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노래의 날개위에 품바 그 둘째 마당>
{청소년 전기(前期)} 상(上)1: <마리오 용=란자 탄생>
中2 때,
우리 집 뒤편 공작 창(廠) 앞 너른 길에는
저녁 무렵이면 어떤 젊은 아저씨가
잘 생긴 검은 복서 종(種) 개를 데리고 와서 훈련을 시켰다.
공을 멀리 던지면 물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그 공을 한 번 냄새 맡게 하고
100m 범위에서 아무리 교묘하게 숨겨놓아도
곧바로 찾아오는 아주 영특한 개였다.
그때가 되면 어김없이 2~30명의 구경꾼이 모이는데
그 개가 공을 찾아 늠름하게 물고 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모두 아낌없이 박수를 치곤했다.
그렇게 30 여분 그 쇼가 끝나면 어김없이
수문통 저 건너에서 또 다른 아저씨의
목청 좋은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해는 저어서 어두운 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
‘현제명’의 <고향생각>과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오곡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BLANDO의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등 인데
아주 잘 불러서인지 아니면 그때만 해도
동네 人心이 좋아서인지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무튼 매일 저녁 1시간쯤 불렀다.
나는 어느 날 그이가 잠깐 쉬는 인터벌에
‘남인수’의 <청춘고백>으로 보이지 않는 도전을 했다.
그런데 그이가 내 노래 끝날 때까지 참고 있었다.
더군다나 끝나고 박수까지...
물론 서로 얼굴은 한참 멀리 떨어져서 못 본채로...
다음날부터 우리의 거리는 차츰 차츰 좁혀졌고
3일째 되는 날 우리는 비로소 상견례를 했다.
그이는 서울 영락교회의 성가대원으로
피아노 등 악기도 잘 다루는 프로였다.
그이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나는 조금씩
음악의 세계에 더 깊고 넓게 들어간다.
뽕짝 말고도
다른 음악이 있다는 것에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이는 내게 쉬운 음계와 박자를 가르쳐 주었다.
자기는 베이스인데 나는 테너라며
외국의 유명한 성악가들을 소개해주며
<춘희> 에 나오는 <프로렌자 나의 고향으로>가
자기가 특히 좋아하는 베이스 노래로서
자기에게는 테너 레코드판은 별로 없어서
빌려주지 못한다 했다. 마침 그때 나는
동아일보의 크로스워드 퀴즈에 응모,
전국에서 3명중에 뽑히는 행운을 얻는다.
그 얘기를 들은 그이는 그 상금으로
성악곡 레코드판을 사라고 한다.
지금 가치로는 50만원은 족히 될
그때 상금 5만원으로 몽땅 성악곡 레코드를 샀다.
인천에서도 변방(邊方) 시골인 솔고개에
풋내기 ‘마리오 란자’ 아니 마리오 용이 태동하는 순간이다.
원래 트럭운전사출신이고 정통 오페라보다는
영화 쪽에 많이 참여했다 해서
‘란자’를 흔히 정통음악인이 아니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38살에 아깝게 세상 버린
‘란자’는 잘 생긴 외모에
그 타고난 성량과 시원한 음색은 정말 참 대단하다.
특히 그가 부르는 <Drink, Drink>나
오페라 <오텔로>에서 ‘데스데모나’를
칼로 찔러 죽이고 부르는 아리아는
귀를 마비시킬 정도로
고음이면서도 힘차고 맑게 쭉 뻗어간다.
그리고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다른 어느 가수와도 달리
자유분방하게 부르는데 참 멋지다.
마찬가지로 여러 노래를 듣다보니
어느 가수가 특출 나다 하여 모든 노래를
다 맛깔나게 부르는 것이 아님을 알겠다.
<엘레지>(=비가(悲歌))는 ‘베냐미노 질리’가
<진주 조개잡이 중 귀에 남은 그대 음성>은
‘니콜라이 게타’가
<별은 빛나건만>은 ‘스테파노’와 ‘도밍고’가
<무정한 마음>은 ‘스테파노’와 ‘콜레리’가
<여자의 마음>과 <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파바로티’가
<오 솔 레 미오>는 ‘스테파노’가 리드미컬하지만
‘파바로티’와 ‘콜레리’가 부르는 것이
가장 우렁차면서도 박력 있고 남성적 매력이 넘친다.
그중에서도, 나는 ‘란자’ 의 <돌아오라 소렌토로>와
‘프랑코 콜레리’가 젊은 날의 미성만이 아닌 중년이후에
더 풍부해진, 약간은 코 먹은 소리처럼 들리는 음색과
힘차고도 드라마틱한 성량(聲量)으로 부르는
<불 꺼진 창>을 즐겨 흉내 내서 불렀다.
그런데 노래를 악보를 보며 악기반주와 더불어 배우는 것이 아닌
레코드만 들으며 생 다짐으로 익히려하니
참 힘도 들고 따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무렵 피아노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엄마를 졸라 나는 마침 女동생을 가르쳤던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였다.
지금의 내 안목으로 보아도 엄청 예쁜,
길고 숱 많은 새카만 속눈썹과 시원한 큰 눈,
상큼하게 도드라진 이마, 쪽 뻗은 콧날線,
사랑스러운 턱, 뚜렷하고 도톰한 입술, 하얀 피부,
키는 제법 크고, 탱탱하면서도 날씬한 그녀!
그것이 문제였다.
이틀 간 나 혼자서 연습할 때는 완전히 손에 익혀
눈 감고도 유려(流麗)하게 잘 치는 내가
그녀가 내 옆에 앉기만 하면
전혀 건반 따로 손 따로 이니......
무엇보다도 콩닥콩닥 내 심장 뛰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정말 대책이 없었다.
결국 2 개월 만에 포기...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오늘도 半음치 半박치 어설픈 품바~타령을 하며
그녀는 왜 그리 예뻤던가?
아니면 내가 문제가 있었나? 헷갈린다.
아니 난 당시
지극히 신체 건강한 소년이었을 뿐이리라....
2: <명곡아, 명곡아, 너 어디 있니?>
중 3 때 초등학교 동창회가 있었다.
분명히 누구나 노래 한 曲 정도는 해야 될 텐데
뭐 색다른 짓거리가 없을까?
前날 저녁 짱구를 굴리던
이 ‘돈키호테’ version ‘키르케골’
다음날 노래 지명을 받자 늠름히 나가서
“저는 노래는 못하고 명곡은
부를 줄 아니 노래대신 명곡을 부를 게요”
여기저기서 “건방 떠네” 하는
비아냥거리는 웅성거림이 소용돌이친다.
자못 야유의 휘파람도 나올 기세다.....
바로 내가 노린 바다.
나는 잔뜩 아랫배에다 힘을 주었다가
갑자기 천둥 같은 웃음소리만으로써
적장(敵將)을 말에서 떨어뜨려 죽게 한
장판교의 ‘장비(張飛)’같은 목청 돋우어
“명곡아 ... 명곡아...너 어디 있니?...”한 10초 쯤 지나 비로소 상황파악이 끝난
남녀동창들은 박수 또 박수...
3: <독창>
高 1 당시, 교장인 ‘길영희’ 선생님의 아이디어로
매월 첫 월요일에 한 반(班)씩 돌아가며
전교생 모인 강당에서 학예발표회를 하는 전통이 있었다.
메뉴로는 독창이나 중창 하나, 그리고
과학관찰보고서 발표 등으로 꾸며지곤 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허구한 날 복도에서
노래를 달고 살던 나를 반 친구들은
독창담당으로 내 몰았고 이 ‘돈키호테’는
“한 번 해보지 뭐” 하는 뱃장으로 OK했다.
음악선생님에게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리고
지도편달을 청했다.
선생님 왈 : “악보로 공부했지? 악기는 뭐 다루냐?”
“저 그냥 레코드판 틀어놓고 혼자 배웠는데요.”
“뭐라고? 아이고 두(頭)야”
그래서 언제나 음악 선생님 등의
피아노 반주와 함께 부르던 독창은
내가 처음으로 관행을 깨고 무반주로 부르게 된다.
음정은 대충 맞추는데 박자는 흥이 나거나
내 호흡을 자랑하고 싶어지면
(세계 3대 테너들이 <오 솔 레 미오>를 부를 때
고음파트 한 소절을 그리 했던 것을 기억하면 된다)
장음(長音) 표시가 있든 없든 아무 소절에서나
내 멋대로 2박자 끌 걸
4박자 5박자 식으로 끄는 버릇이 있는 나를
선생님은
“아예 네 멋대로 불러라”고 포기하신 탓이었다.
아무튼 <오 솔 레 미오>와 <돌아오라 소렌토로> 두 곡을 뽑아댔다.
결과는...?
공전(空前)의 대 히트였다.
과거 그 어느 정통파 독창자들보다도
더 우레와 같은 박수세례를 받았으니...
더군다나 당시
미술선생님인 한뫼 ‘장선백’ 선생님이 바로 그날
이 반(班) 저 반 반마다 돌아가며
미술시간에 미술 수업은 걷어치우고
“오늘 그 놈처럼 시원하게 노래 부른 넘은
몇 년 만에 처음 보았다.” 라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난 뜬 것이다.
얼마나 웃기지도 않는 얘기냐 말이다.
정작 음악선생님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데
음악에는 전혀 문외한인 미술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뜨다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린 학생시절에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 경향이 있는데
바로 그 ‘장’선생님이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카리스마를 휘두르는 분이었다는
웃지 못 할 일화(逸話)이다.
아무튼 그 후 나는 선배들의 혼인식
뒤풀이에는 의례 앙코르 곡까지 담당해야했고
이런 일은 세월이 좀 지나 <KBS 의 열린 음악회>와
노래방이 생겨 세상이 내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때까지는 계속되었다.
그때까지는
무반주에 마이크 없는 생음악 시대였었으니까...
끝까지 다~ 읽었습니다.
호문언니가 읽어보라고 강요(?)하셔서 읽기 시작했는데
넘나 자미롭고 흥미가 있어서 다 읽었씀다.(말로 하라면 연변 사투리로 잘 할 수 있는데...)
마리오란자의 노래가 판이 좀 오래된것같네요, 그렇죠??
그러나 저나 용오라번니의 무정한 마음(카타리이죠?)을 한번 듣고싶은데
어떻게 좀 녹음해서 여기다 좀 올릴 수 없나요???
호문언니가 올리는 방법은 가르쳐 드리겠다시는데요?
마리오란자는 트럭밑에 들어가 트럭 고치면서 흥얼거리며 노래 부르다 누군가에게 잡혀서
그렇게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었다지요?
제고인 10회오라버니 last name이 " 주"인 선배님은 호문언니에게 들으라고 노래를 올려주셨다는데
이모님이 그렇게 원하시는데 한번 이 방에 오라버니의 노래 한곡 올려주시면 어떠하실러는지요~~~
음악, 미술, 문학, 모든면에 뛰어나신 참 천재어르신네올씁니다.
정날 내가 살아생전에 꼭 한번 만나보고 죽었으,면 좋겠슴다.

누구가 정확히 콕 집어낸대로 실제 속은 빈 강정이고
요즘 마지막으로 입만 살아서 썰을 푸는 이 사람을....
드디어 신화의 주인공으로 올리시는구려.!!!
난, 음악, 미술, 문학, 그 어느 것에도 정통하지 못하고
아니 그 시늉도 내지 못하는 정도이고
단지 그 방면에 실력이 있는 분들이 여자이든 남자이든
내 마음을 열고 기꺼이 고개 숙이고,
감동하며 찾고 흡수하는 마음을 갖고 있을 뿐이에요.
에스더누이! 나야말로 일각이 여삼추로
누이의 제대로 닦은 정통파 노래와 현미의 <떠날 때는 말 없이>를
듣게 될 날만 학수고대하고 있는데....
그리고 나는 노래보다도 노래 부를 때 내 그 엄청 쓰는 인상이 한 몫 해요.
바로 이 밑에 광야 언니가 올린 홀란드 사진전에 나오는
하늘을 향해 잔뜩 목을 치켜들고 슬프게 울어대는 Lonely Wolf 와 같은 폼!
그래서 내 그런 모습 마주 보며 노래 듣기가 좀 무안해지는 폼!
우선 진짜 프로중의 프로들 노래나 아래 올리니 들어봅시다.
마지막 피아노 곡은 안들려요.
언제 우리끼리는 생방송으로 합시다.
