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록시에서의 즐거운 시간을 정신없이 보내고
아쉬운 마음을 남겨 놓은 채 일어선 것은 대략 12시를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송 창식군과의 작별에는 왠 넘의 친구들이 그리도 미련들이 많으신지
주차장에서 다시 서로들 인사를 나누느라  시간을 또 까먹었다.

여리기는 영희님과 한 짝이 되어 단 둘이서만 차에 탔다.
가야할 방향은 록시에서 나오자마자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이곳에서는 왼쪽으로 갈 수 있는 신호등이 없다.

하긴 심야시간에 자동차도 드문드문 달리기 때문에 잠시 다른 마음을 먹고서
얼른 핸들을 틀면 되지만  옆에는 모범 인생을 살아오신 영희님이 타고 계신데
어딜 무례한 행동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 몸도 이 동네에서는 젠틀맨으로 낙관 찍혀 있을 텐데.

그냥 순리대로 하기로 정하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도로로 들어섰다.
전에 이곳에 왔을 때에도 이 길로 갔었고 조금만 가면 유턴하는 곳이 있었던 기억이 나기도 하여
별 생각 없이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근데
얼마 후 나타난 이정표를 본 순간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워진다.
표시판에는 직진이면 양평(아마도 그렇게 본 것 같다)이요 우회전하면 광주, 수원이란다.
이거 이대로 곧바로 가다가는 양수리 쪽으로 가는 거 아닌감?
분당으로 가려면 광주방면으로 가면 되겠군.(유턴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로 팽개쳐 버렸는지 모르것다)

"이리 가도 되겠죠?"
"녜  될 것 같군요"

그동안 인일분들과 만나면서
그나마 이야기를 좀 수월하게 할 수 있던 사람을 꼽으라면
우선은 샤인이고 그 다음으로는 송 미선님 그리고 방장님......

처음으로 단 둘이서만 있게 된 영희님이니 자연히 뭔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라는 어려운 문제가 생겼다.
운전하면서, 신호등 살피면서, 도로 확인하는 그 순간순간에도  대화꺼리 잡기에 머리를 쥐어짜야만 했다.
한 가지 다행스러웠던 점은 영희님이 여리기랑 초등동창생이라는 것이었다.

오늘 만났던 창식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하여 이 녀석에 대한 추억을 꺼집어 내니
공통되는 초등학교 옛 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나오면서 예상외로 분위기는 사뭇 부드러워져 갔다.
각자 자식들이야기,
나랑 대학 동기인 문자님이나 현숙님이야기,
그 외 우리 5인방에 대한 이야기들을 가지고 무리 없이 술 술 이야기를 이어나가자고 나름대로 계획도 세웠다.

간간이 나오는 이정표를 보면서 길을 아시는지 물어보기도 하면서 광주, 수원 쪽으로 내려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주위는 너무나도 고요하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시골처럼 한적한 도로는 가끔 자동차가 지나다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둡고 하여, 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처음 가는 도로이기 때문에 잘 못 가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조바심도 나면서 요런 생각이 자꾸만 떠오른다.
"에이 참  록시에서 나오자마자 무조건 좌회전하여 아는 길로 갔어야 하는 건데 ㅉㅉㅉ"

시간은 흘러가고
품위 있는 여인을 무사히, 얼른 귀가 시켜 드려야는 하는데 가는 길은 생판 낯선 풍경만 나오고,
대화는 이어가야 하고..  
처음에는 분위기 잡으려고 셀린 디옹의 씨디를 틀어 드렸으나
언제까지 말없이 음악만 즐길 수는 없는 법.
다부지게 마음 먹고 대화를 열어갔다.

가도 가도 길은 낯 선 길.
아마도 마당쇠였으면
"마님, 이 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라도 택시를 불러야 할깝쇼?" 꼬리를 내렸을런지도 모르지만
육군 포병장교 출신인 여리기는 짐짓 태연한 척,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어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요.  밤이다 보니 속도도 너무 낼 수가 없고. 그냥 안전하게 느긋히 가겠습니다“.
영희님 불안하게 하지 않으시게 속으로는 근데 이 길이 맞기는 맞는거야? 중얼거리면서리..


우리나라 도로에 설치되어 있는 이정표는 고처야 할 점이 한 둘이 아니다.
일일이 열거하려고 하면 열불이 나서 참을 수 없어 여기서는 생략하겠지만
특히 밤중에는 조명도 어두워 초행길을 가는 경우에는 이정표에 적혀있는 지명을 읽으느라
서행한다거나 신호도 내지 않고 급정거 하는 등 본의 아니게 뒤 차에 위험을 주는 경우도 자주 있게 된다.

그 날도 가로등도 침침하고 (어느 곳은 그 것마저 없어서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으로  글자를 확인하기도 한다)
초행길이라 조심스럽게 운전을 하고 가니 시간은 자꾸만 늦어졌다.

