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사모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13.이명구

세르기에프 대수도원
모스크바 북쪽 약 70km 지점에 있다. 1930년까지는 세르기예프(Sergiyev)라고 불렀으며, 1930년 B.자고르스키를 기념하여 현재 이름으로 개칭하였다. 기계공업과 목공예·가구·칠기·완구 등 다양한 경공업이 이루어진다. |



러시아 속담에 돈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속의 돈에서도 냄새는 나지 않는다.
그것을 거머쥔 인간의 손에서 냄새가 날 뿐이다.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창작의 동력은 천재성이나 정의감이 아니라 '돈'이었다.
가난했던 그는 원고료 수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글을 써야 했다.
그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에 손을 댔다가 결국 더 많은 빚에 쪼들려 살았다.
그러나 그가 평생 돈에 쫓겨 다녔고, 돈을 좇아다녔기 때문에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등 불멸의 대작이 탄생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도스토예스키의 소설에서 돈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는 "그의 아무 소설이나 집어 들고 아무 쪽이나 펼쳐보라.
거기에는 반드시 돈 이야기가 나올 것"이라며 도스토예프스키 문학에서 돈의 의미를 탐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첫째, 돈은 자유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돈은 주조된 자유다.
그래서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돈은 열 배나 더 소중한 것이다"라고 말했다.(중략) 돈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사
회적, 정치적 자유보다 더 절실하게 돈의 자유를 추구한다.'
둘째, 돈은 시간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저 유명한 말 '시간은 돈이다'가 도스토예프스키에게서는 뒤집힌다.
시간은 돈이고 또 돈은 시간이다. 그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돈을 위해 시간을 제공하고, 또 돈을 주고 시간을 산다.'
셋째, 돈은 인간 관계의 기본적인 고리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인물들에게서 돈은 문자 그대로 인간의 언어를 대신하여 말을 한다'는 것이다.
돈 때문에 죽고 죽이고 결혼하고 헤어지는 소설 속의 등장 인물들은 결국 돈 덕분에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넷째, 돈은 힘이다.
'돈이 있음으로 해서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고, 세상을 변하게 한다'는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돈철학이었다.
그러나 도스토예프스키는 부자와 빈자를 반드시 악한 자와 선한 자로 나누어 보지는 않았다.
도스토예스키는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인물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탐욕에 빠진 부자를 혐오했다. '명예도, 양심도, 연민도, 인간적인 변덕도 모두 접고 부자가 되기 위해 질주하는 삶에 대해서
는 경고한다'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선배 작가는 프랑스의 오노레 드 발자크였다.
발자크 역시 낭비벽으로 몸살을 앓던 작가였고, 평생을 빚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궁핍을 모면하기 위해 무지막지하게 써댄 위대한 작가였다.
그의 문체, 그의 삶 심지어 그의 빚까지도 문학 지망생에게는 역할 모델이었다는 것이다.
도스트예프스키를 가리켜 자본주의 사회의 욕망 구조를 일찌감치 꿰뚫어 본 작가라고 평가한 이 책의 결론은 이렇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돈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는 편안하고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인생과 예술
그의 인생이란 선에 대한 희구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인생의 의의는 선에 대한 노력 속에 있다는 것이다.
즉 선이 인생의 목적이며, 사람은 모두 이 목적을 향해서 전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목적을 달성하려면 사랑이 필요하다.
이 각자가 자기 속에 간직하고 있는 이성 ― 신의 활동인 사랑을 통하여 선이라는 목적을 향하는 노력, 이것을 톨스토이는 인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문제에서 출발하여 그는 이 목적에서 벗어난 그 어떠한 훌륭한 사상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하고, 인생의 의의를 그릇되게 해석시키는 허위의 과학과 사이비 종교를 비난하면서, 개인적인 행복과 참된 행복과의 차이를 논한다,
또 동물적인 생존과 합리적인 생활과의 차이를 밝히고, 결국 인간은 이성에 의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톨스토이는 루소 이후 그의 도덕적 저술로써 인간 양심을 크게 뒤흔들어 놓았다.
