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랑
여기다가 옮겨서 계속 쓰겠습니다.
굴비 정식으로 점심을 먹기 위헤 일부러 찾아간 영광은 조그마한 소도시였다.
어딜 가나 촘촘하게 엮어서 매달아 놓은 굴비가 가득한 상점들이 많아서
여기가 정말로 굴비의 본산임을 인정하게 했다.
하지만 영광 굴비 한정식은 기대에 훨씬 못 미쳤다.
내가 상상한 것은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제법 큰 굴비가 따끈하게 구워져 나오는 밥상이었는데
정작 굴비는 도시에서 흔히 먹는 것보다도 볼품이 없는 것이었다.
대신 밑반찬들이 한 상 가득했지만 딱히 젓가락이 갈 만한 반찬도 없었다.
다시는 영광에 굴비 정식 먹으러 오지 말아야지.
1인분에 2만원도 넘게 주어서 더 만족하지 못한 점심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해남 대흥사를 향해 길을 나섰다.
영광에서 해남까지 가는 길은 <백수 해안도로>를 탔다.
길을 닦은지 얼마 되지 않은듯 보이는 해안도로에는 마침 해당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산길에서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 옆에 피어있는 붉은 꽃이 해당화라니....
내 평생 실제로 해당화를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 라는 노랫말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보니 참으로 정겨웠다.
어디선가 섬마을 선생님이 불쑥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계속)
서산대사의 기념사원인 표충사도 있는 해남의 대흥사를 품고 있는 산이 두륜산임을
산문에 내 건 간판을 보고서야 처음 알았다.
두륜산은 허황되고 과장된 소문없이 내공이 깊은 영산이었다.
산의 모양새며 산밑에서도 느낄 수 있는 산의 정기가 아주 맑고 그윽했다.
대흥사로 들어가는 진입로는 아주 길고 숲이 울창했다.
차를 버리고 세월아 네월아 하며 탱자탱자 걷고 싶은 길이었다.
아직 벌건 대낮인데도 어둑하게 느껴지는,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어 하늘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다.
대흥사는 이번이 초행길이 아니었다.
대학 다닐 때 답사를 온 적이 있었으니 30년이 넘어서 다시 찾은 셈이다.
그 때 무엇을 보았는지 머리로는 하나도 기억을 할 수가 없는데
잠재되어 있는 내 무의식엔 많은 것이 저장되어 있었는지 그냥 다 친숙하게 느껴졌다.
긴 신작로를 달려 절 입구에다 차를 세워 두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마침 초파일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절로 들어가는 길이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자세히 보니 산 색이 투톤이었다.
짙은 초록색 솔잎 위로 삐죽이 덧대어져 있는 연두빛 새순으로 묘하게 배색이 되어 싱그러움을 더했다.
소나무 사이에 끼어 있는 애기 단풍나무의 야광빛에 가까운 연두 새 잎에 손을 대면
내 손이 연두색으로 환하게 빛이 날 것만 같았다.
바야흐로 신록이 야무지게 여물어 가고 있었다.
신록은 청춘의 전유물이라 한 이가 무색하게 내 마음 가득 신록을 채우고 또 채웠다.
이 또한 도회지에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보물이 아닌가. (계속)
우람한 은행나무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느라 빙 둘러 서 있었다.
- 여러분 ~ 저기 산 꼭대기를 보세요.
뭐가 보이시지요?
산 꼭대기에는 아주 커다란 바위 몇 개가 봉우리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저렇게 거대한 바위가 산머리에 떡 버티고 있는데 뭐가 보이냐니? 그냥 바위구먼.
- 잘 보세요.
마음이 착하고 공덕을 많이 쌓으신 분의 눈에는 저것이 그냥 바위가 아니라
부처님이 누워 계시는 것으로 보일겁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 맞다. 그러고 보니 부처님일세, 그려.
- 어디? 어디?
- 저기가 머리고 저게 코네. 안보여?
- 으응.... 그러네. 나도 보여.
사람들은 왜 그리 갖다 붙이기를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다.
실제로 보고 하는 소린지 모르지만 어느새 우리 일행들도 마음 착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모두들 누운 부처의 모습이 보인다고 하니 말이다.
내 눈에는 그저 커다란 바위로만 보였지만 나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다고 믿으면 그리 보이는 법이니까. (계속)
표충사 마당에 마주보고 서 있던 목백일홍 두 그루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목백일홍 (일명 배롱나무)은 나무 표면이 대패로 밀어 놓은듯이 매끈해서
원숭이도 오르지 못하고 미끄러진다는 나무로 유명한데
무슨 연유인지 그 마당에 있는 것은
마치 괴목을 다듬어 놓은 것처럼 가지 끝을 뭉턱뭉턱 톱으로 다 잘라 놓았다.
