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1일부터 약국의 여름휴가가 시작된다.
휴가 날짜는 벌써부터 정해져 있었다.

약국을 오픈하면서 거의 휴일 없이 10개월을 버티다보니 체력에 한계가 와,
7월초부터 위가 쓰리고 소화도 안 되고 기운도 없고 먹는 것도 귀찮고 잠도 잘 이루지 못하는등 무척이나 고생을 하였었다.
결국 내과에 가서 진찰 받고 위내시경까지 검사하였다,

약 먹고 몸 상태가 원상복귀 되어 가니 집사람이 이번 여름 휴가는 어디엔가에 가서 푹 쉬다가 오자고 한다.
형제들 모임이 마침 그 시기에 있어서 어디가 좋은지 물어보니 정말이지 이번 휴가에는 여행을 갈 것이냐고들 반가워 하면서
바로 위 형님이 근무하셨던 거제도가 좋으니 한 번 갔다 오라고 강추하셨다.

더불어 밑에 남동생이 놀린다.
평소에 재미없는 형님이나 형수님이 맘 크게 잡수시고 놀러 가신다는 것이 놀랍고 기쁘게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된단다.
뭘 하시면서 2박 3일을 보내실꺼며 긴 긴 하루를 무슨 이야기들로 채우실련지.......

이 녀석아 그래도 결혼 30여년을 별 탈없이 지내왔잖냐 !!!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 먼 곳을 어떻게? 왔다 갔다 하다보면 운전하느라 진을 다 뺄텐데....
하지만 마눌하고의 십여 년 만의 외출인데 내색 잘 못했다가는 마눌한테 소박맞을 것은 물론이고
형제들이랑 형수, 제수씨들한테 완존 왕따 당하기 십상이라 말도 못 꺼내고 머리만 끄덕거렸다.

그래 큰 맘먹고 한 번 멀리 떠나보자, 대신에 2박 3일만 지내고 나머지 이틀은 그냥 내 마음대로 쉬기로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거제도로 최종 결정이 난 것이 2주일 전 쯤이었다.

지금부터 20여년전 일본에 있을 때, 방학을 맞이하여 전공교실에서 단체로 여행이나 행사를 계획할 때나,
아님 학생들이 놀러갈 때에 행선지의  롯지(lodge) 예약을 한 3개월전부터 알아보는 것을 곁에서 보곤 하였다.
아니 우리나라에서는 호텔이라면 모를까  무슨넘의 예약?   정 급하면 당일에 가서도 방들도 잘 잡곤 하였는데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어인일로 이리도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만 하는고?    참으로 불편한 나라로구나
속으로 흉보던 때가 있었다.

그것이 세월이 흐르다보니  요사이는 우리나라도 미리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인식하고는 있었다.

거제도에서 약국을 하였던 대학 친구가 2명이나 있으니 정 급할 때에는  녀석들에게라도 앵겨보면 뭔 수가 생기겠지라는
믿는 구석이 있기도 하여 며칠은 그저 태평스럽게 보냈고 한 열흘전부터는 슬슬 알아봐야지 생각하면서도
별로 바쁘지않는 약국일이었지만 깜빡 깜빡 잊고 지내다 어제서야 본격적으로 숙박할 곳을 알아보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아침 11시경이었다.


어제 직접 인터넷으로 들어가 보니 호텔은 물론이요 펜션, 민박, 모텔까지 여러 종류의  숙박시설이 즐비하였다.
그럼 그렇지 이리도 많은데 잘 곳은 널려있겠지.

호텔은 이미 예약 완료되었을 것으로 예상하고, 외도로 가기 쉬운 선착장 부근에 있는 펜션위주로 인터넷을 여행하였다.
전망도 좋고 위치도 적당한 곳 10여군데를 골라 홈페이지를 방문하였다.

난 8월 15일 정도면 휴가 끝머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7월 중순부터 8월 중순이 성수기라네.
모든 곳이 다 가능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나 그래도 몇군데는 비어있는 방이 있으리라 느긋이 마음먹고
요모 조모 살펴본 후에 5군데의 괜찮은 펜션을 골라 점잖게 전화번호를 눌렀다.

이크 이런 이런, 모두 다 예약이 완료되었단다.
주인들께서 예의 바르게 답변들을 해 주시지만,  성수기인 지금,  2-3일 앞두고 이제야 예약하는 사람도 있다니..,
지금 세상에 참 무던하고 태평스러운 사람도 다 있다라는  느낌을 풍기는 인삿말들이었다.

등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거제도에 살았던 친구들한테 전화하여 사정이야기 하면서 협조를 구하였더니
한 녀석은 자기는 거제도를 떠나온 지  오래되어 연결시켜줄 곳이 없는데
다른 한 녀석은 혹 가능할지 모르니 그 쪽으로 알아보라고 비켜간다
다른 녀석에게 전화해 보니 지금은 너무 늦었으니 아예 자기가 살고 있는 부산으로 와서 놀다 가란다.

이제는 호흡하기조차 힘들어졌다.

때 맞추어 마눌이 약국에 들어선다.
오늘이 말복이라 그간 남편이 고생했다고 어제부터 삶기 시작한 닭백숙을 담아서 더운 날씨에 땀 흘리며 가지고 온 것이다.

내 모습을 보면서 왜 그러느냐고 물어본다.
옆에 있던 아가씨가 킬킬거리면서 알려준다.

