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께서 장 수술을 받으시고 또 후유증으로 폐렴이 걸려 입원하고 계시는게
오늘로 24일째다.
84세 노인이 수술과 긴 병을 견디어 내시느라 큰 눈이 더욱 커지고 야위셨다.
처음에는 이렇게 병원에 오래 계실지 모르고 가족들끼리 간호를 하다.
급기야 병원에서 간호하시던 어머니마저 졸도하시는 일을 당했다.
양쪽 침대에 부모님을 눕히고 밤을 새며 보살피던 남편의 흰가운이 그의 얼굴만큼이나 초췌했다.
침대에 누우신 채로 변을 보시고 며느리 손에 처리를 맡길 수 밖에 없는 아버님은 내게
" 선미야 미안하다" 사과를 하신다.
우리의 잦은 이사때마다 달려오셔서 짐이 행여나 풀어질까 단단히 묶어 주시던 아버님의
두 손은 마른 갈고리 같이 여위어 힘이 없으시다.
옷을 갈아 입힐때 옷 사이로 드러나는 두 발은 가늘기만 하다.

우리집에 오실 때면  며느리를 위해 '모짜르트 클라리넷 협주곡 'CD를 들고 오시던 멋쟁이 아버님이셨는데..
오늘 병상에서 한없이 약해지신 아버님을 위해 그렇게 좋아하시던 요한 스트라우스 '봄의 왈츠'를  틀어드린다.
생동하는 봄의 음악을 들으시며 어서 회복하세요, 아버님.

아버님을 처음 뵌건 대학교 2학년 가을 마리아 칼라스 공연이 있었던 이대 교정에서였다.
남자친구는 자기 용돈을 몽땅 털어 음악회 티켓을 내게 내밀었다.
음악회가 끝나고 차가운 가을 공기를 마시며 교정을 걸어나오는데 웬 키가 큰 분이 남자친구를 아는 척 하셨다.
내가 쑥스러울까봐 그랬는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누시고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셨다.
"누구예요?" " 응, 우리 아버지.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아버님은 언제나 며느리 이름을 부르시는 인자한 분이셨다.
내가 큰 아이를 출산했을때, 손주를 보신 기쁨에 온 얼굴이 다 횐하셨던 아버님.
남편의 월급이 17만원이던 군의관 시절 , 춘천에 있는 우리집을 오실때마다
나를 춘천 중앙 시장에 데리고 나가 이것 저것 장을 봐주시던 자상하신 분이셨다.
아버님은 원래 성품이 착하셔서 늘 남을 먼저 배려하시던  호인이셨다.
남에게 싫은 소리는 절대로 못하시고 큰 눈동자가 온순한 성품을 그대로 보여주는 그런분이셨다.

정년퇴임 후 어느 날 급하게 물건을 건네 받기로 해서 아버님과  동암역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급하게 나오시느라 틀니를 빼고 나오신 그분의 양 볼은 움푹패여 할아버지의 모습이 역력했다.
그때 마음 한 구석이 퀭한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도 아버님은 병상에서 내 이름을 부르신다.
"선미야, 잠이 안오고 마음이 불안하다.너 나를 위해 기도 좀 하렴"
기도하려고 다가서는 나의 손을 꼭 잡으시고 틀니를 뺀 오므라진 입으로 살짝 웃으신다.

아! 아버님.
오늘 저는 연로하신 아버님을 바라보며 왜 이리 마음이 슬픈 걸 까요.
어서 건강을 회복하시고  편안하고 존귀한 여생을 보내시길 하나님께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