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제고 18회 성욱입니다.

마을 절임배추좀 팔아볼까 하고 제고 홈페이지에 글을 올리고는, 아무래도 여학교 홈페이지가 나을까 해서, 죄송하지만, 인일여고 홈페이지에 올려보려고 하다하다 안돼서 말미에 부탁말을 올렸더니 이재성군이 여기다 올려줬군요. 올려준 재성군이나 지우지 않고 놔두신 귀 동창회 관계자분들 두루 감사합니다. (이젠 저도 올릴 줄 압니다.*^*)

이왕 제글이 올려져 있으니 제 소개좀 하겠습니다. 우리 기수와 같은 기수인 인일 11기분들은 혹시 아실지 모르겟습니다만 저는 13년 전에 귀농해서 농사짓습니다. 구구한 설명보다는, 제 홈페이지에 이와 관련해 써놓은 글이 있기에 옮깁니다. 좀 긴데요, 중년의 애교로 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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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농촌에 내려온 지 햇수로 어언 13년째. 마을 운영위원장까지 맡았으니 어엿한 촌사람이 되었다.   내가 농촌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초기에 부딪혔던 것은 크게 세가지로, 첫째 농촌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찾기, 둘째 농촌에 적응하기, 셋째 아이들 교육 문제였다.

 

농촌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 찾기


 

원래부터 농촌에서 살던 사람이야 이런 문제 의식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삶을 미리 어떤 것이라고 규정해 놓고 거기에 끼워맞춰 살겠다는 발상은 토박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웃기는 일일 테니까 말이다. 물고기가 물에서 사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그냥 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나름의 의미 규정을 해야 했다. 도회지에서 농촌으로 뛰어드는 것은 뭍에서 물로 뛰어든 것만큼이나 나에게는 획기적인 것이었고 농촌은 나의 구원처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지내놓고 생각해 보면 알량한 지식인의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어쨌든, 당시로서는 내가 왜 농촌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미 규정이 필요했다. 그래야 마음이 편했으니까. 어쩌면, 아직 젊은 내가 도회지에서 농촌으로 간 것은 패배자로서가 아니라는 끊임없는 자기 최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의미 규정이 참으로 모호한 것이어서 이런 것이다 하고 딱 부러지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당연했다. 사람의 삶을 어찌 한두 마디로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해도 당시를 회상해서 억지로 꿰맞추어 본다면 ‘몸과 마음을 추슬러 자연과 대화하기’ 정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나의 자연은 사람이 배제된 신선 세계의 자연이 아니라 사람이 함께 부대끼며 어울려 사는 포괄된 의미의 자연이 되겠다.


 

  농촌에 적응하기


 

  농촌에 와서 산다는 것은 온갖 때에 찌든 속세를 떠나 신선과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의 ‘때(?)’ 찌든 농촌이라는 사회에 와서 거기에 적응하여 산다는 것이다. 내가 수십년간 적응하여 살던 도회지와 달리 농촌은 나름대로의 삶의 패턴이 있는데, 그걸 인정하여 거기에 적응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합리화를 내세우는 도회지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농촌 사람은 아직 덜 떨어졌거나 순박한(은근히 한자락 내려깔고 보는 식의) 시골 사람이고, 좋든 싫든 하나의 지역공동체에 속박되어 있는 농촌 사람의 입장에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으로 무장된 도회지인을 바라본다면 자기만 아는 깍정이인 것이다.

 

  어느날, 마을회관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갑자기 술취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노래라기보다는 고함에 가까운 유행가 가락이 흘러나왔다. 소란으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공중도덕이 충일했던 나는 당연히 마을회관에서 놀던 동네 노인들이 마이크 조작을 실수하여 노래가 방송으로 흘러나온 줄 알고(그래서 그 노인들이 노래가 방송으로 흘러나오는 걸 모르는 줄 알고) 마을회관으로 가서(우리집은 마을회관 바로 옆이다) 노래가 방송으로 흘러나오니 방송을 꺼야 되겠다고 했더니 날벼락이 떨어졌다. 아버지 같은 동네 어른들이 노는데 젊은 녀석이 와서 흥을 깬다는 것이다. 노는 중에 흥이 나서 마이크 잡고 노래를 불렀는데(우리 나라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흥나면 마이크 잡고, 또 마이크 잡으면 더 흥나 하는 것 같더라고) 그게 외부로 흘러나갔던 것. 그런데 기계 조작에 영 서투른 노인들이라 회관 내부로만 나오게 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래, 그렇다면 좋다, 평소 들어보지 못한 노인들의 이 흥겨운 노래를 동네 사람들도 다함께 들어보고 즐겨봐라 하고 일부러 더 크게 틀어놓고 방송했다는 것이다.

