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지난 7월16일 독일 뮌헨 슈바빙 일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모임 ‘Seerosenkreis’ 는 ‘슈바빙, 청춘이 황금빛 맥주로 넘치는 곳 : 한국 여성작가 전혜린의 뮌헨에 관 한 에세이들’ 제하로 뮌헨 시립문화회관에서 문학낭송회와 음악회를 가졌다. 이 예 술가 모임은 1940년대 슈바빙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정기모임을 갖던 레스토랑 Seerose에서 시작됐으며 전혜린의 작품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소다. 1950년대 뮌헨과 관련하여 쓴 그녀의 산문을 독일 배우가 낭송하고 이에 맞춰 피아노 반주를 곁들이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지난 7월16일 뮌헨 슈바빙의 예술가 모임 ‘Seerosenkreis’은 한국 작가 전혜린을 주제로 문학낭송회와 음악회를 가졌다. 사진은 모임 포스터.
전혜린(田惠麟, Chon Hye-Rin)은 지난 1965년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한국의 여성작가다. 몇권의 수필과 번역서를 남겼지만 ‘한 세기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31년 평안남도 순천의 상류가정에서 태어나 한국의 최고명문 경기여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젋은 나이에 대학 교수가 됐다. 가부장적인 유교전통이 강했던 1950년대 한국에선 보기 드문 커리어우먼이었다.
출세욕이 강했던 그녀의 부모는 그녀가 판사나 검사가 돼 명예와 권력을 얻기를 원했다. 문학은 그녀를 끌어들여 세속적인 가치와 다른 길을 걷게 했다. 그녀는 1955년 독일 뮌헨대학(University of M?nchen, Ludwig-Maximilians-Universit?t M?nchen)으로 유학을 떠난다. 법학 공부는 접고 독일 문학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머문 곳은 독일 남부 뮌헨의 슈바빙(Schwabing). 화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와 클레(Paul Klee)가 살았었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가 시를 쓰던 자유롭고 예술적인 분위기가 감도는 거리였다.
독일 일간지 「S?ddeutsche Zeitung(SZ)」은 7월11일자 ‘자유로운 영혼(Freiheit des Geistes)’이란 제하의 기사에서 그녀에 대해 “1955년부터 1959년까지 뮌헨 대학에서 작가를 꿈꾸며 공부했던 유일한 한국인 여학생. 독일에서의 경험과 삶을 통해 완전히 변해버린 한국 여인. 혹은 여전히 몇 권의 저서만이 읽혀지는 무명작가”라고 소개하며 ‘슈바빙을 사랑한 21살 한국 여학생’에게 슈바빙은 ‘뮌헨의 몽마르트. 청춘과 보헴과 천재에의 꿈을 일상사로서 생활하고 있는 곳. 위보다는 두뇌가, 환상이 우선하는 곳. 하여간 슈바빙은 이 무서운 날카로움으로 발전해 가는 기계 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로 비쳐졌다고 설명했다.
이 신문은 이어 그녀가 독일에서 다시 조명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뮌헨의 저널리스트 유스티나 슈라이버(Justina Schreiber) 씨는 한국인 작가 이미륵에 대한 연구 도중 우연히 전혜린을 알게 된다. 수필가 전혜린은 1946년 독일어로 쓰여 진 이미륵(李彌勒, Mirok Li)의 베스트셀러 『압록강은 흐른다(Der Yalu fließt)』를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슈라이버는 이 무명의 한국 작가에 심취하게 어 2010년 그녀에 관한 라디오 방송을 기획하게 된다. "방송을 위해 나는 몇 개의 에세이를 번역의뢰 하였는데 그녀의 글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이 작품들을 내 컴퓨터에만 소장하고 있는 것이 아쉬웠다." 이 후 슈라이버는 소위 독일유학 붐을 일으킨 이 무명작가의 글을 공개할 방법을 찾는다. 독일어로 번역된 그녀의 글들은 진실 되고 생동적인 그녀만의 언어를 통해 매우 독창적 문체를 갖는다고 덧붙인다.

▲'자유로운 영혼‘제하로 전혜린을 조명한 독일 일간지 SZ의 7월11일자 기사.
이 신문은 그가 “사르트르(Jean Paul Charles Aymard Sartre),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를 읽으며 스스로 실존주의자라 여겼고 끊임없이 타자가 정한 규율에 서 벗어나고자 했다“며 ”이러한 그녀의 삶의 방식에 196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과 여성들은 열광했고 현재까지도 한국인들은 전혜린의 흔적을 찾아 슈바빙으로 여행 한다“고 밝혔다.
