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날개위에 품바 그 둘째 마당>

{청소년 전기(前期)} 상(上)

1: <마리오 용=란자 탄생>

中2 때,
우리 집 뒤편 공작 창(廠) 앞 너른 길에는
저녁 무렵이면 어떤 젊은 아저씨가
잘 생긴 검은 복서 종(種) 개를 데리고 와서 훈련을 시켰다.
공을 멀리 던지면 물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그 공을 한 번 냄새 맡게 하고
100m 범위에서 아무리 교묘하게 숨겨놓아도
곧바로 찾아오는 아주 영특한 개였다.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2~30명의 구경꾼이 모이는데
그 개가 공을 찾아 늠름하게 물고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 아낌없이 박수를 치곤했다.
그렇게 30 여분 그 쇼가 끝나면 어김없이
수문통 저 건너에서 또 다른 아저씨의
목청 좋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해는 저어서 어두운 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
‘현제명’의 <고향생각>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BLANDO의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등 인데
아주 잘 불러서인지 아니면 그때만 해도
동네 人心이 좋아서인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

아무튼 매일 저녁 1시간쯤 불렀다.
나는 어느 날 그이가 잠깐 쉬는 인터벌에
‘남인수’의 <청춘고백>으로 보이지 않는 도전을 했다.
그런데 그이가 내 노래 끝날 때까지 참고 있었다.
더군다나 끝나고 박수까지...


물론 서로 얼굴은 한참 멀리 떨어져서 못 본채로...


다음날부터 우리의 거리는 차츰 차츰 좁혀졌고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상견례를 했다.
그이는 서울 영락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피아노 등 악기도 잘 다루는 프로였다.
그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는 조금씩
음악의 세계에 더 깊고 넓게 들어간다.
뽕짝 말고도
다른 음악이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이는 내게 쉬운 음계와 박자를 가르쳐 주었다.
자기는 베이스인데 나는 테너라며
외국의 유명한 성악가들을 소개해주며
<춘희> 에 나오는 <프로렌자 나의 고향으로>가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베이스 노래로서
자기에게는 테너 레코드판은 별로 없어서
빌려주지 못한다 했다.  마침 그때 나는
동아일보의 크로스워드 퀴즈에 응모,
전국에서 3명중에 뽑히는 행운을 얻는다.
그 얘기를 들은 그이는 그 상금으로
성악곡 레코드판을 사라고 한다.


지금 가치로는 50만원은 족히 될
그때 상금 5만원으로 몽땅 성악곡 레코드를 샀다.
인천에서도 변방(邊方) 시골인 솔고개에
풋내기 ‘마리오 란자’ 아니 마리오 용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원래 트럭운전사출신이고 정통 오페라보다는
영화 쪽에 많이 참여했다 해서 
‘란자’를 흔히 정통음악인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38살에 아깝게 세상 버린
‘란자’는 잘 생긴 외모에
그 타고난 성량과 시원한 음색은 정말 참 대단하다.
특히 그가 부르는 <Drink, Drink>나
오페라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칼로 찔러 죽이고 부르는 아리아는
귀를 마비시킬 정도로
고음이면서도 힘차고 맑게 쭉 뻗어간다.
그리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다른 어느 가수와도 달리
자유분방하게 부르는데 참 멋지다. 

마찬가지로 여러 노래를 듣다보니
어느 가수가 특출 나다 하여 모든 노래를
다 맛깔나게 부르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엘레지>(=비가(悲歌))는 ‘베냐미노 질리’가
<진주 조개잡이 중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은
‘니콜라이 게타’가
<별은 빛나건만>은 ‘스테파노’와 ‘도밍고’가
<무정한 마음>은 ‘스테파노’와 ‘콜레리’가
<여자의 마음>과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파바로티’가 
<오 솔 레 미오>는 ‘스테파노’가 리드미컬하지만
‘파바로티’와 ‘콜레리’가 부르는 것이
가장 우렁차면서도 박력 있고 남성적 매력이 넘친다.
그중에서도, 나는 ‘란자’ 의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프랑코 콜레리’가 젊은 날의 미성만이 아닌 중년이후에
더 풍부해진, 약간은 코 먹은 소리처럼 들리는 음색과
힘차고도 드라마틱한 성량(聲量)으로 부르는
<불 꺼진 창>을 즐겨 흉내 내서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악보를 보며 악기반주와 더불어 배우는 것이 아닌
레코드만 들으며 생 다짐으로 익히려하니
참 힘도 들고 따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무렵 피아노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엄마를 졸라 나는 마침 女동생을 가르쳤던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지금의 내 안목으로 보아도 엄청 예쁜,
길고 숱 많은 새카만 속눈썹과 시원한 큰 눈,
상큼하게 도드라진 이마, 쪽 뻗은 콧날線,
사랑스러운 턱, 뚜렷하고 도톰한 입술, 하얀 피부,
키는 제법 크고, 탱탱하면서도 날씬한 그녀!
그것이 문제였다.


