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내, 내 남편은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안영근 의원의 부인 김말숙씨⑭

[주간조선 2005-12-06 11:53]  



“온갖 고생 다했어도 함께 걸어온 길 후회없어”
부모 반대 무릅쓰고 결혼, 농사짓고 냉면장사까지..."무슨 일 있어도 저만은 남편 편이 돼야죠"

1987년 5월 30일 인천 주안5동 성당에서 한 결혼식이 있었다. 새하얀 한복 차림을 한 남녀가 신부님 앞에 섰다. ‘기쁜 혼례를 하늘에 고해 만천하에 알린다’는 고천문(告天文)도 울려퍼졌다. 하지만 신부의 화장한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 됐다. 신부 측에선 친구 몇 명을 제외하곤 가족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빨갱이 백수에게 절대 시집 못보낸다”던 부모님은 끝내 딸을 외면했다. 잔칫날 국수는 성당 수녀님들이 손수 끓여줬다.

기쁨도 잠시였다. 강릉 경포대로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남편은 경찰에 잡혀갔다. 구속 이유는 6월 민주항쟁과 관련한 집시법 위반이었다. 그래도 하늘이 도왔나보다. 얼마 후 6·29 선언이 있었고 신랑은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슬픔도, 상처도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팔삭둥이로 태어난 첫째 아들이 ‘유사 자폐장애’란 진단을 받았다. 남편은 냉면도 팔고 생수도 배달해봤지만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전력이 주홍글씨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굶어 죽으란 법은 없었다. 아내가 가진 약사 자격증 덕분에 약국 일을 하며 네 가족의 생계를 꾸려갔다.

그 남편이 2000년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될 때까지 두 사람은 13년간 그렇게 살았다. 열린우리당 안영근(安泳根·47·인천 남구 을) 의원과 그의 부인 김말숙(金末淑·43)씨의 얘기다.

어딜 가나 욕 먹는 남편

지난 11월 18일 김말숙씨가 운영하는 인천의 수성당 약국을 찾았다. 김씨가 허겁지겁 약국에 도착했다. 지역구의 샤브샤브식당 개업식에 갔다가 잔뜩 밥을 먹고 왔단다.

이날도 예외가 아니었다. 개업식에서 만난 지역구민들은 김씨에게 남편에 대한 말을 쏟아놓았다. 한나라당 쪽 사람들은 “여기(한나라당) 있을 때 튀더니 거기(열린우리당) 가서도 튀느냐”고 했다. 또 열린우리당 쪽 사람들은 “열린우리당에 왔으면 대통령을 옹호해야지 왜 만날 딴지 놓느냐”고 비난했다. 안 의원은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탈당은 빠를수록 좋다”고 말한 뒤 당내에서 “당신이나 탈당하라”는 맹공(猛攻)을 받았다. “정체성에 의심이 간다” “해당(害黨)행위 그만하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안 의원은 욕 먹는 데 이골이 났다. 2003년 7월 한나라당을 탈당한 뒤 새벽 6시쯤이면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무조건 남편을 바꾸라고들 하세요. 그리곤 쌍욕을 내뱉으시죠. 지금도 아침에 전화벨이 울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요.”

욕 먹는 내용만 달라졌을 뿐, 시간이 흘러도 욕 먹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김씨는 지역구에서 들은 말을 그대로 남편에게 옮기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 듣기 좋은 말부터 전한다. “의외로 남편에 대해 ‘거 시원하게 말 잘했다’고 하는 분도 있어요. 밖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온 남편에게 저까지 뭐라고 하면 어쩌겠어요.”

하지만 설화(舌禍) 사태가 진정될 즈음이면 날을 잡아 남편에게 쓴소리를 한다. 그래도 말로 인한 사고는 그칠 줄 모른다. 지난 6월 안 의원은 “개혁당파에게 나가라고 대놓고 얘기는 못하겠지만 그들이 나가준다면 화장실에서 웃을 의원이 많다”고 했다. 자신의 주장이 그가 속한 당내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 모임)의 전체 뜻인 것처럼 비춰지는 것에 대해 항의를 받자, 안 의원은 안개모를 탈퇴했다.

김씨에게 ‘여의도에서 왕따 당하는 정치인’을 일컬어 ‘여의도’와 ‘왕따’의 첫자를 따서 ‘여왕 클럽’ 회원이라고 한다고 말해주었다. 밝았던 김씨의 얼굴이 잠시 어두워졌다. “남편이 왕따 당하면 내 아이가 어디 가서 왕따 당하는 것과 같지요. 안쓰럽지요, 뭐.”

