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누군가 그런다. “한국은 재미가 넘쳐 흐르는 지옥이고 미국은 심심한 천국이라고” 맞는 말이다. 한국 처럼 유흥 문화가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모든 사회 생활의 중심에는 가족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의 경우에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갖는 유일한 낙은 한국 식품점에 들려서 한국 영화를 빌려 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지난 한국 영화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식료품점에 들렸다. 가게 주인에게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느냐고 했더니 조금 시간이 된 테이프를 하나 건네 주면서 그 영화에 나오는 여 주인공의 연기가 볼만하다고 추천한다. '오아시스’라는 그 영화는 시작 부터 좀 무거운 분위기를 주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았다. 그 주인 말대로 여 주인공의 뇌성마비 장애자 연기는 감동적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필자를 그 영화 속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그 언젠가 파긴슨 환자의 연기를 하던 ‘로버트 드니로’보다 더 실감있게 역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녀의 우수한 연기의 감상을 떠나서 영화 내면에는 우리의 사회에 告하는 어떤 메세지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제작한 지가 2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아직 퍼낼 신선한 물이 그 영화에 남아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형무소에 갔다온 ‘홍종두’ 는 출감 후 부터 자기가 기대하던 사회로부터 흐르는 싸늘한 냉기를 느낀다. 형을 살리려고 대신 갔다온 감옥 생활이라는 희생에 감사하기는 커녕 온 가족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여 주인공 ‘한공주’ 또한 지체장애자라는 이유로 식구들한테 받는 인간적 처우는 엉망이었다. ‘한공주’ 때문에 수혜 받은 장애자 아파트로 온 가족이 이사가면서도 공주를 허름하기 짝이없는 서민 아파트에 처 박아두고 떠난다. 보살펴 주는 것도 형식적이라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한다. 비록 가족의 일원이라도 장애인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사회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애자라고 해서 그리고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해서 거북하게 따 돌림을 당하는 지체가 되어버린 그들에게는 몸하나 조차 의탁할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며 보다듬어 줄수 있는 그들만의 정신세계가 있었다. 감독은 그 햇살같이 맑은 영혼이 그들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비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한공주’의 영혼이 비 장애인으로서 호흡하는 모습도 간간히 비추어진다. 바깥 세상과 내면 세계의 차이를 실감있게 그려주는 장면들이다.
자연인으로 태어나서 사회인이 되고자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라는 큰 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들도 정상인 처럼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고, 파티에도 가고 싶어 한다. 다른 젊은이처럼 데이트도 그리고 섹스도 하고픈 욕망들이 화면에서 그려 진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느껴야 할 사랑의 희열(喜悅)은 단지 판타지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들과의 의욕과는 상관 없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재수가 없다고 표정 짓는 사람들의 장면이 이어진다. 두 주인공은 그것이 당연한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져 보려고 한다.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정신과 그 욕구는 건강했다. 허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둠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자유 욕구 마저 허용이 안된 채 불 이익을 당하는 사건이 전개되면서 영화는 끝을 낸다.
어두운 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무서운 우리 사회의 선입관을 난도질하는 영화였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장애자를 비 장애자와 같은 인격을 가진 개체로서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기 보다는 일단은 '가까이 하기엔 불편한 당신’으로 취급하여 왔다. 그래서 그들이 갖는 사회에 대한 피해 의식 또한 절망적이며 삶에 대한 의욕의 싹을 짤라 놓기가 일쑤였다. 우리사회의 측은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는 필자를 18년 전의 기억속으로 밀어 넣는다.