단 누이는 프로니까 먼저 누이가 부르는 것 하나 올려요.
어쩜 그리도 재미나게 쓰시는지 ㅎㅎㅎ
정말 꼭 한번 녹음해서 올려주세요! 듣고 싶어요!
춘자 후배 우리 열심히 졸라 봅시다!
사실을 사실대로 쓰면 재미도 없거니와 그건 그냥 르포가 될 테니
이런 저런 치장과 양념을 섞어 얘기를 조금이라도 흥미롭게 하려고
좀 과장법을 동원했는데 이러시면 저 숨어야 돼요.
하지만 언제고 기회가 되면 실망을 냉장고에 맡겨논다는 전제하에서
그저 가볍게 즐기는 차원에서 생방송으로 유쾌한 시간 가질 날이
살아 생전에 있겠지요.
휴~우 땀난다.!!! 어디 쥐구멍 없나???
[ 에이구 이 내가 지금 한 20분 두두린것 크릭 하는데 누구와 땃통! 하는 소리가 크게 따당! 해서
무험하게 그 어느 Nom 인가 했더니 우하하하 도망가자 !! 바로 조카! 글이 올라가 부렸네 이내 보다 쎄군유 ~]
용선배님 !!위에선배님글에서 나야말로 대책없이 엔돌핀 팍!! 팍!!! 쏟아내고 감니다
[그녀가 내 옆에 앉기만 하면
전혀 건반 따로 손 따로 이니......
정말 대책이 없었다.
노래는 못하고 명곡을 부를 게요”
“명곡아 ... 명곡아...너 어디 있니?...”
한 10초 쯤 지나 상황파악이
아무 소절에서나
4박자 5박자 식으로 끄는 버릇이 있는 나를
“아예 네 멋대로 불러라”
결과는...?
“오늘 그 놈처럼 시원하게 노래 부른 넘은
몇 년 만에 처음 보았다.” ]
ㅋ ㅋ ㅋ ㅋ ㅋ ㅋ 너무재미있어요!!!
정말 오랜만이네요.
나 참 주책이죠?
좀 웃기는 희한한 넘이죠?
그래도 양주동 박사처럼 자칭 국보 1호나
천연기념물은 아직 못 되는 얌전한 젊은 늙은이예요. ㅎㅎㅎ.
젊은 늙은이가 맞는 거야요?
늙은 젊은이가 맞는 거야요?
마음은 젊고 몸만 늙은 이라 할 때면 위가 맞고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젊은 사람이라 할 때는 아래가 맞네.
또 젊은 사람이 마음은 늙었을 때도 아래가 맞고...
도대체 어느 게 맞는 거야요?
둘 다 틀리나?
아님 둘 다 맞나?
하늘에 때린 번개전보의 회신은 아직 없어요?
아무리 천하의 양주동 박사라 해도 좀 어려운가?
나 과거에
때로는 용주동으로
때로는 양상욱으로 불리울 때도
어느 게 맞는지 모르겠더먼서도....
자미 후배가 결론 내리시압!!!
자! 이제 우리 4기 오인숙 시인이 우리의 언니, 누나, 이모인
일본군위안부 여인들의 한 맺힌 삶을 월간 창조문예에 12개월 동안
한 달에 5편씩 총 60 편의 시 (즉 12부 각 부는 5편의 시를 포함한다)로
재구성하여 바친 헌시를 감상해보자.
그는 위안부여인들의 참혹한 삶을 낙엽처럼 쌓여진 변화의 색깔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 (=황금찬 시인의 서문에서)
"내가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지 않으면 그들이 더 슬퍼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손수건으로 숱한 눈물을 닦아줄 사람이 저입니다.”
(= 시를 쓰기에 앞서 다지던 오인숙 시인의 비장한 결의)
나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시를 공부한 사람도 아니다. 따라서 시의 상징성이
어떻다느니, 형상화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라느니, 구성이 긴박감이 있다느니,
향토색 짙은 표현을 썼다느니 등 전문적인 평은 하지도 않겠거니와 할 실력도 없다.
다만 그저 여러분의 선배이고 또는 후배인 오인숙 시인의 노고를 함께 치하하며
그저 눈물이 솟구쳐 오르면 오르는대로 놓아두고 감탄으로 무릎을 칠 때면
주저없이 그리 하자는 것뿐이다.
예수님도 고향 나사렛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 인일인의
활짝 열린 가슴으로 인일이 낳은 뛰어난 감성의 시인인 오 시인과 함께
고향 가는 길을 이제부터 동반해 보자.
1부 끌려갈 당시
빼앗긴 것이 땅 뿐이랴 (1)
빼앗긴 땅에 지은 농사는
또다시 빼앗기고
쌀독은 언제나 비어 있었지
배고픔을 채우러 간 산
쑥과 냉이 지천이어도
뱃구레는 벼랑만큼 아득하고
골짜기보다 깊어
조팝꽃 이파리
흰 쌀밥에 고기반찬
원 없이 준다기에
따라나선 길
순결이 목숨 같음도
전쟁이 원수 같음도
열세 살 철없는 나이에
무엇을 알았으랴
트럭 흙
먼지 뒤로 사라진
고향 오솔길과 싸리 대문
채송화 꽃 피기도 전에
짓밟힌 새순이여
채송화 꽃 피기도 전에 짓밟힌 새순, 그들은 순결이 목숨 같음도
전쟁이 원수 같음도 모르던 이 땅의 철없는 소녀였을 뿐...
그 집 앞을 지나며 (2)
도살장으로 가는 소처럼
머리 한 번 못 흔들고
끌려가던 날
그 집 앞을 지나며
젖은 그림자로 마당을 쓸었네.
두서너 달 있으면
신랑 각시 되어 살았을
지게 위에 들꽃 가득 싣고
들찔레 향기 날리며 오던 사람
이름도 얼굴도 기억할 수 없네.
등 떠밀려 담 모퉁이 돌 때
황소울음 울던 아버지
썩은 빗자루 쓰러지는 듯한 어머니
사진 몇 장 가슴에 품었지만
그 사람 향기는 품을 수 없었네.
마지막 그 집 앞을 지날 때
다시는 볼 수 없고
한 이부자리 쓸 수 없는
애달픈 인연으로
남을 사람 찾으며
아린 가슴 쑥물 들었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울며불며 마당을 온통 눈물로 적시고,
아버지는 꺼이꺼이 황소울음 울고 어머니는 썩은 빗자루처럼 쓰러진다...
두서너 달 후면 신랑 각시로 살았을 그 사람 사진 몇 장 품에 안고 가지만
그이는 영원히 잊어야 할, 향기조차 품을 수 없는 머~언 사람!!!
가슴은 아리다 못해 쑥물처럼 시커멓게 썩어 들어간다...
이 시를 보며 어찌 한달음에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나는 고향 가는 길 어귀에서 벌써 발이 풀려 주저앉아
가슴 젖는, 소리 없는 통곡을 해야 했다.
작금(昨今)에 용 아무개가 요설과 허무맹랑한 구라로
세인의 눈과 귀를 속이며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고 있습니다.
더구나 자기가 무슨 외국 성악곡을 깨나 부르는 척 과도한 장광설을
떠벌리고 다니는바 마침 그 용아무개와 함께 노래방 등에서 노래를
주고받을 기회를 가지신 몇 분들이 그 친구의 실체를 알고나서
뒤 늦은 감은 있지만 더 이상 세인의 혼동과 안타까운 실망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발통문을 돌리고 있는 중이니
아직 그 사기에 넘어가지 않으신 분들은
각별히 주의하시기를 널리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인일 동문광장 자게판 관리자 백(白)
저, 아침부터 너무나 웃어서 죽습니다!
좋은 음악도 듣고 재미진 글도 읽고 살맛 나네요!
오시인의 글도 읽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너무나 귀한 시입니다.
drink! drink! 오랫만에 들으니 너무나 좋아요!
너무 반가워요.
아리죠나의 선인장꽃 향기가 어디서 나는가 했더니.......
오인숙선배님의 시 "그 집을 지나며(@)"를 읽으며 눈물이 눈약을 넣은것 처럼 주루룩 떠어졌어요.
너무 감동적인 그리고 가슴아파 저린 시이군요.
몇년전 이곳 LA Little Tokyo에 조그마한 극장에서 일본 정신대에 끌려가 참혹한 일들을 당했던
할머니들과 인터뷰하는 장면들과 그것을 영화로 만든것을 본 적이 있었어요.
너무 분하고 마음 아프고 불쌍해서 몇일밤을 잠을 잘 못 잔적이 있답니다.
그 영화를 우리 아버지의 사촌 여동생(김 대실감독)이 만들어 우리 온 가족들이 가서 관람했었지요.
일본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일본차 절대로 타면 안되는데, 나도 일본차를 타고 있으니
우리 할아버지가 무덤속에서도 화 내실거예요.
용상오라버니!
사실 노래를 녹음해서 여기에 올린다는 거 쉬운일 아니지요.
반주자를 찾아서 연습해야하고 녹움시설이 잘 되어있는 곳에서 잘 녹음해서 그것을 여기에 올리기란
말처럼 쉬운것은 아니지요.
제가 죽기전에 꼭 한국에 한번 갈 것입니다.
그것이 금년이 될런지 10년 후가 될런지 알 수 없지만 꼬 갑니다.
그 때 우리 노래방이 아니라 음악당을 빌려서 스테파노와 마리아 칼라스가 공연했듯이.............

용상오라버니가 막 구라를 치길래 나도 한번 구라 쳐 봤습니다.
희망사항이기도하고..........
좋은 음악 잘 듣고 나갑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게 만수무강하세요!!!!
참 담백한 성격이 느껴지네요.! 일본차 운운 하는 말이...
그래요. 지금 세상에 그런 거에 제약받을 필요는 없고
본 바탕만 잃지 않고 살면 되지요.
나 이 아침에 참 신나게 웃었어요.
그래요. 구라로는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나중 스테파노와 칼라스처럼
축배의 노래 듀엣을 저질르든지 (=이모버전)
주현미와 저 박완 처럼 타령을 부르든지 해봅시다.
노래 정말 좋아요.
오늘 김철웅 장로님과 어우동 아우 듀엣 저질르시겠다(?)
늘 건강하고 장사 열심히 하세요.
오라버니!
벌써 일어나셨어요?
우리 남편이 김철웅장로인것은 또 어떻게 아시나요????(징말 못 말리시는 분이셔)
듀엣소리가 나왔으니, 또 수다 좀 떨지요.
언젠가 우리 부부가 콜로라도까지 차를 렌트해 가지고 드라이브해서 갔다가
올때는 비행기를 타고 온 적이 있었어요.
Californua, Nevada, Arizona, Utah, Clorado 이렇게 5주를 지나서 가는 동안
동요도 교회에서 유년주일학교에서 배운것과 학교에서 배운것 중고등학교 음악책에서 배운 것
교회 성가곡 찬송가등을 내가 멜로디로 시작하면 우리 남편이 테너로 우리 남편이 멜로디로 시작하면
내가 앨토로 화음을 넣어서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며 여행을 했지요.
참으로 신기한 것은 내가 아는 노래를 우리 남편이 다 안다는것이 참 신기했어요.
내 나이 26살에 만나서 만난지 정확하게 76일만에 결혼한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렇게 내가 아는 노래들을 그렇게 다 아는지 그것도 나이차가 8살이나 되는데.......
내가 주일학교 성가대를 할 때 우리 남편은 어린이 성가대 지휘를 했으니
내가 아는 노래들을 다 알더라구요~~~
미국에 31년전에 와서 성가대 지휘자로 나는 성가대원으로 봉사를 했으니
레파토리가 같을 수 밖에요.
정말 노래 많이 부르면서 여행했어요.
이젠 우리 남편도 늙고 나도 늙어서 둘이 듀엣을 무대에서 하는 적은 별로 없지요.
아~~
오늘 에스더가 말이 좀 많다.
미워하는 동문들 있겠다. 이만 총총..
아니다, 내가 이 방에 들어 온 이유는
내가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가진 "신영옥과 김선욱의 연주회"를 다운로드 받아서 보고
너무 좋아서 들어와서 자랑하려고 했는데........
김선욱이 정말 피아노 잘 치네요.
라프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1악장부터 2악장을 마칠때 땀이 눈물이 되어 온 얼굴이 젖어가지고
치더니 3악장의 그 빠른 템포를 얼마나 열정적으로 신 들린 사람처럼 치던지, 나도 정신을 아니 넋을 잃고 봤답니다.