집회 때 쓸 걸개그림 그리다 만나

두 사람은 1986년 가을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 안 의원은 인천지역 사회운동연합(인사련)의 집행국장이었고, 김씨는 숙명여대 약학과를 졸업한 뒤 인천 적십자병원 약제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김씨는 저녁 6시에 인천에서 병원 일이 끝나면 시외버스를 타고 영등포 선교회로 갔다가 밤 12시에 귀가했다. 선교회에 가면 그는 집회 때 쓸 걸개그림과 목판화 작업을 주로 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투쟁을 외치는 젊은이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대학시절 교지 편집일을 하다가 문화운동에 관심을 가졌어요. 전태일 초상화 같은 걸 그렸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났을 땐 두 사람은 전단지를 나눠 갖고 뿌리러 다녔다. “집회에 나갔다가 닭장차(경찰 버스)를 한두 번만 같이 타도 친해져요. 그때 지금 이 약국 근처에서 도망다니면 다방 주인들이 숨겨주곤 했는데.”(웃음)

피가 뜨거운 남녀가 만나 불같은 사랑을 했다. 만난 지 1년도 안돼 결혼을 결심했다. 하지만 이북 출신인 김씨의 부모는 국가보안법을 위반해 감옥을 세 번이나 다녀온 사윗감을 “다 돼도 빨갱이는 안된다”며 반대했다.



결국 김씨는 가출했고 1987년 5월 두 사람은 결혼했다. 두 사람의 사랑이 깊은 만큼 생활은 고단했다. 안 의원은 노동자들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집회 때 갖고 나가 팔았고 신문사 지국에서 일하며 새벽마다 신문도 돌렸다. 당시 풀무원을 운영하던 원혜영 열린우리당 의원과의 인연으로 생수 배달도 했다.

돈 벌겠다고 바둥거리는 남편을 보기가 늘 안쓰러웠다. 김씨는 “내가 약국 하니까 당신은 당신 하고 싶은 것 하라”고만 했다.

1993년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데리고 강원도 횡성으로 내려갔다. 안 의원은 민중당 소속으로 시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진 뒤였고, 큰아들 지우가 자폐증을 앓고 있었다. 밭에서 따온 고추, 배추, 감자와 앞마당의 닭이 낳은 달걀로 반찬을 해먹던 시절이다.

하지만 농사도 아무나 짓는 게 아니었다. 3년간의 농촌생활을 정리하고 와선 1996년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냉면집 ‘모란각’을 운영했다. 남편은 냉면 국수를 직접 뽑았고 아내는 계산대를 맡았다. 하지만 이것도 IMF 위기를 만나 문을 닫았다.

안 의원이 1998년 한나라당 인천 남구을 지구당 위원장을 맡을 때 김씨도 정치에 발을 디딜 뻔했다. 그 지역에서 한나라당 소속이던 시의원이 갑자기 여당인 민주당으로 출마하자 아무도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래서 김씨가 한나라당 시의원 후보로 나왔다. “말숙이라는 제 이름이 워낙 웃기잖아요. 이 지역에서 오래 약국 일을 하면서 쌓인 이미지가 나쁘지도 않았고요. 뭐 예상대로 떨어졌죠. 그래도 선거며 정치며 많이 배웠어요.”(웃음)

결국 2000년 안 의원은 국회의원 금배지를 달았다. 첫 월급은 고스란히 ‘함께 가는 길벗회’라는 장애인 단체에 기증했다. 안정을 찾았나 싶었는데 2003년 여름 남편은 “탈당하겠다”고 했다. 남편은 당을 바꾸고도 운이 좋았는지 국회의원에 당선돼 재선의원이 됐다.

“다른 국회의원 부인들 만나면 미안해”

인터뷰 전날, 열린우리당 의원 부인들의 모임인 ‘우리 가족’의 회식이 있었단다. 몇몇 의원 부인이 그에게 “안 의원님은 요즘도 말씀이 많으셔서…”라며 웃었다. 그는 씩 웃고 말았다.

하지만 이번 모임에선 유난히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대통령이 출당할 때다”란 남편 말을 생각하면 원내대표, 정책위의장의 부인들을 보기 민망했고 “당 쇄신을 통해 국면을 타개하지 않으면 고건 전 총리 카드가 유력한 (대선 후보) 대안”이라고 한 말을 떠올리면 당에서 대선 후보자로 손꼽히는 정치인 부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천정배 법무장관의 부인을 보면 남편 안 의원이 “법무장관은 수사지휘권을 강정구 교수에게 사용할 게 아니었는데 소 잡는 칼을 닭 잡을 때 써버렸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이래저래 죄송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남편이 한 말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었어요.”

정치인 아내를 해도 말 많고 탈 많은 정치인의 아내 노릇을 하기란 정말 힘들 것 같다. 김씨는 그냥 웃기만 했다. “정작 본인은 왕따를 당해도 편안한가 봐요. 이 사람은 국회의원이란 자리 자체에 그렇게 연연해하지도 않아요. 이 자리를 덤으로 얻었다고 여기거든요.”