한국이 올림픽 개최 국가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조국은 물론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던 80년대 무렵 필자는 플로리다 대학에서 영어 과목을 두 학기 수강을 하고 있었다. 문법을 담당하는 여선생은 종종 수업 시작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5 분 정도 늦었다. 미국 학교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번복 되다보니 어느 학생이 따지는 조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명의 어린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크리스쳔 집안의 주부였던 그녀의 남편은 플로리다 대학 물리학과 교수였고, 대학교 4 학년 된 아들과 2학년이 된 딸이 있었다. 이 들 네 가족이 한 명씩 맡아서 뒷 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 녀가 주로 늦게 왔던 이유는 입양아들이 모두 1급 장애아로서 척추장애자나 오아시스 영화에서 나오는 ‘한공주’처럼 뇌성마비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의사 소통과 몸의 거동이 힘 들어서 자주 침대에 오줌을 쌌고 그런 날은 그 들을 목욕시키고 새로이 침대를 갈아 주어야 하는 일로 수업이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아동을 입양하는 경우를 종종보기는 했어도 장애아이를 입양한 경우는 흔치를 않아서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루는 종강이 되어 학생들 모두가 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마침 그 날 그들과 가족이 되어 살고있는 입양아들을 볼 수 있었다. 3살 박이 부터 시작해서 9 살 까지 되는 남자 아이들이었으며 한결 같이 동양인이었다.
필자는 설마하는 생각에 그 교수에게 어느 나라에서 입양된 아이냐고 물었다. 넷중에서 세명이 한국에서 온 아이고 나머지 한명은 미국 본토에서 입양된 아이라고 하면서 그녀의 부가 설명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 미국에서는 장애아라고 해도 부모들이 더 키우려고 해서 왠만해서는 입양하기 어려운데 한국은 유독 쉽다”. 그 녀의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의 말을 그녀와 나눌 수 없었다. 단지 필자가 한국에서 유학온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을 뿐이었다. 그 기억을 새삼 지금 떠 올린다는 자체는 그 것을 안고 살아온 세월만큼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한다.
'97년 무렵 필자는 방송진행과 시민운동 때문에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 운동을 같이 하던 ‘고은광순’ 한의사의 도움으로 자신의 병원에 오는 장애자 가족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우면동 장애자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장애인 부인은 취재가 한참 진행되던 중간에 펑펑 눈물을 쏟는다. 자녀들이 부모가 장애자라는 이유 만으로 학교급우들 한테 그리고 선생한테서 차별을 받다 못해 학교도 안가고 삐뚤어 지고 있다고 하며 사회를 향해 맺힌 한을 쏟아냈다. 자기 이름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선생은 항상’ 어이 장애자’하고 불러대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 후 그들은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장애자 아파트를 포기하고 변두리로 이사하는 결심을 해야만 했다.
장애인 복지예산 배정에 있어 OECD 국가중에서 한국이 최 하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장애인에 대한 정부의 시각은 물론 사회적 시각이 아주 편협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장애자 학교가 자기 동네로 오면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 먹이며 데모를 하기도 하고, 자기의 자녀가 장애자 가족의 아이와 짝궁이 되면 바로 담임에게 찾아와서 항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장애 아동의 담임을 기피하는 교육 현장들이 속출하기도 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의지가 박약한 교육 정신으로 인해 멍들어 버린 사회는 좀 처럼 치유가 될 기미가 안 보인다. 또한 그같은 사회의 의식에 氣가 눌린 나머지 "장애인의 50%가 의무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는 억울한 실정" 을 논박할 만한 여유가 그 들 장애인에게는 없는 것이다.
