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헷세의 그림과 시



Magnolienzweig 목련 나무 가지



안개 속에서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넝쿨과 돌들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활기에 찰 때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에 휩싸이니  
그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모든 것들로부터  인간을 홀로 격리시키는  
어둠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일 수가  없다.  

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인 것이다.





Madonna d'on Ongerio 돈 게리오의 마돈나




순례자 


나는 항상 방랑의 길에 있었다. 
순례자였다.  

내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기쁨도 슬픔도 흘러갔다. 

나는 방랑의  의미도, 목적도 알지 못한다.  
몇 천 번을 쓰러지고  그때마다 다시 일어났다.
 
아,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성스럽고
멀리 높은  하늘에 걸려 있었던  사랑의 별이었다.
  
그러나 그 별을 안 지금은

목적을 알지 못하던 동안에는  마음 편히 걸어갔고  
기쁨과 행복을 가질 수 있었다.                  




이탈리아




가을날     


숲이 금빛으로 타고 있다.

상냥한 그이와, 여러 번    
나란히 걷던 이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 간다 
      
이런 화창한 날에 오랜 동안 품고 있던 
행복과 괴로움이, 향기 속으로      
먼 풍경으로 녹아 들어간다.  
    
풀을 태우는 연기 속에서      
농부의 아이들이 껑충거린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를 시작한다.




수선화





흰 구름


오, 보아라,
잊혀진 아름다운 노래의 조용한 멜로디처럼
푸른 하늘가를  계속  떠도는 흰 구름을.

긴 여행 속에 방랑의 슬픔과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흰 구름을 이해할 수 없으리.

나는 태양이나 바다나 바람을 사랑하듯,
정처 없이 떠도는 흰 구름을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자에게
그것은 누이이며 천사이기에.




Februarmorgen am Luganer See 루가노 호수의 2월 아침





방랑의 길에서 



슬퍼하지 말아라, 곧 밤이 오리라.    
그러면 우리들은 파리해진 산 위에서    
몰래 웃음 짓는 것 같은 시원스러운 달을 보리라.    
그러면 손을 잡고 쉬자.  
   
슬퍼하지 말아라, 곧 때가 오리라.     
그러면 우리는 쉬리라.

우리들의 십자가가     
밝은 길가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리고 비가 내리고, 눈이 오고    
바람이 불 것이다.




Berge hinter Bäumen 나무 뒷편의 산




노을 속의 백장미           



슬픈 듯 너는 얼굴을 잎새에 묻는다.            
때로는 죽음에 몸을 맡기고            
유령과 같은 빛을 숨쉬며            
창백한 꿈을 꽃피운다. 
           
그러나 너의 맑은 향기는            
아직도 밤이 지나도록 방에서            
최후의 희미한 불빛 속에서            
한 가닥 은은한 선율처럼 마음을 적신다. 
          
너의 어린 영혼은            
불안하게 이름 없는 것에 손을 편다.            
그리고 내 누이인 장미여,             
너의 영혼은 미소를 머금고            
내 가슴에 안겨 임종의 숨을 거둔다.




그림 그리는 헤세




멀어져 가는 젊음          



피곤한 여름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호수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들여다본다.
          
일상에 지친 나는 먼지에 싸여          
가로수 그늘을 방황하고 있다. 
         
포플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내 뒤로 황혼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앞에는 밤의 불안이 죽음과 함께 온다. 
         
먼지에 싸인 채 지친 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젊음은 머뭇거리듯 뒤로 밀려나며          
고운 모습을 감춘 채          
나와 함께 앞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Ticino Landscape 티치노 풍경




마을의 저녁 무렵                



양떼를 몰고 목동이                  
조용한 오솔길을 가고 있다. 
                  
집들은 잠이 오는 듯                    
벌써 깜박이고 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지금                     
단 하나의 이방인    
              
슬픔으로 하여 나의 마음은                
그리움의 잔을 남김없이 비운다. 
                   
길을 따라 어디로 가든              
벽난로에는 따뜻한 불이 타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고향과 조국을 느껴보지 못했다. 


         

Am Weg 길에서




생의 계단  


만발한 꽃은 시들고
청춘은 늙음에 굴복하듯이
인생의 각 계단도 지혜도 덕도
모두그 때마다 꽃이 필 뿐
영속은 허용되지 않는다.

삶이 부르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은 용감하게 그러나 슬퍼하지 말고
새로운 단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이별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해야만 한다.

무릇 생의 단계의 시초에는
우리를 지켜주고 살아가게 하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어지는 생의 공간을 명랑하게 지나가야 하나니
어느 곳에도 고향같이 집착해서는 안되며,
우주의 정신은 우리를 붙잡아 두거나 구속하지 않고
우리를 한 계단씩 높이고 넓히려 한다.