그는 우리들의 개인적 생활(이기적 생활), 동물적 생활 속에서도 이성에 의해서 살아나가는 것이 올바른 인간생활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강조하는 그의 사상의 특색은 그 목표를 현재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상이 바로 실행임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랑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의 활동이므로, 현재의 활동에 있어서 사랑을 표시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생활을 무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약속하는 그러한 불합리를 그는 싫어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과 같은 행복론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자기만을 위해서 살아서는 안되며, 남을 위해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인간이 자기 행복만 생각하고 살면 그 희망은 서로 충돌하기 때문에 도저히 행복해질 수 없다.
즉 이성의 활동인 사랑을 가지고 일반 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인생 최고의 목적이며 그 가운데 올바른 행복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부활》에서는 자비로 나타난다.
네흘류도프가 시베리아 여행 중에 느끼게 된 사랑은 오직 자비심의 발로였다. 그것은 만인에 대한 자비인 것이다.
온갖 생활의 체험을 지닌 네흘류도프가 이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악과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네흘류도프는 이에 대한 해결책을 《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과 제18장에서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제3부 28장).
"사람은 누구든지 죄가 없는 사람이 없으며 따라서 사람을 처벌하거나 교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므로, 항상 모든 사람을 몇 번이고 끝없이 용서해야만 한다." 는 이 한 가지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네흘류도프는 이 생각의 확증을 얻기 위하여 산상의 설교를 읽는다.
이 설교는 지극히 간단하고 실행하기 쉬운 것이며 만일 이대로 실행만 한다면 폭학도 없어지고 인류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즉 지상천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볼 때, 톨스토이의 사실적이면서도 생명이 약동하는 듯한 묘사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까츄샤의 나이브한 첫사랑의 장면, 네흘류도프가 꺄츄샤를 유혹하는 안개 낀 부활제의 밤, 캬츄샤가 네흘류도프를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비바람 치던 심야의 정거장,
변기에 앉아 있는 여죄수들의 모습, 감옥 안에서 진행되는 허식적인 종교의식, 죄인면회소의 광경,
영지에서 목격한 농민들의 궁핍한 생활,
시베리아 감옥에서의 정치범들과 일반죄인들의 심리조사 등에 능란했던 톨스토이는 그의 주인공은 물론 한번 등장했다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 사소한 인물들,
예를 들어 재판관, 배심원, 시골의 촌장, 전옥의 딸 등과 같은 사소한 인물에까지도 각자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부조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인간 육체의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어서 심리적인 뉘앙스를 그에 대응하는 육체의 움직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활》에서 까츄샤의 육체적인 외견이 그녀의 도덕적인 정신 상태에 따라 점차적으로 변해 가는 모습이 여러 번 묘사되고 있다.
즉 매력적인 까만 사팔눈이 반짝이는 귀엽고 순진한 둥근 얼굴은,
한때 살이 찌고 들떠서 매춘부의 음탕한 추파를 던지지만, 이윽고 시베리아 유형 길에서 도덕적인 갱생의 힘이 작용하게 되자.
또다시 그녀의 얼굴에서 예전의 활기가 넘쳐흐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톨스토이의 가장 뛰어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게서 볼 수 있었던 일체의 형이하적인 특질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또 달리 강하게 느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보는 모든 것이 그의 감각에 호소하고 매혹시켰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러시아 문학에 있어서 톨스토이만큼 철저한 사실주의자는 없었고 또 그만큼 구체성과 이 세상의 생존의 색조에 애착을 가진 작가도 드물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소설에 그토록 발랄한 생명감을 부여해 주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톨스토이 예술의 또 하나의 커다란 특징은 그의 작품의 자서전적인 요소에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주로 묘사하면서 자기의 사상과 불안을 표현했지만,
철저한 사실주의자였던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과 그의 생활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을 주로 묘사했다.