최근에 필자는 시애틀로 출장을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뇌를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언어장애와 수족의 마비를 겪으면서 치료 기간 중 혹시 장애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애를 태우며 걱정하기도 했다. 동시에 본인이 그간 말로만 장애자를 걱정을 하였다는 사실에 깊은 참회를 하였다. 오늘 현재 한국의 장애자 가운데 질병이나 사고 등의 후천적 원인으로 인한 장애자가 88%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장애자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허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애써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자들에 대한 인식이 불행하게도 어릴 때 부터 잘 못 각인되고 있다. 그러한 의식이 싹트는데는 어린 아이의 가정 교육을 담당하는 엄마들의 책임이 큰 것이다. 책 읽기 보다는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선호(?)하는 그들 엄마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영화나 드라마 작품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의식과 사회 정서를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갖고 있는 작품의식은 필자 뿐만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이 훈주
철지난 한국 영화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식료품점에 들렸다. 가게 주인에게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느냐고 했더니 조금 시간이 된 테이프를 하나 건네 주면서 그 영화에 나오는 여 주인공의 연기가 볼만하다고 추천한다. '오아시스’라는 그 영화는 시작 부터 좀 무거운 분위기를 주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았다. 그 주인 말대로 여 주인공의 뇌성마비 장애자 연기는 감동적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필자를 그 영화 속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그 언젠가 파긴슨 환자의 연기를 하던 ‘로버트 드니로’보다 더 실감있게 역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녀의 우수한 연기의 감상을 떠나서 영화 내면에는 우리의 사회에 告하는 어떤 메세지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제작한 지가 2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아직 퍼낼 신선한 물이 그 영화에 남아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형무소에 갔다온 ‘홍종두’ 는 출감 후 부터 자기가 기대하던 사회로부터 흐르는 싸늘한 냉기를 느낀다. 형을 살리려고 대신 갔다온 감옥 생활이라는 희생에 감사하기는 커녕 온 가족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여 주인공 ‘한공주’ 또한 지체장애자라는 이유로 식구들한테 받는 인간적 처우는 엉망이었다. ‘한공주’ 때문에 수혜 받은 장애자 아파트로 온 가족이 이사가면서도 공주를 허름하기 짝이없는 서민 아파트에 처 박아두고 떠난다. 보살펴 주는 것도 형식적이라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한다. 비록 가족의 일원이라도 장애인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사회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애자라고 해서 그리고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해서 거북하게 따 돌림을 당하는 지체가 되어버린 그들에게는 몸하나 조차 의탁할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며 보다듬어 줄수 있는 그들만의 정신세계가 있었다. 감독은 그 햇살같이 맑은 영혼이 그들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비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한공주’의 영혼이 비 장애인으로서 호흡하는 모습도 간간히 비추어진다. 바깥 세상과 내면 세계의 차이를 실감있게 그려주는 장면들이다.
자연인으로 태어나서 사회인이 되고자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라는 큰 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들도 정상인 처럼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고, 파티에도 가고 싶어 한다. 다른 젊은이처럼 데이트도 그리고 섹스도 하고픈 욕망들이 화면에서 그려 진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느껴야 할 사랑의 희열(喜悅)은 단지 판타지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들과의 의욕과는 상관 없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재수가 없다고 표정 짓는 사람들의 장면이 이어진다. 두 주인공은 그것이 당연한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져 보려고 한다.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정신과 그 욕구는 건강했다. 허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둠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자유 욕구 마저 허용이 안된 채 불 이익을 당하는 사건이 전개되면서 영화는 끝을 낸다.
어두운 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무서운 우리 사회의 선입관을 난도질하는 영화였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장애자를 비 장애자와 같은 인격을 가진 개체로서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기 보다는 일단은 '가까이 하기엔 불편한 당신’으로 취급하여 왔다. 그래서 그들이 갖는 사회에 대한 피해 의식 또한 절망적이며 삶에 대한 의욕의 싹을 짤라 놓기가 일쑤였다. 우리사회의 측은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는 필자를 18년 전의 기억속으로 밀어 넣는다.
한국이 올림픽 개최 국가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조국은 물론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던 80년대 무렵 필자는 플로리다 대학에서 영어 과목을 두 학기 수강을 하고 있었다. 문법을 담당하는 여선생은 종종 수업 시작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5 분 정도 늦었다. 미국 학교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번복 되다보니 어느 학생이 따지는 조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명의 어린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크리스쳔 집안의 주부였던 그녀의 남편은 플로리다 대학 물리학과 교수였고, 대학교 4 학년 된 아들과 2학년이 된 딸이 있었다. 이 들 네 가족이 한 명씩 맡아서 뒷 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 녀가 주로 늦게 왔던 이유는 입양아들이 모두 1급 장애아로서 척추장애자나 오아시스 영화에서 나오는 ‘한공주’처럼 뇌성마비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의사 소통과 몸의 거동이 힘 들어서 자주 침대에 오줌을 쌌고 그런 날은 그 들을 목욕시키고 새로이 침대를 갈아 주어야 하는 일로 수업이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아동을 입양하는 경우를 종종보기는 했어도 장애아이를 입양한 경우는 흔치를 않아서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루는 종강이 되어 학생들 모두가 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마침 그 날 그들과 가족이 되어 살고있는 입양아들을 볼 수 있었다. 3살 박이 부터 시작해서 9 살 까지 되는 남자 아이들이었으며 한결 같이 동양인이었다.