분명 삐죽하니 제멋대로 뻗은 가지도 있었을텐데
나무는 마치 강제로 거세를 당한 것처럼 다 벗고 다 잘린 채 서 있었다.
나는 그 나무가 죽은 줄 알았다.
이젠 가차없이 뽑혀 불쏘시개가 될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두어 군데에서 연한 새 잎이 그 맨들맨들하고 단단한 몸통을 뚫고 나와
윤기 나는 연두빛을 한껏 자랑하고 있었다.
생명의 힘.
아주 강한 것을 이긴 아주 약한 것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 작은 이파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너무도 강렬했다.
살아있음 자체가 아름다움이다.
그러니 살아 있는 동안에는 어떤 상황을 만나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한가.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기억하면
우리가 사는 동안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 수 있을 터.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히 피조물인 인간이 생명에 대해 쉽게 단정지어선 안 되리라.
가만히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작고 연한 것이 파르르 떨며 내게 생기를 전해 준다.
마음에 뜨거운 기운이 확 퍼지며 코끝이 찡하다.
- 내게 생명 주심을 감사하나이다.
나도 모르게 이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대웅전 옆 뜰에 마치 빨래줄같은 빈 줄만 마당 가득 매어 놓고
아직 등은 하나도 달아 놓지 않았다.
일기예보에서는 초파일에 비가 온다고 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대웅전 앞부터 연등에다 비닐을 씌워 거는 인부의 손길이 배나 힘들어 보였다.
해는 어느덧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아침에 길을 나선 것이 마치 오래 전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산 그늘이 지는 것을 보며 우리는 서둘러 절을 빠져 나왔다.
아직 갈 길이 먼데 너무 오래 지체한 것 같아 내려오는 길은 걸음을 재촉했다.
일주문을 막 나서려는데 맑고 깊은 큰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친구가 뛸듯이 좋아했다.
그렇지 않아도 범종소리가 듣고 싶어 예불시간까지 기다리고 싶었단다.
떠나는 길손의 마음을 헤아려 깍듯이 배웅을 해 준 것처럼 울리는 종소리를 마음에 담고
우리는 두륜산의 호위를 받으며 대흥사를 떠났다. (계속)
오늘 밤은 완도 근처에서 유숙을 하며 싱싱한 해물을 좀 먹고
내일 아침 일찍 배를 타고 보길도로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옛 청해진, 장보고의 고장 완도는 더 이상 섬이 아니었다.
육지와 연결된 거대한 연육교 덕분에 뭍이었다.
완도에서 보는 바다는 광활하지도 망망하지도 않았다.
다도해의 섬들에 갇혀버린 바다에서는 갯내음도 별로 나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항구 근처의 수산물 공판장으로 갔다.
혹시 갓 잡아 온 생선을 경매가로 살 수 있을까 했는데 이미 공판장 문이 닫혀 있어서
할 수 없이 부둣가에 있는 어시장으로 갔다.
내가 가르치는 외국 학생들 눈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엽기적인 풍습이 바로
살아있는 낙지를 통째로 먹는 광경이라고 했다.
해물탕에다 산 채로 넣어서 끓이는 것도 기가 막히게 징그럽지만
더 끔찍한 것은 얼굴에 낙지발이 척척 감겨도 끄떡하지 않고 산 채로 먹는 것이라 했다.
그 학생들이 내가 산낙지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봤으면 뭐라고 했을까. ㅋㅋ
세발 낙지의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맛을 무어라 설명할 수 있을까.
칼로 다지듯이 잘게 썰어 놓은 세발낙지에다 참기름을 살짝 뿌리고
새콤달콤한 초장에 와사비를 곁들여서 먹으면 입에 착착 감기게 맛있으면서
피곤에 절었던 눈이 번쩍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무어라 설명할까.
실로 오래간만에 산 낙지를 먹었다.
대전에서는 이렇게 싱싱한 놈을 만나기가 힘들었는데
바다에서 금방 건져 올린 살아있는 해물을 보니 구미가 절로 당겨 실컷 먹었다.
낙지를 생으로 먹고 갑오징어까지 날로 먹으면 소화가 안될 것 같아서
오징어는 데쳐서 먹었는데 이 또한 별미였다.
갑오징어가 제 철인지 집집마다 수족관에 갑오징어가 가득했다.