어렵게 어렵게 가던 도중에 남한산성이라는 표시가 나오자 영희님이 말한다.
“아! 남한산성 쪽으로 가시면 분당이 나올 거예요. 그 길로 가시죠”
(그래 남한산성을 넘으면 성남이 나오겠구나. 가보지 뭐)

구불구불 산길을 달리며 살펴보니 주위에 음식점이랑 카페 같은 곳이 제법 많이 있다.
한참을 올라가는데 다시 영희님이 한 말씀하신다.
“아닌가? 옛날에 왔던 데가 아닌 것 같기도 하네”
(잉? 이거 낭패네. 길 잘 못 들면 한 밤을 종일 헤맬지도 모르는데...내일 아침에 뭔 소문이라도 나는 건 아닐려나)
“그래요? 안되겠습니다. 누구한테 물어 봐야 겠네요”

운전기사는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는 식당을 찾아가 성남 가는 길을 물어 보았다.
온 길을 따라 그냥 주욱 올라가면 나온단다.
참 우리나라 사람들, 길 가르쳐 주는 방식은 너무나도 간단하고 쉽다.

한 밤중이라 한적한 산길을, 그것도 잘 포장된 도로를 여인과 함께 드라이브 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방향도 틀림이 없음을 알았겠다 이왕 시간도 늦었으니 안달을 해 보았자 별 수가 없을바에는
즐기면서 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렇게 심야에 데이트 했다는 걸 친구 분들이 아시면  뭐라고 하실까요.
부러워할까요?“

“아마 놀라워들 하겠죠?”


가파르지도 않고 그리 높지도 않은 고개를 올라가 보니
와!!!!!!!!!!
성남과 분당을 잇는 기니긴 불야성이 눈앞에 펼쳐진다.
정말로 오랜만에 장관을 보게 되었다.

둘이 동시에
“햐!!!!!!!!!!!! 멋지네요.”
“좋군요”
정상에 차를 세워 놓고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이 찬란한 불 잔치를 감상하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만서도 너무나도 늦은 시각이라 아쉬운 대로 천천히 운전을 하면서
움직임 없는 가로등 빛과 요란하게 번쩍이는 네온사인들
그리고 끊임없이 이어저 오는 자동차들의 불빛들을 정신없이 내려다보았다.

올려다보려고만 하지 말고 나보다 못 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라는 말이 있지만
그 날 그 시각, 내려다본다는 문구는 여리기에게는 의미심장한 말로 다가왔다.

그저 매일 보는 불빛이건만
이렇게 높은 곳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보니
오늘은 그 빛으로부터  생의 아름다움이 비춰오는 것 같다.

그리도 무섭게 내달리던 자동차들도
위에서 내려다보니 모두들 서두름 없이 천천히 천천히 달리고 있다.
지금 눈에 보이는 많은 것들이 평화롭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그 모습에서 바쁘게만 살아온 삶에서 여유로움을 가지고 산다는 것의 아름다움이 전해져 온다.


멀리 떨어져서 사물을 관조한다는 것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단 말씀야.
살아가면서 가끔은 이런 때도 있어야 하는건데....


다시 시내로 내려와서 마주치는 여러 가지의 빛들은
조금 전, 산 위에서 내려다보며 가졌던 넉넉함과는 다른 맛을 주고 있다.
왠지 답답하고 조바심이 나면서 맥박이 빨라진다.

산길을 지나면서 나누던 대화는 그런대로 담백한 면도 있었는데
시내에 들어서면서는 이야기 내용도 현실적으로 바뀌었다.
“저 넘의 차는 신호도 무시하네요.”
“분당의 아파트 가격이 많이도 올랐다지요,”
“저 많은 상가들이 다들 장사가 잘 될까요......”
"저 녀석들은  왜들 집에는 안들어가고 밤 늦게까지 헤매고들 있는고?"

1시가 넘어서 영희님이 거하시는 아파트 부근에 차를 세웠다.
이 날은 공교롭게도 여리기가 핸드폰을 집에다 놔두고 나왔기에
록시에서 출발하기 전에 집으로 전화를 하기로 하였었는데
그만 깜빡 잊고 남한산성에 들어서서야 생각이 났기에
영희님 댁에 바래다 드리고 잠깐 핸드폰을 빌려서 마님께 보고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었지.

귀부인을 내려 드리기 전에 핸드폰을 빌려 달라고 하니 영특하고 눈치 빠르신
영희님께서 하차 하시더니 슬그머니 차에서 멀리 자리를 뜬다.
인일동산에서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신사로 알려져 있을 여리기가,
늦은 귀가로 인하여 마눌한테 쩔쩔매면서 호통이라도 받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않는 상황이라도 보여서 입장이 난처해 할 까봐 염려하여서 취한 배려이신 것 같았다.


어부인께 짧게 보고 드리고 여리기는 집으로 향했다.
별 일 없이 원만하게 수습을 하여서 혹시나 하였던 기대에 부응치 못 한 것은 아니었겠지요? ㅋㅋㅋㅋ
집에 도착하니 2시 10여분.

마나님이 반갑게 맞이하신다.
그럼 그래야지
집에 돌아 온 것만 해도 어딘데.
더구나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돌아 왔는데.

아직은 여리기가 눈치 보면서 살지는 않는 듯 싶다.



영희님 영희님 박 영희님 그 날 잘 들어가셨죠?


이 런 이 런
내일이면 울 친구가 브라질로 가시네.
그 간의 한국 생활 좋으셨죠?
영희님 영희님 조 영희님  아무 탈 없이  안녕히 가세요.



원하던 대로 일들이 되지 않더라도 항상 언잖아 할 것만도 아닌 것 갑다
뜻밖에 생각지도 못했던 만족을 얻을 수도 있었잖은가.

남한산성에서 불빛을 내려다보면서 얻은 경험이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