필자는 설마하는 생각에 그 교수에게 어느 나라에서 입양된 아이냐고 물었다. 넷중에서 세명이 한국에서 온 아이고 나머지 한명은 미국 본토에서 입양된 아이라고 하면서 그녀의 부가 설명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 미국에서는 장애아라고 해도 부모들이 더 키우려고 해서 왠만해서는 입양하기 어려운데 한국은 유독 쉽다”. 그 녀의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의 말을 그녀와 나눌 수 없었다. 단지 필자가 한국에서 유학온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을 뿐이었다. 그 기억을 새삼 지금 떠 올린다는 자체는 그 것을 안고 살아온 세월만큼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한다.
'97년 무렵 필자는 방송진행과 시민운동 때문에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 운동을 같이 하던 ‘고은광순’ 한의사의 도움으로 자신의 병원에 오는 장애자 가족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우면동 장애자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장애인 부인은 취재가 한참 진행되던 중간에 펑펑 눈물을 쏟는다. 자녀들이 부모가 장애자라는 이유 만으로 학교급우들 한테 그리고 선생한테서 차별을 받다 못해 학교도 안가고 삐뚤어 지고 있다고 하며 사회를 향해 맺힌 한을 쏟아냈다. 자기 이름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선생은 항상’ 어이 장애자’하고 불러대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 후 그들은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장애자 아파트를 포기하고 변두리로 이사하는 결심을 해야만 했다.
장애인 복지예산 배정에 있어 OECD 국가중에서 한국이 최 하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장애인에 대한 정부의 시각은 물론 사회적 시각이 아주 편협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장애자 학교가 자기 동네로 오면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 먹이며 데모를 하기도 하고, 자기의 자녀가 장애자 가족의 아이와 짝궁이 되면 바로 담임에게 찾아와서 항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장애 아동의 담임을 기피하는 교육 현장들이 속출하기도 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의지가 박약한 교육 정신으로 인해 멍들어 버린 사회는 좀 처럼 치유가 될 기미가 안 보인다. 또한 그같은 사회의 의식에 氣가 눌린 나머지 "장애인의 50%가 의무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는 억울한 실정" 을 논박할 만한 여유가 그 들 장애인에게는 없는 것이다.
최근에 필자는 시애틀로 출장을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뇌를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언어장애와 수족의 마비를 겪으면서 치료 기간 중 혹시 장애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애를 태우며 걱정하기도 했다. 동시에 본인이 그간 말로만 장애자를 걱정을 하였다는 사실에 깊은 참회를 하였다. 오늘 현재 한국의 장애자 가운데 질병이나 사고 등의 후천적 원인으로 인한 장애자가 88%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장애자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허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애써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자들에 대한 인식이 불행하게도 어릴 때 부터 잘 못 각인되고 있다. 그러한 의식이 싹트는데는 어린 아이의 가정 교육을 담당하는 엄마들의 책임이 큰 것이다. 책 읽기 보다는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선호(?)하는 그들 엄마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영화나 드라마 작품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의식과 사회 정서를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갖고 있는 작품의식은 필자 뿐만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이 훈주
2004.11.12 08:56:19
장애우들을 위한다고 하는 일들 중에 많은 일들이 마음만 가지고는 안되더군요.
그만큼 우리에게는 아무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인합니다---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다면.....---기본적인 교육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몰라서 못하는 것들이 많아요.
(저도 사고로 병원 생활을 잠시 해 보아서 그들의 창문은 열어 보았죠.)
그만큼 우리에게는 아무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시인합니다---사람의 영혼을 볼 수 있다면.....---기본적인 교육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몰라서 못하는 것들이 많아요.
(저도 사고로 병원 생활을 잠시 해 보아서 그들의 창문은 열어 보았죠.)
2004.11.12 11:00:19
저는 특수학교 선생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마음이 좀 남다를 것입니다.
