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터를 떠나온지 반년 만에 맞은  소학교 6학년 여름 방학(나 말구 우리 아들)
열두살 짜리 우리아이는 향수병에 몸살을 했다.
서울에 두고온 친구 누가 보고 싶다는건 허구헌날 하는 입버릇이고
엘지슈퍼앞 떡꼬치가 먹고 싶다고 하고 , 친구와 만화 바꿔 보던 등나무 벤치를
꿈에 봤다질 않나,  바람만 불면 제풀에 펄럭거리던 나무끝에 걸린 연은
어찌 되겠냐는 둥,
차가 들이받아 상채기를 낸 모퉁이의 가로수는 아마 죽었을 거라거니.
추억의 레퍼토리는 끝이 없었다.
일본어 선생(재일 한국인)에게 제 꿍꿍이 속을 털어 놓기도 했다.
" 여름 방학에 혼자라도 갔다 올거예요."
" 방학땐 비행기 티켓 사기가 어려울텐데."
" 요코하마에 가서 배 타고 가면 되요."
" 요코하마엔 화물선 밖에 없고 후쿠오카나 시모노세키까지 가야할텐데
혼자 갈 수 있니?  "
결국 못 가고 그 방학을 넘겼다.
넘긴 건 방학 뿐이 아니고 그리움의 고비도.
상훈이와 하던 게임을 도모히로와 하면서 죽이 맞아가고,
종호와 하던 야구를 나오키와 하는것도 재미 들이면서
그리움은 엷어져가고 일본의 문명(?)을  끌어 들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崔 씨 성을 쓰고 있는 그 할아버지(그의 며느리와 나는 친구처럼 지낸다)는
소년시절 밀항 이고 말고도 읎이 화물선 구석에 낑겨져서 일본땅에 떨어져
갖은 고생을 하여 돈을 모으고 일가를  이루고 자식을 낳고 손자를 봤다.
이젠  돈도 제법 있는것같고 부동산도 솔찮게 있다.
귀화를 안하고 그만한 재산을 모으기란 보통 어려운게 아니라는데.
2세 3세는 한국말 할 줄 모른다.
2세때는 살기에 허둥거리느라, 3세는 양육 주최의 권한이 없어서.
손자의 이름은 兄山 이다 . 식구는 모두 ' 아니야마' 라고 불러도 할아버지는
' 형산 ' 이라부른다. 열다섯 나이에 떠나온  고향  경주를 감아도는 두고온 강
형산강.  꼬깃꼬깃 접어 가슴에 묻어둔 얼마나 사무친 그리움이면......


고이케(小池) 상은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  ' 부친이 조선반도에 부임해 근무할때 태어나 소학교
들어갈 무렵까지 살았다 ' 는
자신의 기억보다 부모나 터울진 언니한테 들은게 더 많은 추억들.
나를 알게 되어 찰싹 달라 붙었다.  기회만 있으면 아득한 옛일에서
기억해낸 한국말을 섞어가며 유년의 아련한 그리움에 빠져들지만
공유할 수 없는 그의 추억 더듬기가 나에겐 비오는 영화(낡은 필름)
을 보는것 같아 졸립고 지루하다.


소학교 3학년 5학년 두아이를 데리고 2년 전에 온 한국인이 있다.
집세, 주차비가 비싼 것을 감수하고 단지 ' 부인이 외로워 할까봐 '
시내 한복판 , 역에서 5분 거리에 집을 얻었다.
얼마전 3학년짜리 작은애의 반에서 선생님 지도하에 스모시합을 했다.
물론 한국인은 그 아이 혼자였지만 ' 오기의 우리 똘만이 ' 는
우승을 가리는 자리에 까지 섰다.
거의 모든 애들이  "니뽄니뽄 "을 외치며 손뼉치면서 상대팀 아이를 응원했다는데,
소학교 교실의 3학년 스모 시합에서 '니뽄'이 무슨 아랑곳인지,
선생님은 제재도 안 하고 이름불러 응원하란 말도 안하고......
외로움을 너무 일찍 알게 되는것 같아 잠든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는
마음이 쓸쓸하다.  꿈속에선 초등 1학년때 떠나온  "내 친구 " 들에게
둘러싸여 까불거릴까?


넘 얘기만 하지말고
내 맘속의 그리움을 털어 놓으라고?

아예 생살을 저며 달라고 하지 그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