  내가 사정을 모르고 실수했으니 더 노시라고 해도 다들 에이 에이 하면서 뿔뿔이 흩어지는데야 아무런 대책이 없다. 당연히 나는 에미애비도 없는 몹쓸 젊은 녀석이 되어 버렸다. (젊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농촌의 고령화 덕분으로 올해 쉬흔넷인 나는 우리 마을 남녀노소 통틀은 150여명 중 당당 15위의 젊은이이다.)


 

  부역이라면 케케묵은 봉건 시대의 유물로만 느껴지는데, 여러분들 요즘에 부역이 있을까 없을까? 정답은 ‘있다’이다. 그것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펄펄 살아 날뛰고 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지방도로를 비롯한 마을의 온갖 도로의 보수와 청소, 마을 상수도 보수와 청소, 마을 안길과 농로의 시멘트 확대 포장, 수리 관개 시설 관리, 상부상조의 의미가 더 크긴 하지만 어쨌든 의무 사항인 상고시의 운구로부터 자질구레한 손님 접대에 이르는 노동력 차출 등등. 청소는 그렇다치더라도 공공 도로의 확대와 포장까지 마을 사람들의 부역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나는 정부나 지역 자치단체를 비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회지에서 자기 동네의 안길이 아니라 자기만 사용하는 집 앞길이라도 누가 부역으로 공사하던가. 이건 농촌이라고 위정자들이 깔보고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건 마을 축제 행사였다. 우리 마을을 편리하게 해주는, 군수나 군의원, 면장으로부터 특별히 대우받는 특혜였다. 예산이 부족하다보니 재정을 쪼개어 자재비만 대주기로 하고 공사하는 것이기에 그 차례가 온다는 것 자체가 혜택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부역쯤이야 대수가 아닌 것이다. 나는 은혜도 모르는 불평분자가 되었다.


 

  칼로 두부를 자르듯 시시비비를 명확히 한다는 것은 어떨까? 사실 특별한 일 말고는 시비가 붙은 어떤 사안에 대해 옳고그른 것을 가려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농촌 지역에서 시시비비를 엄격하게 가려내어 행동한다면 겉으로의 찬사는 들을지언정 그들과 함께 묻혀 살기는 쉽지 않다.

  농촌 사람에게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은 삶의 터전이다. 도회지인들이야 그 지역이 싫으면 이사가면 그만이지만 농민은 좋든싫든 지역을 떠날 수 없다. 아무리 영농 기계화로 두레가 깨어지고 자본주의화로 농촌공동체가 해체되었어도 농촌에서 이웃의 도움 없이는 살아날 방법이 없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끼리는 서로 보기 싫어 속으로는 이를 갈고 있어도 겉으로는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헌신적이기까지 하다.

 

  그래서 도회지에서 온 뜨내기(지역민들에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10년을 같이 살았어도 정서적으로 뜨내기이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이사온 지 15년이 되었고 마을의 이장을 하는데도 마을에서 가끔 뜨내기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는 시시비비를 명확히 가려내어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받아낼 것은 받아내지만 지역의 토박이는 대충 두루뭉실 넘어간다. 토박이는 시장에서 아는 사람한테 바가지썼다는 것을 알아도 다음에 또 그 사람한테 간다. 왜냐하면 서로 아는 사람이니까. 농협 조합장 선거 후보자 토론회 때 후보자들한테 난처한 질문을 던져선 안된다. 후보자들이나 투표자들 모두 서로 아는 사람들이니까. 그래서 농업이 좋아 귀농한 도회지 출신 뜨내기는, 농업에 생계를 맨 농촌 토박이들은 왜 시시비비를 가려내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보란듯이 명확하게 시시비비를 따지는 동안 알게모르게 왕따당하는 헛똑똑이가 되어간다.      