뉴스에도 종종 오르내리는 [아이들 수출하는 나라]라는 말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장애아이의 담임을 기피하는 사례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다른 문제들이 있거든요.
미국의 일반적인 학급의 급당 인원은 몇명이나 되는지?
보조교사가 있는 것은 아닌지?
미국 교사들의 주당시수는 어떻게 되는지?
몇몇 가지만 봐도 우리나라 교사들의 객관적인 환경은 미국과 비교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 선생님들에게 정말 생소하기 그지없어 어찌 가르쳐야 좋을지 모르는 장애 아동을 맡으라고 하면 겁부터 날텐데 어찌 담임을 하겠다고 선뜻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특수학교선생이지만, 일반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특수아동이 들어가야 하는 학급은 급당 인원을 줄여주고 선생님 수당도 팍팍 주고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힘든 또 하나의 환경은
저는 이누무 [단일민족 사상]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 안하는 그 뿌리 깊은 배타심이
나와 좀 다를 뿐인 장애인을 영영 차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미국 같은 경우는 Melting pot 이라고 하던가요? [다 받아주어라]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라 [다름]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러울 것 같구요.
(물론 인종차별등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오래 두고 풀어야 할 문제.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정말 보통의 엄마들이 TV도 보면서 책도 읽으면서 아이들을 잘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인옥이가 보면
장애인 문제만 나오면 눈을 반짝인다고 하겠군.)^^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마음이 좀 남다를 것입니다.
뉴스에도 종종 오르내리는 [아이들 수출하는 나라]라는 말이 정말 부끄럽습니다.
장애아이의 담임을 기피하는 사례에 대해서는 그리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다른 문제들이 있거든요.
미국의 일반적인 학급의 급당 인원은 몇명이나 되는지?
보조교사가 있는 것은 아닌지?
미국 교사들의 주당시수는 어떻게 되는지?
몇몇 가지만 봐도 우리나라 교사들의 객관적인 환경은 미국과 비교할 수가 없거든요.
그런 선생님들에게 정말 생소하기 그지없어 어찌 가르쳐야 좋을지 모르는 장애 아동을 맡으라고 하면 겁부터 날텐데 어찌 담임을 하겠다고 선뜻 나설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특수학교선생이지만, 일반학교 선생님들의 고충이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특수아동이 들어가야 하는 학급은 급당 인원을 줄여주고 선생님 수당도 팍팍 주고 해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장애인들이 힘든 또 하나의 환경은
저는 이누무 [단일민족 사상]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인정 안하는 그 뿌리 깊은 배타심이
나와 좀 다를 뿐인 장애인을 영영 차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미국 같은 경우는 Melting pot 이라고 하던가요? [다 받아주어라]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라 [다름]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러울 것 같구요.
(물론 인종차별등이 없는 것은 아니겠으나)
오래 두고 풀어야 할 문제. 어린 아이들로부터 시작해야 되는데,
정말 보통의 엄마들이 TV도 보면서 책도 읽으면서 아이들을 잘 가르쳤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인옥이가 보면
장애인 문제만 나오면 눈을 반짝인다고 하겠군.)^^
2004.11.12 14:40:06
좋은 글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런데요,
전세계에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 그래서 정말 여유로울 수 밖에 없는
(정신적인 면이나 구조적인면, 또 절실한 복지등등 기본적인 모든 면에서)
그들과 우리와의 비교는 정말 가슴아프네요.
그들의 열린 사고와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원칙이나 배려는
우리가 앞으로 계속 배워야하고 바라봐야 할 점인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래도 몇년 전의 분위기와는 다른 모습들을 종종 느끼니까요.
(이제서야 입양문제가 자연스럽게 드라마방송에 나오니까요.)
정민교수가 쓴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 속의 한국 선비모습들을
보면 우리의 정신 문화가 우리 속에서 발현되는 날은 세계의 정신들이
놀랄꺼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겨우 배고픔에서 헤어난지 얼마 안 된 민족아니던가요?
그런데 또 힘든 요즈음입니다.
풍요롭고 원칙적인 미국속에서 바라보시는 대한민국이
여기저기 안타까워 보이시겠지요.
