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날개 위에 품바 其 06>
 부제(副題) : <‘金秋子’ 다운로드>

 “상욱아. 저 놈 운다.”
 3일간의 방문 끝에  실컷 작별인사 하고 친구 N과 서울행 고속버스에
 올라탄 우리를 바라보며 K는 그 자리에 선채 울고 있었다. 
 주르륵 흐르는 주먹눈물을 훔칠 생각도 하지 않고
 사뭇 고개까지 주억대며 그렇게 울고 있었다.
 아! 콧날을 시큰하게 만들고 가슴 싸하게
 뒤흔들던 그 망부석 같던 모습이라니...!
 
 친구 K는
 친구 N과 내가 당시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던
 홍콩배우 왕우(王羽) 주연의 무협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그 흥분이 채 가시지 않아 손짓발짓에 침까지 튀겨가며
 뒤풀이에 여념 없을 때 그는 옆자리에서 시쁘둥한 표정으로
 계속 하품만 하며 뒤척이더니 극장에서 나오자마자
 우리를 데리고 막 바로
 알랭 드롱 주연의 <태양은 외로워>로 끌고 간다.
 마치 오염된 눈과 귀를 정화시키기라도 하듯이...

 마침 알랭 드롱 과의 면회시간이 1분후면 시작된다 하여
 순전히 문명인(文明人)친구를 둔 탓에 우리는 기아(飢餓)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한 채 면회대열의 굴비두름이 돼야 했다.
 K는 배도 고프지 않은지 그 제서야 눈을 반짝이고 귀를 쫑긋 세워
 알랭 드롱에 빠져드는,
 무협영화에 환장하던 우리들과는 급(及)이 달라도 한참 다른 친구였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는 날
 N과 나는 그 문명인 K를 찾아 대구에 내려갔다.

 당시 <님은 먼 곳에>와 <늦기 전에> 등으로
 상당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던 ‘김추자’!
 나는 그녀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다. 너무 느끼했다.
 그래서 애써 계속 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나는 K의 방안에서
 ‘아끼꼬’에게 서서히 최면이 걸린다.

 외출해서는 동화사(桐華寺) 너른 뜰에서, 이파리 다 떨쳐버리고
 겨울을 준비하는 무심(無心)한 고목(古木)이나 이미
 유명(幽明)을 달리한 무감(無感)한 고목(枯木)만 골라 기대서서,
 숨쉬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푹 꺼진 눈과
 빠져나가려는 영혼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는 듯싶은 텅 빈 어깨에
 형사 콜롬보에게 빌린 것 같은 잿빛 버버리 코트 걸치고
 blue-gray 회색빛 음울한 겨울 CF scene을
 처절히 토(吐)해내던 운주사 와불(臥佛)! (=내가 붙인 친구 K의 별칭)

 그리곤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와서는
 엉덩이 방바닥에 붙이기도 전에
 겨우 막 단잠에 빠진 ‘아끼꼬’를 일으켜 세웠다.
 아니 눈을 뜨는 순간부터 잘 때까지
 걸핏하면 그는 ‘추자’를 불러 세웠다.
 K의 ‘추자’ 다운로드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그 때 그 와불은 일본 처녀와 3년여 긴 세월 
 애틋한 펜팔사랑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방에는 그 여인이 보내온 종이학 천 마리가 담긴 병이
 앉은뱅이책상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동의 유수(有數)한 양반집 장남인
 그가 일본여자와 혼인을 하기에는 너무나 현실의 벽이 두꺼웠으니...
 하여 사랑에 멍든 그는 그리도 혼(魂)이 날아가고 백(魄)이 흩어진
 허깨비와 같은 모습을 연출하고 있는 터수였다.
 
 난 내 체질에는 도통 맞지 않는 그 안동양반기질이란 걸
 그때 거기서 처음 느꼈다.
 그건 그가 우리를 안동의 자기네 종가(宗家)에 데리고 가서
 몇 수레 분(分)도 넘을 엄청난 고서(古書)들과 임금이 내린 교지(敎旨),등을
 보여주는 자리에서가 아니었다.  종갓집을 지키던 고희를 넘긴
 희끗한 머리의 학(鶴)같은 노인이 우리 20대 젊은이들과 마루에 앉아
 큰절로 수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도 아직 아니었다.
 K의 집에서 매일
 저녁상을 받기 전에 마당 펌프 가에 씻으러 나오면 그 누이동생이
 우리가 발까지 다 닦고 일어날 때까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옆에서 다소곳이 기다리다가 수건을 건네주던,
 나로서는 생전 처음 보고 겪는 모습에서였다.
 지금은 문학박사이며 등단시인이 된 그 누이에게
 아직도 사뭇 송구스러운 기억이다.

