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오래전 어느 존경하는 선생님께 예수를 어떻게 믿게된 동기를 여쭙자 옛날 명동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카톨릭 촌이 있었는데 거기 언덕에 십자가가 있는 것을 보고,
친구한테
“너 저게 뭔지 아니?”
했더니, 잘은 모르지만, 누가 우리 대신 죽었다 그런 뜻이래 하더란다. 우리 대신
누가 죽었다는 충격을 받고 그 말을 마음에 두었는데, 나중에 어떤 소읍으로 전학을
갔더니 거기에도 십자가가 있어 ‘아 이 동네에도 우리대신 죽은 사람이 있구나 ‘하고
자진해서 그곳을 찾아가 그때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새 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짝, 머리가 하늘까지 닿겠네>
내가 어릴적 살던 동네에는 높은 뚝아래 개울이 있었다. 뚝에는 풍뎅이가 늘
박혀있는 호박꽃, 쌀꽃, 까마중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었고 우리는 맑은 물에서
수영도 하고 젖은 몸을 한나절 잘 익혀진 돌멩이 위에서 말리며 긴 여름나절을
보냈다. 그런데 이개울은 폭이 넓지않아 비가 조금만 와도 물살이 금방 세어지며
불어 올랐다.
어느해 팔월 장마가 지나가고 볕이 채 나기도 전에 동네아이들과 어울려 시냇가에
나갔다가 새 운동화를 떨어뜨려 보냈다. 동동 뜬 운동화 한짝은 흙탕물의 빠른
물살을 따라 안타까워하는 주인의 마음은 아랑곳도 없이 멀리 사라져갔다.
개학날 신으라고 사주신 것이라 나는 야단 맞는 것이 두려워 집엘 얼른 들어가지
못하였다. 해가 진후에 걱정이 되어 찾으러 나오셨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모퉁이에
친구와 서있는 나를 발견하고, 운동화때문이 아니라, 늦도록 안들어와 어른들을
걱정시켜드린 것 때문에 꾸중을 들었던 것이 생각난다. 육남매를 길러내시는
부모님께 운동화를 다시 한번 사시게한다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견딜 수없이
송구스러웠던같다.
가끔 새신 동요를 들을 적마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새 신발 하나 사 신고, 머리가
하늘에 닿을 만큼 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수록 기뻣을까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가난했던 우리 어린 시절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고, 같은
동네에 살던 상훈이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그다음날 해는 푸른 하늘에 걸려있고 날은 맥없이 맑은데 신발장을 바라보니 외쪽
운동화가 젖은채 슬프게 앉아 있었다. 문뜩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상훈이 남매가
서 있었다. 문을 열자
“ 오늘 우리 둘이 일찍 일어나 개울을 따라 내려가 봤어.왠지 꼭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더니 정말 나무가지가 개울에 쓰러져 있는데 그 가지에 운동화가 걸려
있었어.”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운동화 한짝을 받아들고 나는 정말 하늘을 닿을 것 같이
깡충깡충 뛰고 있었다.
상훈이 남매는 우리 뒷집에 살았는데 아버지는 술꾼이였고 어머니는 국민학교
교사였는데 중풍으로 오랜 세월을 누워 계셨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그들을
키우셨는데 학교 숙제부터 예의범절을 가르치며 반듯하게 외손자들을 길러내셔서
동네사람들 누구나 그들을 칭찬하며 높이 샀다.
상훈이는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이 가끔씩 악동으로 변해가지고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을 끊어가거나 줄넘기 할때 뛰어들어 훼방을 놓을때도 의연하게 그들을
말리는 등 선한 아이의 표본으로 누구의 기억에나 남아 있었다.
그들의 부모님 두분 다 돌아가시고, 상훈네가 우리 동네를 떠난 후 소식이
끊어졌는데 상훈이가 목사가 됬다는 소식만 들었지 아무도 그들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십여년 전 한국에 나갔을 때 나는 문득 그들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다. 미국에 온 뒤
나도 교회를 다니게 됬으드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영종이라던가하는 섬에 있다는 소식을 알아내 인천에서 배를 타고 삼십분 정도를
가니 조그만 섬들이 드문 드문 눈에 띄었다. 배의 기름냄새와 바다냄새가 섞여진
갯벌을 지나 무릎까지 자란 잡초들을 헤치고 언덕을 올라가자 교회 건물 옆에
“향린원”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이 마당에 앉아 무를 썰어
말리고 계셨다. 상희 향린원 원장님이 집 뒷쪽에서 걸어 나왔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아 내린 상희의 얼굴뿐인 내 기억위에 수십년의 세월이 현기증 날정도로 지나갔다.
