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70년 차이로 두 사람은 총을 맞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1909년 10월 26일 아침 나절에 하얼빈 역에서 총을 맞았고
박정희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 저녁 나절에 청와대 옆집에서 총을 맞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쏜 사람은 이토의 얼굴도 몰랐다는 대한제국의 안중근이란 청년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쏜 사람은 대한민국 육사 동기생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유언은 자기를 쏜 안중근에게 말한 "바보같은 놈!"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유언은 자기를 부축한 심수봉에게 말한 "나는 괜찮다"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일본 국민이 존경하는 "10대 영웅"의 한 사람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아직까지도 찬사와 비판이 공존하는 "불행한 영웅"의 하나로 남았다.

이토 히로부미를 쏜 안중근은 한국, 일본 양국에 팬클럽까지 있는 역사적 영웅이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쏜 김재규는 팬 클럽 하나 없는 "우발적이고 무모한 테러범"이 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대통령의 장례식은 모두 사상 최대 규모의 국장으로 치러졌고,
이 두 사람의 장례식 뒤의 정치 흐름은 모두 군부 강경파가 주도하는 정치로 넘어 갔다.

주도권을 잡은 일본의 군부 강경파는 10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한일합방을 성사시켰고
--- 너무 잘 나가다가 세계 대전 일으키고 망했지용 --
주도권을 잡은 한국의 군부 강경파는 7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민주화운동을 진압하였다.
--- 서울 올림픽도 유치하고 잘 나가다가 주모자는 백담사 갔다 왔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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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70년 간격으로 같은 날 총에 맞은 이 두 사람은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서로 닮은 점이 꽤 많은 것 같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다 시골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 났다는 점이 일단 비슷하고,
각자 자신의 조국을 근대화시키는 데에 평생을 보냈다는 점이 공통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역사를 바라볼 때에 감정을 잔뜩 실어서 보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따라서 일본 사람들이 이순신과 안중근을 숭배한다는 말을 우리는 도저히 이해 못한다.

아무리 일본 사람들이 강자숭배사상에 젖어 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자신들의 조상을, 자신들의 영웅을 죽게 한 조선인을 숭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이순신이나 안중근에 대해서 알고 있는 정도가 "10"이라면
우리 나라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알고 있는 정도는 얼마나 될까? 0.5? 1?

그런 의미에서 이토 히로부미에 대하여
조금 더 자세히 알아 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이토 히로부미...
그는 사실 오래 전에 일본으로 넘어갔던 임(林)씨 성을 가진 조선인의 후예였다.

임진왜란 때 납치된 사람의 후손인지, 아니면 다른 시기에 납치된 사람 후손인지...
그것도 아니면 동해에서 고기잡이하다가 풍랑에 일본까지 표류된 어부의 후예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분명히 일곱 살 때까지의 성씨는 그 아버지와 똑같은 임씨였다.
물론 일본식 발음으로는 "하야시"였겠지만...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았던 가난한 농부 임씨 아저씨는 불쌍한 어린 아들을
하급 사무라이였던 "이토" 가문으로 심부름이나 시키라면서 들여 보냈는데...
얼마 안 되어 그 가문에 양자로 입적이 되고 성씨도 "이토"로 창씨개명되면서
이후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란 이름으로 평생을 지내게 된다.

그러다가 개화파 사무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문하생이 되면서
일본 메이지 유신 초기의 주역들과 많은 교분을 갖게 되는 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다.

22세 때에 젊은 혈기로 영국 공관을 불 태우는 등 저항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으나
영국에 직접 가서 영국을 보고 온 후로는 철저한 "자기주도적 개화파"로 변신하였다.

일본과 한국의 개화 과정에 있어서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이 부분이다.
일본은 "자기주도적 개화파"가 힘을 얻어서 자기주도적인 개화가 가능했다면
조선은 "자기주도적 개화파"가 힘이 없어서 질질 끌려 다니며 개화를 당했다는 점이 다르다

이때 이후 죽기 전까지 이토 히로부미는
40여년간 장관·총리·전권대사·정당 총재·추밀원 의장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일본 역사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 중에서 특히 총리는 무려 4번이나 연임했다.