애정어린 격려인 줄 알겠지만
조금 더 지켜 봐 주십시요.
훈주님의 글 속에 담긴 뜻 잘 알고 있지만
변명삼듯이 길어 졌네요.
그런데요,
전세계에서 막강한 부와 권력을 쥐고 있는 , 그래서 정말 여유로울 수 밖에 없는
(정신적인 면이나 구조적인면, 또 절실한 복지등등 기본적인 모든 면에서)
그들과 우리와의 비교는 정말 가슴아프네요.
그들의 열린 사고와 보통의 사람들이 갖는 원칙이나 배려는
우리가 앞으로 계속 배워야하고 바라봐야 할 점인것은 인정합니다만
그래도 몇년 전의 분위기와는 다른 모습들을 종종 느끼니까요.
(이제서야 입양문제가 자연스럽게 드라마방송에 나오니까요.)
정민교수가 쓴 '미쳐야 미친다'라는 책 속의 한국 선비모습들을
보면 우리의 정신 문화가 우리 속에서 발현되는 날은 세계의 정신들이
놀랄꺼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겨우 배고픔에서 헤어난지 얼마 안 된 민족아니던가요?
그런데 또 힘든 요즈음입니다.
풍요롭고 원칙적인 미국속에서 바라보시는 대한민국이
여기저기 안타까워 보이시겠지요.
애정어린 격려인 줄 알겠지만
조금 더 지켜 봐 주십시요.
훈주님의 글 속에 담긴 뜻 잘 알고 있지만
변명삼듯이 길어 졌네요.
2004.11.12 15:06:02
글을 쓰다 보면...
제가 던진 주제에 저와의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분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것이 건강한 담론으로 발전되지 않고 자기의 관점만 주장하는 격론으로
연결되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다른 영역에서 접근하고
계신분들이 주는 가르침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김문희님 같이 저와는 좀 다른 각도로 진단하고 계시는 분들을
만나면 제가 아직 모르는 부분이 있구나 하는 부끄러운 생각과 함께 아직
더 생각하고 배워야겠다는 욕구를 갖게 됩니다.
다시말하면 서로 다른 영역에서 갖고 있는 시각과 주관이 어느 하나라도
간과되지 않고 존경되어야 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김문희님이 지적하신 점에 이견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의 시각을 넓혀 주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고, 더욱 예쁘게 사세요,,,
2004.11.12 15:09:19
우리도 점차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모습들이 많이 보여지리라 가대해 봅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장애우에 대한 의식있는 변화가 일어나길 ~~
우리도 언제 그들의 처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죠?
어느 공동묘지에 "내일의 당신들의 자리"라고 써 있듯이요
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x8)(x8)(x8)(x18)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장애우에 대한 의식있는 변화가 일어나길 ~~
우리도 언제 그들의 처지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죠?
어느 공동묘지에 "내일의 당신들의 자리"라고 써 있듯이요
좋은 글 잘 읽엇습니다.(x8)(x8)(x8)(x18)
2004.11.12 22:16:22
인일 동문 여러분 안녕하신지요?
여기 플로리다는 지금 아침 7시 30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밤새 너무나 많은 분이 다녀 가셔서 저도 깜작 놀랬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한번 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야 할 화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이 있었듯이 부국이며 장애인에 대한 인권이 최대로 보장되어 있는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데는 분명히 모순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에게 가는 혜택이 미미하다는 것보다는 장애인들에게 갖는 의식에 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자 했었습니다.
최인옥님 말씀대로 서서히 밝게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대학을 갈 때 만해도
장애 학생은 대학을 진학할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신부들이 세운 서강대를 제외하곤..)
30 년전 그 시절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사회 곳곳에서
넉넉한 사랑의 여백도 보이고 있어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인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사안이 많다고 느낍니다. 그들의 주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자기들을 비장애인과 꼭
같은 인격체로 인정해 달라는 목소리들 입니다.