갑오징어는 언뜻 보면 오징어가 아닌 시커먼 것이 복어 비슷한 물고기같이 생겼다.
내 평생 갑오징어가 그렇게 생긴 것도,
투명한 날개를 좌악 펼치고 헤엄치는 것도 처음 보았다.
아직 숙소도 어디에다 잡을지 정하지 않고
우리는 여행지에서의 첫 만찬을 여유롭게 마음껏 즐겼다.
잠은 완도를 벗어나 신지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 근처에 가서 자면 좋을것 같았다. (계속)
배가 아닌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섬이었다.
황금연휴라 숙소가 다 꽉 차서 방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방을 구하러 돌아다니며 보니 캠프화이어를 하는 젊은이들도 있고
백사장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캄캄한 바닷가에 젊음의 열기가 가득했다.
노래하고, 웃고, 떠들고...
자지러지는 듯한 그들의 청량한 웃음 소리가 새삼 부럽다.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까.
남자들이 방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친구와 나는 어두운 해변에서 서성이며 그들을 부러워 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늙었다는 반증이겠지.
간신히 구해 들어간 방은 좁고 누추했지만 그래도 바다를 내려다 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룻길에 천리를 달려 와 바다를 앞에 놓고 쉴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미리 숙소를 정해 놓으면 자유롭지 못하다고 무작정 떠나오길 잘했다. (계속)
아침 일찌기 바닷가에 나가서 보니
텅 빈 백사장에 잔물결이 일렁이는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발끝에 와 닿는 모래의 감촉이 너무도 보드라워서
70년대 유행했던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 잡아 봐라 ~ 하며
모래밭을 맨발로 달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래서 이곳 이름이 명사십리인 모양이다.
나중에 붐비는 철을 비껴서 다시 찾아 와 조용히 며칠 머물다 가고픈 해변이었다. (계속)
완도로 나와 아침을 간단히 먹고 화흥포 선착장으로 갔다.
여기에서 자동차까지 싣고 노화도로 건너가는 페리호를 타기 위해서 였다.
자동차는 운전자를 포함해서 운임이 14,000원이고 승객은 5000원이었다.
자동차를 후진으로 넣어서 빼곡히 싣고 배가 떠났다.
올망졸망 크고 작은 섬들에 갇힌 바다라 그런지 마치 호수 위를 달리는 것 같았다.
아니, 그 곳의 바다는 마치 농장 같았다고 해야 맞다.
각종 수산물을 길러 내는 양식장들이 즐비하니 말이다.
화흥포에서 40분쯤 가니 노화도에 다다랐다.
노화도는 전복 양식으로 유명한 섬이었다.
어쩐지 완도에서 같은 배를 타고 들어 온 차 중에 유난히 전복 유통 회사 차가 많았다.
나는 전복은 당연히 바다에서만 나는 줄 알았다.
자연산이든 양식이든 바다 속에서 키워내는 것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노화도에 와서 보니 전복은 밭에서도 생산이 되고 있었다.
바다에서 가까운 밭에 인삼밭에 씌우는 검은 망을 덮어 놓은 움막 모양의 비닐 하우스가 많았는데
그 곳이 바로 전복 양식장이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뭍에서 전복을 키우는지 궁금해서 한 곳을 들어가 보니
옛날 목욕탕같은 커다란 콘크리트 수조에 파이프로 바닷물을 연결해 흐르게 해 놓고
검정 플라스틱 용기에다 전복 씨를 붙여서 키우고 있었다.
먹이로 쓰는 다시마는 바로 앞의 바다에서 따로 양식을 하고.....
바다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
남해안에서 물고기를 기르는 사람들은 어부가 아니라 <바다 농부>라 해야 옳을 듯 싶다. (계속)
나는 그 곳을 막연하게 아주 먼 섬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멀미나는 뱃길을 하염없이 가야 하는 유배의 섬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보길도 역시 배를 타지 않고 다리를 건너 곧장 들어갈 수 있었다.
노화도에서 보길대교를 건너니 평범한 들길과 산길이 나왔다.
멀리 보이는 바다만 아니면 여기가 섬이라는 것조차 실감이 나지 않는 섬이 보길도였다.
보길도에도 해남처럼 땅끝 전망대가 있었다.
여기가 우리 국토의 최남단이란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이.
보길도는 윤선도의 섬이었다.
윤선도가 유배를 와서 머물렀다는 곳에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고
기념관 앞의 식당 이름은 어부사시사였다.
윤선도 기념관은 유배지에 지은 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운치가 있고 풍류적이었다.
마당 한 가운데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정자를 지어 <세연정>이라 했다.
