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어느 존경하는 선생님께 예수를 어떻게 믿게된 동기를 여쭙자 옛날 명동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카톨릭 촌이 있었는데 거기 언덕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친구한테

 

“너 저게 뭔지 아니?”

 

했더니, 잘은 모르지만, 누가 우리 대신  죽었다 그런 뜻이래 하더란다. 우리 대신

누가 죽었다는 충격을 받고 그 말을 마음에 두었는데, 나중에 어떤 소읍으로 전학을

갔더니 거기에도 십자가가 있어 ‘아 이 동네에도 우리대신 죽은 사람이 있구나 ‘하고

자진해서 그곳을 찾아가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내가 어릴적 살던 동네에는 높은 뚝아래 개울이 있었다. 뚝에는 풍뎅이가 늘

박혀있는 호박꽃, 쌀꽃, 까마중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었고 우리는 맑은 물에서

수영도 하고  젖은 몸을 한나절 잘 익혀진 돌멩이 위에서 말리며 긴 여름나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개울은 폭이 넓지않아 비가 조금만 와도 물살이 금방 세어지며

불어 올랐다.

 

어느해 팔월 장마가 지나가고 볕이 채 나기도 전에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시냇가에

나갔다가 새 운동화를 떨어뜨려 보냈다. 동동 뜬 운동화 한짝은 흙탕물의 빠른

물살을 따라 안타까워하는 주인의 마음은 아랑곳도 없이 멀리 사라져갔다.

 

개학날 신으라고 사주신 것이라 나는 야단 맞는 것이 두려워 집엘 얼른 들어가지

못하였다. 해가 진후에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오셨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친구와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운동화때문이 아니라, 늦도록 안들어와 어른들을

걱정시켜드린 것 때문에 꾸중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육남매를 길러내시는

 

부모님께 운동화를 다시 한번 사시게한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견딜 수없이

송구스러웠던같다.

 

가끔 새신 동요를 들을 적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새 신발 하나 사 신고,  머리가

하늘에 닿을 만큼 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수록  기뻣을까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가난했던 우리 어린 시절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같은

동네에 살던 상훈이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다음날 해는 푸른 하늘에 걸려있고 날은 맥없이 맑은데 신발장을 바라보니 외쪽

운동화가 젖은채 슬프게 앉아 있었다. 문뜩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상훈이 남매가

서 있었다. 문을 열자

 

“ 오늘 우리 둘이 일찍 일어나 개울을 따라 내려가 봤어.왠지 꼭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더니 정말 나무가지가 개울에 쓰러져 있는데 그 가지에 운동화가 걸려

 있었어.”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 한짝을 받아들고 나는 정말 하늘을 닿을 것 같이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상훈이 남매는 우리 뒷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술꾼이였고 어머니는 국민학교

교사였는데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누워 계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그들을

키우셨는데 학교 숙제부터 예의범절을 가르치며 반듯하게 외손자들을 길러내셔서

동네사람들 누구나 그들을 칭찬하며 높이 샀다.

 

상훈이는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이 가끔씩  악동으로 변해가지고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을 끊어가거나 줄넘기 할때 뛰어들어 훼방을 놓을때도 의연하게 그들을

말리는 등 선한 아이의 표본으로  누구의 기억에나 남아 있었다.

 

그들의 부모님 두분 다 돌아가시고, 상훈네가 우리 동네를 떠난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상훈이가 목사가 됬다는 소식만 들었지 아무도 그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십여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나는 문득 그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미국에 온 뒤

나도 교회를 다니게 됬으드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영종이라던가하는  섬에 있다는 소식을 알아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삼십분 정도를

가니 조그만 섬들이 드문 드문 눈에 띄었다. 배의 기름냄새와 바다냄새가 섞여진

 

갯벌을 지나 무릎까지 자란 잡초들을 헤치고 언덕을 올라가자  교회 건물 옆에

 “향린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마당에 앉아 무를 썰어

 말리고 계셨다. 상희 향린원 원장님이 집 뒷쪽에서 걸어 나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상희의 얼굴뿐인 내 기억위에 수십년의 세월이 현기증 날정도로 지나갔다.

 

“오빠가 이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할머니를 따르는

 외로운  노인네 분들이 이곳에 모여들자 교인들과 힘을 합하여 집을 마련해서

 그분들을 돌보아 드렸지요. 지난 여름 노인네 분들을 모시고 봉화대에 소풍갔다

 

오다가 소낙비를 만났어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불어난 물살에 나무다리가   

끊겨져 내리자 한분씩 노인들을 업어 나르고는 자신은 물에 생명을 잃었지요. 아무도

 봐드릴 사람이 없는 노인네분들이기 때문에 , 그리고 오빠가 늘 즐겁게 일하시던

 

<향린원> 이므로 그뒤로 제가 이곳에 들어와 오빠일을 맡았지요.”

 

갓 따온 미역과 굴로 무침을 만든 점심상이 나와 둘이 마주 앉았다.

볕이 내려쬐는 시냇가에서 놀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 둘이는 중년이 훨썩 넘어

멋없이 늙어진 모습으로 밥상을 받았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고사하고 남을 위해 죽는 것은 어떤 힘에서일까 ?

우리 둘은 밥을 먹고 상훈이의 묘를 찾았다. 교인들이 세워준 비문에는  < 베푸는

기쁨으로만 살아 온 김상훈 목사 주안에 잠들다> 이렇게 써 있었다.

 

벌써 금요일…………

월급을 타려고 회계과로 나섰다. 싸늘한 공기에 까운 깃을 올렸다. 그런데 밑을 

내려다보니 얼어붙은 것같이 딱딱한 땅에서 보랏빛꽃들이 뾰족뾰족 올라오기 시작한다.

 

봄이 오래 전 부터 와있었는데 올해부터 아이 둘이 대학에 입학하고는 학비 걱정으로  일에만 파묻혀 지나느라 어느 것에도

무감각해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른 새벽마다 밝아오는 어둠을 가르고 일을 갔다가는 저녁이 되어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을 지친 몸에 받아 앉고 집으로 돌아온다.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긴 잠을

한번 자는 것이 근래의 소원일 정도로 피곤한 날의 연속이다. 젊은    동료가 힘들지

않으세요 ? 물을 때마다  “  아이들이 이 에너지의 원천이지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실 내 아이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힘의 근본이 되는 삶이 얼마나

부족한이의 삶일까 생각해 본다. 운동화를 잃어버린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첫 새벽

물길을 따라 내려갔던, 또 소낙비를 만나고도 물색없이 나들이 나온 것만 좋아하던

노인들을 위해 뛰어들었던 상훈이의 마음들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저 십자가의

사랑과 짐짓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위해, 또는 내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한 뜻이 나의 힘의

원동력이 되어, 남을 위해 끝없이 베풀며 그들의 고통도 같이하며 바쁘게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부끄러운 월급봉투를 받아들었다.

 

 

**********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나간 어려웠던 때 썼던   수필을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