그의 초기 3부작 《유년시대》(1852년) 《12월의 세바스또뽈리》(1855년)에서 톨스토이는 자기를 니콜렌까라는 이름으로 묘사했고, 《까자흐 사람들》에서는 올레닌으로,
《전쟁과 평화》에서는 삐에르로, 그리고 마지막 작품 《부활》에서는 네흘류도프로 자신을 그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화상의 묘사는 흔히 객관적인 실재성을 결여할 우려가 많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완숙한 이 작품도 몇 가지 결함이 지적되고 있다.
첫째 결함은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객관적인 실재성을 구비하지 못한 점이다,
이런 결함은 톨스토이 자신의 이상이 구현된 인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전쟁과 평화》의 삐에르, 《안나까레니나》의 레빈보다 네흘류도프는 특히 모순이 많다.
그 까닭은 앞의 두 작품의 주인공의 나이는 집필한 당시의 톨스토이와 별반 차이가 없었던 데 비하여
70세의 노인이 35세의 네흘류도프를 쓰자니 부자연스러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또 하나의 결함은, 로망 롤랑이 지적했듯이 엄밀한 사실적 관찰이 주가 된 제3부에 쓸데없는 복음서적인 결론이 너절하게 나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발표 당시에도 독자들의 그 같은 불만이 컸던 것으로,
이에 대해서 톨스토이는 "나 같은 노인이 그처럼 긴 세월을 보내고 작품을 쓸 때는 사람들이 잊고 있던 복음서 구절을 한번 회상케 하려는 생각이 어찌 안 들겠느냐?"는 말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부활》에서는 작가의 서정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부활》은 인간에 대한 고민의 가장 아름다운 시이다.
그래서 로망 롤랑은 "모든 작품 중 나는 이 작품 속에서 톨스토이의 가장 맑고, 바로 영혼 속으로 스며드는 날카롭고 엷은 회색의 눈동자를, 그리고 모든 사람의 영혼 속에 신을 보는 눈길을 느낀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문호임과 동시에 위대한 사상가이며 종교가였던 것이다.
또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은 세계문학사상 불굴의 영광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항시 인생에 대하여 절박한 고민을 체험하고 그 사상을 실현하느라고 애쓴 작가이다.
그리하여 그는 문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교육·난민구제의 방면에도 힘을 기울였다.
러시아의 부조리, 러시아의 크나큰 죄악에 대해서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던 것이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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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코프스키
국민주의는 보통 19세기 자본주의융성기의 민족국가 형성의 움직임에 관련된 것을 말하고 19세기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해방의 독립운동에 관련된 것을 민족주의라 한다. 러시아 민족은 예로부터 대단히 우수한 민요를 풍부히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즐겨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생애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 5월 7일 광산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산의 총감독이었으며 그의 가족관계로는 위로 이복누이와 형 또 아래에 누이동생과 동생이 있어서 그들과 함께 유년 시대를 보냈다. 그는 어려서 가정교사에게 불어와 독어를 배웠는데 그는 그녀를 잘 이해하고 따라서 그녀와의 이별이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이별의 1848(?)년 콜레라로 어머니가 죽은 뒤 작곡을 시작하였고 감정의 배출구로 음악을 쓰는 습관이 몸에 붙이게 되었다. 그는 1867년 <폭풍우>를 작곡했을 때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다음해에 발라키레프와 그의 일파들과도 알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무소그르스키, 보로딘,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있었다. 발라키레프는 젊은 차이코프스키의 교향적 환상곡을 비판하였으며 관현악작품인 환상서곡 <로미오와 줄리에>의 형성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발라키레프 일파와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냈는데 그 까닭은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과 개정에 발라키레프가 도움을 주기는 했어도 차이코프스키는 발라키레프의 페테르스부르크의 문하생과는 달리 음악원에서 전문적으로 공부한 음악가였으며 그의 제 1 교향곡에서 이미 명백해진 바 와 같이 그의 작품은 서구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러시아 민요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았고 그래서 현악사중주1번의 느린 악장에 우크라이나 노래를 사용하기도 했지만 그는 열렬한 국민주의자는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선율들은 C단조의 제2교향곡에서도 다시 나타나기 때문에 op.17인 이 작품은<소러시아>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1874~1878년 사이에 차이코프스키 생애에 가장 많은 걸작이 나온다. 