얼마전에 장애인 협회 간사로 있으면서 장애인 상담을 맡고 있는 젊은 여성 장애인이 자기도
벗을수 있다고 자신의 나신을 인터넷 상에 공개하는 것을 보고...가슴이 저려오더군요,
그녀의 그러한 도발적 행위를 나무라기 전에 '오죽하면' 하는 생각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홀트 재단에서 발표한 지난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입양에 대한 정서를 이해 하시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 여기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지난해에 홀트 재단에 의뢰된 입양아의 수가 429명 이었는데 이중에서 200명은
우리나라에서 수용하고 나머지 229명은 외국으로 입양 수속을 하였다고 합니다.
국내 입양아의 수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군요,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아동은 역시 장애아 입양 이었다고 합니다
--- 중3 미혼모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가장 많음---
늘 해오던 대로 장애자 아동중 약 80%가 미국에 입양되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장애아가 국내에 입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하고, 집안 좋은 아이들만 선택하여 입양을
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출생 배경, 건강을 불문하고 입양을 하려는 미국인의 정신을 본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저한테 솔직히 누가 장애인 아이를
키울수 있느냐고 물으면 할 수 있다고 yes 라는 대답을 못 합니다.
왠만한 박애 정신과 종교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홀트에서 일하는 직원이
귀뜸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갖는 종교 정신과 우리네 종교 정신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도대체 미국인들의 저런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여기 플로리다는 지금 아침 7시 30분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고 일어나니 밤새 너무나 많은 분이 다녀 가셔서 저도 깜작 놀랬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한번 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야 할 화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위에서 지적이 있었듯이 부국이며 장애인에 대한 인권이 최대로 보장되어 있는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데는 분명히 모순이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지적하고자 했던 것은,
그들에게 가는 혜택이 미미하다는 것보다는 장애인들에게 갖는 의식에 좀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고자 했었습니다.
최인옥님 말씀대로 서서히 밝게 변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대학을 갈 때 만해도
장애 학생은 대학을 진학할수가 없었습니다( 미국신부들이 세운 서강대를 제외하곤..)
30 년전 그 시절에 비하면 우리사회가 장애인에 대한 생각의 폭이 넓어지고 사회 곳곳에서
넉넉한 사랑의 여백도 보이고 있어 희망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상대인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직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서 노력해야 할
사안이 많다고 느낍니다. 그들의 주장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자기들을 비장애인과 꼭
같은 인격체로 인정해 달라는 목소리들 입니다.
얼마전에 장애인 협회 간사로 있으면서 장애인 상담을 맡고 있는 젊은 여성 장애인이 자기도
벗을수 있다고 자신의 나신을 인터넷 상에 공개하는 것을 보고...가슴이 저려오더군요,
그녀의 그러한 도발적 행위를 나무라기 전에 '오죽하면' 하는 생각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홀트 재단에서 발표한 지난해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의 입양에 대한 정서를 이해 하시는데
도움이 될것 같아 여기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지난해에 홀트 재단에 의뢰된 입양아의 수가 429명 이었는데 이중에서 200명은
우리나라에서 수용하고 나머지 229명은 외국으로 입양 수속을 하였다고 합니다.
국내 입양아의 수는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는군요,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아동은 역시 장애아 입양 이었다고 합니다
--- 중3 미혼모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가장 많음---
늘 해오던 대로 장애자 아동중 약 80%가 미국에 입양되었습니다.
특기할 만한 사항은 장애아가 국내에 입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건강하고, 집안 좋은 아이들만 선택하여 입양을
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아이의 출생 배경, 건강을 불문하고 입양을 하려는 미국인의 정신을 본 받을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저한테 솔직히 누가 장애인 아이를
키울수 있느냐고 물으면 할 수 있다고 yes 라는 대답을 못 합니다.
왠만한 박애 정신과 종교 정신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홀트에서 일하는 직원이
귀뜸합니다. 그러고 보면 그들이 갖는 종교 정신과 우리네 종교 정신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도대체 미국인들의 저런 사랑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은 댓글을 남기고 싶어 이렇게 씁니다.
81년에 이민와서 지금은 워싱톤 근교 MARYLAND 에서 살고 있읍니다.
잘 아시겠지만, 이민 교포들의 지적수준은, 소수를 제외하곤 이민올 때의 상태에서
정지되기 쉬운데, 종종 생각하게 하는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