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며칠째 벼르고 있었다.
기회를 봐서  남편과 ' 담판을 지어야지' 하고

저녁 먹은 그릇들을  포개어 그냥 옆으로 밀어 놓은 채
포도 한송이를 놓고 뜯어 먹으며
"나 의논할 게 있는데...... "
남편이 포도 씨를 뱃어 내다 나를 쳐다 봤다.
" 돈이 필요한 거야, 시간이 필요한 거야? "
" 둘 다 "
" 당신 시간이나 써.   난 시간 없으니까."
(속으로) 그거야 물론이지.   여부가 있나.
어디다 얼마가 필요한지는 묻지도 않는다.
마누라가 돈을 아무데나 허펑더펑 흔들어 쓰지 않는건 믿으니까.

다른 때 같으면 한국 가는 일로 이렇게 밍기적거리고 망설인 적이 없다.
근데 이번엔  한달 동안에 세번이나 한국행을 해야 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가 비지니스맨도 아니고,
미루거나 땡길 수도 없는, 날 정해진 일이 열흘. 보름간격으로 듬성듬성 걸려 있으니,
헐 수 없이 한번은 줄이자고  작정해서 후원금이나 보내고 ' 불참 ' 으로 마음 접었는데
그래도 아쉬움이 남아  운을 떼어 보았지.

잘 했지  뭐야.
그런때 아니믄 내 평생 언제 그 많은 옛 친구들을 불러 모아 반가운 해후를 할 거며,
내 은사님들
가끔 인일 홈페이지에서 사진으로 뵌
백발 성성할 연세의 은사님들(사실은 염색으로 잘 모르지만)
길에서 마주쳐도 얼른 다가가 옷 소매를 잡아 끌며
' 선생님 차 한잔 같이 하시지요.'
' 선생님 점심 사드릴께요. '  그런 소리도 못하고
쭈빗거리다 말게 뻔한 내 주변머리, 내 수줍음을 내가 너무 잘 알지.
그러기 땜에
여러 친구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애 써서 판 벌렸을 때 나두  한자리 꼽싸리껴서
謝恩의 마음으로
머리 세어가는 쉰살 우리 재롱도 보여드리며 같이 웃고 싶은 거지.
남편에게 운은 떼어 놨으니
나중 일은 나중 일이고
우선 10월 20일 오전 나리타발 비행기 티켓 예약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