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Nipper>

부제(副題) : 노래의 날개위에 품바를 하게 된 배경

 

강원도 정동진 <참소리 박물관>에 가보면 ‘nipper’의

슬픈 얘기를 듣게 된다. ‘weber’의 <무도회의 권유>라는

음악이 흘러나오면 지금이라도 죽은 저의 주인이 오는 줄 알고

문 쪽을 향해 쫑긋 귀를 기울인다는 ‘nipper’ 라는 개,

아무리 극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서양인다운 멋있는 발상이다. victor 유성기의

상표인 개가 바로 그 ‘nipper’이다.
 

지금 볼일로 먼 지방에 가 있는 ‘만정’이 마침 그 개를

묘사하며 노래타령을 하는 글(‘황금심’에서 ‘심수봉’까지)을

보내왔고 자기 컴이 말썽중이라며 내게 대신 자네들에게도

전달해달라는 부탁이다. 나는 ‘만정’의 글을 받아보는 순간

내 지난 50여년을 노래라는 프리즘으로 한 번

반추(反芻)해보고 싶은 유혹을 느껴 그 즉시 3~4일 만에

바로 몇 편의 품바 타령을 엮어냈다. 이제 그 글 중 일부를

펼쳐 보이려네. 우선 내 미흡한 글에 앞서

‘만정’의 멋들어진 글을 먼저 전달한다. 
      

나는 ‘에디트 피아프’에 비해 ‘배호’가 더 진짜 슬픔을

노래했다는 ‘만정’의 견해에는 결코 동의하지 않지만

다음의 글 자체는 얼마나 멋들어진 글이냐!

자네들이 듣기 좋은 말로 항상 ‘만정’과 나를 우리 모임의

Two-Top이라 하지만 역시 등단작가인 ‘만정’이 그라운드를

누비는 스타플레이어라면 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후보 선수,

아니 볼 보이에 지나지 않으리라.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우리가

이 나이에 무슨 과거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고

글짓기 내기해서 제일 잘 쓴 넘에게 무남독녀 딸 주겠다는

엉뚱한 예비 장인 앞에서 있는 재주 없는 재주 다 쥐어 짜내느라고

마음 졸이며 둥둥대는 떠꺼머리총각도 아니잖은가?

그러니 자네들도 자주 자네들의 현재 일상(日常)이나

과거의 추억담을 올리게. 어차피 부질없는 짓거리이기는

피차 매 한가지 아닌가!  


뭐라고? 엉성한 글 보내면 마누하님에게 야단맞는다고?

아니 자네들은 마누하님을 존경하는 경처가(敬妻家)

수준을 떠나서 두려워하거나 외경(畏敬)의 차원인

경처가(驚妻家)란 말인가? 자, 자 그만 웃기고 내 얘기 들어보게.  


<1001 야화(夜話)>(=아라비안나이트)라는 소설집도 있지만

우리 나이 이제 60년×365=21900일인데 그 살아온 날의

1/20도 채 안 되는 1001 개 이야기를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뭔가? 글을 잘 써야겠다는 생각이 앞서

글에 너무 힘을 주려니까 힘들지, 그저 평소 술자리에서

부담 없이 재미있게 얘기 하는 식으로 풀어 쓰면 될 것을...

L !  자네는 평소 주석(酒席)에서 썰은 가장 많이

독점적으로 풀던데 그걸 그대로 글로 쓰면 되잖은가?

가끔은 글은 평소 말하듯이 쓰고 말은 글 쓰듯 하면

글은 참 쉽고 말은 격조가 따라붙게 되지...

오죽하면 자네들도 익히 잘 아는 음치(音癡)인 내가

노래라는 프리즘으로 비추어 본 내 인생을 얘기한다지 않는가?

어찌 보면 정말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그저 잠시 자네들도 마음의 허리띠 느슨하게 풀고

나와 함께 지금 품바여행을 떠나봄세......

우선 싱거운 여행 떠나기 전에 먼저 만정의 글을 보고....  

 

다음: (만정의 글)

<‘황금심’에서 ‘심수봉’까지... >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짓거리를 했다.

나이 오십이 넘은 터수에 무슨 팬클럽이냐고

마누라의 핀잔도 그리고 바이올린 전공인

막내딸의 눈 흘김도 각오하고

요절한 가수 배호 클럽에 줄을 선 것이다.  