이때 그는 동성연애자로서의 죄악감에 더욱 시달리게 된 그는 자기가 위기를 향해 가고 있음을 알자 결혼만이 자기 문제의 해결방도 인양 다짜고짜 결혼으로 치닫게 된다. 그리고 음악에 대한 역점과 비극적인 억압감을 그는 오로지 음악에만 쏟아 넣었던 것이다. Bb단조의 제 1피아노 협주곡 op.23은 어느 정도 감정이 동요하고 있던 시기와 국민주의 적인 시기를 이어주는 다리라고 할 수 있다. 국민주의 적 면은 양쪽 끝악장에 우크라이나 주제를 다시 쓰고 있는것에 나타나 있다. 그는 폰 메크 부인과 교재한 후 약 10년간 집에 틀어 박힌 생활을 했다. 작곡을 하고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가르치고 휴가 때에는 서유럽에 가소 장기간 체재하면서 작곡가들을 방문한다던가 새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메크 부인과 관계가 끊어진 다음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콜레라에 전염 되었다는 것이 그의 사인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도 많은 그의 전기에서는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1979년 소련의 문화성에서는 면밀한 고증을 통해 그의 죽음이 독살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애를 탐닉하고 있다는 설이 점점 퍼지자 법률학교 시절의 동급생이었던 법관들은 그 스캔들이 자신들에게 파급될 것을 우대하여 그에게 스스로 독배를 마시도록 강요하였다는 것이다. 음악 경향 차이코프스키는 1863년 공무원 생활을 마치고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루빈스타인이 세운 음악원에 입학하여 루빈-스타인에게 악기법과 작곡을 정식으로 공부하게 된다. 그는 이 음악원 시절에 중요한 친구 게르만 라로슈를 알게되고 졸업 후 루빈스타인의 동생 N.루빈스타인이 원장이 된 새로 창설된 모스크바 음악원에 강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후 그는 10년간 그 직에 있으면서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의 재능이 높이 평가되고 있을 때 니콜라이 루빈스타인, 카시킨, 알브레히트 등과 친교를 맺었다. 1868년 교향곡 1번 <겨울날의 환상>을 N.루빈스타인의 지휘로 모스크바에서 연주되었을 때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같은해의 최초의 오페라 <지방 장관>을 공연하였으나 실패하였고 그해 발라키레프와 그의 그룹들과도 친교를 맺는다. 그리하여 1872년 교향시풍인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을 작곡하여 발라키레프에게 바쳤다. 1871년 현악4중주제 1번을 그리고 1872년 교향곡 2번을 썼는데 이는 민요를 테마로 한 국민주위 적 작품이다. 1873년에는 교향곡 환상곡<템페스트>를 작곡하여 5인조의 이론적 지도자 스타소프에게 바쳤다. 이 같은 사실은 그가 국민악파와의 관계가 밀접했음을 입증하여준다. 그러나 그후 그의 작곡 경향은 점차 멀어져 서유럽파로 끌렸던 것이다. 낭만주의 후기에 러시아 음악 페테르스부르크 악파, 모스크바악파, 5인조라고 불리는 신 루빈스타인파로 구별할수 있다. 차이코프스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악파로 볼 수 있는 루빈스타인 파는 안톤 루빈스타인이 대표자로 그는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로서 유럽 각지를 여행하여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떨쳤으며, 러시아의 교향악 운동의 창시자가 되었다. 한편 그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민족만이 향유한 특징있는 음악을 가지고 있는데 이를 민족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흔히 민족 음악과 같이 해석 될 수 있고, 민족의식을 명확히 하는 국민음악, 다시 말하면 국민주의적 음악을 말할 때도 있다. 국민주의는 보통 19세기 자본주의융성기의 민족국가 형성의 움직임에 관련된 것을 말하고 19세기말에서 러시아 민족은 예로부터 대단히 우수한 민요를 풍부히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즐겨한다는 기록이 있다. 러시아 민족의 특성은 한 곡에도 조바꿈의 변화가 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하모니도 풍부하여 다른 민족에게서 찾을 수 없는 특별한 것이 잠재해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민요는 몽고의 영향과 그리스정교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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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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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게신 하게루프는 노르웨이의 안정된 가문에서 태어나 함부르크에서 음악을 배웠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으며 끝내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다. 1863년 코펜하겐으로 가서 1864년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 리카르트 노르로크와 사귀면서 음악적으로 발전했다.