몇해전에 헐리우드볼에서 반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시키 협주곡(피아노)1번과 라프마니노프 협주곡 3번을 치기로 했다가
차이코프시키1번은 쳤는데 콘디션이 안 좋다고 라프마니노프는 몇번씩 무대에 나왔다는 나가고 하더니
결국은 못 치고 간단한 쏘나타 몇곡으로 대신 했던 적이 있었어요.
김선욱이 번 클라이번보다 더 힘있고(물론 젊었으니까) 정말 정말 잘 치네요.
오늘 마침 손님도 별로 없고 덕분에 음악회 로얄석에서 잘 보았답니다.
정말로 이만 총총.(호문언니 버젼)
하루꼬야 비데오 보는것 같다
실제 니 부부 가락을 들어 보았으니 인정 광 꽝 꽝
헌디 조카는 ????
두분다 가락 자랑에 하루를 보내는데 요즘 목소리 좀 뽑으면 시디 만들어서 선물 하던데
한번 해 보시지 들
조카 하루꼬 가락은 2005년도 나성 인일 모임에 맛 보기로 쬐끔 올려졌습니다
김 철웅 장노님 하숙생과 하루꼬에 떠날때는 말없이 입니다
혹 그간 홈에 변경이 있었기에 없어 졌을까만도 찿아 보세유
근디 이 내는 완존이다 [완전히 자존심 상한다]
그래서 노래 잘하는분들을 이 내가 한수저 더 주거던 ~
잊었네 ~ 자미야 이 내도 어떤때는 어이 없이 니 같이 컴 앞에서 혼자 웃을때가 있지
전번에 수노가 봉숭아 식당인지 뭰지 할때도 그랬고
얼마전 니가 기냥 쏴 델때도 너야 열 받겠지만 이내는 기냥 니 익살이 떠 올라서라무니
니 얼굴 그리며 웃었다고 하면 또 열 받냐?
헌디 오른손 따로 왼손 따론지 그분 말이야 이미 파바로티 같다고 소문
미국에까지 널널 깔린것 니도 내도 춘자도 죄다 아는 사실인데 오늘 은근히 빼는 모습이 마리오 용이다
용용 내롱
또 이름하나 붙었네
5 이 인선 후배 입학 했으니 뭐 이름 하나 달아 주겠지 용
호문언니!!!
저 마지막 쏴댈때 막 우스면서 쏘아 댔어요 !!
코메디처럼 묘사해가는나를 나자신이 어찌나 우스웠는지 .....아마 다른사람들 설마 할테지만 저 사실 그랬어요 !!
그리고 어떤 동문은 컴켜놓고 한줄 한줄 읽어가며 완전 코메디로 쏴 댄다고 하며 같이 배꼽을 잡아가며 한참 웃었어요!!
사실입니다.하나도 열 안받아요 !!오히려 우스워서 죽을번했어요 !!지금도 한참웃었어요!!
답신내용을 안알려드릴수도없고 ...
양조(?)동 박사님께서 천둥답신이 왔는데
이것도 저것도 다 아니고 " 입만살은 늙은이" 라고 하시네요 !!
내가 용선배님은 절대그러시는 분이 아닙니다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인기짱입니다요!라고했더니 " 여봐라 !! 니 가보는 수준하고 조(?)동이 국보1호가 보는수준하고 같냐" 고 돼지게 혼났어요 !
나 회신내용 못알려드린다했더니 한때 어깨를 나란이하고 누구조(?)동이가 더 쎈지 매일 입씨름한친구라 괜찮다고
염려말래요 용 조(?)동이는 아직 국보로 지정을 못받아서 이승에 계신거라나요 . 국보로지정되는날이오면 그때는
세월이 얼마 안남았으니 대접잘해두라는 부탁 까지하시데요
그리고 자의던 타의던 국보 지정은 허락하지않아야 이승에서 오래 머물수있다는 부탁도 빼놓지 말고전하라네요
아이구..... 나 클났네!!!! .....저는 그냥 양조동박사의 천둥답신을 전해드렸을 뿐입니다.
이제야 우리 516 카페가 제 자리를 찾았구나.
양조동이 영감께서 어찌 그렇게
어린 소녀에게 천기누설을 했다냐???
<입만 살은 늙은이>란 말은
양조동 영감과 나와 둘 사이에서만
수십 년 나이를 격해서 주고받던 농이거늘....
어쨌든 이제 다 들켜버렸으니 도리어 속이 다 시원코나!~~~
그건 그렇고 어떤 행동을 할 때
바로 그 순간의 자기자신을 관조하며 행동하다니...
자미는 위파사나 禪을 완전 體得했구려.
그 정도면 가끔씩 하산하여 어린 양들을 지도해도 되겠소이다.
쾅 도장.!!!
간만에 이 방을 노크하니 웃음꽃이 피어 참 좋아요!!!
용선배님과 춘자의 무대가 많이 기대되네요.
춘자야, 머뭇거리지 말고 이 봄에 나와서 예당만큼 크고 훌륭한 무대는 아니지만,
조촐한 무대는 마련할 수 있으니 싸게싸게 나와 보렴.
호문언니, 인선언니도 함께 오신다면 더욱 좋지요.
용란자님, 긴급고지 자~~~알 숙지했지롱~~~~
오선배님의 시를 언젠가도 읽으면서 무척이나 맘이 아팠는데
이 시각엔 더 가슴이 저려오네요.
춘자야, 그제는 친구를 고통없는 하늘나라로 보내고 맘을 달랠 수가 없었어.
하늘도 슬펐는지 이른 아침부터 비가 한없이 내리더라.
한 번쯤 만나고서라도 보냈으면 좋았을텐데.....
내가 너무 무관심했음에 더 슬펐어.
누구냐고???
우리 카페에 가 보면 사진이 올라와 있어.
고 3때 키가 큰 셋이서 트라이앵글을 이루었건만,
이제 한 친구는 하늘나라로 가버렸고,
또 한 친구는 소식이 끊긴지 30년이 훌쩍 넘었으니
이 몸 한 몸만 남은 것같아 맘이 많이 아파요.
성자언니, 네잎크로바로 그려진 나비가 참 이색적이예요.
자미야, 양주동 박사를 잘 기억하고 있구나.
정말 너무나 척을 잘 했지???
저땜시 분위기가 DOWN됐네요
다시 좋은 노래 들으시면서 UP시키셔요.
우리 카페에 들어가서 김혜숙의 사진 보았어.
그래, 기억속에 있는 친구야.
어쩜 좋으니?
우리가 벌써 그런 나이가 되었나??
아픔이 없는 나라로 갔으니 위로받자.
우리 모두 건강히 살아야 할텐데......
아무쪼록 건강한 생각만 하면서 웃으면서 그렇게 살자꾸나.
자~
오라버니!
우리들로 하여금 웃게해 주시와요~~~
이러다 방세 올릴라 ㅎㅎㅎ
용자 왈 에이구 뭘 ~ 이 내가 오히려니깐 날 잡으라구 ! 아 암!
광숙아 그렇케 간 후배 앞에 숙연 해 지는구나 걱정 근심 아품 없는곳에서 편히 지내길
이모가 하도 신조어를 잘 창조해내시니까
저도 그 추이를 쫒아가기가
어느 때는 무척 헷갈리지만 재미가 있어요.
그런데 미국에 오래 살던 분들 몇이
이모처럼 똑같이 사용하는 걸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저 내~롱이라고 한 말이 아무래도 메~롱 아녜요?
그러나 저러나 이모!
나 이모가 하도 노래 들려달라고 겁주면서 채근하셔서인지
봄 환절기에 무릎 꿇고 지금 기침하고 있어요.
원체 내 구라는
"지난 토요일에 달나라에서 독창했다."라고 할 정도의
타칭 구라의 황제인데
요즘 영 간소하게 구라의 소찬을 차리다보니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모호해서인지
진짜로만 진지하게 알고 자꾸 버선목 뒤집어보라 하시니...
아예 구름잡는 구라로 UPGRADE할까 보다.!!!! 잉잉.
(이모버전인 데 그럴 듯하게 요럴 때 요긴하게 쓰이네요.)
자꾸 빼는 것도 좀 남우세스러우니
어차피 내가 프로가 아닌 판에
좀 잘 못하면 어떻고 실수하면 어떨까?
출연료도 공짜인 데...
머언 미래가 될 지 모르겠지만 Coming Home 행사에
에스더 누이 등 선배 입학자와 ,
늦깎이로 입학하신 피닉스의 이인선 님
샌프란시스코의 이은자 님 등
모두 한국에 오시면 인일 모임에서
하루꼬와 장일남의 <기다리는 마음> 정도를
한 소절 씩 때려 봅시다. 까이꺼.!!!
나는 원래 음치니까 듀엣은 못 하고
한 소절씩 이어가는 방식으로요...
<비목>도 좋고요.
아! 자니 리가 부르던 <뜨거운 안녕> 도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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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아마 정선 인듯싶습니다.
요즘 꾀가 나서 Tag를 걸지않고 그냥 복사해서 옮기는데
안 나오면 나중 다시 Tag를 걸어 올리겠습니다.
소리가 중단돼서 동심초로 바꾸었습니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 고? "
저는 이 노래 가사 중 이 부분이 좋더군요.
중학교 시절 자주 불렀는 데 요즘은 기운이 좀 부쳐서
되도록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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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향 돌아가는 길(귀향)의 여정을 걸어가 봅니다.
오늘의 장면은 너무 처절해서 그냥 아무 말 없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오인숙 시인에게 사전에 양해 없이 이렇게 전재하는 것을
우선 이 자리를 빌어 뒤늦게나마 사과드리며 양해를 구합니다.
우리 귀향 시집을 옆에 두고 가끔 펼쳐봅시다.
주위의 우리 딸들에게도 읽히고요.
2부 행선지(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포가 되어>
주소 없는 소포가 되어
화물칸에 실린 채
산굽이 돌아 강 건너
흙 먼지 벌떼 나는 곳
목단강을 보셨나요
흑룡강을 보셨나요
남양군도 물빛을 보셨나요
이곳은 어디인가요
각혈하던 노을
무덤 속으로 숨어들고
한적한 마을 어둠은
깊고 길기도 해라
원하지 않는 곳에
보내진 소포 신세
피 묻은 옷고름이라도
내 고향으로 부쳐주소
3부 위안소 생활
<이기 참 지옥인갑다>
옷 입고 벗을 새 없이
짐승들이 달려들어
생살을 찢더구나.
고양이 열댓 마리 둘러서서
생쥐 한 마리 놀리듯 하데
차라리 빨리 죽여나 주지
밭두렁 잡초 뽑듯
머리카락 한 웅큼 처녀림 한 웅큼
움켜쥐고 소름끼치게 웃는 얼굴
견딜 수 없어
고무신짝 벗어들고
죽어라 반항했더니
몽둥이찜질에
귓불 찢어지고 고막이 터져
몇 번씩 까무라쳐도
질긴 게 목숨인기라
온몸이 피멍 들고 불거져
자주감자 열린 듯 했지
산 목숨 끊을 수 없어
짐승들 노리개로 사는 고통
이기 참 지옥인갑다.
<피 흘리는 꽃>
꽃잎이 진다
비도 오지 않고
바람조차 없는데
우수수 떨어진 꽃잎
백합꽃보다
옥잠화 꽃몽오리보다
수줍고 애잔한 흰 살결을
짓뭉개고 밟아 버린
잔인한 군화 자국들
찢겨진 꽃이파리 울며
숨 넘어가게 몸부림치고
꺾어진 꽃대에서
붉은 피 철철 흐른다.
이 시를 읽으니, 지난번에 일본타운에서 봤던 그 영화장면이 떠 올라
오늘 점심을 먹지 못 하고있습니다.
일본군들이 배급 타는것을 기다리듯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그마한 원두막같은 집앞에, 오줌 마려운 강아지새끼들 처럼 몸을 비틀며.........
그 깨 그 불쌍한 아릿다운 처녀들이 .호호 할머니가 되어
그 때 일을 상기하며 몸을 떨며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았었습니다.
일본놈들 정말 이 역사앞에 진정으로 사죄를 해야합니다.
점말 못된놈들입니다.
붉은피를 철철 흘리며 몸부름쳤던 그 꽃봉오리들앞에 엎디어 빌어야합니다.
