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날개위에 품바 그 첫째마당>

{유년기(幼年期)}

1: <5살에 이미 나는 청춘이었다.>
우리 친구들끼리 영혼에 비슷한 사이클이 있다 보니
추억도 비슷한 데가 있다.
다만 그 영상(映像)이 꿩이냐 공작이냐 라는
빛의 산란(散亂)에서 좀 차이가 있을 뿐.

내게도 그 서양(西洋)개 Nipper는
엄청난 회오리바람이었다.
그것은 나를 20년은 앞당겨
늙어 버리게 한 ‘맆반윙클’ 의 술병이었다.
 
“헤어지면 그리웁고 만나보면 시들하고
몹쓸 건 이 내 심사”
곱지만 시원하게 터지는 ‘남인수’의 <청춘고백>
그것이 내가 처음 접한 트로트였고 첫 노래였다.
이상하게도 두세 번 듣고 흉내가 쉽게 되었다.
재미가 들린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
유성기 arm을 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번에 10장을 얹고 자동으로 돌아가는
신형축음기도 들여왔다.
아버지는 집안 어른이나 친구 분이 오시면
내게 노래를 시켰다.

“믿는 다 믿어라 변치 말자 누가 먼저 말했던 가 .......
죄 많은 내~ 청~춘” 이라는 노래 <청춘고백>을 부르면서
난 남녀가 헤어져 있으면 그립다가도 막상 만나면
시들해지나보다 라고 어렴풋이 눈치 챈 것이다.
그렇게 5 살배기 꼬마는 타임머신 타고 그때 벌써 청춘이었다.
그것도 罪가 아주~ 많~은... ...

또한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 저 하늘 저산아래,
아득한 천리...언제나 외로워라... ”라는 고복수의
<꿈에 본 내 고향>이란 노래와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10 여년에
청춘만 늙고...” 라는 <타향살이>를 부르고 또 부르면서
난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집에 살면서도 늘 고향은 아득한 천리
저 너머에 있었고 더군다나 10 여년씩이나 고향 떠나
타향에서 떠도는 이미 팍 늙어버린 5살짜리 청춘이었다..

그리고 , 저음에서는 무지 굵고 덮어 누르는 목소리에
고음에서는 엄청 맑고 시원하게 꾀꼬리처럼 올라가는
목소리의 황금심을,  지금보다 2~3 음은 더 높게
올라가던 어린 시절 나는 쉽게 따라 불렀다. 
그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 “울며 왔다가 울며 가는
서른(=슬픈)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그)누가 알아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 체 하시나요.”
이 노래를 수도 없이 듣고 부르고 하면서 난 알뜰하다는 말이
살림살이나 돈 씀씀이가 알뜰하다, 라는 뜻 이외에
사랑의 푼수가 넉넉하지 못 하다(=薄情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을
일찍이 알아버린 5살짜리 늙은 소년이었다. 


2: <첫 이별>
한량(閑良)이었던 지 아버지를 닮아
노래를 엄청 잘 부르는 사촌 녀석과 함께
나는 평소에도 늘 노래시합을 했다.
녀석의 애창곡은 ‘박재홍’의 <물방아 도는 내력>인데
녀석은 박자, 음정, 음색, 모두 ‘박재홍’ 그 자체였다.
다만 녀석은 겉멋이 들어 초가~집 짓고, 라는 가사를
초가라 집 짓고 로 바꿔 불러 버릇하다가
그게 그만 입에 붙어버리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에게
매번 꿀밤을 맞곤 했는데 그걸 결국 못 고친 채
초등학교 입학 후 바로 저 세상으로 갔다.
거의 매일을 함께 지냈던 녀석의 죽음이
내게는 서로 길들여진 사람과의 첫 이별이었다.


3: <예정된 부산행열차 탑승권>
‘남인수’의 음색(音色)과 고저장단에 맛을 들인
나의 또 다른 남인수 노래는 <이별의 부산정거장>이었다.
“서울 가는 십이 열차에 기대앉은 젊은 나그네......”
“사람은 평소 자주 하는 짓에 의해
운명이 그림 지어질 수 있다”는 ‘머피’의 법칙을
생각하게 만드는 노래다. 
그 얼마나 나는 서울 가는 열차에 혼자 기대앉아
차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았는가?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아버지 심부름 차 내려가던
부산행 열차에서 얼핏 내 눈동자에 박힌
이름도 성도 모르던 부산 아가씨를
내 어깨에 기대게 한 채
둘이 함께 서울행 열차에 탄 것은
나 홀로의 외로운 기차표를 최소한 50장은
허공에 뿌린 후였으니......

<오 솔레미오> 와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전문가 도움을 받아 피아노 반주와 함께
녹음해 들려준 노래보다도
生음악으로 즉석에서 불러 제친
<이별의 부산 정거장>에 더 감동 먹던
釜山아가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4: <슬로우 슬로 퀵퀵>
갑자기 레코드 판 한 장이 증발했다.
‘손인호’ 의 <하룻밤 풋사랑>이었다.
그리고 못 보던 젊은 아지매들이 복작댔다.
옆집 대청마루가 엄청 넓었다.
거기 아버지 그리고 아저씨들이
젊은 아지매들과 손을 잡고
슬로우 슬로 퀵퀵,  <하룻밤 풋사랑>노래에 맞춰
열심히 돌고 돌았다.
엄마는 그때도 그저 부엌때기로
창가 한 모퉁이에 숨죽이고 서서
내 손을 잡은 채 옷고름만 물고 있었다.

“아! 엄마... 사랑보다는 恨이,
고운 情보다는,  미운 情이 훨 많겠건만
당신은 아버지 옆에서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는군요...!"


5: <짝사랑>
“아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
이지러진 조각달 강물도 ......맴을 돕니다.”
5살 때부터 ‘고복수’의 <짝사랑>을 입에 달고 살았던
어린 ‘키르케골’(=어렸을 때 내 별명이 개똥 철학자였다)은
그때부터 약관(弱冠)이 될 무렵까지
제대로 연애 한 번,  사랑 한 번 해보지 못하고
기껏 짝사랑만 전공(專攻)하는 환생한 콰지모도로 살았으니...
이것도 아마 ‘머피’의 법칙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여겨지며
배운 것을 바로 실행에 옮기는 훌륭한 학생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구나 생각된다.!


6: <바이브레이션과 꺾음 목 애국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배운 노래는 애국가였다.
노래 부른 후면 의례히 동네 아저씨들에게
늘 칭찬과 박수 받던 내가 
“이 자식 떨긴 왜 그렇게 떨어
애국가를 무슨 3류 유랑극단 노래로 만들어버리네” 라고
무지하게 야단맞고 그때 이후 나는 음악시간만 되면
구박덩어리 1호가 된다.

0O1-Bohemian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