 

  오늘의 농촌 문제를 이야기할 때 흔히 이농 현상을 말한다. 한마디로 농촌에서 살기 어려워졌으니까 농촌을 떠나는 것이다. 농촌에 산다고 해서 농촌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도회지에서 살다 실제 접해본 농촌은 성공과 출세를 갈망하는, 아니 자녀 교육이라도 제대로 시켜보려는 젊은 사람들이 뿌리내리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곳이다. 한 끼 쌀값이 껌 한 통보다 못한 것은 벌써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담배 한개비에도 못 미친다.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의 내면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외부의 남과 견주기 마련이다. 명절 때 고급 승용차를 몰고 돌아오는 출향인들의 활기찬 귀성 행렬, ‘도회지에 살고 있는 누구네 아들 아무개는...’으로 시작되는 성공담은 농촌의 젊은이들을 분명 주눅들게 한다. 나는 농민운동하려고 귀농한 것은 아니지만 농촌에 살기에 이러한 문제점은 마땅히 극복해야할 현실이었다. 그래서 훗날 아름다운 살만한 농촌 만들기를 한 여러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말하기로 하자.


 

  아이들 교육 문제


 

  우리 군의 여론 조사 결과를 보면 고향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 교육 문제로 놀랍게도 70%에 육박한다. 압도적이다. 자녀 교육을 위해 외지로 떠나고, 그래서 인구가 줄고, 그래서 경제가 더 피폐해지고, 그래서 교육 환경이 더 나빠지고, 그래서 다시 교육을 위해 외지로 떠나고......, 이렇게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로 이사왔다. 그들의 눈에는 나는 아이들 참으로 교육에 관심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아니 그들이 말하는 상급 학교 진학을 기준으로 말하면 나는 시골에 와서 교육에 성공한 사람이다. 큰애는 충남과학고등학교를 거쳐 카이스트를 졸업했고 작은애는 충남의 명문이라는 공주사대부고를 거쳐 IT계의 카이스트라는 한국정보통신대학교에 진학했으니까. 서울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과연 이 정도의 상급 학교로 진학할 수 있었을까?

 

  내가 여기로 이사올 때 큰애가 초등학교 6학년, 작은애는 4학년이었다. 그런데 한때 학생수가 140명도 넘었다는, 그래서 분교를 유치했던 우리 마을의 초등학생 수는 우리 애들 2명을 포함해서 겨우 4명뿐, 그것도 6학년이 3명이라 그들이 졸업하면 달랑 작은애 하나만 남게 된다. 대를 이을 2세가 없다. 마을마다 가뭄에 콩나듯 남은 찌끄래기(내 말이 아니다. 농촌에서는 좀 쓸만한 아이들은 다 도회지로 간다고 해서 남은 이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들만 모아 무슨 교육이 이루어질 것인가.

 

  그러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2세가 없는 것은 우리 마을만의 현상이 아니라 농촌의 전반적인 현상이고, 아이들이 없어지지 않는 한 교육은 이루어진다. 교육 자체가 파괴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이들이 줄어든 덕분으로 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한 학급당 10명 남짓으로 교사가 수업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 되었다. 그야말로 전인 교육이 가능한 쾌적한 환경이 되었다. 학생들이 이용하는 학교 시설도 여유가 있어진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경우, 아무 때나 서로 다투지 않고 이용할 수 있다. 학교 버스를 이용해서 현장 실습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교사 수준이 거의 평준화되어 있어 아무리 오지 학교라도 도회지 교사 못지 않다. 학생 수가 적으니 교사들의 연구 활동도 알차고 활발할 수 있다.(단, 이것은 학부모가 학교에 관심있어야 가능하다. 내가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 노릇을 해봐서 안다. 물론 모든 교사가 다 그렇다고 일반화할 수야 없겠지. 성실한 교사인 친구 김용환이 화낼까 두렵네, 쩝.)

 

  우리 애들이 다닌 학교는 집에서 5킬로 남짓. 학교 버스가 있어서(분교가 폐교되면서 학교 버스가 생겨났다.) 통학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이들 학교에서 읍내로 나가기에는 교통이 불편해 학원을 다니거나 과외를 하기가 어려웠지만(하지만 맘먹으면 못할 것도 없고, 실제로 몇몇 극성파 부모들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어떤 학원에서는 수업이 끝날 때 학교로 버스를 보내기도 했다.), 학생 수가 적어 교사들이 더 잘 살필 수 있어서인지 아니면 교장이 볶아서인지는 사실 헷갈리지만, 학력에서도 아이들 학교는 읍내 학교에 뒤지지 않았다. 학생 수가 적으니 경쟁의 의미가 줄어 아이들은 서로 좋은 친구들이었다. 경쟁으로, 점수로 아이들을 내몰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말로 아이들이 행복해 할 수 있는 쾌적한 교육 환경이 아닌가?  게다가 자연 환경은 어떤가.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등하교 때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재미를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는 십리가 조금 안 되었는데 아침 먹는 시간이 이른 아이들도 동네 입구에서 기다렸다가 함께 학교로 가곤 했다. 대부분 농사꾼 집 아이들이라 아침이 일렀다. 동네 입구에 늦게 나오는 아이들 기다리느라 한판, 가다가 잔디밭이 있던 큰고개에서 한판, 씨름이든 구슬치기든 못치기(시골이라 돈이 없어 동전 대신 못으로 했다.)든 그냥 가는 법이 없었다. 선생들이 느슨해 지던 2월에는 양지바른 산기슭에서 고구마를 구워먹으며 학교를 땡땡이치기도 하였다. 자연은 군것질거리도 많았다. 진달래, 아카시아, 삐삐, 산딸기(뱀딸기도 물이 많아 좋다), 칡뿌리, 칡순, 누구네 집 울타리의 앵두(어째서 우리집 앵두보다 그 집 그 앵두가 더 생각나지?), 콩, 밀, 깜부기 속대, 감, 밤, 참외... 그때야 몰랐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참 행복한 때였다. 