오늘은 이 "동심초"노래가 가슴이 찢어지게 아프게 들리네요.
채 시라가 아를 갖는 그런 연속극이 있었지 8 15 특집 더큐멘타리 여명의 눈동자로 기억 된다만 그때도 그렇케 줄줄이 서 있는
상기된 일본 군화들 말이다 그것 보는것도 지옥 인갑더라 ! 오 시인 글데로~
조카 고마워요 헌디 이렇케 까지 맴 저미게 하시나요 라고 했다고 시인 후배에게 전 하세요
글구 춘자야 그 황태 찜 니 요리 방법으로 오늘 해 보련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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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
모두 가슴이 따뜻하시네요. 아니 아직도 활화산이네요.!!!
저도 오죽하면 이 시 60 편을 읽는 데
한 달 이상 걸렸겠습니까?
시 한 편을 펴면 그만 복받쳐 오르는 울음에
고향을 찾아가려고 길을 나선 것도 잊고
소리없는 통곡에 눈앞이 흐려져 그대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던 그 때가 생각납니다.
아니 오늘 또 눈물 주머니가 터집니다.
여명의 눈동자에서 철조망을 붙잡고 애틋한 눈길을 나누던
여옥이와 장00(박상원 분)의 장면이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 드라마에서 채시라는 절정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었죠.!!!
박상원은 드라마에서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
최대치로 분한 잘 알려진 배우의 이름은
반대로 생각이 나지 않고...(혹 최재성?)
아! 이러한 건망증과는 관계없이
슬픔에는 마르지 않는 게 저의 눈물샘인가 봐요.
박상원이 분한 역은 장하림
최대치로 분한 배우는 최재성이네요.!!!
채시라가 분한 역은 윤여옥이고요.
오랜만입니다. 여전하시죠? 건강하시고...
그런데 유머가 우아하다는 것까진 알아듣겠는데
거룩하다는 말씀은 아리송해서리....??
어쨌든 저도 지금 웃었다 울었다, 눈물 콧물 다 짜면서
한편 배꼽은 빼꼽대로 빠질까 봐 움켜잡고 ...
이게 참 무슨 꼴인지... 옆에 누가 없으니 망정이지 어이 참!!!
하기야 늙기도 서러라커든 울지도조차 마라 하실까?
글구 조카 !!! 그 드라마에 여옥이를 떠 올리시는군요 거기에 최 대치 까지 !!! 헌디 그 탈랜트 그때 열연을 인기리에
마치곤 그후는 보기가 드물더군요 최 재성 ???
저는 그 테이프 를 훌 쎄트로 사서 중국에 친척들에게 선물을 했죠 워낙 친척들이 70여분 사시기에 돌려 돌려 가며
울며 불며 보았다는 야그를 여기 미국에 울 어머님께 [소천 ] 사연 사연 엮어 보내여 울 엄니 그 편지 보시고
두고 두고 이부자리 밑에 두시곤 읽으시곤 우시고 또 읽으시고 우시고 에구 엄니 생각에 하차 할렴니다 총총
이모가 잠간 등장해서 또 마를 까 말까 주저하던
내 눈물주머니 다시 터트리시네.
글구 봄날 68번은 <곰배령 곰배령 구경가시죠> 라는 글을 클릭을 하시면
곰배령 설명과 거기에 지천으로 피는 야생화 설명 등이
자세히 전문가적인 안목과 수려한 필치로 작성되어 있어요. 급하시긴... ㅉㅉㅉ.
제가 갖고 간것으로 알고 계세요 지난번 샌 프란 시스코에 갔더니 태평양 연안에 수마일이 위에 선인장 으로
덮였더라고요
한마디 ! 위에 동심초를 들으니 국민학교때 노래 잘하던 친구 생각이 나네요 베니스에 상인 주인공격인 아제비
역을 맡았는데 [ 갚지 못하여 살기 영감에게 가슴에 살 한근을 베어 주어야만 하는 그역] 암튼 틀린것 있으면 고치시길
갸가 오락 시간에 동심초를 불러서 선생님한테 야단 맞는 일이 있었죠 이유인즉 유행가 불렀다고 ~
그땐 그게 유행가인가 ????? 아리 `아리 그 시절에만 있을수 있는 일이죠 그 노래 잘 하던 친구들 박문 으로 인천 여고로 갔죠
모다 환갑이 지났구먼 ~~~~
|
용상욱님은 어찌 그리 섬세한 감성을 지니셨는지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그런데 한밤중의 파도이라도 달빛은 필요하겠지요.
보여야 더 웅장할 테니까요.
파도 감상, 음악 감상 잘했어요. 오숙자 시인의 시도 기가 막히군요.
늘 감사합니다. 고목이 다된 나무에 새순돋는 기분을 맛보게 해주시니까요.
주말 좋은 시간들 되세요!
이인선 님 그날 밤에도
막 보름을 넘긴 휘영청 밝은 달이
은가루 빛을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목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고목에서는 만우절 유머가 나오지 않아요.
자녀들이 모두 너무 훌륭히 제 몫을 하고 계시더군요.
보이는 듯 마는 듯 하신 고아한
인선님의 가정에서의 교육과 인품이 엿보여
다시 저를 뒤돌아보게 하더이다.
바로 앞의 <미국 스타들의 옛모습>도
"이곳을 누르고 열기를 하세요" 라고
고쳐야 보이는 분들이 있을 텐데...
그것도 좀... 그저 미안합니다.
오늘은 오인숙 시인의 귀향 5부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피고>
고개 마루를 넘어가봅니다.
저는 5부를 들어가기 전에 시인의 시작노트를 주목합니다.
평생을 사랑에 천착해온 저로서 거기에 사랑에 대한
시인의 처절한 Reality가 펼쳐져 있음에 흠칫 놀라 버렸지요!
위안부, 그녀들에게도 사랑은 찾아 왔고 심지어 그 대상이
증오의 대상인 일본군인 이기도 했다는 바로 그 말에...
아! 바로 그렇게 치열하지만 담담한 시인의 시각(視覺)으로 인해
시인의 시(詩)는 시대와 세월을 초월해
우리 인간세상의 영원한 시(詩)로 타오르는 게 아닐 런지요??
자 함께 시인의 육성을 들어봅시다.
<시작(詩作)노트>
{5부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피고>를 쓰면서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죽고 죽이는 참혹한 전쟁터에서 어떻게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마지막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사랑이란 사람에게 남겨진 작은 불씨다.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잿더미 속에 남겨진 작은 불씨가
바람결에 살아서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이란 사랑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 했던가?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행복해지고 살아갈 의욕을 갖게 되는가보다.
처참한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났다.
일본군위안부로서 모진 가학 속에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녀들에게도 사랑의 불씨는 남아 있었다.
그 대상은 학도병으로 끌려온 징용된 같은 동포이기도 했지만
또는 증오의 대상인 일본군인 이기도 했다.
몸은 비록 유린의 흔적으로 찢겨졌지만
영혼만은 순수했던 그녀들이었다.
외롭고 절망적인 가운데서도 순결한 영혼은
누군가를 사랑함으로써 따뜻해졌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환경이나 살벌한 분위기도
사랑 앞에선 아무 것도 아니었다.
메마른 대지 위에 내리는 한줄기 소나기처럼
삶에 대한 욕구가 생명을 지탱해 주었다.
그러나 그 사랑은 결실을 맺기가 어려웠다.
더러는 아픈 이별로 끝나기도 했고
그 사랑이 죽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전쟁 속에서 사랑은 사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마저도 없었다면
전쟁은 더욱 잔인하고 파괴적인 것으로 끝났을지도 모른다.
한 순간이나마 따뜻한 기억의 순간이 있었다는 것은
그녀들에게 위로와 용기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싸매주고 치료해주기 때문이다.
그녀들의 육신은 어쩔 수 없이 망가졌을지라도
마지막 불씨 같은 사랑이 있었기에
수치와 오욕의 삶에 한 가닥 희망이 되었던 것이다.}
<청혼>
끓는 기름 뒤집어 쓴 흉터처럼
민둥살 사랑의 추억은
궂은 날 저려오는 아픔입니다.
광란의 전쟁 끝나면
결혼하자 마주 잡은 손
겨울나무 삭정이 되고
함께 살자 고백하던 목소리
대나무 숲에서 서성이는데
돌아오지 않는 당신을
바다 끝 땅 끝에 간들
찾을 수 있을까요
날마다 선지피 쏟으며
홀로 가는 서쪽 하늘
내일은 새로운 해가
다시 떠오를지라도
그 날의 기억 속 태양은
아직 산을 넘지 못하고
그리움은 독약이 되어
양잿물 먹은 고양이처럼
거품 물고 몸부림치는
아픈 날의 환영을
어찌 달래야 합니까
죽어도 못 잊을 청혼의 말은
사시사철 끓는 기름입니다.
<첫사랑>
아지랑이 피는 봄
흙덩이 밀고 싹트는
새싹의 느낌으로
내게 와서 뿌리 내린
당신은
나의 머리카락
손톱 발톱이 되어
잘라내고 깎아내도
소리 없이 자라는
그리움인 걸
아무도 어쩌지 못할
무덤까지 함께 갈
천연두 자국 같은
발진의 흔적입니다
<잊을 수 없는 이름>
영롱한 진주가
밤에도 잠들지 못한
조개의 눈물인 것을
뱉어내지 못하고 품은
모래알 같은 이름인 것을
아물지 않은 상처에
스스로 침을 발라
홀로 간직하고픈
소중한 비밀인 것을
처절한 문신의 살점인 것을
우박처럼 쏟아진
총알과 포탄도
죽이지 못하고
세월도 지우지 못한
담석증을 앓는 이름
진주가 되었군요.
찟어지는 이 영혼의곡소리가 들리느냐 ?????
차라리!!!!차라리!!!!!차라리 !!!!
태평양 일본열도 한가운데를 뒤집어 울어주려무나!!!
추임새 좋~다!!!
아! 참 클날 뻔 했네.
조카 애인이 아유미예요.
지금 둘이 무지 뜨거워요.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면 안 되잖아요.
당시 일본 군인들도 국가에서 시키니 그랬겠지요.
지들도 사람인데...
삼킬듯덤벼드는파도야!!!
지구를 한입에 삼킬듯~ 삼킬듯 ~넘실데는 큰입파도야 !!
일본열도를 몽땅 삼켜버린다고
저토록 가엾게 찟어진 영혼들에게 위로가 되겠느냐만은 !!!
파도야!!파도야!!파도야!!
차라리!!차라리!!! 차라리 !!
너의 그 큰 입으로 태평양 한가운데 바닥을 쳐 토해내는 소리로
지축이 흔들리도록 밤새도록 마구마구 울어다오 !!
아직도 구천을 헤메는 저 가엾은 영혼들의 안식을 위하여!!!!
☞ 여기를 누르시고 '열기'를 하세요.
외국스타들의 어릴적 모습
*자동 슬라이드가 안되므로 화면 좌측 하단에 있는
메뉴 중에서 볼펜을 누르시고 맨 위의 <화살표>를
누르세요.
화면 바탕에 대고 마우스를 클릭 할때 마다
한장씩 바탕이 넘어 갑니다. 수동식 슬라이드죠.
또 애 써주셨군요.
헌데 제 경우는 앞의 STARS CYNT.PPS,를 클릭하면
잘 나오는 데 이번 것은 좀처럼 문을 열어주지 않네요.
제가 분명히 파일첨부해서 본문넣기 했던 것인 데...
제가 컴의 기전(시스템)을 몰라서 번번히 수고를 끼치는군요.
이제 잘 됩니다.
감사합니다.
와우!!! 증말, 증말 절창입니다. 마치 노랫말인 듯
그저 한줄기 신선한 바람 같은 절귀네요.
<어느 날 선인장 이 보이지 않으면 제가 가져간 줄 아세요.!!!>
요렇게 해놓으니 더 노랫말 같으네.