● 진작부터 알아보실 것이지 ㅉㅉㅉㅉ.  한마디 들었다.

이제는 위치나 가격 따질 것 없이 무작위로 돌려본다.
차타고 다니는데 펜션이 선착장에서 멀면 어때? 가격? 호텔보다 비싸면 어때 빈 방만 있으면 되지.

어느 펜션은 각 방마다 예약 가능 여부를 실시간으로 알 수 있게끔 정리해 놓은, 앞서 나가는 홈피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홈피는 직접 전화를 걸어야만 알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친절하게 각 방을 나열해 놓고 예약가능한 표시까지 해 놓은, 마음에 꼭 드는 홈피가 있어서 즉시 들렸더니
모두 예약이 완료되었다고 느긋이 말해주는,  정말로 짜증나게 만드는 못된 홈피도 있었다.
좌우간 결론은 한결같이 모두 다 예약 완료.

●  민박으로 알아보자고 마눌이 아이디어라고 주고 있다.

단박에 면박을 주었다.
★  아니 몇 년만에 가는 휴가인데 민박이라니. 우리 나이가 얼마유?

여자끼리 눈짓을 나누면서 조잘거린다.
여사원이 물어본다.

◆  몇 년만에 두 분만 가시는 여행인데요?
★  아마 십년은 넘었을 껄.. 결혼 20주년 기념으로 1박2일 나들이였지 아마?
◆  예에~?. 국장님 너무하셨다 너무하셨어.

섬뜻해지면서 마눌의 눈치를 재빠르게 살핀다.

★  에이 안되면 강화도나 서해안 서산반도라도 갑시다.

답변이 없고 분위기도 심상치 않음이 직감적으로 느껴져 온다.

이때 새로 산 나의 핸폰이 요란하게도 울린다.
받아 보니 마당쇠 양국이다.

■   어이 오랜만일세.
★  요사이 어떻게 지내는고? 어디 다녀왔는감
■   아니 아직. 자네는 휴가는 갔다 왔는가?
★   말 말게나 모레부터 시작인데 아직도 숙소를 결정치 못했다네. 펜션들이 요사이 배가 터지는 모양이야.
■   어디로 가는데?
★   거제도.
■   거제도? 왜 그 먼 곳으로.
★   형제들이 강추해서리.
■   가만있어봐라 내 아는 녀석이 거제도에서 통졸임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양구기 전화가 왔다.

■  장승포에 있는 호텔OO에 자네 이름으로 예약을 해 놓았다.
숙박료는 8만원하고 12만원인데 우리나이에 뭔 12만원이냐.
낮에는 돌아 다니고 저녁에는 놀러 다니고 밤에는 잠만 잘텐데. 그래서 8만원으로 했다. 펜션보다 더 싸더라.

속으로는 녀석 기특도 하다. 어쩌면 내 마음하고 이리도 같을까 하면서도

★  그래도 마눌하고 가는데  이왕이면 전망도 좋고 질 좋은.....

망설이는 척 하였더니 양구기가 두 말 하지 말라면서 잘 다녀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남긴다.

■  나이 먹으면 마눌 속 썩히지 말고 시키는대로 착한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만 다니다가 몸 성히 돌아오란다.
말 안 듣다가는 바람직하지 않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단단히 조심하란다.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느낌은 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일도 일어나는군요.

잘 곳을 얻지 못하여 거제도 행을 포기할 까 망설이던 차에 평소에 별 신통치 않은 친구라고  
속으로 우습게 여기던 양구기가  우연찮게 오랜만에 전화했다가 호텔 예약까지 해 주지를 않나,
호텔보다도 더 비싼 펜션은 모두가 만원인데, 비록 해안가에 있는지 시내 한 복판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리고 지은지 얼마나 되는지, 방은 후진지 깔끔한지 알지 못하지만 명목상 그래도 호텔이라는 곳은 비워져 있었다니.  

자 그럼 가는 일만 남았네.
근데 무엇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요건 또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이번엔 어느 녀석이 전화 걸어 올것인가? 녀석에게 앵겨봐야지.

살아오면서 놀러가는 일, 모임 주선하는 일, 식당이나 노래방, 숙소 정하는 일등은 내 손으로  해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다 직원이나 부하들이나 회사, 학교 등에서 알아서 해 주었기에 난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었다.
몇 년 전부터 대학동기들간에 부부동반이나 혹은 남자들끼리만 모여서 여행갈 때에도
나서서 깔끔하게 일 처리하는 친구가 한 두명있는 덕에 나머지 녀석들은 편안하게 다니곤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요사이도 난 별로 대수롭잖게 여기고 사는데 주위에서는 한심하게 생각들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벌을 이제야 받는가 하였는데 듕국넘처럼 생겨먹은 異種 수호천사가  나타났다.


현역시절 전국을 돌면서 평소에 만나는 사람들마다 밀접한 관계를 구축해 놓았던 녀석이
은퇴후에는 김빠진 맥주 신세로 떨어진 것은 아닌가 여기고 있었던 우리의 마당쇠 양구기가
기가막히게 절묘한 시기에 나타나 역전의 용사다운 실력을 발휘에 주셨다.

그려 그려 자네 마당쇠 양구기는 아직 녹슬지 않았구먼그려.
고마우이 친구여.


모든 예약은 미리 미리 해 놓고 삽시다.

그렇다고 이 세상과 이별하는 예약은 말고요.
예약 할 수도 없고 받아주는 곳도 없지만서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