우리가 어떤 생활권에 뿌리를 내리고
마음 편히 살게 되면 무기력해지기 쉽나니,

새로운 출발과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만이
우리를 마비시키는 습관에서 벗어나리라.
  
아마 임종의 시간마져도
우리를 새 공간으로  젊게 보낼지 모르나니
우리를 부르는 삶의 소리는 멈춤이 없으리...

자, 마음이여 이별을 고하고 건강하거라.





Bigogno-나무 집 길




내 젊음의 초상        



지금은 벌써 전설이 된 먼 과거로부터        
내 청춘의 초상이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지난날 태양의 밝음으로부터        
무엇이 반짝이고 무엇이 타고 있는가를 !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 왔다.  
      
그 길을 나는 이제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나의 길을 성실하게 걸었고        
추억은 보배로운 것이었다. 
       
잘못도 실패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Wanderung 화집 <방랑>




9월


뜰이 슬퍼하고 있다.

비가 꽃 속으로 시원스레 빠져 들어간다.
여름이 그 마지막을 향해
잠잠히 몸부림친다.

잎 새들이 하나씩 금빛 물방울이 되어
높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굴러 떨어진다.

죽어가는 정원의 꿈속에서
여름이 깜짝 놀라 피로한 웃음을 띤다.

여름은 지금 잠시 동안
장미꽃과 더불어 잠들고 싶어 한다.

이윽고 여름은 서서히
피로한 그 큰 눈을 감는다.





Beet mit Sonnenblumen 해바라기 화단



슬픔



어제 그토록 불타오르던 것이
오늘 죽음의 제물이 된다.

슬픔의 나무에서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내가 가는 길에
쉴 새 없이 떨어져 쌓이는 것을 본다.


발자국 소리도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고,
긴 침묵이 가까워 온다.

하늘엔 별도 없고 가슴엔 사랑도 움트지 않는다.
회색 빛 먼 곳은 적막하고 세상은 늙고 공허하다.

이 사악한 세상에 어느 누가 그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까?
슬픔의 나무에서 꽃잎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Seebucht mit Caslanoberg 카스라노 산의 해안




늦가을의 산책



가을비가  회색 숲에 흩뿌리고,
아침바람에  골짜기는 추워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툭툭 떨어져
입을 벌리고 촉촉히 젖어 갈색을 띠고 웃는다.

내 인생에도 가을이 찾아와
바람은 찢어져 나간 나뭇잎을 딩굴게 하고
가지마다 흔들어댄다 - 열매는 어디에 있나?

나는 사랑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괴로움이었다.

나는 믿음을 꽃피웠으나
그 열매는 미움이었다.

바람은 나의 앙상한 가지를 쥐어뜯는다.
나는 바람을 비웃고 폭풍우를 견디어 본다.

나에게 있어서 열매란 무엇인가?
목표란 무엇이란 말인가!

피어나려 했었고, 그것이 나의 목표다.
그런데 나는 시들어 가고,시드는 것이 목표이며,
그 외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는 목표는 순간적이 것이다.
신은 내 안에 살고, 내 안에서 죽고,
내 가슴 속에서 괴로워한다.
이것이 내 목표로 충분하다.

제대로 가는 길이든 헤매는 길이든,
만발한 꽃이든 열매이든
모든 것은 하나이고,
모든 것은 이름에 불과하다.

아침바람에 골짜기가 떨고 있다
밤나무에서 밤이 떨어져,
힘 있고 환하게 웃는다.

나도 함께 웃는다.








나의 어머님께        



이야기할 것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너무나 오랫동안 나는 멀리  객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나를 이해해준 분은        
어느 때나 당신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당신에게 드리려는        
나의 최초의 선물을        
수줍은 어린아이 손에 쥔, 지금 
       
당신은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나의 슬픔을 잊는 듯합니다.   
     
말할 수 없이 너그러운 당신이,
천 가닥의 실로        
나를 둘러싸고 있기 때문입니다.




Zinnienstraus 백일홍 꽃다발





꿈              



언제나 같은 꿈이다. 
             
빨간 꽃이 피어 있는 마로니에              
여름 꽃이 만발한 뜰              
그 앞에 외로이 서 있는 옛집
              
저 고요한 뜰에서             
어머니가  어린 나를 잠재워 주셨다. 
             
아마도, 이제는 오랜 옛날에              
집도 뜰도 나무도 없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그 위로 초원의 길이 지나고              
쟁기가 가래가 지나 갈 것이다.  
           
고향의 뜰과 집과 나무를              
이제는 꿈에서만 남을 것이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떠올리는              
무수한 낯모르는 얼굴들....              
서서히 하나, 둘              
불빛이 흐려간다.  
            
그 여린 빛이 회색이 되고




Hesses Zimmer 헤세의 방





헤세의 초상화




* 흐르는 곡은, 장영주 연주의 G선상의 아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