"그를 통해 북부의 민속 가락과 내 자신의 특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그리그는 말한 바 있다.
1864~65년 겨울,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년 사촌 누이동생 니나 하게루프와 결혼했고,
그녀는 그리그의 가곡에 대한 권위있는 해석가가 되었다.
1865~66년, 1869~70년 겨울을 로마에서 보내던 중,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열광적 찬사를 보낸 리스트와 입센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1866년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 정착하여 노르웨이 정부의 종신연금(1,600크로나)을 받기 시작한 1874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85년 베르겐 근방에 '트롤드하우겐'이라는 집을 지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스칸디나비아·유럽·영국에서 연주 여행을 가졌으며, 1888년 런던에서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스스로 연주했다 (→ 민속음악).
노르웨이의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둔 그리그의 음악은 섬세한 서정 감각으로 유명하다.
1867~1901년 사이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 Lyriske Stykker〉을 작곡했다. 활기찬 리듬은 민요와 연관이 깊으며, 화성법은 후기 낭만주의 양식에서 발전한 새로운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작품 16과 〈현악 4중주 G단조〉 작품 27, 바이올린 소나타 및 피아노 소나타 각각 3곡 등 일부 작품에서 자유 소나타 형식을 썼다.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작품 24는 노르웨이의 민속 선율에 바탕을 둔 변주곡이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페르 귄트 모음곡 Peer Gynt〉 작품 23과 〈홀베르그 모음곡 Holberg〉 작품 40이다. 노르웨이의 춤과 노래를 편곡한 작품 17, 작품 66과 특히 〈노르웨이 농민 춤곡 슬로터〉 작품 72는 리듬과 화성에 대한 그의 예리한 감각을 보여준다.
성악곡은 A. O. 비녜의 가사에 곡을 붙인 작품 33과 시가 〈산의 요정 Haugtussa〉 작품 67이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리그는 시의 정서를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했다.

ㆍ피오르드 왕국·꾸밈없는 국민·그리고 예쁜 도시
노르웨이는 비싸다. 편의점에서 물 한 병이 5000원, 핫도그 하나에 1만5000원이나 했다.
날씨도 변덕스럽다. 멕시코 난류와 북구의 찬공기가 충돌하는 지역이라 맑았다가도 흐리고, 흐리다가도 맑아진다.
그런데도 노르웨이는 늘 가보고 싶은 여행지로 꼽힌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트래블러는 몇 해 전 완벽한 여행자가 꼭 가봐야 할 곳 50곳을 선정했는데
북유럽으로는 유일하게 노르웨이 해안을 꼽았다.
물가도 ‘악’ 소리나게 높고, 날도 짖궂은데 왜 그리 많은 사람들이 노르웨이를 동경할까?.
경이로운 피오르드도 유명하지만 해안 마을도 아름답다.
난바다로 나가거나, 만으로 깊숙이 숨어들기 쉬운 바닷가엔 역사도 구구하고, 모양이 아름다운 마을도 있다.
이 마을들은 피오르드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100년전 건축물이 즐비한 ‘올레순 Ålesund’
적당하게 작은 도시를 사랑한다.
도시는 너무 크면 헤벌어져서 짜임새가 없다. 작으면 초라해서 볼거리가 많지 않다.
노르웨이 중부 해안의 올레순은 크지도 작지도 않게 아담하다.
인구 4만2000명. 미술사학을 하는 사람들에겐 제법 알려진 아르누보 도시다.
![]()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베르겐. |
겉모습은 비슷한데 장식은 어느것 하나 똑같은 게 없다.
건물이 지어진 것은 20세기 초 1904년부터 1907년 사이 재개발로 새로 세운 도시다.
유럽에서도 재개발을 했다고? 거기 안타까운 스토리가 있다.
