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량한 교직 생활이지만 기억에 남는 제자가 있다. 내가 교직에 있던 학교는 그 당시 이천 읍에서도 시외버스로 50분간 가는 충청도와 경기도의 접경에 있는 오지 학교였다. 선생들은 모두 나같은 초임교사가 아니면, 도시에서 문제를 일으켜서 좌천되어 온 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서 나는 한 눈에 큰 인물이 될 것 같은 14살짜리 아이를 보았다.  내가 도시로 온 이후 그 아이와 서신을 몇번 주고 받았지만 소식이 끊어졌다. 

 

  재직중 나는 그곳 아이들에게 누누이 말했다.

 

  "사회에 새 바람과 불어넣어주는 것은 도시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이 아니고 시골에서 나서 자란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문구를 환경정리 때 뒤에다 붙여 놓았다.

 

 비가 오면 발목까지 빠지는 길을 걸어 십리 건 십오리 건 걸어서 학교에 오는 아이들이었다. 어떻게 하면 농땡이 칠까 궁리하는 선생님들에게서 두 눈을 반짝이며 배우고자 열망하는 아이들이었다. 공부보다는 도로 가꾸기나 모내기에 동원되는 행사가 더 빈번한 시골 학교였지만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는 꿈을 가진 아이들이었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아끼는 내 작품 <순무>에는 고등학교 2학년 때 강화도에서 서울로 전학와 적응하는 그 아이 얘기가 나온다.

 

 "불어는 시험범위까지 한 자도 빼지 않고 무조건 외었다. 기말고사 결과가 나오자 불어선생은 나에게 천재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공부가 나에게는 가장 좋은 도피처였다. 어느 날 화장실 거울 속에 머리가 허연 사람이 휑한 눈으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 머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백이 되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니 거짓말처럼 머리가 검어졌다."

 

그리고 나는 작품 속에서 고향에 남아 있는 친구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다. 

 

" 난 말이여, 모낼 때마다 생각혀. 모는 씨 뿌려 자란 자리를 한 번 옮겨 주어야 하는겨. 그래야 더 단단히 뿌릴 내리고 가지를 뻗고 힘차게 자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겨. 모내지 않은 모는 그 자리에서 여리여리 하게 자라 열매도 제대로 못 맺고......."

 

<순무>의 무대를 강화도로 설정을 했지만 그때 그 아이들다. 이름까지 똑같은 아이도 있다. 

 

내 책 <히말라야바위취>가 출간되고 마음이 들떠 있을 때 텔레비젼 뉴스 시간에 장관 대변인이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그 아이였다. 이미 오십 줄에 들어선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지만 내 눈에는 예전 14살 때 모습 그대로였다. 그 아이가 근무하는 세종시로 책을 보냈더니 어제 전화가 왔다. 아마도 출판사에다 내 전화번호를 알아낸 모양이다.

 그때 그 열악한 조건에서 공부한 아이들이 놀랍게도 행시를 패스하여 고위 공부원이 되어 있었고, 한 아이는 사법고시를 패스해 변호사가 되어 있었다. 또 한 아이는 고위공직에, 또 한 아이는 사업에 성공해 큰 부를 축적했다.  언제 그 친구들과 한번 만나자고 한다.

 

나는 도중에 학교를 그만 두어서 그 아이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그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봐 주었다. 그리고 시골 촌 구석에서도 서울 아이들이 갖지 못하는 장점을 누누이 말해 주었다. 사십대 후반인 지금은 국장급 장관 대변인이지만 머지않아 장관이 되고, 또 그보다 더 윗 사람이 될 거라는 것이다. 삼십여년 전에 나는 그 아이에게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