사실 안 의원이나 김씨가 힘겹게 느꼈을 때는 따로 있단다. “국회에서 왕따 당하는 건 괜찮아요. 감옥을 들락거리며 노동운동하던 혈육 같은 분들과 쌓아온 관계가 무너질 때 너무 마음이 아파요.” 안 의원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손을 들지 않고 보완·개정 쪽의 입장을 밝혔을 때 지인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이럴 수 있느냐”고 항의했다.

한나라당 의원 부인, 열린우리당 의원 부인

부부는 일심동체다. 남편이 당을 옮긴 뒤 한나라당 의원 부인 모임에 나가던 김씨도 이제 열린우리당 의원 부인 모임에 나간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물어봤다. “16대 때 (한나라당) 의원 부인 모임에 가보면 제가 거의 막내였어요. 그런데 열린우리당에 오니 서른 살이 갓 넘은 90년대 학번인 분도 있어요. 제가 나이 많은 쪽에 속한다니까요.”



그뿐만이 아니다. “열린우리당엔 한나라당과 달리 ‘사모님’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권위적이지 않고 활력이 넘쳐요. 그런데 상대적으로 국회의원이란 자리가 쉽게 주어진 남편들을 둬서인지 (국회의원이란) 직책을 대단하게 보지 않는 것도 같데요. 한나라당 부인들은 ‘공주과’에 속한다고 해도 국회의원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지 경험한 분이 많거든요.”

김씨의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차이점도 있겠구나’ 싶어졌다. “열린우리당 의원 부인들 사이에 있으면 대체적으로 서민적인데 아무래도 여당을 두 번째 해서인지 힘이 느껴져요. 한나라당 의원 부인들은 야당을 두 번 하면서 헝그리 정신이 강해진 것 같고요.” 정치인의 아내 눈에 비친 정치의 현실이다.

다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홈페이지와 달리 안 의원의 홈페이지는 노랑색이 아닌 파랑색으로 꾸며져 있다. 문득 김씨에게 남편의 정체성에 대해 물어봤다. “정체성이요? 없는 것 같은데요. (웃음) 민주노동당 의원님들이 단결하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지만 이제 정체성을 따지는 게 우리나라 정치현실에 좀 안 맞는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더니 정체성을 놓고 남편을 비판하는 의원들도 정작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정확히 말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열린우리당에 계신 분 중에 한나라당 공천을 못 받아서 온 분들도 솔직히 있잖아요. 그런 분들이 더 난리치시는 걸 보면….” 그러더니 김씨는 “그렇게 오늘 헐뜯다가 또 내일의 동지가 되고, 정치가 뭐 원래 그런 거죠”라고 했다. 남편이 걸어온 굴곡 많은 인생을 함께 걸어오면서 그가 터득한 지혜다.

남편은 욕을 먹을지언정 그는 남편이 속한 당에 대한 로열티가 열린우리당에 와서 훨씬 높아졌단다. “예전에 (남편이) 한나라당에 있을 땐 입당원서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요즘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권한다니까요. 저도 당원 가입해 당비도 꼬박꼬박 내고요.”

17대 총선 직후에 ‘나는 아빠가 국회의원이 된 게 참 부끄럽다’는 글을 안 의원의 홈페이지에 올려 놀라게 했던 둘째 아들 신우는 요즘 “커서 정치인이 되고 싶다”고 한다. 자폐증이 있는 큰 아들 지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안 가고 일자리를 찾을 것이란다. “제 욕심이야 큰 아이를 대학에 보내고 싶지만 그거야 엄마 만족일 뿐이죠. 장애인 아이를 둔 엄마들은 ‘아이보다 딱 하루만 늦게 죽으면 한이 없다’고들 해요. 저도 그 마음이죠, 뭘.”

김씨는 남편이 자기 양심에 부끄럽지 않은 정치인이 되길 바랄 뿐이다. “남편은 남을 안아주고 다독거리지 못하고 싫은 티도 팍팍 내요. 그야말로 정치적이지 못한 사람이죠.” 그는 “남편은 다시 냉면 국수 뽑으면서도 잘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는 이제껏 걸어온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는 “남편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서 “낭만적이고 열정 많은 사람이 원래 사회운동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남편이 욕 먹는 걸 보면서 이러다가 저 양반 혼자만 덩그러니 남는 게 아닐까 싶어져요. 아무리 그래도 저 한 명은 남편 편이 될 거예요.”(웃음)

상처 없이 생기는 맷집이 없다더니 어떤 국회의원 부인보다도 여유가 있어 보였다.

황성혜 주간조선 기자(coby0729@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