1904년 1월23일 새벽 2시15분 마가린 공장에서 불이 났다. 불길을 바닷바람을 타고 나무 집들을 하나하나 삼켰다. 이튿날 오후 5시에 불은 꺼졌으나 1000여채의 가옥 중 850채가 불에 탔다. 주민 1만2000명 중 1만여명이 이재민이 됐다. 소방서 옆에 살던 노파 한 사람만 사망했다. 인명 피해가 적은 게 그나마 기적이었다.
올레순이 잿더미가 됐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유럽 곳곳으로 퍼졌던 모양이다.
그런데 구호의 손길은 요즘만큼 빨랐다.
독일의 빌헬름 2세가 보낸 구호선은 화재발생 이틀 만에 도착했다.
대체 이 작은 마을을 돕기 위해 어떻게 유럽 각국이 발빠르게 움직였을까?
“1900년대 초 이미 피오르드는 세계적인 여행지였고
올레순은 게이랑에르 피오르드의 관문이었죠.
독일 황제는 게이랑에르 피오르드를 7번이나 방문했기 때문에 올레순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올레순 앞바다는 대구어장으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지금도 노르웨이 최고의 항구이며 세계 최고의 대구수출지다
대구어장으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지금도 노르웨이 최고의 항구이며 세계 최고의 대구수출지다.
유럽에서 보내온 물자 중에는 경첩이나 문고리 같은 건축자재도 있었다.
당시 정부는 국가재정을 쏟아부어 마을을 재건했다.
세계 각국에서 공부한 노르웨이 건축가 50여명을 불러 다양한 모양의 집을 지었다.
이때 지은 집들이 도심 한복판에 있는 아르누보 스타일의 집이다.
아르누보는 요즘말로 바꾸면 뉴 아트(New Art), 새로운 예술이란 뜻이다.
이때 지은 집들은 겉멋을 많이 부렸다. 한 건물에 같은 모양의 창이 없고, 장식도 아기자기하다.
지혜를 상징하는 부엉이를 새겨넣었는가 하면 병원이었음을 상징하는 꽈배기 모양의 장식도 보인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했던 로맨티시즘의 영향이다.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은 건축물만 보고 아르누보 양식임을 눈치채긴 힘들다.
이런 집이 하나만 있었다면 어쭙잖게 멋을 냈다고 촌스럽다고도 했을지 모르겠다.
수백채가 한자리에 모여있으니 건축학도에겐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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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들이 노천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노란 색과 붉은 색을 칠한 건물들은 어느 만화영화의 세트장이라 해도 믿어질 정도로 귀엽다.
창고 앞 수로에는 범선과 요트가 정박해있다.
마을 전경은 악슬라산 전망대에 오르면 잘 보인다.
마을은 반도처럼 쭉 뻗어있고,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이 퍼져 있다.
100년 안팎된 건축물들의 뾰족지붕들을 찬찬히 뜯어보고 있으면 마치 형형색색의 로고블록을 마을을 꿰어 맞춘 것처럼 보인다.
중세의 수도이자 예술의 고향 ‘베르겐 Bergen’
베르겐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 때 “노르웨이가 아니라 베르겐에서 왔다”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만큼 고향에 대한 자부심이 강하다. 베르겐은 중세엔 노르웨이의 수도였다. 일단 역사를 먼저 들춰보자.
12세기 이후 유럽은 교통이 발달해 상인들이 활발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상인이 바로 한자(Hansa)다. 이 상인들을 보호하자는 도시동맹이 바로 한자동맹.
베르겐도 한자동맹의 주요 도시였다.
베르겐의 브리겐 부두에는 독일인만이 묵는 상관을 짓고 무역을 했다.
베르겐의 명물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때 당시의 건축물이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여 있는 옛 건축물들은 조금씩 기울었다.
나무 바닥은 삐걱거리지만 브리겐에는 바도 있고, 기념품점도 있으며 예술가의 작업실도 있다.
금요일 밤 오후, 노랫소리가 흘러나오는 브리겐의 바는 노르웨이인과 관광객들이 어우러져 왁자하다.