 

  큰애가 졸업해서 읍내의 중학교로 진학하자 우리 마을에는 초등학생이 작은애 하나만 남았다. 버스를 타고 다니면 자연을 느낄 수 없다. 나는 자연을 느끼게 하고자 학교 버스를 마다고 일부러 자전거로 통학하게 했다. 멀어서 걸어다닐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에 친구가 없어 같이 몰려 다닐 수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자전거 타고 다니기 어렵다고 툴툴거리면서도 가끔 이상한(내가 모르니까 이상한!) 꽃이나 풀을 가져와서 물어 보고 산짐승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자전거를 타다 걷다 하면서 주변의 온갖 동식물을 관찰하게 되고 여유를 갖게 되는 것 같았다. 요즘에 작은애한테 그때 이야기를 해보면 자전거 통학하느라 힘들었지만 덕분에 몸이 튼튼해진 것 같고 학교 오가면서 이것저것 하던 게 가장 추억에 남는다고 한다. 자연은 나와  딸애의 30년의 시공을 넘어 똑같은 선물을 해주는 것이다. 어렸을 적에 자연 속에서 자연과 어울려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저 깊은 속에 그 무엇인가가 저수지 같이 저장돼 있다가 틈만 나면 뛰쳐나와 즐거울 때면 즐겁게 해주고 위안을 받아야 할 때면 위안을 해주는 참으로 신기한 요술단지를 만드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아이들은 여유가 많았다. 학교도 일찍 끝나고 점수로 내몰지 않아도 되어서 아이들은 책을 많이 읽었다. 사실 집에 일찍 와봐야 마을에 친구가 없으니 할 일이 책 읽는 것밖에 달리 할 것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많이 읽었다. 어느 달인가는 한 달 동안 읽은 책이 거의 100권에 육박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초등학교 때 그렇게 학교 공부를 하지 않고 놀았어도, 학원, 과외는 근처에도 안 가봤어도 아이들은 중학교에 올라가서 1등을 놓치지 않았다. 수많은 독서량과 알게모르게 축적된 자연의 힘이 공부해야 할 때 제대로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른 학부모들이 부러워하며 댁의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 다 공부를 잘 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수많은 독서량과 자연과의 교감 덕분이라고 말한다. 정말 그게 다냐고 물으면 어렸을 때부터 유기농산물을 먹여서 그런가 하고 눙을 친다.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도회지에서 점수가 떨어지는데도 학교 공부를 제쳐놓고 책을 읽히기는 쉽지 않다. 1분 1초가 꽉 짜인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갖기는 어렵다. 자신을 되돌아보지 못한다면 스스로 문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다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연 속에서 여유를 가지며 함께 사랑하는 법을 익힌  우리 아이들은 적어도 초등학교 과정에서만큼은 최상의 교육을 받은 것이라고 감히 나는 이야기할 수 있다.

 

  교통이 불편하고 교육 환경이 불량(?)해서 점수따기 교육이 곤란했던 우리 아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택으로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가장 유능한 점수따기 선수가 되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도 자신들이 원하는 곳으로 진학했다. 많은 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성공적인 교육을(물론 나는 이런 것이 성공의 척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충남의 최고 오지인 청양에서, 그리고 그 청양에서도 가장 후미진 우리 마을에서 해보았다.

  좋은 교육 환경은 무엇일까? 아무리 나쁘게 보이는 환경이라도 교육의 목표를 생각해 보며 스스로 만들어 간다면 그게 가장 좋은 환경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