광야 역시 약손이 지나가니 사진들이 오늘은 보이네~ 늘 고마우이 ~
조카 ! 그 사진중 마이클 잭슨은 바로 그 사진 나이에쯤 [ 1976년도 쯤 ] 잭슨 5라고 그에 가족들에
특별 무대가 토욜마다 있었는데 그때 쯤이면 길거리가 한산할 정도로 인기 프로그램이였죠
그때 막내라서 젤 눈에 뜨이게 활약을 했던 생각이 나네요 ~~~~ 이 내도 그 프로그램을 엄청 기다렸던것은
모든것에 익숙지 못한 이민 초기라 이웃도 친구도 도무지 적막 상태였죠
담 !고인이 된 후랭크 시나트라 그 사진이 줄잡아 70여년은 지난것 같군요 의상을 보면 비교가 되는것이
그때 울 나라는 그 나이에 아이들이 무슨 옷을 입고 지냈는지요? ~~~~~
언급하신 최계락 시인 참 좋은, 만나고 싶은 수염난 천사네요.
이 글을 마침 <낙화> 의 이형기 시인이 썼고...
천사는 일찍 데려가나봐요.!!!
강물에는 꽃씨가 바다를 향해 가고
시인 이 형 기
1970년 7월 4일 밤.
시인 최계락 선생은 곁에서 지켜보는 부인 구 여사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 길로 그는 이승을 하직하고 하늘나라의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때 최 선생의 나이는 갓 마흔이었다.
아깝다기보다는 억울하고, 억울하다기보다는 원통하다.
'인생 40부터"란 말이 있듯이 마흔이면
이제부터 시작이 아닌가. 시작할 나이에 끝막음을 하다니 말이 안 된다.
말이 안 되는 일이라 그런지, 최계락 선생이 간 지 어느새 서른 해가
가까운 긴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최계락 선생의 시를 더 좋아하고 그를 우리는 잊지 못한다.
마음이 허전할 땐 최게락 선생이 불쑥 전화라도 걸어올 것 같은
환상적 기대에 사로잡히는 일까지 있다.
하긴 30여 년 전 그 날 최계락 선생의 부음을 듣고 황급히 부산으로 내려가
유해 옆에서 밤을 새울 때도 최계락 선생의 죽음이란 그 사실이
나에겐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여우한테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꿈속에서 그가 장난을 치는 것 같기도 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나는 비로소
최계락 선생의 죽음을 실감하고 혼자 눈물을 흘렸다.
최계락 선생!
최계락 선생의 존재는 나에게 그런 친구가 있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한없이 미덥고 든든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최계락 선생의 천의무봉(天衣無縫)한 시와 인간성은
나처럼 욕신 분분한 자의 무딘 붓으로
도저히 힘이 미치지 않는 먼 곳에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없는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내 마음의 공동에 돌을 던지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쓴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마흔아홉 해가 더 지난 1949년 가을이었다.
지금도 우리 고향 진주에서 해마다 열리고 있는 개천예술제(그 당시는 영남예술제)다.
그 개천예술제 제1회 예술제를 계기로 진주중학교 6학년 졸업반(중·고교 분리 이전)인
최계락 선생과 진주 농림학교 5학년인 내가 초면 첫인사를 나눈 것이다.
말이 초면이지 나는 실상 그 전부터 최계락 선생을 잘 알고 있었다. 「꼬까신」,
「외갓길」 같은 우수한 동시를 이미 써 최계락 선생은 우리가 만나기 전에
이미 문단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학생 시인이었다.
나와 같은 무명의 졸자는 최계락 선생을 멀리서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 대상이지
함부로 나가서 인사를 청할 대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개천예술제의 시 백일장에서 나는 뜻밖에도 장원을 했다.
그리고 그 덕으로 최계락 선생에게 인사를 청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 최계락 선생은 나이가 좀 어리다고 심사위원 명단에 끼지는 못했지만
사실상 심사위원이나 다름없는 비중을 가지고 있었다.
인사를 나눈 그 이튿날부터 우리 둘은 거의 매일같이 만났다.
그리고 이후, 그가 이 세상을 하직하기까지 우리는 어느 한쪽의 이름을 대면
절로 다른 한 쪽의 이름이 생각나게 되는 사이로 그렇게 지내왔다.
이상한 것은 그 동안 우리가 한 고장에 산 기간이 가히 오래지 않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학으로 간다고 진주에서 부산으로 가버린 1952년까지
겨우 3년 동안 한 고장에 살았을 뿐이다.
1956년경이었던가. 그가 서울 어느 잡지사에 일자리를 얻어
몇 달 동안 우리 집에 묵은 일이 있지만
그것까지 합쳐도 역시 만 3년을 넘지 못한다.
그 밖의 기간은 그는 부산, 나는 서울에서 천리의 거리를 떨어져 살았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천리도 지척이다.
우리는 서로가 한 번도 멀리 떨어져 산다는 격절감을 느껴 본 적이 없다.
더구나 그가 가기 전 5년간은 각기 부산과 서울에 떨어져 있었어도
우리는 같은 직장(국제신문)에 근무했다.
그는 부산 본사, 나는 서울 지사에서 업무용 무전으로
전화보다도 더 쉽게 말을 주고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설령 그런 통신 환경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천리가 분명 지척이었던 우리의 관계, 그런 게 친구간의 우정일 것이다.
만나도 특별한 화제는 없었다.
그저 덤덤한 물 같은 얘기가, 그러나 밤이 깊은 줄 몰랐다.
무엇을 쓸까
엽서
한 장에
적을 말이 없구나
엽서
한 장에
긴
이야기는
턱을 괴고
책상 앞에
앉아서
밤은
깊은데
아빠 따라
멀리
서울로 간
영수야,
적을 말이
없어서
엽서
한 장에
쓸 얘기가 없어서
엽서
한 장에.
―「엽서 한 장에」 전문
쓸 말이 없어 턱을 괴고 앉아 있지만, 그 엽서 한 장은
그러나 결코 단순한 공백이 될 수는 없다.
한없는 우정이 솟구치느고 솟구치는, 그야말로 우정의 샘일 것이다.
1951년 여름이다.
최계락 선생과 나는 폐허가 된 진주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표지까지 합쳐
꼭 30페이지 짜리의 얄팍한 동인지 『이인』을 냈다.
둘이서 낸다고 『이인』이라고 한 것이다.
지금 문단에선 그 『이인』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열 사람 정도나 될까 말까. 게다가 그것은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만 책이다.
하지만 그 『이인』에는 최계락 선생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최계락 선생의 첫 동시집 『꽃씨』의 제목이 된 동시 「꽃씨」도
『이인』에 처음으로 발표된 것이다.
꽃씨 속에는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빠알간히 꽃도 피어서 있고
꽃씨 속에는
노오란 나비떼가 숨어 있다.
불과 여섯 줄. 글자로 따져도 50 자가 못 되는 이 작품 속에는
그러나 한없이 넓고 깊은 세계가 담겨져 있다.
그 작은 꽃씨 속에서 하늘거리는 파아란 잎, 피어있는 빠알간 꽃,
그리고 숨어있는 노오란 나비떼를 볼 수 있는 눈은 누구나 쉽게 갖는 것이 아니다.
시인들 중에서도 최계락쯤 되니까 그런 눈을 갖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꽃씨의 생성 변화를 통해 자연의 섭리, 우주의 신비를 파악하는 눈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는 눈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환히 꿰뚫어 보는 눈이다.
그러나 최계락 선생의 이름을 들추면서 이인을 말할 땐
그가 쓴 편집 후기를 또한 잊을 수 없다.
역시 짧은 글이니까 전문을 소개한다.
밤만이라도 진정 고이 잠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너무나 불우한 현실에서 맨발을 벗고
학교엘 가고, 갈가리 떨어진 꿈을 달래줄 장난감 하나 없이 자란다 할지라도,
그러나 밤만이라도 고이 잠들 수 있는 노래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내가 아는 한 최계락 선생은 자신의 시나 문학에 대해 해명적인 글을 쓴 일이 없다.
이 후기에는 아마도 최계락 선생이 남긴 유일한 그 예외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명적인 글이면서도 또한 그대로 시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 담긴 최계락 선생의 정신은 마치 천사와 같은
순수함과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구태여 어린이라 할 것 없이 모든 독자에게
그는 밤만이라도 고이 잠들 수 있는 노래를 주고자 했고, 또 실제로 주었던 것이다.
이 정신은 최계락 선생의 문학적 바탕이자 인간의 본바탕이다.
글은 곧 그 사람의 표현이란 말이 있다.
최계락 선생이야말로 글과 사람이 완전히 일치하는 표본적인 예가 된다.
'밤만이라도 고이 잠들 수 있는' 그의 노래를 그래서 우리는
그의 인간을 통해서 도 그대로 느낀다.
누구나 그를 만나면 흐뭇한 정에 취해 거칠었던 마음이 절로 가라앉는 모양이다.
때문에 친구나 후배들은 물론 선배들까지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곧잘 그를 찾았다.
그런 사람들을 최계락 선생은 한번도 그냥 돌려보낸 적이 없다.
심지어는 딸아이 등록금으로 가불한 돈을 찾아온 친구에게 털어주고
자기는 다시 일수 돈을 얻어 쓴 일까지 있다.
그는 수양을 쌓아서 그렇다기 보다도 천성으로 그렇게 타고 난 사람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천심이라 할까. 그 천심은 계산을 모르고 가식을 모른다.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정의 샘물은 끊임없이 남에게 퍼주고 또 퍼줄 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수염 난 천사라 불렀다.
수염 난 천사 최계락 선생은 아무리 자주 만나도 물리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의 작품의 순수함도 역시 그러하다.
그의 다정한 인간성은 그의 시의 그 극치적인 서정에 직결돼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글과 사람의 일치가 한 가지 점에서 어긋나고 있다.
인정만은 한없이 헤픈 그가 시를 쓸 땐 언어의 선택에 무척 인색하고 엄격했기 때문이다.
단어 하나는 물론 토씨 하나도 그의 시에는 군살이 없다.
그 시를 위해 필요한 언어, 그 언어의 오직 수정만을 그는 용케 가려 뽑는다.
그가 함부로 시를 쓰지 않고
또 함부로 발표하지 않았던 것도 이 엄격성 때문일 것이다.
시를 써 달라는 청탁에 일일이 응하지 못해 괴롭다는 하소연을
나는 그로부터 여러 번 들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최계락 선생은 시 중에서도 동시를 주로 썼다.
그에겐 『꽃씨』와 『꼬까신』이란 두 권의 동시집이 있다.
동시라면 어린아이들이 읽는 시.
그래서 어쩐지 시의 의붓자식 같은 대접을 받는 게 우리 나라 실정이다.
그런 현상이 옳건 그르건 최계락 선생의 동시는 흔히 말하는 동시가 아니다.
시로서 완전히 승화되어 있는 작품으로 어른이 읽으면
때묻은 일상과 일상의 잡다한 상념을 떨치고
순수한 동심 회복이 가능한 훌륭한 시다.
아지랑이 같은 것.
먼 산이
아른대는
아지랑이 같은 것.
복사꽃 피는
언덕에 서면
지금은
가고 없는
누나의 모습.
아지랑이 같은 것.
들길에
아물대는
아
봄날
아지랑이.
―「언덕에서」 전문
이런 게 동시라면 그 동시라는 말은 가장 세련된 시를 뜻하는 말이 될 것이다.
흔히 동심은 천심이라 한다. 천심을 가진 사람, 최계락 선생의 시심이
동시적 양상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러니까 당연한 일일는지 모른다.
결과적으로 그는 우리 나라 동시를 시의 경지,
아니 시 이상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빛나는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러나 최계락 선생은 인간이 그러하듯 문학에 있어서도 자부나 야심을 갖지 않는다.
남이 칭찬을 하든 비판을 하든 상관없이 겸손하게 혼자 자신의 최선을 다할 뿐이다.
1963년에 <부산시문화상>, 1967년에 <소천아동문학상>을 최계락 선생은 받았다.
부산서 친구들이 수상 축하회를 열어준 자리에서 답사를 통해
그는 '나는 나의 인생과 시에 대해 야망이나 야심을 가진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다.
부산에 있는 그의 친구 시인인 김규태 씨가 추도의 글에서
그 때 일을 써 놓은 것을 읽고 새삼스럽게 감회가 새로웠다.
과연 최계락 선생은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야심없는 자기 충실은 도리어 알찬 열매를 맺는다.
동시라는 말이 가장 세련된 시를 뜻하는 말이 될 수 있게 한
그의 문학적 업적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한 장의
흰
종이를 생각는다.
아직은
아무
글씨도 없는,
아직은
아무
그림도 없는,
그래서 소중한
한 장의
흰
종이.
그러나
나는 읽는다.