 “야 또 ‘김추자’냐? 넌 ‘김추자’ 밖에 모르냐?”라고
 구시렁대던 나는 오히려 하루... 그리고 이틀이 지나,
 녀석의 배턴을 이어 받아
 내가 직접 턴테이블 arm을 조종하는 항해사가 된다.
 그리곤 나도 아침이고 저녁이고 가리지 않고 ‘추자’를 찾았다.
 와불로 인해 ‘추자’가 내게 down-road 完了가 된 것이다.
 ‘추자’의 덫에 걸리는 순간이다.
 아니 은밀한 내 욕망이 뻔뻔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난 그렇게 3일을 K와 지내고
 <추자라는 불가역(不可逆)의 늪과 K의 뜨거운 눈물>을 안고 돌아왔다.

 대마초 파동 後 1978년 퇴계로 대한극장에서 무대 인사하던
 ‘추자’를 따라다님을 시작으로
 나는 그 후 숱하게 ‘추자’를 쫒아 다닌다.
 강남의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끝내고 무대에서 내려오던 ‘추자’에게
 악수를 청하던 내 손이 머쓱해지고 나서야
 요주의(要注意) 스토커(?)라고 이력서에 빨간 줄 달 뻔했던
 나의 기나긴 광(狂)팬 행각은 비로소 끝이 났다.
 
 그러나 아직도 식곤증에 운전이 힘들어질 때
 나를 그나마 자부롬에서 지켜줄 수 있는 구원투수는 ‘추자’뿐이다.
 내게는 여가수로는 고(故) 황금심 과 김추자가
 그토록 가슴 진하게 박혀 있다.
 
 내 친구 하나는 우리나라가 인구 5천만이나 되는데
 20년이 넘도록 ‘추자’를 이을 여가수가 나오지 않는다는 게
 정말 아쉽다고 말할 정도로 ‘추자’를 극찬한다.
 나 또한 최소한 우리
동년배(同年輩) 사이에서
 ‘김추자’ 라는 이름 석 자를 모르거나
‘ 김추자’의 진가(眞價)를 알지 못하는 이들과는 대화가 무뎌진다.
 아니 노래에 관한 한 함께 말을 섞고 싶지 않다.
 
 사실 노래 잘하는 가수, 음악성이 비범한 가수는 많다.
 특히 작금에 와서는 더욱...
 하지만 그 어느 가수도 각자 노래가 천편일률적(千篇一律的)이다.
 그리고 그 목소리도 거의 늘 비슷하다.
 하지만 추자의 목소리는 천변만화(千變萬化)요
 감정을 실어 내 뿜는 열정적인 모습은
 노래마다 명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쉬운 예로 자기 노래가 아닌 다른 가수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하거나 흉내 내어 다른 가수가 부를 때
 거의가 본래의 가수보다는 맛이 훨 떨어진다.
 그런데 김추자는 남의 노래를 불러도 원래의 가수보다
 더 맛깔나게 부르는 천(千)의 목소리와 풍부한 감성을
 담아 소화시키는 가수였다. 적어도 내게는......


 다음은
 심지어 김추자 이전에 여자가수 없었고 김추자 이후에 여자가수 없었다라고
 주장하던 전(全)방위 문화평론가 이성욱(1960-2002)씨의 유고(遺稿)집인 
 <쇼쇼쇼 김추자 선데이 서울 게다가 긴급조치>라는 책에서 옮긴 글 일부

 ‘김추자’ 노래하나.....  

 <님은 먼 곳에> <커피한잔>
 . .. ‘김추자’는 당시 대중가요 지형에서 돌출, 그 자체였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당시 인기 있던 여자 가수들 하면
  대개 ‘이미자,’ ‘하춘화’ ‘조미미’ ‘김상희’ ‘정훈희’ 등이었다.
  그런 평균율 속에 ‘김추자’는 단연 별경이었고
  한국 대중음악의 새로운 대륙을 열어가는 탐사대였다

  ... ‘김추자’의 퇴장은 한국 가요사의 절반이 과거완료형으로
  완성되어 문헌으로만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이후 ‘김추자’의 공백은 [바람]을 부른 ‘김정미’가 메우려 했지만
  단지 아류(亞流)일 뿐이었다.
 ‘김정미’ 그 자체로는 괜찮은 가수였고 그의 일렉트릭 보이스나
 춤동작 등은 분명히 매력의 요인이었지만 ‘김추자’의
 봉우리에 비하면 언덕배기 정도일 뿐이었다.

. . ‘김추자’의 존재의의는 평준화, 일반화, 관습화되어 있던,
  그래서 무척이나 지루하고 단순 편력했던 우리 대중가요사의
 무의식적 습관을 일거에 뒤흔들어 놓고 충격을 가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노래 문법은, 다소 비약해서 말하면
 이미 지배화 되어있던 무의식적 노래 문법에 파열의 지점을
 확실히 각인해 놓음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긴장의 틈새와
 이단(異端)점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수용자는 그 제공으로 인해 자신의 음악적 반향의
 스펙트럼을 넓게 그리고 다채롭게 조형할 수가 있었다.
 ‘ 김추자’는, 때문에 우리 대중가요사의 한 정점(頂點)이자
 선지식(善知識)이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요람이 되어버린 김추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