미국·영국·러시아·청나라와의 협상에 전권대사로 참여해 외교의 틀을 짜고,
일본헌법의 기초를 마련하는 등 일본 현대사에서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별로 없을 정도로 그는 메이지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기획도 승리도 모두 그의 업적이었고..
승리 후 각종 조약의 일본측 특명전권대사의 역할도 모두 이토의 몫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철저한 사전 준비는 항상 성질 급한 군부 강경파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이러한 치밀성은 언제나 완벽한 승리를 보장했기에 달리 불만은 없었다.

한국을 정벌하여 집어 삼키려 했던 소위 "정한론"에 대해서도 이토는 처음부터 반대했다.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서서히 썩어서 망할텐데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토는 군사 작전보다는 이미 충분히 망가져 있는 고종 임금의 통치력을 활용하였고
나라보다는 자신의 안위를 더 챙기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더 활용하였다.

조선의 임금을 대한제국의 황제로 승격시켜 주고..
이미 죽고 없는 왕비도 황후로 승격시켜 명성황후로 불러 준다고 하니까

이토의 장기적인 계획을 알 리 없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이제 우리도 드디어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한 황제의 나라가 되었구나"면서 기뻐 날뛰고..

독립협회 부위원장이었던 이완용은 독립문 세운다면서 여기저기 모금하러 다녔으며..
독립문 양쪽에 있는 "독립문", "獨立門"이라는 현판 글씨도 자신이 직접 써서 붙였다.

태극기 옆의 "독립문"이란 글씨의 주인공 이완용을 매국노라고들 하지만
사실 나라 빼앗긴 것이 어디 이완용만의 책임이겠는가..

을사보호조약 협의 때에도 사실 아침 10시부터 이튿날 새벽 2시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이완용을 포함한 많은 대신들이 13시간 동안 줄기차게 반대만 하다가....

막판에 이완용이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이미 대세가 다 기울었는데, 지금 이 회의에서 반대한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라는 말이 나왔고,

그 시간까지 고종황제를 대신하여 회의를 주재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럼, 이 조약을 더 이상 반대하지는 않겠다는 뜻으로 봐도 좋은가?"라고 하자
이완용이 "마음대로 하시오"라고 말하였고...

배고프고 졸린 대신 네 명이 줄줄이 "나도 같은 생각이오"라고 하자
이토는 잽싸게 "8명 중에 5명 찬성이니 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땅땅땅..."
라고 외쳤고 이로써 을사보호조약이란 것이 통과되어 버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만든 일본 메이지 유신의 입헌군주제 헌법과 거의 같은 내용인
대한제국 헌법에는 "대신들이 결정하면 그걸로 끝이고 황제는 조용히 지켜보면 된다"
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이나 황제는 어차피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토 측에서 볼 때에는 황제의 사인이 있든 없든 내각 회의에서 가결되면
그 조약은 무조건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었다.
일본도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대한제국도 마찬가지란 이야기였다.

사실 모든 것은 아까 점심 먹고 일찌감치 도망 가 버린 고종황제가 책임 져야 할 일인데
이완용의 이 한 마디는 이완용을 두고두고 천하의 매국노로 결정짓는 말이 되어 버렸다.

어쨌든 이토 히로부미의 노련한 "버티고 기다리기"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이 을사보호조약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두고두고 이토를 규탄하게 만든다.
그런데, 정작 규탄 받아야 할 고종 황제는 언제나 싹 비켜 나간다. 참 이상한 현상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인생 말년에 조국 일본을 위하여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다.
대한제국 문제는 거의 마무리된 것 같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고서는,
조국을 위한 마지막 봉사활동으로 만주 병합 작전을 기획했고...
러시아, 만주 지방 출장 중에 대한제국의 열혈청년 안중근의 총을 맞게 된다.

이토 히로부미는 3발의 총을 맞았는데,
숨 넘어 가는 중에도 비서에게 누가 쏘았는지 물어 보았고
비서가 대한제국의 어떤 젊은이라고 답변하자
이토 히로부미는 "바까나 야쯔..(바보 같은 녀석이...)"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마지막 유언의 의미는 아마도,
"이미 국제적으로 모두 양해가 된 사항이고...
나 한 사람 없어진다고 별로 달라질 것도 없을텐데....
정말 바보 같은 녀석이 바보 같은 짓을 했구만..."
이란 뜻이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국제적인 거물이 되어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얼굴도 모른다면서 직접 처단을 하고자 나섰고...
정작 본인은 장렬하게 옥쇄하겠다는 안중근의 계획 또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한 강렬한 저항정신이 이봉창, 윤봉길로 이어졌고...
현재는 팔레스타인 아랍민족의 교과서가 되고 있다.