어린 시절 아직도 전쟁의 포연이 채가시지 않은

회색의 거리에서 개 한마리가 우두커니 지켜 앉은

상표의 Victor 유성기를 통해 내가 보고 들은 것은

그 감각적인 기계를 만들어 어린아이에게 보내어 준

서양에의 막연한 그리움과 그리고 거기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애조 띤 ‘황금심’이나 ‘남인수’의 슬픈 정조였다.

어린 내게 최초의 슬픔의 실체를 가르쳐 영혼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건 이들 보이지 않는 ‘남인수’나 ‘황금심’

아니면 며칠이건 앉아 슬픔에 목 놓아 우두커니

기다리던 형상을 무언으로 내게 던지던 Victor 의

그 상표인 개였으리라.  


이 시절 웃겼던 이야기 하나가 있다. 전쟁이 끝나고

입학한 해 음악시간은 온통 나비야 ~~ 나비야~

학교종이 땡땡땡 정도의 미개발 전쟁하는 나라 정도의

수준(?) 이어서 선생님의 노래 지명에

과감히 오동추야 달이 밝아~~ 로 수준을 한 단계

높여 주려다 미개한 음악 선생에게 저지를 당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애석한 일이다.  


‘배호’를 만난 것은 충격이었고 지금도 충격이다.

온통 ‘브러더스 포’의 그린 필드나 ‘레이 촬스’,

‘클리프 리차드’ 아니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서양의 현란한 리듬에 빠져 있던 나에게 쓱하니

나타나서 아예 혼을 홀딱 빼앗은 그는 한마디로

영혼으로 노래한 천재였다. 그처럼 사랑의 아픔과

청춘의 비탄을 격조 있게

온몸으로 노래한 가수가 있었던가?  


샹송의 ‘줄리에트 그레코’나 ‘이베트 지로’

‘에디트 피아프’를 애기하지만 그들은 슬픔보다 기쁨을

‘배호’보다 더욱 많이 노래했다는 점에서 ‘배호’보다는

한 수 아래인 셈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본질이나 인생의 본질은 기쁨보다

슬픔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배호’만큼 모른 철부지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배호’의 <안녕> 을 불러 본 일이 있는가?

그대들은 인생의 비탄(悲嘆)스런 순간에 ‘배호’의

<마지막 잎새>를 불러 본 일이 있는가?

허허로운 인생은 가을밤 마지막 떨어지는 잎새 같다고

노래했던 그는 마치 “인생은 불가해” 라는 메모를 남긴 채

폭포에 몸을 날린 일본의 어느 천재시인처럼

짧게 그러나 휘황찬란한 꼬리 불길을 남긴 채

별똥별 유성으로 사라졌다.

‘김추자’는 도발이고 욕정이다.

그녀를 듣고 있노라면 내면의 온갖 은밀한 욕망들이

그녀의 리듬에 맞춰서 환각 파티를 벌린다.

귀밑에 대고 끊임없이 간지러움을 태우면서

유혹하는 그녀는 현대판 ‘살로메’인 것이다.

아니라고 한다면

“거짓말이야 ~~ 거짓말이야~~” 그녀는 외칠 것이다 .  


‘심수봉’은 또 어떤가.. 너무도 애잔하고 여려서

언제나 안아 주고 싶은 또 다른 함정이다.

그녀의 <백만 송이의 장미>를 듣고 있노라면

달래듯 어루만지듯 반복하는 리듬에는 온갖 남성적인 것을

순식간에 무장해제해 버리는, 엄청나게 애절해서

귀엽고 상냥스런 그래서 위험한 페미니즘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그녀의 또 다른 노래 <무궁화> 는 ‘찬하당’이 농담으로

독립군 출정의 노래라고 하였지만 그렇더라도 그건 벌써

백만의 왜병들이 무기를 팽개치고 그녀에게

조복(調伏)하게 만들 수 있는

페미니즘의 무기에 다름 아니다.

그녀의 노래는 이미 백만 정의 육혈포에 해당하리만큼

이 세상 온갖 남성을 무너지게 하는 천사의 노래인 것이다.

‘세월이 가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