이틀 간 나 혼자서 연습할 때는 완전히 손에 익혀
눈 감고도 유려(流麗)하게 잘 치는 내가
그녀가  내 옆에 앉기만 하면
전혀 건반 따로 손 따로 이니......
무엇보다도 콩닥콩닥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정말 대책이 없었다.
결국 2 개월 만에 포기...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오늘도 半음치 半박치 어설픈 품바~타령을 하며
그녀는 왜 그리 예뻤던가?
아니면 내가 문제가 있었나? 헷갈린다.


아니 난 당시
지극히 신체 건강한 소년이었을 뿐이리라....
 

2: <명곡아, 명곡아, 너 어디 있니?>

중 3 때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었다. 
분명히 누구나 노래 한 曲 정도는 해야 될 텐데
뭐 색다른 짓거리가 없을까?
前날 저녁 짱구를 굴리던
이 ‘돈키호테’ version ‘키르케골’
다음날 노래 지명을 받자 늠름히 나가서
“저는 노래는 못하고 명곡은
부를 줄 아니 노래대신 명곡을 부를 게요”  
여기저기서 “건방 떠네” 하는
비아냥거리는 웅성거림이 소용돌이친다.
자못 야유의 휘파람도 나올 기세다.....
바로 내가 노린 바다.
나는 잔뜩 아랫배에다 힘을 주었다가
갑자기 천둥 같은 웃음소리만으로써
적장(敵將)을 말에서 떨어뜨려 죽게 한
장판교의 ‘장비(張飛)’같은 목청 돋우어 
“명곡아 ... 명곡아...너 어디 있니?...” 

한 10초 쯤 지나 비로소 상황파악이 끝난
남녀동창들은 박수 또 박수...

3: <독창>
高 1 당시, 교장인 ‘길영희’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매월 첫 월요일에 한 반(班)씩 돌아가며
전교생 모인 강당에서 학예발표회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메뉴로는 독창이나 중창 하나, 그리고
과학관찰보고서 발표 등으로 꾸며지곤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허구한 날 복도에서
노래를 달고 살던 나를 반 친구들은
독창담당으로 내 몰았고 이 ‘돈키호테’는
“한 번 해보지 뭐” 하는 뱃장으로 OK했다.
음악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지도편달을 청했다.
선생님 왈 : “악보로 공부했지?  악기는 뭐 다루냐?”
“저 그냥 레코드판 틀어놓고 혼자 배웠는데요.”
“뭐라고? 아이고 두(頭)야”
그래서 언제나 음악 선생님 등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르던 독창은
내가 처음으로 관행을 깨고 무반주로 부르게 된다.
음정은 대충 맞추는데 박자는 흥이 나거나
내 호흡을 자랑하고 싶어지면
(세계 3대 테너들이 <오 솔 레 미오>를 부를 때
고음파트 한 소절을 그리 했던 것을 기억하면 된다)
장음(長音) 표시가 있든 없든 아무 소절에서나
내 멋대로 2박자 끌 걸
4박자 5박자 식으로 끄는 버릇이 있는 나를
선생님은
“아예 네 멋대로 불러라”고 포기하신 탓이었다.
아무튼 <오 솔 레 미오>와 <돌아오라 소렌토로> 두 곡을 뽑아댔다.
 
결과는...?
공전(空前)의 대 히트였다.
과거 그 어느 정통파 독창자들보다도
더 우레와 같은 박수세례를 받았으니...
더군다나 당시
미술선생님인 한뫼 ‘장선백’ 선생님이 바로 그날
이 반(班) 저 반 반마다 돌아가며
미술시간에 미술 수업은 걷어치우고
“오늘 그 놈처럼 시원하게 노래 부른 넘은
몇 년 만에 처음 보았다.” 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난 뜬 것이다.
얼마나 웃기지도 않는 얘기냐 말이다.
정작 음악선생님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음악에는 전혀 문외한인 미술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뜨다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린 학생시절에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그 ‘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분이었다는
웃지 못 할 일화(逸話)이다.
아무튼 그 후 나는 선배들의 혼인식
뒤풀이에는 의례 앙코르 곡까지 담당해야했고
이런 일은 세월이 좀 지나 <KBS 의 열린 음악회>와
노래방이 생겨 세상이 내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는 계속되었다.
그때까지는
무반주에 마이크 없는 생음악 시대였었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