일본 사람들이 이토 히로부미를 존경하는 정도만큼
혈혈단신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용감하게 저격한 안중근마저도
일본 사람들의 존경 대상이 되었으니,
일본이란 나라는 참으로 특이한 나라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지금도 말이 많은 일본 사람들의 신사 참배...
그 참배하는 "신사(神祀)"에 이순신 장군도 모시고 안중근도 모신다 하니..
우리 나라 사람의 평균적인 상식으로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토의 치밀한 업무수행능력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다만, 우리에게 해를 끼쳤으니 그저 나쁜 놈, 쪽발이 새끼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토는 조선 세종 때의 황희 정승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는 청백리로도 추앙 받고 있다.
이토가 죽은 뒤에 재산이 너무 없어서 천황이 유가족에게 3백만원인가 주었을 정도이다

---- 이토 히로부미를 스승으로 모셨다는 이완용도 이토의 청렴함은 배우지 못했다.
---- 아직도 여기저기에서 재산이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 황제는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최고 등급의 시호를 내렸고...

과학만 탐구하던 종두법의 선구자 지석영까지 나와서 이토의 추도사를 읽었다.
100년 가까이 지난 최근에 와서, 그 지석영은 그 날의 추도사 때문에
"한국 과학기술 명예의 전당" 명단에서 탈락되는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 그 지석영의 형님 지운영이 우리나라 애국가 작사자 중의 하나라는 설도 있다---

온건파 이토 히로부미가 죽자 성질 급한 군부 세력들은
통감으로 있던 데라우치 육군대장을 움직여서 얼른 한일합방을 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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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도 이토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농부 출신이었고
이토와 마찬가지로 외국 가서 외국을 직접 보고 배워 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곱 살에 이토 가문에 양자로 가서
"임 아무개"라는 이름에서 창씨개명하였고..(일본서는 창씨개명이 쉬운 모양이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1학년 23세 때에 갑자기 고향 가서 창씨하고 오라 그래서..
큰형님의 뜻에 따라 "고령 박씨"에서 "高"와 "木"을 따서 "高木"으로 창씨를 하였고
이름은 "정희"에서 "正"을 살리고 일본 남자들이 잘 쓰는 "雄"을 붙여 개명을 하여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이름으로 만주로 돌아 갔더니...
만주군관학교의 만주인 생도들이 모두 "참, 이상한 게 조선놈들이라"면서 비웃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이 두 사람은 나란히 만 44세 되던 해에 정치적으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이
이토 히로부미처럼 조국 근대화의 기반을 확실히 닦아 놓은 점은 닮았으나
이토 히로부미처럼 확실한 국민의 지지를 얻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제삿날이 같은 이토와 박정희... 그리고 안중근과 김재규....

좀더 자세히 비교 검토하여 오늘의 교훈을 찾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아직 우리나라 풍토에서는 시기상조라 대충 여기서 그만 두어야겠네요...

참, 박정희 대통령 총 맞기 6주일 전 미국 주간지 타임지 기사에서
멀쩡한 박정희 대통령 사진을 7-8명의 독재자 귀신들 사진과 나란히 실어 놓고서는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 당장 죽어도 공화당이 튼튼해서 한국은 괜찮을 거다"라는 내용의
"세계의 독재자들(The Dictators of the World)"라는 기사를 게재한 그 저의가 무엇일까...

등등 궁금한 일들도 아직도 참 많지만..
모두 나중으로 미루어야겠네요....

아무튼 박정희 대통령은 숨이 넘어 가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는 괜찮다"면서 다른 부하들 걱정을 했다고 한다.
평소 충무공 이순신을 흠모하던 박 대통령으로서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충무공 숭배사상도
일본 사람들의 이순신, 퇴계, 율곡 숭배사상을 보고 역수입한 것이다.