일찍이
어느 이야기책에서도
읽어볼 수 없었던
즐거운 이야기를.
그리고
나를 본다.
일찍이
아무도
그려 본 적이 없었던
아름다운
그림을.
점을 찍자
첫 점을
흰
종이에
줄을 그어
즐거운
이야길 엮고,
물감을 풀어선
그림을 그리자.
열두 빛깔
아름다운
꿈을
그리자.
정월
초하룻날
새
아침에,
나는 생각는다
한 장의
흰
종이를.
어느 해 정초에 쓴, 이 시에는 삶의 의욕이 넘치고 있다.
한 장의 흰 종이는 우리가 노력해서 이룩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계락 선생은 갔지만 그의 시는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시를 낳은 그의 인간성과 그것이 우리의 가슴속에 새겨놓은
최계락 선생의 이미지 또한 살아 있다.
생전에 그랬듯이 죽은 후에도 그러한 최계락 선생의 문학과 인간성은
우리의 거친 마음을 고이 달래주는 노래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최계락 선생의 시를 읽으면
남몰래 혼자서 울고 싶은 시간을 갖고 싶어할 것이다.
그의 시는 아무런 설명없이 그저 느끼면 되고
또 그렇게 느끼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하는 힘을 가졌다.
인간이 또한 그 시처럼 다정하고 순수한 최계락 선생이었다.
부산을 다녀온 사람이 있으면 피차간에 으레 최계락 선생의 안부를 묻고 전하는 것이
최계락 선생을 아는 서울 친구들의 불문율이었다.
그런 최계락 선생을 하늘도 아껴서 속세에 너무 오래 두지 않으려 한 것인가.
뒤에 남은 친구들이 지금도 가끔 마음속으로 부르곤 하는 다정한 이름 최계락 선생!
아지랑이가 타는
들길을
가면
따스한 햇살이
꽃으로 피는
4월.
뒷산에서 우는가
뻐꾸기
울음 속에
송화가루
새큼한
향내가 묻어 온다.
어느새
자랐을까
파아란
잔디 위에
문득 길을 멈추고
조용히
눈 감으면
오늘도
또
바람이
노래로 흐르는가.
―「봄날」 전문
몸체가 큰 것이든 작은 것이든 살아 있는 것은
다 소중하고 살아 숨쉰다는 사실은 축복이요, 행복이다.
봄 날씨가 화창한 들녘 연초록 잎새들이 봄 햇살이 간지러워 간지러워 몸을 흔드는 때,
훈훈한 봄바람이 어머니의 입김처럼 불어오고 우리는 그냥 있지를 못해
산으로 들로 나가는 때
산짐승들은 마냥 산이나 산자락을 누비고 봄날은 이렇게 우리를 황홀하게 한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환희의 봄!
살아 있음은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흐뭇한가를 스스로 느끼게 해주는 봄날!
끊임없이 살아 넘치는 생동감을 자연의 빛깔과 바람의 노래로 교감시키는 서정성의 시!
햇살 같기도 한 시! 시는 또 하나의 생명의 근원이요,
누구나 고루 나눠 가질 수 있는 노래다.
우리 모두를 소외감에서 벗어나 자연과 친화할 수 있는 시심을
감동과 함께 우리에게 수혈해주고
햇살과 바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 이 순간에도 있었고
내일에도 분명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봄날」은 그런 즐거움과 기쁨을 알게 해주는 격조 높은 작품이다.
한겨울 동안
그렇게도 조용하던
골목이
요 며칠 사이
갑자기
부산해졌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방을 벗어 던지기 무섭게
훈이도
민이도
그리고 또
순이도
어쩌면 곧장
골목에서 어울리기 마련인
요즘,
그렇구나
봄은
어느새
이 골목에까지 와 있었네.
―「봄과 골목」 전문
시간의 상징적 자리이면서 또한 삶의 터전이 맞물려 있는 봄과 골목은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의 한 부분이며 우리의 삶의 터전이다.
누가 불러내지도 않았지만
우리는 또 하나의 나를 만나려고 골목에서 서성거릴 때가 있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집을 찾아나서면 집보다 먼저 나서는 골목!
어느 누가 모여 달라고 소리치지 않아도 스스로 모여 노는 골목!
바람과 햇빛이 유난히 많은 골목! 구김이 없이 소리치고 노는 모습은
늘 우리에게 한 폭의 유화로 남는다.
그 유화를 통하여 내일을 펼치는 힘은 우리이면서도 계절이다.
이런 자연의 모습을 무리없이 최 선생은 빛깔 고운 언어로 구축하여
훌륭한 서양화로 펼쳐 놓고 있다.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그 새
감나무도
저리
자라서,
담 밖
골목까지
가지를 뻗었구나.
이태 전
이맘때쯤
정들었던
집을 팔고,
이사를 하던 날은
부슬비가
내렸지.
영이하고 가꾸던
앞뜰
꽃밭에,
지금쯤은
채송화도
한창이려니…….
어쩌다
지나가는
옛집 앞에서
발걸음은
절로
멈추어지고,
문을
열고 나오는
사내 아이가
꼭
우리
훈이만 같구나.
―「옛집 앞에서」 전문
자신이 살아온 모습이나 하루를 걸어온 일은 옛일로 통한다.
옛날 일들은 늘 우리를 비실비실 웃게 한다.
살아온 일을 거꾸로 되짚어 보는 일은
우리를 슬프게 하든지 웃음짓게 하는 묘한 감동을 불러 일으키게 한다.
거꾸로 되짚어보는 행위는 바로 깊은 자기 반성이다.
앞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도 아름답지만 뒤를 돌아보며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일을 하나하나 챙겨 계획하는 일은 참으로 소중한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몸담아 살았던 옛집을 돌아보는 것은
웃자란 자신의 오만함을 가지치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요,
겸손히 살 수 있는 미덕을 지닌다.
높은 산
골짜기서
너는 외롭다가,
먼 들판
어둔 길에
너는
쓸쓸하다가,
깊은 밤
내
창문 앞에 와서
서는
바람.
책을 덮고
외로운
이야기나 들을까.
눈을 감고
쓸쓸한
이야기나 들을까.
바람아,
찬
밤에
겨울 바람아.
―「바람」 전문
바람은 우리의 삶에서 매우 혼란스러움을 안겨주며 추상적인 대상이다.
만질 수 없으며 볼 수 없는 바람의 실체!
우리는 그래서 바람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한다.
최 선생은 바람을 통해서 하루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어지러움 없이 차분하게 보고 느끼게 해준다.
바람은 우리에게 당혹감을 줄 수 있으나
그 껄끄러움을 덜어주고는 매우 친화하게 해준다.
어둠의 막막함을 물리고 바람의 이야기를 듣고자 함은
이 땅의 아버지에 대한 화자를 쉽게 이끌어냈다.
외로움과 늘 쓸쓸함은 우리의 영원한 화두다.
더러는 풀어내고, 더러는 미궁으로 밀어둔 채 바람을 통한 자기 성찰!
사람의 마을 우주를 휩쓸고 다니며 본 것을 단순하게 말하게 하는
단조로움을 휴머니즘을 통하여 구축해 놓는다.
휴머니즘, 그것은 우리 인류를 나락에 빠져들게 하지 않는 횃불 같은 것이다.
산바람 스며 휘돌아
그지없이 쓸쓸한 대합실 벤치에
두서넛 노곤히 지친 마음
물끄러미 천장만 노려 노리고
얼음인 양
싸늘히 얼어붙은 여정
도무지 훈훈한 얘기란
한 오리 못 가진 채
이럴 때야 모두들 제가끔 지닌 버릇
엽초 연길 삼켜보는 것
외가엘 간다고 좋아하던 아이도
새파란 엄마 등에 포근히 숨 가쁜데
머얼리 고개 너머로 가까워 오는
기적 소리 그리운 저녁 어스름
―「어느 시골역」 전문
쓸쓸함을 통하여 시의 특성인 서정성을 획득해내고 묘한 풍경을 이룬 작품이다.
어느 작은 시골 간이역 한 장의 흑백 사진처럼
그 어떤 그리움이 사무침으로 흐르는 꽃강물 같은 것.
담배 연기, 기적 소리 같은 일상의 언어로 강인한 인상을 주는 따뜻함.
쓸쓸함이 다시 화롯불 같은 향수로 연결케 하는 시와 시의 행간이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는 별로라는 도리질을 받을지 모르지만
시를 되풀이해 읽다보면
외할머니의 지극한 정다움을 지닌다.
최 선생의 시편은 가뭄에 찌든 풀잎을 이슬이 씻어주고 갈증을 모면시켜 주듯이
우리의 영혼을 보다 따뜻하게 해주고 잊고 있었던 고향을 다시 되짚어보게 하는
영적인 그 무엇이 있다.
최계락 선생이 남겨 놓은 시편들은 명료성이 더욱 서정성을 띠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놓쳐서는 안 될 자연의 친화력을 한껏 보여주고 있다.
지나친 생략법은 시적 상상력을 절감하는 기미를 보이기 쉬우나
시의 즐거움을 통하여 극복했다.
그의 넉넉한 시세계는 우리를 보다 삶의 희망으로 남아 있게 한다.
꽃강물 위로 꽃씨가 망망대해 바다를 향해 가는 매우 힘참을
시를 통해 한껏 펼쳐 보여주고 있다.
*천의무봉 : 시가나 문장 따위가 자연스럽게 잘 되어 완미함을 이름.
완전무결하여 흠이 없음.
*욕신 : 몸에 묻으 때.
1998년 10월 문학수첩 발행
최계락 동시집 ① 『꽃씨』에서
최 계락 시인은 옛 집 앞에서누군가 살고 있을까? 저 또한 1989년도 모국 방문때 누군가 살고 있을
살았던 집을 방문 했을땐 등 나무가 무성히 자라서 마당을 텊어 지붕이 되였고 정말 저리 자란 감나무에
땡감들이 골목에 떨어져 뜨거운 여름에 지나가는 사람들 발에 체이고 있는것이 넘 가여워서 라기보다는
그냥 울었었습니다 그 집이 없어졌다는 소식도 있고 혹 그 근처 조카들이 다니던 국민학교 에 모국을 떠나면서
은행 나무를 두 구루 심어 놓고 떠났는데 그 은행 나무는 있을까 ? 거기에 넘 잘 맞추었던 총각 점쟁이 집도 ~~~
모다가 그리움 뿐이군요 ~~
이렇케 훌륭한 글은 혼자 아닌 많은 분들이 읽어 주었으면 ~~~ 안경 내리고 시린 맘으로 하차 합니다~~

바깥은 온통 봄이다. 神의 걸작 중에서도 두 번째로 위대한 걸작인 꽃들이
맘껏 싱그러우면서도 요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神이 봄의 물감을 통째 들어부었나보다.
팝콘이 주렁주렁 매달린 듯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뭉쳐져 있는 듯한,
朱丹빛 紬緞이 펼쳐져 있는듯한 온갖 화려한 꽃들이 들판을 덮고 있다.
너무 벅차다. 그런 봄의 전령들이 내 가슴에 너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게,
대책 없이 길에서 맞닥뜨리는 것이... 나만의 공간에서 봄을 예행연습해야겠다.
베란다 뒤 모기잔등 (=문배(蚊背))만한, 그것도 햇볕이 들지 않는 담벼락 밑
그 땅 뙤기에 난쟁이 꽃들을 심었다.
며칠 열심히 물을 주고 갈망의 눈길을 주었더니 어느 새 응답을 한다.
희고 노란 수선화, 자줏빛, 노란빛의 튤립, 하얀 히아신스,
열대의 미니어처와 같은 관중, 저 뒤에는 남천, 영산홍, 철쭉, 라일락, 화살나무,
대나무, 소나무가 그저 아랫도리만 보인다. 담쟁이 넝쿨도 은밀히 숨을 고르고 있다.
그래도 그 알량한 땅 뙤기에 널려있는 게 나무라고, 꽃이라고, 가끔 이름 모를,
예쁜 새들이 찾아온다. 오늘 지난번 가지치기에서 많이 잘려버린 남천 열매대신
녀석들 양식으로 좁쌀을 돌확 위, 모래 위에 조금 뿌려 놓았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던 녀석들이 다시 오려나?
자미후배!