이런 나무집도 사실은 재건축으로 사라질 뻔 했다.
당시 주민들은 좀이 슬지 않게 생선기름을 발랐는데, 걸핏하면 불이 났단다.
그래서 지방정부는 건축물들을 모두 부수고 석조건물로 지으려 했다.
재건축 공사를 시작하려 할 때 엉뚱하게도 다른 지역에서 불이 나면서 이 나무집을 허물자는 계획은 흐지부지됐다.
베르겐 사람들의 자부심 중 하나는 베르겐이 예술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솔베이지의 노래’로 유명한 그리그, ‘절규’를 남긴 뭉크, ‘인형의 집’을 쓴 극작가 입센이 베르겐에서 활동했다.
그리그가 살았던 작업실에선 바다가 빤히 내려다 보였다.
그리그는 죽어서도 노르웨이 바다를 보고 싶어했단다. 그의 유언에 따라 바위 벽에 구멍을 내고 그를 묻었다.<펌>

절규 [絶叫, The Scream, The Cry]
노르웨이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1863∼1944)의 작품.
원어명 : Der Schrei
작가 : 뭉크
종류 : 템페라화
크기 : 83.5×66㎝
제작연도 : 1893년
소장 : 오슬로 뭉크미술관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1893년 작품으로, 오슬로 뭉크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뭉크의 작품들 중 가장 표현성이 강하며,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같은 주제를 그린 소묘 작품에는 뭉크의 다음과 같은 글이 덧붙여 있다.
"두 친구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햇살이 쏟아져내렸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핏빛처럼 붉어졌고 나는 한 줄기 우울을 느꼈다.
친구들은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고 나만이 공포에 떨며 홀로 서 있었다.
마치 강력하고 무한한 절규가 대자연을 가로질러가는 것 같았다."
《절망》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남성의 형상이 이 그림에서는 유령 같은 모습의 인간으로 표출되었다.
전율하며 양손을 얼굴에 대고 있는 이 인물은 화면의 아래쪽에 위치하여 정면으로 관객을 향하고 있다.
그의 해골 같은 얼굴에는 공포에 찬 절규가,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흘러나온다.
배경 화면의 구성을 대담하게 사선으로 처리하였으며,
얼굴선의 동적인 처리와 빨강·노랑·파랑의 삼원색에 맞추어진 배색 등으로 형식적인 면에서 더욱 강렬한 효과를 나타낸다.
붉은 구름은 마치 불타고 있는 것처럼 공포스러운 화면 효과를 나타내며 절망적인 심리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뭉크는 보는 이들의 감성을 집요하게 자극하며 회화라는 양식을 통해 자신의 인생관을 표현한 화가이다.
그리고 작품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감정을 전달하기 위해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왜곡, 율동하는 듯한 선 등의 표현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 그림에서 인물은 병마에 시달리는 환자의 모습 또는 유령처럼 표현되고 있는데,
뭉크는 깊은 좌절에 빠진 사람을 좀더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형태의 왜곡을 사용하였다.
음악이랑 좋다.
새롭게 공부하는듯, 읽는 사람들은 좋긴하지만~
어지럽지 않게 조심하거래이.
언젠가 나도 몇번 퍼 나르고 났더니
눈앞이 어질어질,,,혼났다.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핀란드의 교향곡 작곡가.
그곳에서 그는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
〈포횰라의 딸 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 Luonnotar〉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그는 곧 헬싱키에서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다.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위해 원래의 세례명 대신 '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그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 En Saga〉·〈카렐리아 Karelia〉·〈4개의 전설 Four Legends〉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교향곡 1번 E단조〉(1899)를 작곡하기 이전인 1897년 핀란드 의회는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했다.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 Finlandia〉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시벨리우스의 명성은 대륙을 관통했다.
학생으로서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와 친교를 맺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페루치오 부조니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2번 D장조〉(1901)를 지휘했고, 영국의 작곡가 그랜빌 밴톡은 〈교향곡 3번 C장조〉(1907)를 의뢰했다.