이름 그대로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씻어 낼 만한 정자였다.
두툼하니 잘 생긴 나무를 통째로 써서 지은 정자 앞에는
마치 수호신인양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떡 버티고 서 있었다.
멀리서 보면 흡사 버드나무처럼 가지가 연못을 향해 축~ 늘어져 있고
가지마다 올망졸망 솔방울을 잔뜩 달고 있는 소나무.
새로 난 연두색 연한 가지마다 노랗게 여문 송화가 가득가득 들어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 소나무는 윤선도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의 음성, 그의 체취, 그의 습관까지도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이 먼 섬에다 자기만의 유배 낙원을 일구고 어떻게 삶을 음미하였는지 다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만히 소나무를 쓸어주며 나무에게 속삭였다.
네가 인간보다 낫다.
아니, 질기다.
온갖 질곡과 영욕의 현장을 다 보고도 끝내 침목하고 있으니.... (계속)
보길도에서 완도로 다시 나와서 점심을 먹고 고흥의 팔영산 휴양림으로 향했다.
해발 660m의 울창한 숲과 여덟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 팔영산 꼭대기에
통나무로 지은 숙소를 미리 예약을 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통나무 집이 생각보다 깨끗하고 운치가 있었다.
넓은 창이 시원한 방에 누워 밖을 내다 보니
하늘과 함께 산봉우리가 통째로 시야에 들어왔다.
산 중턱이 아닌 꼭대기에 지은 집이어서 하늘과 눈높이가 맞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숙소에다 짐을 풀어 놓고 다시 나왔다.
어차피 저녁도 먹어야 하고
해가 지려면 아직도 몇 시간은 족히 남아 있는데 숙소에 머무르는 것이 아까워서
오는 길에 이정표에서 보았던 나로도의 인공위성센타에 가보기로 했다. (계속)
인공위성센터가 있는 그 곳은 남도의 끝자락 바닷가였다.
아직 일반인들에게 공개할 과학 박물관도 개관을 하지 않았고
거기로 들어가는 길도 다 뚫리지 않아 군데군데 길이 아닌 길을 억지로 가야 했다.
여기서 우리 손으로 만든 인공위성을 하늘로 쏘아 올리게 된다며
괜시리 들떠서 좋아하는 남자들을 보니 마치 수학여행을 온 아이들 같다.
어찌보면 남자들이 여자보다 훨씬 오랫동안 동심을 간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 볼거리도 놀거리도 없는 그곳엔 어둠이 더욱 짙게 깔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어둠 덕에 오히려 조명발을 잘 받은 모형 인공위성들 옆에
키 작은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고 그 뒤에 바다가 있음을 알리는듯 파도소리가 들렸다.
환한 대낮에 왔으면 숲을 헤치고 나가 바다를 보았을텐데..... 아쉬움이 남았다.
우리 세대에 우주 가는 길이 열린다 해도 나는 절대로 안 갈거야.
나는 비행기도 힘들어서 타기 싫어.
친구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내가 물어 보았다.
갈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나는 한번 도전해 보고싶은데?
흠.....
나는 아직도 비현실적인 꿈을 버리지 못하는 어린아이인 모양이네.
이미 나이 오십이 넘었고 몸도 부실하고 체력도 형편이 없는 주제에 우주인을 꿈꾸는 것을 보니.
언제가 되어야 이런 미망에서 깨어나 현실에 충실한 어른이 될까?
내가 좋아하는 저 친구처럼.... (계속)
나로도에서 숙소로 오는 길에 갑자기 심한 현기증과 멀미가 났다.
가파르고 구불거리는 산길을 오르락 내리락 하며 하루종일 돌아다닌 것이 무리였던 모양이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청룡열차를 타고 내린 사람처럼 정신없이 휘청거렸다.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거의 실신한 사람처럼 꼼짝도 못하고 누워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심한 빈혈인데다
어제부터 불청객 손님까지 와서 내 몸에 피가 많이 부족한지 눈도 뜰 수 없었다.
여행지에 와서 아프다고 하면 일행들 여행 기분을 망칠까봐
구경하고 다니는 내내 전혀 내색을 안했는데 내 몸이 더 이상은 버티지 못했다. 바보같이.
자고 나면 괜찮아질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남편이 걱정하는 친구를 안심시켜 보내는 소리를 들으며 까부룩 들었던 잠이 깼다.
생각해 보니 나는 저녁도 못 먹었네.
숙소에 가서 먹자고 이것저것 사가지고 들어왔는데....
남편은 친구네 방에서 먹었을까?
몸은 아주 피곤한데 쉽게 잠이 다시 들지 않았다.
