찌 느끼고 어찌 살아냈을지
알 수 없음이 안타깝기만 하지만
그렇게 스러져간 사람의 몫은 그 사람의 몫으로
그 후의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삶의 무게로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각자의 처한 몫이겠죠?
고맙습니다.
아주 큰 선물이 이렇게 이곳에 있었는데 이제야 받게 되었지만
이제라도 받을 수 있어 더 고맙습니다.
아름다운 오월!
언니와 전혜린에게 제가 그린 꽃 한 송이 보냅니다.
참으로 "노루귀"의 잔털이 사랑스럽네요.
이름도 사랑스럽구요.
저는 몇년전 함부르그 여행에서
한국의 설앵초를 처음으로 보았었어요.
그 꽃하고 비슷한듯 하면서도
더 애리 애리 하네요.
선물 감사해요..
신영후배가 그린 그림 실제로 보면 더 사랑스럽겠지요?
전혜린이 뮨헨유학시절
뮨헨근교에서 얼마동안 살았던 그때를
한국에 귀국해서도 두구 두구 기억하던 글을 제가 지난번 릴케글에 썼었어요.
이번 정원여행하던 중에
곳곳에 있는 찻집이 정겨웠어요.
아마도 전혜린이 아직도 살아있다면
이런데를 다니며
사람이 늙어가면서도
얼마든지 스스로 행복해지는 것을 알았을 거에요...
이번 여행에서 동행하며 사귄 오스트리아 여인 '크리스타'와 '유타'에요.
신영후배가 보낸 노루귀 그림을 본 다음날,
정원 찻집에서 본 푸른색의 찻잔을 보면서 웬지 노루귀가 연상되더라구요^^.
또한 전혜린 연배 유타의 모습과
그녀를 쳐다보는 나와 비슷한 연배 크리스타의 눈길이 아름다워
(좀 떨어진 자리에서 앉아있었기에 파파라치로 줌을 댕겨 )앵글에 잡아 보았어요.
나중에 그녀들에게 사진을 보여주니
너무 좋다고 꼭 메일로 보내달라고 하더라구요.ㅎㅎ
신영후배~
새로운 직장에서 적응 잘하고 건강히 지내기를 바래요.
우리도 언제 만나면
크리스타와 유타처럼 정스런 눈길을 나누자구요... 안녕~
오늘은 "전혜린 47주년 기일에"를 다 읽었지...
호숙후배의 댓글도 강신영후배의 댓글도........
난 전헤린이 그렇게 젊은 날에 갔는지 몰랐었어....
그랬었구나........
요즘 옥인후배덕에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네...
좋은 음악도 고마워..
김춘자 선배님
정말 전혜린이 일찍 세상을 떠났지요?
그래도 그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기에 그녀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기억되는 것이겠지요.
우리 나라가 6.25전쟁을 지난 후 어려운 시기에
독일에 가서 서구의 문명을 일찌기 터득한 사람으로,
귀국하여서도 좀더 독일 문학에 활발한 활동을 할수 있었는데
채 이루지 못하고 떠난 것이 많이 아쉬어요.
제가 이제 이 나이가 되도록 살어보니,
30이란 나이가 얼마나 인생에서 아름다운 나이인줄 알겠지만,
정작 그 나이에는 모르는게 우리 인생인 것 같아요.
선배님
정신의 연령은 나이를 초월하는 듯합니다.
요즘 종종 그런 생각이 들거던요.
아주 어렸을적 생각했던 것이
아직도 저의 기본이 되는 생각이 들때에 그래요..
아직도 덜 성숙해진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
선배님
외딴곳까지 들러주셔서 글을 주시니 반갑고 고마워요.
지난주에 Freud 박물관을 한국에서 온 정신심리학 관계자들과 찾았었다.
그곳에서 전혜린이 우상처럼 여겼던 루우 살로메의 사진을 보았다.
한 정신심리학 박사가,
그녀가 니이체의 친구로서 비엔나의 프로이드를 찾아왔었다고 전하는데...