“오빠가 이 곳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외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할머니를 따르는
외로운 노인네 분들이 이곳에 모여들자 교인들과 힘을 합하여 집을 마련해서
그분들을 돌보아 드렸지요. 지난 여름 노인네 분들을 모시고 봉화대에 소풍갔다
오다가 소낙비를 만났어요. 다리를 건너는데 갑자기 불어난 물살에 나무다리가
끊겨져 내리자 한분씩 노인들을 업어 나르고는 자신은 물에 생명을 잃었지요. 아무도
봐드릴 사람이 없는 노인네분들이기 때문에 , 그리고 오빠가 늘 즐겁게 일하시던
<향린원> 이므로 그뒤로 제가 이곳에 들어와 오빠일을 맡았지요.”
갓 따온 미역과 굴로 무침을 만든 점심상이 나와 둘이 마주 앉았다.
볕이 내려쬐는 시냇가에서 놀때가 엊그제 같은데 우리 둘이는 중년이 훨썩 넘어
멋없이 늙어진 모습으로 밥상을 받았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은 고사하고 남을 위해 죽는 것은 어떤 힘에서일까 ?
우리 둘은 밥을 먹고 상훈이의 묘를 찾았다. 교인들이 세워준 비문에는 < 베푸는
기쁨으로만 살아 온 김상훈 목사 주안에 잠들다> 이렇게 써 있었다.
벌써 금요일…………
월급을 타려고 회계과로 나섰다. 싸늘한 공기에 까운 깃을 올렸다. 그런데 밑을
내려다보니 얼어붙은 것같이 딱딱한 땅에서 보랏빛꽃들이 뾰족뾰족 올라오기 시작한다.
봄이 오래 전 부터 와있었는데 올해부터 아이 둘이 대학에 입학하고는 학비 걱정으로 일에만 파묻혀 지나느라 어느 것에도
무감각해져 있음을 깨닫는다. 이른 새벽마다 밝아오는 어둠을 가르고 일을 갔다가는 저녁이 되어 무겁게 내려앉은
어둠을 지친 몸에 받아 앉고 집으로 돌아온다. 부드러운 바람소리를 들으며 긴 잠을
한번 자는 것이 근래의 소원일 정도로 피곤한 날의 연속이다. 젊은 동료가 힘들지
않으세요 ? 물을 때마다 “ 아이들이 이 에너지의 원천이지요”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사실 내 아이들이 일하며 살아가는 힘의 근본이 되는 삶이 얼마나
부족한이의 삶일까 생각해 본다. 운동화를 잃어버린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첫 새벽
물길을 따라 내려갔던, 또 소낙비를 만나고도 물색없이 나들이 나온 것만 좋아하던
노인들을 위해 뛰어들었던 상훈이의 마음들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는 저 십자가의
사랑과 짐짓 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나를 위해, 또는 내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선한 뜻이 나의 힘의
원동력이 되어, 남을 위해 끝없이 베풀며 그들의 고통도 같이하며 바쁘게 살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부끄러운 월급봉투를 받아들었다.
********** 주님의 은혜로 잘 지나간 어려웠던 때 썼던 수필을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
오랜만에 들어오니 인숙의 글에 감명 감동....
그런삶을 살다가신 그런사람이 네 가까이 계셨다니,
어린때 고운 품성을 그대로 지닐 수 있는 그분 ,
정말 그리스도 향기를 드러내는 고귀한 삶'
우리가 믿는 다고 하는 것이 부끄러워 .
삶에서 묻어 나는 향이 없으니..,
정례목사님께서 좋은 말씀을 들려 주셨다는데 못 들어서 너무 섭섭하이.
다음 나오면 꼭 기회를 만들자!
목사님 께서 찬조를 동창회에 하셔서 내 몸 둘바가 없어요.
고맙고 도 고마워요.다음엔 꼭 연락해서 좋은시간 갖게 해 줘요.꼭꼭꼭.
경선아.
너 우리동네 뚝 생각나니?