참, 이토 히로부미의 메이지 유신 바탕이 되는 철학의 중심에
조선의 퇴계 사상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들 계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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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이 "한일합방의 원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철권정치 독재의 표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생애의 모든 업적을 철저히 외면하고 만다면 우리가 역사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우리는 역사를 보는 자세를 약간은 개선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욕을 하든 찬양하든 그거야 각자 개인이 판단할 몫이지만...
일단은 자세히 알고 난 뒤에 그런 판단을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 보자.

자기네들의 철천지 원수 이순신을 아예 "전쟁의 신"으로 모시고 지속적으로 섬기는
일본인들의 "뭔가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 보자고 하면 나도 매국노가 되는 걸까?

독립문에 태극기 문양을 넣고 앞뒤로 자신의 친필 글씨까지 써 올려서 독립의 의지를 굳건히 하고,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 운동 때에 자신의 건물인 명월관을 기꺼이 회합장소로 제공한 이완용에게 망국의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말 것인가?

"싸울 준비도 전혀 안 되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최명길의 말을 안 듣고 계속 싸우자고 하다가 나라 망신, 왕실 망신 모두 당한 것을 타산지석으로 삼자"
라는 이완용의 변명은 정말로 전혀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었을까?
만약 전 국민이 일본에 대한 결사항쟁으로 나아갔다면 우리에게도 승산이 있었을까?
이기지도 못하고 옛날 병자호란 때처럼 더 많은 젊은이들이 죽지는 않았을까?
제2의 최명길을 자처한 이완용의 판단에 대하여 손익계산을 한번 해 봐야 할 것 같네요.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이완용을 배후에서 조종한 "의지의 친일파"도 있었는데 다들 잘 아시는지 모르겠네요

일찍이 송병준과 함께 일본 유학 갔다 와서...
이완용보다 일곱 살이나 많으면서도
이완용의 일본어 통역비서관으로 활약했던 사람이지요...
--- 한성영어학교 출신인 이완용은 일본어를 몰랐다... 배우려고도 안 했다.
--- 한성영어학교 인천분교가 지금의 인천고등학교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극장 사장으로, 소설가로 나서기도 하는데요
참, 이 사람이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자신의 소설에서
"일본 사람 좋은 사람" "중국 놈 나쁜 놈"이란 공식을 만든 사람입니다.

네? 알 듯도 하다고요?

네-- 아마 맞을 겁니다.
일본어 모르는 이완용에게 일본어 통역관으로 활약하던 그 사람은
바로 "혈의 누" "귀의 성" 등 일본식 소설 제목으로 소설을 쓴 --
바로바로 "이인직"이라는 사람입니다.

이인직-- 이 사람은 나중에 병원에서 죽을 때에도
왜 이완용이 자기보다 더 높은 귀족이 되었느냐며 불평을 했다고 합니다.

네? 앞으로 고전문학 책에서 "이인직"이라는 이름도 빼야겠다고요? 서정주는 벌써 빠졌고.
그러면 학생들이야 무지하게 좋아 하겠지요... .
책이 자꾸 얇아지니까요.. 시험 범위도 점차 줄어 들 것이고...

이왕이면 이광수 소설, 최남선 독립선언서까지 몽땅 다 빼시지요. 뭐...
더구나 최남선은 일본식 7-5조 율조를 수입해서는...
그게 우리 나라 전통 민요의 율조라고 자랑했던 사람이랍니다....
---- 일본과 한국이 내선일체니까 우리 나라 민요라 해도 맞기는 맞는 건가? 그 참 헷갈리네 --

성질 나면 자꾸 빼요, 자꾸 빼.
역사책 한 장도 안 남게...

ㅎㅎㅎ... 신난다.
시험범위 또 줄었다.

사실은 요즈음도 친일파를 많이 볼 수 있다.
방송국의 각종 쇼프로, 연속극 내용, 광고 아이디어 등 수많은 분야에서
일본의 것을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많다.

그래 놓고서는 말로만 친일파 나쁘다고 하고...
자기네들이 그동안 일본 것 베낀 것 들킬까 봐
일본문화 개방은 언제나 시기상조라고 말한다.

요즈음 친일파와 옛날 친일파가 같은 말일까, 다른 말일까
참 어려운 말이다

그나저나... "독도는 분명히 우리 땅인 게 맞긴 맞지만, 그래도 좀 안 갔으면 좋겠다"
라는 어느 장관님의 말씀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역시 너무너무 어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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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문학박사 황재순(제물포고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