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의 날개위에 품바 그 다섯째 마당>
(부제 : 길에서 지샌 大學生活)

 

1 : <즐풍목우(櫛風沐雨)>

원래 좁기도 한 내 나라이지만 늘 한 사람에게만 화살을 쏘는 짓궂은 버릇을 가진
장난꾸러기 큐피드가 꾸미고 벌려 논 사업에 휘말려 서울, 부산, 진주, 울산, 대구,
그리고 온양을 정신없이 헤매 다녔고 내 침대에 누워본 날은
아마도 손을 꼽아야 했다.
어쩌다 집에 돌아온 바로 다음날이 중간시험이라는
느닷없는 소식에 시험범위자체도 모르는 책을
대강 훑어보고 시험을 보고...그렇게 대학생활의 초반이 흘러갔다.

턱없이 가벼운 지갑을 보충하려고 늘 계란을 30개쯤 삶아서
가방에 둘러매고 다니며 食事代用으로 했다.
그나마 수업일수를 덜 빼먹으려 언제나 밤기차를 이용했다.
가끔 얇은 지갑을 벌충할 욕심에 무임승차를 하려고
애랑이 찾아다니던 裵 裨將 개구멍 出入 흉내 내다
어느 날 밤은 역무원에게 제대로 붙들려 뺨이 얼얼하도록
주먹세례를 받기도 했다.

진주 촉석루 논개 바위에 앉아 삶은 계란 우겨 넣으며
흐르는 南江에 시름을 띄어 보내며 바람에 머리 빚고,
알 수 없는 과부(寡婦)심술처럼 時도 때도 없이 뿌려대는
때늦은 서러운 봄비에 沐浴을 했다.

 

2 : <“내사마 오늘 장사 안 할란다.”>

1년여(餘)를 그렇게 큐피드의 장난에 놀아나던 나는 그 때 다행히 
힘들고 괴롭고 한 없이 외로웠을 그 여정(旅程)의 半정도는
내 친구 하나와 동행을 했다.
어느 날 우리는 흘러, 흘러 초량 역(驛)에 떨어졌고,
허름한 대폿집에 방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아직 해가 서산에 걸린, 이른 초저녁인데도
막걸리 한 사발에 목을 축인 우리는 우선 한가락씩 뽑아댔다.

“왕거미 길을 묻는....”
<울고 넘는 박달재> 가 멋있게 친구의
구성진 바리톤으로 울려 퍼진다.
황해도 해주에서 기타와 바이올린 둘러매고
수많은 처녀 가슴에 불 질렀다던 부친을 닮아
한량기질이 풍부한 친구는
노래와 술을 무지 좋아했고
노래 솜씨 또한 기가 막혔다.
 
{여기서 사족 하나 :
지금처럼 노래방이 없던 시절인 그때는 노래를 부르려면 가사를
통째로 완벽하게 외워야 하던 시절이었고 반주 음악대신
젓가락 장단이 유일했다. 그래서인 가
그 친구는 그 때 다져진 실력인지 원래 노래에 타고난 소질 때문인지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화면은 아예 보지 않고 뒤로
돌아서서 눈을 지그시 감고 뽑아대는데 박자 음정이 완벽하게
맞고 그 표현력이 참 구성지다. 그래선지 6곡을 불렀다하면
4곡은 100점이다. 
그걸 보더라도 노래방에서는 목소리 큰 사람이 점수 잘 나온다. 라는 말은
잘못된 말일 것이다  왜냐하면 목청! 하면 이 몸이지만 난 그리 큰 점수를
받지 못하고 그 친구처럼 조용히 감미롭게
부르면서 점수가 좋은 것은 무엇보다도 박자가 점수에 가장
중요한 듯싶다.}

다음에 내가 <황성옛터>를 뽑았다.
그런데
갑자기 벌컥 문이 열리며 “지금 누가 황성옛터 불렀는교?”
나는 내 친구를 가리켰다. 잠시 눈을 이리저리 굴리던
초로(初老)의 주모 고개를 흔든다. 내가 정답이란다.

그리곤 “내사마 오늘 장사 안 할란다” 하며
문 걸어 닫고... ...우리 셋은 그 날, 밤을 꼴깍 새워가며
뽕짝에 맺힌 웬수를 열심히 젓가락장단에 비벼 갚았다.