이 작품에서 시벨리우스는 2번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903)와 같은 민족적 낭만주의에 등을 돌리고 〈엔 사가〉와 〈교향곡 4번 A단조〉(1911)에서처럼 더욱 철저하고 단호한 양식을 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인 마지막 3개의 교향곡(5번 내림 E장조, 6번 D단조, 7번 C장조)과〈타피올라 Tapiola〉(1925)를 출판했지만 말년에는 긴 침묵에 빠졌다.
8번 교향곡(1930년대초에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음)과 심지어는 9번 교향곡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자필 악보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미국의 올린 다운스 등의 작가들 덕분에 시벨리우스에 대한 인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유행에 대한 다음 세대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음악 대중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견지했다.
비록 그의 음악적 영감이 스칸디나비아의 경관과 내밀한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시벨리우스를 대뜸 '자연시의 시인'쯤으로 기억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교향시와 7곡의 교향곡에서 성취한 업적은 주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섭렵에 기인한 것이다.
3번 교향곡의 1악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1악장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총체성과 음구조의 구축은 오히려 그 모델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의 비밀은 이러한 유기적 구조물의 구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경선아~~~~~
잠깐 들어와 눈팅두 제대루 못하지만
얼마나 글 올리느라 애쓰니!~~~
나중에 찬찬히 읽어봐야되겠지~~
하지만 디게 부럽다!!~`
늦은밤이지만 피곤가시라고 블랙커피 놓고간다.

요즈음 아무데나 다 문화를 붙여서 그 의미를 퇴색시키지만
여행이야말로 문화와 어부러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오래 전에 알게 된 그래서 지금은 희미한 기억에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예술가들을
이번 여행을 빌미로 리마인드 시키고 싶어 퍼 나르고 있어요.
저도 시간 나는 대로 천천히 다시 읽어볼 요량으로요
여행하면 미선언니인데 같이 못해 아쉽습니다
경선언니 !!!
여행지 사전 예습을 많이 할수있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일정에서 현지 가이드 큰일 났습니다.
언니가 예습하게 한것만큼 설명할수있을까 걱정되네요.
언니덕분에 사전예습을거쳐 현지 답사를하는거라서 아주 유익한여행이되겠어요 .
언니!!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러시아에 가서 같이 백야를 즐기자.
러시아 하면 닥터 지바고가 먼저 떠오르네....
해서 배경음악 바꿨어.
이번 여행 작가 최윤씨가 쓴 `진정한 여행`(64번 글 참조)이 되도록 하자.
여행! 카운트 다운 들 어 갑 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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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언니!!
또다른예습도하고
"64번 진정한여행"을 다시읽어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알차게 여행준비를할수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고등교육기관이다.
1477년에 세워졌으나 당시 종교적인 논쟁 때문에 1510년에 폐교되었다.
그러다가 1595년에 신학부와 철학부로 다시 출발했고, 1624년에는 구스타프 2세 아돌프 왕이 넓은 토지를 하사하여 이 학교의 재정기반이 마련되었다.
현재 이 대학교에는 신학·법학·의학·인문(역사·철학·언어 포함)·약학·사회과학·자연과학(수학·물리학·생물학·지학·화학 포함) 분야의 학부가 있다.
대학도서관인 카롤리나 레디비바는 스웨덴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코덱스 아르겐테우스(Codex Argenteus)가 소장되어 있다.
이것은 4세기에 울필라 주교가 성서복음을 고트어로 번역한 것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필사본이다.
대학본부 건물(1887)에는 많은 예술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20세기 후반 현재 웁살라대학교에는 약 1만 5,000명의 학생들이 재학중이다.
대 문호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명언이라는 것도
좀...그런 내용도 있네요.
이런 걸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의 말, 얼마나 실수가 많겠는지 생각하게 되드라구요.
말한 사람은 제대로 해도 듣는 사람이 촛점을 달리 들을 수도 있구요.
그래서 진솔한 행동만이 진국으로 남는 것인가봅니다.
페테스부르크에 가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의 무대인 센나야 광장도 있다 하고...
하여간 여행을 기다리는 이 시간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