방이 너무 더워서 갑갑증이 났다.
창을 열어 놓자니 바깥 공기가 너무 차갑고 닫아 놓자니 방이 너무 더워 가슴이 터질것 같아서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뒤채느라 꼬박 밤을 새웠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왜 그리도 길며 아침은 어찌 그리도 더디 오는지 모르겠다.
아직 내일 여정이 남았다는 것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어서 집에 갔으면, 아니 여기가 내 집이었으면.
밤 새 뒤척이다가 먼 동이 틀 무렵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계속)
다도해의 섬들이 점점이 박혀 있는 바다와 첩첩이 쌓여 있는 봉우리들을 보고 내려왔다.
그들이 등산을 하는 동안에 나는 방안 가득 들어 온 햇살을 외면하고 늦잠을 잤다.
조금 열어 둔 창문으로 들어 온 청량한 바람 덕에 까부룩 단잠이 들었다.
잠이 달다는 표현을 누가 처음 쓰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절묘하다.
그 아침에 나는 참으로 달게 한숨을 잤다.
밖에서 연신 울어대는 이름모를 새소리에 저절로 잠이 깰 때까지 마치 죽은 사람처럼.....
팔영산 휴양림에서 나와서 순천만 갈대 숲을 향해 길을 잡았다.
오늘은 남도에서의 여정을 끝내고 북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들르고픈 곳을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곳이 순천만이었다.
가을에 철새들이 많이 모여들 때 가면 더 장관이겠지만 봄에 보는 갈대의 색깔이 궁금해 가보고 싶었다.
네비게이션에다 순천만을 입력해 놓고 기계가 시키는대로 가다 보니
넓다란 들판 한가운데를 지나는 농로에 들어서게 되었다.
농로를 따라 그 들판을 지나 앞을 가로막는 방죽에 올라가 내려다 보니 거기가 순천만이었다.
온 시야에 가득한 갈대밭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유감스럽게도 방죽에서 그곳으로 곧장 건너갈 길이 없었다.
우리는 방죽 아래에 난 길도 아닌 길을 따라 달리며 포장된 길이 나타나기를 고대했다.
하지만 그 길 끝은 차량이 다닐 수 없게 쇠막대로 막혀 있었다.
쇠막대 뒤에 갈대숲으로 가는 관광 안내소가 있고 주차장이 있었다.
우리는 차를 거기에 그냥 세워놓고 걸어 나와서 순천만의 뻘 가운데로 난 관람로를 향했다. (계속)
꼭두새벽에 인천에서 떠난 친구네가 우리집 주차장에 당도한 것은 채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친구네 차로 가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우리는 유성에서 유명한 올갱이 해장국을 한 그릇씩 먹으며 이번 여행 일정을 잡았다.
첫번째 행선지는 고창 선운사였다.
복분자와 풍천 장어가 유명한 선운사는 대웅전 뒤의 동백숲이 명물이었다.
마침 초파일 행사를 앞두고 연등을 다느라 정신이 없는 사찰을 조금 벗어나니 숲길이 나왔다.
포근한 흙길을 따라 빽빽하게 잘 자란 나무들 사이를 한가하게 거닐며
모처럼 마음껏 큰 숨을 쉬며 산림욕을 했다.
도시에서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보물이 공짜.
절로 들어가는 자그마한 실개천에 놓인 다리의 이름이 거창하게 <해탈교>였다..
정말로 이 다리를 건너면 해탈의 경지에 이를까....
끝도 없이 묻고 대답을 하며 해답을 찾아 헤매는 중생들의 바램이 오롯이 담겨 있는 다리치고는
규모도 작고 모양새도 아주 소박해서 오히려 정겨웠다.
하기사 성경에 나오는 요단강도 실제 가서 보니 그저 요만한 실개천에 불과했다.
요단강을 건너면 천국에 이른다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들 실망스럽게.....
선운사로 들어가는 신작로에는
얼린 복분자를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 파는 장사들과
동백 기름을 소주병에 담아서 파는 아주머니가 줄 지어 있었다.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그것이 이 고장 특산물임이 분명했다.
동백꽃.
그 송이가 벌어지기 전에는 봉오리가 새빨간 림스틱처럼 예쁘지만.
일단 다 벌어지고 나면 참으로 모양새가 볼품이 없는 꽃.
대웅전 뒤 숲에 지천으로 피었다가 거의 지고 있어서 더 귀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기에 노래 제목도 동백 아가씨라 했겠지.
동백 아줌마나 할머니는 결코 매력적이지 않으니 말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