위택환·이승아 코리아넷 기자
whan23@korea.kr
Saint-Sa?ns, Camille Introduction + Rondo Capriccioso op. 28 violin & orchestra
전혜린 하면 사춘기 그녀의 글을 읽고 한번씩은 모두들 가슴앓이를 해 보았지요.
비범한 천재의 사적인 생활은 그 천재성 때문에 평범한 삶을 살기가 어려워요.
천재가 아닌 평범한 일상이 좋은건지도 모르겠어요.
유럽에서 재조명되는 전혜린
아. 그렇군요.
오랫만이에요 경수후배!
우리의 사춘기시절은 외국에 대한 선망, 동경과 더불어
전혜린이 그려낸 이국과 문학의 얘기를 감수성 가득 받아드렸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세월이 지난 요즘 사춘기생들은 실제 외국방문과
여러 메디아를 통해 이미 세상이 좁다하는 까닭에
아마도 전혜린의 글을 잘 읽지도 않겠지만 읽어도 우리 때와 감흥도 다를 거에요.
이제 내가 살아온 날이 그녀의 생에 두배가 되는 나이가 되니
이렇게 한 발뒤로 가서 생각하게 되는군요.
그러나 그녀의 글을 읽고 느끼던 청춘이
가끔은 그립게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에요.
경수후배!
늦었지만 새해인사 할께요.
신년동문회 준비로 바쁘지요?
즐겁게 올해도 건강히 지내기를 바래요.
여고 시절 전혜린 수필집을 끼고 다니지 않은 학생들이 있었을까 싶게 우리에게 참 많은 영향을 주었던 천재작가가
지금 다시 재조명되고 있다니 반갑습니다.
그녀가 번역한 헷세의 시를 읽고
그녀가 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읽고
사춘기 시절을 난 우리의 세대지요.
결혼을 하니 둘째 동서가 경기여고 전혜린이 동창이라고 해서 놀랐습니다.
"혜린이는 문과에서 일등을 하고 나는 이과에서 일등을 했지."
동서가 팔십 중반을 나고 계시니 전혜린 작가도 살았으면 그렇겠죠.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천재작가.
수식어만 봐도 안타깝네요..
이렇게 독일에서 재조명 받는다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작년에 죽은 지 50주년이 조용히 지나더군요.
생존기간이 (1934 - 1965) 이렇게 되니
지금도 생존한다면 82세가 되겠네요.
이제 제 나이가 이만큼 되다 보니
이렇게 자연처럼 서서히 늙어 가는 것도 살만한데 싶어지며
일찍 떠난 그녀가 안타깝습니다.
산다는 일,
호흡하고 말하고 미소할 수 있다는 일
귀중한 일이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지금 나는 아주 작은 것으로 만족한다.
한 권의 새 책이 맘에 들때,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걷는다는 일,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전혜린/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어제(3월 7일) 아침에 아끼는 한 후배가 보내온 글을 옮겼습니다.
이렇게 행복한 날이 그녀에게도 있었었는데....
2016년 1월 10일 일요일은 전혜린씨의 51주년 기일이었다.
그리하여 하루지난 오늘 혹시나 그녀를 추모하는 행사가 있었는가 찾아보았다
근간의 행사는 찾을 수 없었으나
2013년 8월 13일 해외문화홍보원 웹사이트에 올렸던 윗글을 읽게되었다.
위의 기사내용을 읽어가며
조금만 더 인내심으로 그녀의 인생을 이어갔었더라면 싶은 안타까움이 든다.
그 시대와 요즘 시대가 많이 변하여서일까?
이제 그녀가 세상을 떠나던 시기의 나이 31세,
바로 그 나이에 이르는 딸아이를 가진 엄마가 된 나에게는
젊은 시절 그녀의 글을 읽으며 동경하던 문학의 열망보다는
아프더라도 힘들더라도 열심히 살아주기를 바라는 에미의 마음으로 더욱 더 애석하다.
그녀의 기일을 보내며,
한국의 정치,경제 등등으로 소요하던 시기에
오로지 문학에 몰입하며 자진했던 전혜린님이 남긴 글들은 영원 할 것이다고
그녀를 기억하며 명복을 기원한다.
(참고: 본인이 7년전과 4년전에 올렸던 글.
전혜린의 마음고향 뮨헨~( 클릭) 2009.08.04
전혜린 47주년 기일에( 클릭) 201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