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리 쓰는 유서 ▨

내가 죽을 때에는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은 우리들 사문의 소유 관념이니까.
그래도 혹시 평생에 즐겨 읽던 동화책이 내 머리맡에 몇 권 남는다면

아침 저녁으로 "신문이요"하고 나를 찾아 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장례식이나 제사 같은 것은 아예 소용 없는 일.

요즘은 중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거창한 장례를 치르고 있는데,
그토록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이 만약 내 이름으로 행해진다면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몹시 화나게 할 것이다.
평소의 식탁처럼 간단 명료한 것을 즐기는 성미니까.

내게 무덤이라도 있게 된다면 그 차가운 빗돌 대신
어느 여름날 아침부터 좋아하게 된 양귀비꽃이나
모란을 심어 달라 하겠지만,
무덤도 없을테니 그런 수고는 끼치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기능이 나가 버린 육신은 보기 흉하고
이웃에게 짐이 될 것이므로 조금도 지체할 것 없이
없애 주었으면 고맙겠다.

그것은 내가 벗어버린 헌옷이니까.
물론 옮기기 편리하고 이웃에게 방해되지 않을 곳이라면
아무데서나 다비(화장)해도 무방하다.

사리 같은 걸 남기어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법정 스님 《무소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