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그런다. “한국은 재미가 넘쳐 흐르는 지옥이고 미국은 심심한 천국이라고” 맞는 말이다. 한국 처럼 유흥 문화가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 곳에서는 모든 사회 생활의 중심에는 가족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의 경우에도 모처럼 한가한 시간을 맞이할 때마다 갖는 유일한 낙은 한국 식품점에 들려서 한국 영화를 빌려 보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철지난 한국 영화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식료품점에 들렸다. 가게 주인에게 볼 만한 한국 영화가 없느냐고 했더니 조금 시간이 된 테이프를 하나 건네 주면서 그 영화에 나오는 여 주인공의 연기가 볼만하다고 추천한다. '오아시스’라는 그 영화는 시작 부터 좀 무거운 분위기를 주기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았다. 그 주인 말대로 여 주인공의 뇌성마비 장애자 연기는 감동적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필자를 그 영화 속으로 끌어 당기고 있었다. 그 언젠가 파긴슨 환자의 연기를 하던 ‘로버트 드니로’보다 더 실감있게 역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녀의 우수한 연기의 감상을 떠나서 영화 내면에는 우리의 사회에 告하는 어떤 메세지가 흐르고 있었다. 비록 제작한 지가 2년이 지났다고 하지만 아직 퍼낼 신선한 물이 그 영화에 남아 있었다.

자동차 사고로 형무소에 갔다온 ‘홍종두’ 는 출감 후 부터 자기가 기대하던 사회로부터 흐르는 싸늘한 냉기를 느낀다. 형을 살리려고 대신 갔다온 감옥 생활이라는 희생에 감사하기는 커녕 온 가족이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여 주인공 ‘한공주’ 또한 지체장애자라는 이유로 식구들한테 받는 인간적 처우는 엉망이었다. ‘한공주’ 때문에 수혜 받은 장애자 아파트로 온 가족이 이사가면서도 공주를 허름하기 짝이없는 서민 아파트에 처 박아두고 떠난다. 보살펴 주는 것도 형식적이라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한다. 비록 가족의 일원이라도 장애인과 함께 거주하는 것은 자체가 부담스럽다는 사회 인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장애자라고 해서 그리고 어두운 과거가 있다고 해서 거북하게 따 돌림을 당하는 지체가 되어버린 그들에게는 몸하나 조차 의탁할 공간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며 보다듬어 줄수 있는 그들만의 정신세계가 있었다. 감독은 그 햇살같이 맑은 영혼이 그들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나비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한공주’의 영혼이 비 장애인으로서 호흡하는 모습도 간간히 비추어진다. 바깥 세상과 내면 세계의 차이를 실감있게 그려주는 장면들이다.

자연인으로 태어나서 사회인이 되고자 하지만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라는 큰 벽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다. 그들도 정상인 처럼 좋은 음식을 먹고 싶었고, 파티에도 가고 싶어 한다. 다른 젊은이처럼 데이트도 그리고 섹스도 하고픈 욕망들이 화면에서 그려 진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느껴야 할 사랑의 희열(喜悅)은 단지 판타지로만 나타날 뿐이다.

그들과의 의욕과는 상관 없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자체가 재수가 없다고 표정 짓는 사람들의 장면이 이어진다. 두 주인공은 그것이 당연한 현실임을 받아들이고 체념하며 자기들만의 세계를 가져 보려고 한다. 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정신과 그 욕구는 건강했다. 허나 마지막 장면에서 ‘어둠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들의 자유 욕구 마저 허용이 안된 채 불 이익을 당하는 사건이 전개되면서 영화는 끝을 낸다.

어두운 곳에 사는 사람들을 향한 무서운 우리 사회의 선입관을 난도질하는 영화였다. 실제 우리 사회에는 장애자를 비 장애자와 같은 인격을 가진 개체로서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노력이 있었다기 보다는 일단은 '가까이 하기엔 불편한 당신’으로 취급하여 왔다. 그래서 그들이 갖는 사회에 대한 피해 의식 또한 절망적이며 삶에 대한 의욕의 싹을 짤라 놓기가 일쑤였다. 우리사회의 측은한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이 영화는 필자를 18년 전의 기억속으로 밀어 넣는다.