나는 언젠가 읽었던,
전혜린이 뮨헨유학시절 대학도서관의 책에 있던 그녀의 사진을 오려서 한국에 왔었다는 기억이 났다.
전혜린이 비엔나를 방문했었을 때는 아직 박물관이 개관전이라 못보았겠지... 생각하며
전혜린 대신으로 박물관을 자세히 보았다.
참조:
전혜린의 마음고향 뮨헨~(바로가기클릭)
팽팽하게 살다간 사람들~~~이야기
좀 더 젊었을 땐 ( 죄송해요^^ 선배님들)
그래, 그래야만 해야지 했던 시절들이 있었지요.
현악기의 줄이 느슨해지면 소리가 안 나오잖아요.
이제
그러려니 ~~~하는 나이가 되고보니
그 시절 그 광기에 함께 졸타기를 하는 마음을 느꼈던 시간들이 그리워지고
벌써 몇 개월 째
늘어진 줄
끊어진 줄의 가야금을 두고 보아도
그냥 그러려니 보아지네요.
백영란 후배 댓글따라 오랫만에 이 컬럼난에 들어와
거히 2년이 되어가던 그 때를 더듬어 보았어요.
시간은 이리 흐르고 있네요.
그래요. 평생을 어찌 팽팽하게 살겠어요.
연륜따라 변화되어 가는 게지요.
''더불어 기쁘게' 라고 친구 서예가가 써준 글귀처럼 살려고 합니다.
종종 후배를 만나니 반가워요.안녕히!
지난주에 뮨헨에서 비엔나를 방문한 여류작가 " 카린'을 만났다.
내가 한국 사람임을 알고는
뮨헨방송에서 한국사람들이 ' 전혜린의 뮨헨슈바빙' 의 발자취를 찾아 온다고
도큐를 방영했는데... 뮨헨은 더 오래된 역사와 풍광을 즐길 수있는데
왜 유독 한국사람들은 그녀의 발자취에 연연하느냐고 물었다.
50여년전 전혜린이 뮨헨유학시절의 한국상황은
남북전쟁후 피페한 사정으로 그녀가 독일에 와서 서방세계에 눈을 뜨며 느꼈던 양상을 글로 남기었었다.
그 글이 당시 젊은이들에게 물론 폭발적인 인기가 있었다.
그이후 경제적 발전으로 현재는 그 시절 느낌과 외양상으로는 비교하기도 어려운 차이가 있으나
그녀의 문학을 처음 접하게 되는 청소년기의 감성이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 것이거나.
이제 노년기에 접어둔 사람들에게는 청소년기에 읽었던 그녀의 글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슈바빙을 찾는 한국인들이 그녀의 자취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뮨헨본토 여자 카린과 보름달빛이 내리는 아래
비엔나 전경이 잘 보이는 포도원 언덕에서 여러얘기를 나누면서
전혜린에 대해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년, 2015년 1월 10일이면 전혜린이 떠난지 50년이 된다.
생존한다면 현재 81세,내년이면 82세.
?
우리의 인생은 이 세상에서 누구에게나 1회적인 것입니다.
그 누구도 과거로 돌이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우리의 의지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지금이 너무나 소중한 순간입니다.
윗 본문을 읽으며,
젊은 날의 추억속에 아스라히 자리 잡았던 전혜린님이
세상을 떠난지 47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러
그녀의 발자취가 너무 생생히 찍혀지는 것에 멈칫해졌습니다.
보통은
그의 열정과 광기에 혼을 바쳤던 젊은이들이
각자 생존경쟁으로 성장하다보면
잊혀지기도 하는 전혜린님의 글들입니다.
그녀의 글을 읽었던
나 스스로의 청춘을 회상하는 순간을 가져보면서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야만 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좀 더 생을 영유했었더라면...
너무 자기 의지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의 생을 주관하는 그 무엇에 의지했었더라면 ..하는
안스러운 맘으로 전혜린님을 추모해봅니다.
참조:
전혜린의 마음고향 뮨헨~(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