그리고 우리 집뜰에 미루나무가 한구루 있었어. 그런데 미국에는 미루나무가 없는데, 어느날 길을 잘못 들었는데 거기 큰 미루나무가 있는
거야. 너무 반가워서 한참을 쳐다보고는 가끔 집이 새각날적 마다 그길로 가서 그나무를 보곤했지.
그런데 그때 오빠들이 오셨을 때 큰 버스로 모시고 다녔는데, 일부러 그 곳으로 모시고 가서 "저것 보세요 미루나무가 여기 있어요"하고 외
쳤는데 아무도 감흥이 없으신거야. 내가 가지고 있던 고향괴 그곳에서 계속 사신 분블의고향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지.
그래도 나는 내가 자라날때의 동네 얘기를 쓸 때가 제일 가슴이 뛰며 좋은 것 있지.
화랑농장 으로 가는 언덕길, 역앞에 로타리, 늘 깨끗했던 너의 집 그리고 이북김치....
내년에 만나자.
반가운 인숙이 이름을 보곤 여러번 열려고 시도 했지만
영 안열리더니 이제사 열렸네.
건강하지?
정례통해 네 안부도 들었단다.
인숙스러운 글,
아주 잘 읽었다.
자주 좋은글 올려주렴.
더욱 건강하고 충만한 삶이 되길......
순호야~
너도 그랬구나.
나도 어제 댓글을 달려고 했는데 이상하게 안되더라고~
자고나니 오늘은 되네.
인숙아~
네 글 읽으니 너무 반갑고 내 어린시절도 생각나더라.
한국에서도 어릴적 동네 친구 만나면 반가워서 시간가는 줄 모르는데 외국 살다 오면 더 하겠지.
그 목사님 너무 좋은 분인것 같은데 살아계셔서 한국에 올때 만나면 얼마나 좋았겠니?
맘이 찡하다.
글 솜씨 여전하네.
좋은 글 많이 올리고 건강하게 잘 지내기 빈다.
인숙아 오랫만에 올려준 글 잘 읽었어.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잘 어울어진 글일쎄.
그 목사님 남매지간에 참으로 훌륭하시네.
그렇게 살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울때도 있고
그리 못함이 부끄러울때도 있지만
한가족 탈없이 끝까지 잘 이끌어 나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니?
이민와서 힘겨운 일들을 해내며 멋지게 살아낸 삶에 박수를 보낸다.
종종 글 쓰고 또 올려 주기를 바란다.
며칠 집안 일로 정신이 없어서 오늘에야 여기저기 댓글 달고 있다.
인숙이는 예전부터 문학소녀였지?
정말 글을 맛갈스러우면서도 감동적으로 썼네.
난 아예 나자신에게는 수준높은 삶을 요구하지를 않아
어차피 내수준을 아니까.ㅎㅎㅎㅎㅎㅎ.
그냥 애들하고 남편치닥꺼리 하는 걸로 헉헉대고 살았지.
내식구 건사 잘하는 게 가정에도 국가에도 나아가서는 하나님나라에게까지
잘하는 일이라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걸고 있단다.
때때로 우리가 인생을 40년 되돌릴 수 있다면 아마 다들 전문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은 해.
그 당시의 사회풍조는 지금과는 하늘과 땅같은 차이가 있었쟎아?
결혼하면 무조건 가졌던 직장도 그만두고..............................................
아까운 인재들이 많이 사장됬지.
인숙아 자주 들어와라.
인숙아!
그리스도교의 핵심을 체험된 삶에서 쉽게 찝어낸 진솔한 네 마음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구나
어려웠던 어릴 적 운동화 한짝과 상훈의 이야기
나이들어 그 옛 친구를 찾아간 네 마음
힘들게 일하며 찾아 둔 월급 봉투를 들면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헤아리는 네 마음이
네 아잔한 모습에 그대로 각인되어 있던데...
<베푸는 기쁨으로만 김상훈 목사 주 안에 잠들다 >
" 정례야! 넌 이처럼 숭고한 묘명을 남길만한 가치있는 삶을 살아왔니?
마음 소리가 채찍이 되어 가슴을 치는 이 아침
인숙아!
넌 네 옛 친구 상훈 목사님이랑 비슷해.
어쩌다 한번씩 만난 널 볼 때마다 네게선 그린 향기를 뿜어냈어.
은총의 자녀됨이 그냥 고맙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