한국이 올림픽 개최 국가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조국은 물론 온 미국을 떠들썩하게 하던 80년대 무렵 필자는 플로리다 대학에서 영어 과목을 두 학기 수강을 하고 있었다. 문법을 담당하는 여선생은 종종 수업 시작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 5 분 정도 늦었다. 미국 학교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자주 번복 되다보니 어느 학생이 따지는 조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네명의 어린 아이를 입양하여 키우고 있는 크리스쳔 집안의 주부였던 그녀의 남편은 플로리다 대학 물리학과 교수였고, 대학교 4 학년 된 아들과 2학년이 된 딸이 있었다. 이 들 네 가족이 한 명씩 맡아서 뒷 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그 녀가 주로 늦게 왔던 이유는 입양아들이 모두 1급 장애아로서 척추장애자나 오아시스 영화에서 나오는 ‘한공주’처럼 뇌성마비 환자였기 때문이었다. 의사 소통과 몸의 거동이 힘 들어서 자주 침대에 오줌을 쌌고 그런 날은 그 들을 목욕시키고 새로이 침대를 갈아 주어야 하는 일로 수업이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는 미국인들이 해외에서 아동을 입양하는 경우를 종종보기는 했어도 장애아이를 입양한 경우는 흔치를 않아서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하루는 종강이 되어 학생들 모두가 그 집에 초대를 받아 갔다. 마침 그 날 그들과 가족이 되어 살고있는 입양아들을 볼 수 있었다. 3살 박이 부터 시작해서 9 살 까지 되는 남자 아이들이었으며 한결 같이 동양인이었다.

필자는 설마하는 생각에 그 교수에게 어느 나라에서 입양된 아이냐고 물었다. 넷중에서 세명이 한국에서 온 아이고 나머지 한명은 미국 본토에서 입양된 아이라고 하면서 그녀의 부가 설명은 계속 되었다. "그런데 ... 미국에서는 장애아라고 해도 부모들이 더 키우려고 해서 왠만해서는 입양하기 어려운데 한국은 유독 쉽다”.  그 녀의 말을 듣는 순간  더 이상의 말을 그녀와 나눌 수 없었다. 단지 필자가  한국에서 유학온 유학생이라는 사실을 감추고 싶을 뿐이었다. 그 기억을 새삼 지금 떠 올린다는 자체는 그 것을 안고 살아온 세월만큼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한다.

'97년 무렵 필자는 방송진행과 시민운동 때문에 한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 당시 운동을 같이 하던 ‘고은광순’ 한의사의 도움으로 자신의 병원에 오는 장애자 가족을 취재한 적이 있었다. 우면동 장애자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 장애인 부인은 취재가 한참 진행되던 중간에 펑펑 눈물을 쏟는다. 자녀들이 부모가 장애자라는 이유 만으로 학교급우들 한테 그리고 선생한테서 차별을 받다 못해 학교도 안가고 삐뚤어 지고 있다고 하며 사회를 향해 맺힌 한을 쏟아냈다. 자기 이름이 있는 데도 불구하고 선생은 항상’ 어이 장애자’하고 불러대서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그 후 그들은 자녀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장애자 아파트를 포기하고 변두리로 이사하는 결심을 해야만 했다.

장애인 복지예산 배정에 있어 OECD 국가중에서 한국이 최 하위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장애인에 대한 정부의 시각은 물론 사회적 시각이 아주 편협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장애자 학교가 자기 동네로 오면 집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를 들 먹이며 데모를 하기도 하고, 자기의 자녀가 장애자 가족의 아이와 짝궁이 되면 바로 담임에게 찾아와서 항의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장애 아동의 담임을 기피하는 교육 현장들이 속출하기도 한다. 약자를 배려하는 의지가 박약한 교육 정신으로 인해 멍들어 버린 사회는 좀 처럼 치유가 될 기미가 안 보인다. 또한 그같은 사회의 의식에 氣가 눌린 나머지  "장애인의 50%가 의무교육도 받지 못하고 있는 억울한 실정" 을 논박할 만한 여유가 그 들 장애인에게는 없는 것이다.

최근에 필자는 시애틀로 출장을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심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뇌를 크게 다친 적이 있다. 언어장애와 수족의 마비를 겪으면서 치료 기간 중 혹시 장애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애를 태우며 걱정하기도 했다. 동시에 본인이 그간 말로만 장애자를 걱정을 하였다는 사실에 깊은 참회를 하였다. 오늘 현재 한국의 장애자 가운데 질병이나 사고 등의 후천적 원인으로 인한 장애자가  88%를 차지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 자신도 언제든지 장애자가 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다. 허나 한국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애써 관심을 갖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자들에 대한 인식이 불행하게도 어릴 때 부터 잘 못 각인되고 있다. 그러한 의식이 싹트는데는 어린 아이의 가정 교육을 담당하는 엄마들의 책임이 큰 것이다. 책 읽기 보다는 TV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것을 더 선호(?)하는 그들 엄마들의 특성을 고려한다면 영화나 드라마 작품을 통해서라도 인간의 의식과 사회 정서를 바꾸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갖고 있는 작품의식은 필자 뿐만 아니라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을 주고 있다.  


  플로리다에서  이 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