 

3 : <그 겨울의 니나노 집>

서울에서 술을 마시다보면 지갑도 시간도 목을 조여 왔다.
술이 더 고팠다. 그런데 돈도 시간도 붙잡을 수 없으니...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다. 나와 꿍짝이 맞았던
친구 녀석 둘과 우리는 온양으로 달렸다.
새벽 두시에 잠옷 바람으로 우리를 맞은
온양친구는 우리를 니나노골목으로 안내했다.
우리는 3일 밤 3일 낮을 마시고 또 마셨다.
니나노언니들과 한데 엉켜 마시고 또 마셨다.
가끔씩 돌아가며 부르는 노래, 제 차례 돌아올 때와
화장실 가는 시간이 유일하게 술을 쉬는 시간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돈 걱정 없이, 시간 걱정 없이
젊음을 술과 씨름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온양은 통행금지가 없었다.

초등학교부터 나와 동창인 나의 귀한 친구중 하나인 온양 친구는
당시 군청 서기로 재직 했는데
낮에는 직장에 나가며 점심시간마다 들러
술 床 밑으로 내게 은밀히 돈을 밀어 주곤 했다.
술집에서 난 가장 젊지 않아 보이는 얼굴과
(=나를 20대 초반에 30대 후반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적당히 나온 人格의 틀로 처음부터 서울서 온
<묻지 마 錢主>가 되어 있었음이다.

평생 담배는 입에도 대지 않지만 술자리에서는 뻐끔 담배를
어쩌다 입에 물었던 나는 그때만큼은 절대로 담배를 손에
대지조차 않았다. 내 뻐끔담배 피는 모습을 보면 30대 초반으로 가장한
최 연장자 행세(行勢)가 들통 날 터이므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는 말처럼
내 친구들 역시 젊지 않아 보이는 점에서는
나와 도토리 키 재기 수준이었다.

 

4: <Miss 배호>

둥글고 큰 얼굴의 맏언니, 좁은 이마, 강파른 턱의 셋째,
그리고
늘씬한 키, 오뚝한 코, 서늘한 눈, 도톰한 입의 둘째
바로 Miss 배호였다.
그녀는 노래를 기막히게 잘 불렀다. 그런데 오직 배호 노래만
불렀다. 3일 낮과 밤을 배호만 줄곧 불러댔다.

레퍼토리가 떨어져도 다시 배호 replay 이었다.
늘 흐느끼듯 그렇게 배호만 불러 제쳤다.
그를 사랑해주고, 그를 여자로 눈뜨게 해준, 어느 날 교통사고로
不歸의 客이 돼버린 그 첫사랑이 배호 사촌동생처럼 생겼다나(?)
아님 그 첫사랑이 배호 노래를 즐겨 불렀다나(?)

아무튼 지그시 누르다 슬며시 펴고,
때로는 비틀고, 혀를 굴려가며 씹고,
무엇보다 꺾어지며 넘어 갈 때
가래 끓는 듯,  피눈물 삼키는 듯 토해내는
배호 특유의 절창(絶唱)에 감히 흉내 내기를
일찌감치 포기했던 배호 노래는
그 때 가사를 외울 정도로 들었다.

그녀에게선 가을 냄새가 났다. 그녀의 눈은 항상 젖어 있었고,
가녀린 등 뒤로 메마른 흙먼지 바람이 횅하니 감돌았다.
그녀는 늘 목말라 보였다.
그녀를 보면 나는 물 한잔을 주고 싶었다.
허지만 그녀는 물대신 술을 마시고 또 부었다.

그리고 눈도 풀렸고 혀도 꼬부라져 갔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은 얼음같이 풀릴 줄을 몰랐다.
그들 니나노언니들은 모두 우리들보다
서너 살에서 대여섯 살 위였다.
한참 피 끓는 젊디젊은 우리들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손조차 잡지 않고 언니들도, 우리도,
그저 모두 各自의 사랑을 앓고,
사랑을 마셨고 各自 안고 있는 고뇌(苦惱)를 마셨다.

그렇게 신음(呻吟)하듯이 그 겨울이 저물어 갔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왔다.
엉거주춤 가을마저 가버린 이듬해 초겨울
다시 찾은 온양의 니나노 집, Miss 배호는 거기에 없었다.
물마시듯 술을 쏟아 붓던 그녀는 님 따라 나비 되어
하늘나라로 가버린 뒤였다. 아님 나비된 님 오시는
마을 어귀 지키는 이름 모를 꽃 되어 가버렸는지...
그리고 그 초겨울에 Original 배호도 우리 곁을 떠나갔다.
(1971년 11월 7일 신장염으로 만29세의 나이에 세상 버림)

0O1-Bohemian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