난 이 글이 끝이 났을 때
끌어 오르던 민족애와 울분이 차분이 가라앉으면서
자미후배처럼 멍~허니 암악을 들으며 한참을 앉아 있었다네~~~~
이런 멋있는
시와 음악과 뜨거운 가슴과 따뜻한 마음이 있는 방을 아무 입장료도 없이
자유롭게 들어 올 수 있다는것에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입니다.
용상오라버니께 그리고 우리 광야씨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자미후배의
"파도야! 파도야!"하는 열정적이 외침이 귀에 들리는 듯 하네~~~
이 방에서 하루종일이라도 쉬며 놀았으면 좋겠네~~~
용상오라버니도 자미후배도 모두 보고싶네~~
광숙이도 잘 있나??
어제 저녁에 광숙이가 보내준 맛있는 날김에 양념장을 쳐서
환상적이 황태구이을 얹어서 눈물과 함께 먹었습니다.
내 날아가리라~~
웬수진자들에게 웬수를 갚으러..........
여기에 올라오네요~~~
아직 새로 꾸며진 이 홈피에 익숙ㅎ질 못 하네요.
도밍고의 젊었을적의 미모(?)의 얼굴과 미성의 노래를 들으며
한국의 봄꽃들을 그리워하며 그립니다.
헌데 내 이름 아래에는 내 이쁜 얼굴과 우리 귀염둥이 앤젤(오늘은 가게에 데리고 나왔답니다.)사진이
올라오네요~~ 싫지 않은데요~~~
광야씨! 고마워요~~~
2005년 미주 동문 모임 동영상을 어렵게 찾아
에스더의 <떠날 때는 말 없이>를 세 번이나 들었어요.
그런데 김철웅 장로 님의 <하숙생>은 못 찾겠더라고요.
하숙생 생활을 청산하셨나?
그의 타지마할 공연실황을 한 번 보죠. 우리나라에서도 재즈가 맡 바탕이 되어 있는 남녀가수들 ... 임희숙, 김추자, 패티 킴, 린애, 김도향, 조영남 등등의 노래가 길고 깊은 영혼의 울림이 있듯이 여기 저 여 가수의 노래도 참 좋군요. LOVE IS ALL!!! |
나도 영자에게 배운것인데 오늘 처음으로 시도해 봤어요.
인일홈페이지를 처음 열면 오른쪽 위에 "검색"이 있지요?
거기에 "김춘자"라고 쓰니까 나으 역사가 쫙~ 다 나오네요.
거기에 김춘자회장님의 옆지기"라고 있어요.
고걸 클릭하시면 됩니다.
제가 부른 현미의 "떠날때는 말 없이"를 세번이나 보셨으면 아마
용상오라버니께서 "이 정도라면 내가 이길 수 있지~~"하셨을거예요.
미주 동창회장이 되어서 처음 하는 오픈닝 쏭인데 명곡을 할 수도 없고 유행가를 한 곡 불러야하는데
아는 노래도 별로 없고, 내가 안경을 벗으면 꼭 현미같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기에 현미의 CD를 하나
사 가지고 파티장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연습하면서 갔는데, 박자와 템포가 다른 반주가 나와서 박자가 좀 틀렸어요.
진짜 쪽 팔렸었어요. 반주가 내 노래를 맞추어 따라오던 노래만 하다가 내 노래를 반주에 맞추어 따라하려니까
정말 어렵더라구요. 아이구~~ 챙피해라~~~~~ 지금은 훨씬 잘 할 수 있는데........
에스더!
방금 갈쳐 준대로 김철웅 옆지기 님의
<하숙생>을 보고 들었어요. 와! 그 멋진 허스키...
그리고 그 무대를 장악하고 이끄는
여유 있고 멋진 제스처!! 왕년에 세종대왕 깨나 날린 솜씨네요.
그래요. 노래에 따라오며 맞추어주는 반주가 진짜인데
반주에 맞추어 노래한다는 게 늘 답답하죠.
하지만 그걸 파티장에 가는 그 짧은 시간에
연습해서 부른 노래라고요? 오메 기 죽어라.
내가 늘 아내와 새로운 노래를 배울 때 보면
그 사람은 5~10 번이면 금방 비슷하게 하는 데
난 음치다보니 그게 잘 안 되던데...
그리고 에스더와 나,
나중 이기고 지는 시합해야 하는 거야요?
클났네. 이거!!!
나중에 나 "지금 감기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라고 하지 뭐!!!"
대문은 활짝 열어놓은채로.........
에고~~
썰렁해라~~~~
봄이 왔는데 뭐 좀 개나리나 진달래꽃이라도 좀 꽂아놓으시지.........
영화 `The Miracle,에서 머리에서 발끝까지 탱탱하며
젊음의 싱그러운 숨결이 느껴지던 `로저무어, 그러나
아무리 사교계의 거물이라 해도 늙은 지금의 그의 모습은
추레하다. 그런데 만년 타잔 영화 등에서
타잔을 집요하게 마지막까지 못살게 굴다가
최후에 타잔과의 결투에서 지고 절벽 밑으로 떨어져 죽는 역을 단골로 맡던
단역배우 출신의 `숀 코넬리, 그는 백발이 성성하고
(그는 거의 대머리라 이것도 아마 가발일지 모른다.)
온 얼굴에 주름투성이지만 ` 숀, 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매력적이다. 관자놀이까지 내려온 짙고도 긴 눈썹,
시원한 이마, 비공(鼻孔)이 좀 크고 길지만 옆 선(線)이 멋진 코,
그리고 뚜렷한 입,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눈이 압권(壓卷)이다.
젊었을 때는 불량(不良)스런 섹시함과 날카로운 예리(銳利)함이
대종(大宗)이었지만 나이 들어서는 약간의 유머러스하고 순진하면서도
노회(老獪)한 장난스런 눈빛 그것은 압권이다. 굵고 가는
주름이 그리 많아도 그의 얼굴은 `로저무어, 처럼 낡은
느낌이 들지 않고 탄력이 느껴지는 늙은 거수(巨樹)와 같다.
로저무어는 아마도 눈이 노래서 더 바람 빠진 풍선 같은 가보다.
(노란 色인지 파란 색인지 확실치 않으나 실제로는 파래도 느낌이 노랗다.)
된 알프레도 크라우스의 이 노래가
내 취향에는 오래 남는 노래로 기억됩니다.
소프라노는 Renata Sco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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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문통이라던가 공작창은 한 45년만에 다시 들어 보니 정겹군요 그 공작창에선 무얼 생산 했던 곳이고 또한 수문통은 ?
아직 그런곳이 남아 있을까요 ?
수문통은 복개되었고 제가 살던 집 터는 삼덕(?) 아파트 단지가 되었어요.
공작창은 기차 등 수선하고 모아두던 곳이었고요. 물론 없어졌고요.
하지만 인천에서도 한참 뒷골목인, 제가 다니던 깡시골학교
송현초등학교는 산뜻하게 리모델링되었더군요.
거기서 마침 몇명의 학생들과 담임선생님이
수업이 끝나고 남아 있던 교실에 들어가서
나도 학생들 옆 의자에 앉아 보았지요.
아! 중국은 정말 커요.
저는 평생 중국을 잘게 쪼개어 수 십 번을 가고 싶더라고요.
삼국지, 초한지, 수호지, 서시, 양귀비와 당태종, 측천무후, 등등
중국의 역사와 고전에 젖어 살던 한국 사람인 우리에게는 그 어떤 나라들보다
중국이 먼 옛날 내가 살던 고향처럼 다가오더군요.
내 생애에서는 겨우 두 번, 날짜로 24일 정도로 중국 기행이 마감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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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성! 그 벽에다가 류 아무게가 다녀 갔다고 기와에다 푹푹 페인 한글을 남긴 조선족! 그것뿐 아니라
거기에 중국인들도 심심치 않게 낙서를 많이 한것으로 보아 근성들이 비슷한것 같음 느낌이 남한 산성 같았기에
7대 불가사이에 속하는 장성을 울 나라것과 비우 해봄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데 이 소연이가 이번에 보았을가?
[ 헌디 유감 천만 고산씨가 그렇케 된것 10000 은 교포들이 그것에 대햐서 아쉬움 궁금 ?????????]
이화원과 자금성을 최소한 사흘을 보아야 한다는데 하루씩만 관광을 했으니 떡본 듯 방 그리고 방방방 들
송화강 물이 바로 위에 람창강 물 같은 색이더라고요
세계적인 유산들을 한눈에 보니 좋은 세상에 있군요 이내는 모두다 국교 수교전에 다녀 온 것이라서 그땐
교통 음식 위생 모두다 무척 열악하였기에 [1986] 더욱 머리에 남아있고 그땐 천진에 사시는 오빠가 저를 위해 2시
간 걸리는 북경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 오셨던 추억이군요 그 당시는 개인소유가 없고 배급제도인 일상 필수품이 많았고
개인소유가 없으니 경쟁이 없어 살려면 사고 말라라는식에 불친절 이였는데
지금은 세계가 중국으로 중국이 세계로 이군요 올리신 사진 잘 보았어요 총총
* 그리움이 가득한 날은
시: 용혜원
네 모습이 내 마음을 움켜쥐고
마구 흔들어놓아
그리움이 가득한 날은
외로움이 더 몰아쳐온다.
서러움에 눈물이 흐르고
마음의 갈피마다
사랑의 꽃잎이 피어난다.
금방이라도 너를 만나
가슴 맞비비며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득한 고독의 벼랑으로
한없이 떨어져버린다.
너를 사랑하기에
가슴에 차곡하게 쌓여 있는
그리움의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너를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그리움 속에 투망을 던져
너를 끌어당기고 싶다.
<종교적 믿음과 세속적 사랑>
나는 영화에 대해서 아무 지식도 전문가적인 식견도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영화의 플롯이 어떻고 , 주제,
모티브, 음악과의 조화 등 전문적 평을 하려는 건방진 우를 범하고 싶지 않다. 다만 <사랑>이라는 화두를 평생 천착해온 사람으로서 종교적 믿음과 세속적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아직도 나 자신 산뜻한 입장을
거짓말로라도 정리하지 못하는 상태인 마당에 평소 내 생각과 상당히 일치하는 입장을 쓴 글이 있어
옮겨보았습니다..
민병훈 감독은 종교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을 통해
전작부터 이어져온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신학대학생들과 수도자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외국영화가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내에서 불교를 소재로 한 영화는 많이 만들어졌지만 그 밖의 종교들은 영화로 다뤄진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벌이 날다> <괜찮아, 울지마>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길을 걸어온 민병훈 감독은 세 번째 작품인 <포도나무를 베어라>에서 ‘종교적 믿음과 세속적 사랑’에 대해 말한다. 무거워 보이는 외형과 달리
영화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겪게 되는 고민과 갈등을 함축적인 언어로 풀어낸다.
가톨릭 신학대학생인 수현(서장원)은 여자친구 수아(이민정)과의 관계를 끊고 신학교 생활에 충실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어느 날 찾아온 수아의 결혼소식과 신학교를 그만두려는 가까운 친구 등은 그의 마음을
다시 흔들어놓는다. 성직자의 길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수현에게 학장신부는 아는 수도원을 소개시켜준다.
그 수도원에는 수현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고민으로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수현은 수아를 닮은
헬레나 수녀를 보게 된다. 수현 역을 맡은 서장원은 <용서받지 못한 자>에 이어 또 한번 두 세계의 중간에 걸쳐 갈등하는 인물을 잘 표현해 낸다. 기주봉, 이민정을 비롯한 다른 배우들도 맡은 역할에 잘 녹아 드는 연기를
펼친다. 등장인물들이 갈등하는 한 축에는 종교적 이유가 있지만 그 부분을 인생의 무게로 바꿔 생각해도
큰 무리가 없다. 자기 앞에 직면한 현실을 똑바로 바라보기 힘든 것은 성직자나 일반인이나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라는 요한복음의 한 구절에서 포도나무는 신을 상징한다. 그런 면에서 제목은 얼핏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중국 임제선사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라는 오래전 말을 생각해보면
영화의 주제를 말하기 위해 이보다 좋은 제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종교든 인생이든 결국 스스로
깨닫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주인공 수현의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 그리고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수현은 “깃털처럼 가볍게”라는 어느 노신부의
말을 어렴풋이 깨닫게 되고 자신만의 고민에서 벗어나 타인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째깍째깍 시계소리 가득한 마지막 장면은 마치 ‘고뇌하는 동안에도 인생은 흘러간다. 그러니 너무 심각해지지 말아라’는 감독의
토닥임처럼 다가온다.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언제 등장해도 생명력을 잃지 않을 영화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유효할 주제와 숙성된 생각, 잘 잡힌 균형과 열린 결말 등 ‘좋은 영화’의 조건을 충분히 갖췄기 때문이다.
