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부모님 제사를 맡게 된건
순전히 내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몇해전인가?
감기끝이 안좋으시다는 소식과 함께
시아버님 제사를 못하시겠다는 전갈이 형님에게서 왔다.
그후 몇달후 우리 형님은 눈수술을 하시고
희미하게 보이던 시력이 점점 약해져
전혀볼수없는 시각 장애자가 되시고 말았다.

형님께서 조용히 나에게 부탁하셨다.
이젠 자네가 맡아달라고...
장조카가 맡아야될 일인것 같았는데
그때 조카는 잘다니던 공무원 때려치고
세무고시 준비중인 관계로 몇번의 고배를 마시고
여러모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시댁 식구들과 의논도없이
제사의 중책을 내가 맡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맡아야만 될것같아
이리저리 구구한 말들 오고가는것도 싫었고
남편에게 약간의 호기도 부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일년에 4번 정도
별거 아니라고 생각 했지만
장보는 일부터 만만한게 아니었다.
명절 때는 북적이는 친척들과
미리와서 일을 도와주는 동서와 며느리덕에
그런데로 치룰만 한데
제사때 며느리와 둘이서 장만한 음식들이
이런저런 사정으로 참석 못한 시동생들로 남아돌아가고
집안이 썰렁할땐
참으로 돌아가신 시부모님과 며느리보기가 면구스럽고 쑥쓰럽고
마치 내가 죄인이 된양 고개를 들수없을때가 몇번 있었다.
그런대로 세월은 가고 큰일은 우리집 주축으로 돌아가고있었다.

그런데 추석 몇일전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제부턴 명절날 낮에 잠깐 얼굴보러 오겠다고...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소린가?하고 기분이 묘해졌다.
썰렁하게 가슴 한가운데가 뻥 둟린것 같으면서....
세상에 아무리 시아주버님이 얼마전에 돌아가셨다구해두
이건 너무하다 싶은생각이 드는데
장례후 큰집식구 끼리 따로 남아서 한의논이 이것이었구나
생각하니 약간의 배신감도 느껴졌다.

사람이 감정만으로 살수는 없는일
형님설득 작전으로 들어가
아침에 조상님에게 차례올리는건 모두 모여서해야만 의미가 있는것이고
때되면 서로 분가되는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된다구
내가 병들거나  더늙어서 손띠게 될때는
누가 말려도 각자 나름대루 명절을 보내게되니
때를 더 두고 보자고 조근 조근 말씀 드렸더니
알겠다고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시기에 마음 놓았더니
다시 전화루 번복 또 번복 헷갈리게 하시더니
나중에 내말대루 따르기루 결정하시는 우여곡절이 있었다.

요번 추석 지내면서
큰수확은 온친척들이 시아주버님 영정에 인사드리러 가는
의식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조카가 세무고시에 합격해
얼마전 일산에 세무사 사무실 차린 것도 축하할겸
형님네 며느리는 좀 힘들고 번거롭겠지만
점심은 형님집에서 준비하여 대접하는 것을 시작으로
이집저집 인사다니는 정겨운 풍경이 우리시댁에서도 볼수있게 되었다.

이는 후덕한 우리 형님이 모이니 좋더라라는 결론으로
해마다 명절때마다 점심을 준비하시겠다는
말씀으로이루어진
요번 추석의 쾌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