문성원 기자
목사인 용혜원 시인과 달리 늘 누구=하나님 을 뜻하는 신앙시를 써오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보며 이 마음을 정제해본다.
개가 정신 사나우면 정지를 누르세요.
그것도 시끄러우면 곧 개는 쫓아버리죠.
지금 막~
부를 때만 뛰어나오게 개를 훈련시켰습니다.
축배의 노래 등 다른 음악이나 동영상을 보시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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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임주연의 <보고 싶어>
내 곁에 누군가 있다는 것이... / 이해인
행복한 일입니다..
내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누군가..
아픈 마음을 움켜잡고..
혼자 어둠속에서 눈물 흘릴 때..
난 따뜻한 햇볕아래 있는..
당신께 내 아픔 내 보이며..
보다듬어 달라 합니다..
그러면 당신께선..
따스한 손길로..따스한 웃음으로..
나의 아픔을 녹여주십니다..
참 행복한 일입니다..
이렇게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있단 것이..
누군가..
세상의 힘겨움에 떠밀려..
고통스럽게 허우적 대는 동안..
난 더 높은 곳에 서 있는..
당신께 날 잡아 달라 손을 내밉니다..
그러면 당신은 행여나 놓칠세라..
내 두 손 꼭 붙잡으시고..
천천히 당신곁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난 이렇게 행복합니다..
누군가가 내 곁에 있으므로..
아! 고향에 돌아가기가 이리도 힘이 든다냐! 저 멀리
고향 찾아가는 길에만 나서면 발이 천근이고 가슴이 만근이니...
그래도 우리 귀향의 길을 또 재촉해보자.
<그곳이 갈 수 없는 곳이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향수병이 되어
안타까움을 크게 한다. ... 그러나 한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향수 그 자체가 아닌 비통과 상처로 남아 있는 일본군위안부 여인들...!!!>
(6 부 향수 그리고 상처의 시작노트 중에서)
고향은
고향은
펄펄 끓는 심장에
질퍽 녹아내리는
호박 엿가락이다
단내 물씬 풍기며
열 오른 이마
끈적끈적 떨어지지 않는
그리움을 어쩌란 말이냐
돌아가고 싶어도 갈 수 없어
밤마다 길어지는 목
수숫대 울타리 되어
봉창 찢긴 안방을 지켜 볼까나
아홉 살 고샅길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철없는 아이는
엿장수를 따라가고
챙
챙
가위질 소리만
평생 귀청을 울린다.
상처
멀건 시래기죽 한 사발에
코 빠트린 어린 동생들
시루 구멍만해진 눈망울
아무리 애처롭기로
먼저 태어난 죄
맏이 된 멍에가 그리 커서
송아지 한 마리 값에 팔린 몸
징그럽게
배고픈 기억
뼈아프게 서러운 아버지
비수 같은 이름의 어머니
당산나무 밑에 모두 묻어놓고
입술 깨물며 마을을 떠났지라
박복한 팔자려니
잊고 살자 무진 애써도
궂은 날 신경통 앓듯
전신을 찌르는 슬픔의 가시
궁색한 살림 거들었다 해도
밑 빠진 항아리 되어
고향 집 장독대 찾아간들
내 앉을 자리 하나 있겠나
생각하면 눈물나게 서럽지라
향수병을 앓으며
고깃배 드나들던 바닷가
해풍에 찌든 집 한 채
간고등어 굽는 냄새
행복한 군침 돌던 곳
조갯살로 볼이 통통해지고
미역 해초 뜯어 먹으며
푸른 바다를 닮아
서늘한 눈빛이었네
나랏배가 침몰하던 해
오징어 먹물빛 아버지는
더 이상 그물을 깁지 않고
상어를 잡으러 떠났다던가
잠결에도 출렁이는 바다여
손가락 발가락 곧게 편 산호초여
물 빠진 갯벌인 검은 가슴은
시름시름 향수병을 앓네
빗물이고 싶어라
진달래꽃 따먹고
두고두고 우는 두견새
살구꽃비 내린다.
날개 터는 때까치
뭉게구름 목화밭에 내려와
하얀 솜꽃이 피고
가난한 어버이들 흘린 눈물
메밀밭 소금 꽃 만발하던 곳
탯줄 묻은 땅을 떠나
내 어찌 혼자 떨어져
이리 애달프게 사는 가
사금파리 풀 먹인
연줄 같은 목숨 끈질겨라
살구 익는 가지에
가재 잡던 냇가에
떨어지는 빗물이고 싶어라
고향 논밭에 뒹굴고 싶어라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동굴 속에 갇힌 듯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기도 한다.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비쳐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그만큼 간절하고 절실하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곧 새벽이 올 것이라는 믿음은
절망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된다. ~~~~ 중략~~
여명을 기다리는 끈기를
잃지 않아야 밝은 새 아침을 볼 수 있다...
<7 부 여명을 기다리며 의 시작노트 중에서>
희망의 이름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가도
정신만은 빼앗을 수 없고
몸은 푸줏간 고기덩이처럼
함부로 난도질해도
혼은 짓밟히지 않는다
산불 지나간 잿더미 뚫고
파랗게 돋아나는 새싹을 보느냐
구토의 거름 더미 위로
싱싱하게 뻗어가는 호박 잎
라면발 닮은 덩굴손을 보느냐
하늘이 뒤집혀 땅이 되지 않는 한
빼앗기지 않는 그 무엇을
지니고 산다는 것이
마지막 희망의 이름이 된다
왜 사느냐 물으실 때
불면의 밤은
총구멍보다 무섭습니다
기다림이 없는 삶은
그보다 더 두렵습니다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오늘을 산다는 것은
차라리 고문입니다
왜 사느냐 물으실 때
새벽을 기다린다 말하지요
혀는 어눌하지만
간절한 심정은
그물망 안 숭어의
퍼덕이는 몸부림입니다
비루먹은 말 닮은
남루한 모습이어도
뼈와 살이 태어난 땅에
풍물패 사물놀이 신명나고
누더기 걸뱅이의 품바조차
흥에 겨운 장날
그 곳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립니다
식민지 땅의 젊은 남자들은 학도병으로 노동자로 징용되었고 꽃다운 여자들은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다. 멀고 먼 이국땅에서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피어보지도 못한 채 죽어갔는가, 나라 없는 백성의 설움은 극도의 가난과 함께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렇게나 기다리고 열망하던 조국의 해방을 맞아
모두들 기쁨에 들떠 있었지만 일본군위안부 여성들은 그 기쁨을 누리기보다
전쟁터에 방치된 채 그리운 고국에 돌아갈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어떤 증언자는 해방된 지도 모르고 동굴 속에 숨어 지냈다고도 했다.~~
<8부 해방의 시작노트 중에서>
포도밭에는
애절하고 억울한 이들의
피 멍든 반점이 열리는 포도밭
송이송이 까맣게 익어
휘어진 가지에 매달린
검붉은 눈망울 보아라
아들딸 전쟁터에 보내고
홧병으로 세상 등진 어버이
땅을 치며 통곡하던
포도즙 빛깔로 짓무른
터진 가슴이로구나
귀 밝으신 하나님
눈 뜬 하늘이 보고 있었구나
억압의 쇠사슬 풀리고
이 빠진 악어들 바다 건너
황망히 줄달음치던 날
돼지 잡고 떡방아 찧어 광복의 기쁨을 나누자
애틋하고 가엾은 사람아
너를 낳고 키운 땅으로 돌아와
우리의 과수원에 거름을 주고
철 따라 꿈이 영글어가는
포도나무를 키우면 좋겠구나
선몽
해방된 줄도 모르고
폐허에 버려진 빈 깡통 닮은 얼굴로
깊은 동굴 숨어
허기진 배 깔고
몽롱한 잠에 취해 있는데
생시인 듯 꿈속에오신 아버지
너 추운데 뭐하고 있니
전쟁이 끝났다
집으로 돌아오너라
아버지 머리 어째 그리 희었소
갈대밭 나부끼듯 하네요
산비탈 구르듯 내려와 보니
일본군인들 간 데 없고
어디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인가
거리엔 넘치는 사람의 물결
폭포수 떨어지듯 만세소리 우렁찬데
이게 참말 사실이오?
내 발로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소?
오매불망 기다리던 딸이
오죽 답답했으면
꿈길까지 찾아와
해방의 소식 일러 주셨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의 날은 왔다.
악착같이 숨통을 조이던 일본인들은 전쟁에서 패하고 도망을 쳤다.
도망치는 와중에도 그들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집단살해를 서슴없이 감행했다. 위안부들이 숨어 있던 방공호에 들이닥쳐
기관총으로 살아있는 그녀들을 모두 사살하기도 했다.
남겨진 군수물자를 태워 없애듯 살아있는 생명을 한 구덩이에 던져 넣고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자신들의 목숨을 부지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여인들을 전쟁터에 버려둔 채 황망히 도망쳐 버렸다.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고 산속으로 숨어들어
굶주림과 추위로 죽어간 위안부들도 많다고 한다.
더러는 미군에 생포되기도 하고 위안소가 있던 그 자리에서
어찌어찌 연명을 해나가다 그대로 정착하게 된 분들도 있다. ~중략~
해방되고 이 땅에 들어온 소련군의 만행이 사람들을 또다시 통탄하게 만들었다.
아무 여자나 잡아다가 자신들의 성적욕구를 채웠다.
소련군에게 윤간 당하고 총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 죽은 여인들이
부지기수였다는 것이다.
특히나 고향을 찾아오는 도중에 6.25라는 민족상잔의 전쟁에 휘말려
또 한 번 끔찍한 살상의 현장에서 상처를 입은 분들도 계시다니
실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역사의 격동기를 거쳐야 했던 이 땅의 여인들은
왜 그렇게 비참하고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을까?
나라가 힘이 없고 단결되지 못해서 벌어진 비극은 아닐 까 생각해보게 된다.
<9부 끝나지 않은 전쟁의 시작노트 중>
광인들
중국 등충성 동북부 구덩이
순성가의 위안소에는
집단 살해된 위안부들의 시신이
엉킨 채 묻혀 있었더란다.
어느 날 동 틀 무렵의 방공호 속
가뭇 잠든 여인들
기지개도 펴기 전에
불을 뿜는 기관총 소리
학살의 현장에는
붉은 장미꽃 이파리 흩어지듯
살점들이 부들부들 튀고
선혈은 꿈틀대며 도랑져 흘렀으리.
돌림병 든 닭을 무더기로
웅덩이에 쓸어 넣듯
눈 말간 목숨 생매장하고도
두 발 뻗고 잠이 들었을까
인두겁 쓴 무리들아
사람이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을 까
아마도 미쳤던 게지
인정은 모두 긁어내 오물통에 던져 버리고
전쟁의 미친바람만
허파와 심장에 가득 넘실거려
사람이기를 포기했겠지
온전한 정신으로야 그리 할 수 있었겠나
이념
해방의 만세소리
담을 넘기도 전에
잔칫상에 오른 시루떡
부침개 식기도 전에
탱크보다 무서운
이념의 물결은 들판을 휩쓸고
골육상잔의 파도는
방파제를 넘었다
남과 북의 대들보는 무너지고
모처럼의 휴식으로
훈훈하던 구들장은
폭삭 내려앉았다
무슨 죽을 이유로
한 이불 덮고 자던 형제들이
물고 뜯기는 원수가 되어
등을 돌렸단 말이냐
|
하지만 그 토속적인 표현과, 에둘러서 하는 엉거주춤한 묘사가 아니면서도
정제된 언어의 미학은 정말 슬프지만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시인의 글을 보다보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늪에 잠기는 느낌이구요.
때문에 8부 능선을 코 앞에 두고 이제 그만 발걸음을 돌리려합니다.
너무 힘들고 지치기에...
어쨌든 우리는 남자든 여자든
이 시들이 던지는 메시지를 영원히 잊지는 말아야할 것입니다.
이제 길게 숨을 쉬지요. 그리고 좀 헐렁한 모습으로 돌아갑시다.
다시 한 번 오인숙 시인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지 않고 전재한 점 깊이 사과하며
시인의 건강과 건필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