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생(生)눕사(死)
김 희재
요즘도 매일 만 보 이상 걷고 있다.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외출할 땐 무조건 마스크를 쓰고, 사람들과 ‘거리 두기’를 해야 하는 코로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하필 내가 26년이나 살던 도시를 떠나온 지 몇 달 안 되어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아직 동네도 낯선 터라 혼자 시간 보내는 것이 더 힘들었다.
교회를 비롯하여 문단 활동과 동호회 등 내가 속해 있는 모든 사회가 다 멈추었다.
친구들 여럿이 웃고 떠들며 같이 밥 먹고 노는 일은 금기사항이 되었다.
특히 나는 면역력도 시원치 않은 데다
이제 갓 첫돌이 지난 손녀를 매주 한 번씩 만나기 때문에 더 철저히 방역수칙을 지켜야 했다.
꼼짝없이 집안에 고립되고 말았다.
너나없이 외롭고 힘든 시간을 어찌 보낼꼬 궁리하던 끝에 여고 동창들과 ‘따로 또 같이’ 걷기로 했다.
바이러스가 무서워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같이 걸을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하루에 만 보 걷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각자 사는 동네를 걸으며 보이는 풍경을 사진으로 찍어 단톡방에 올리기로 했다.
걸음 수를 기록해 주는 앱을 사용하여 매일 얼마나 걸었는지 보고하기로 했다.
100명 넘는 사람이 모여 있는 단톡방에서 10여 명이 의기투합하여,
날마다 자기가 본 풍경과 걸음 수를 공개하며 열심히 걸었다.
꽃구경 갈 수 없는 봄과 유난히 비가 많이 온 여름,
스치듯 짧게 지나간 가을과 겨울 풍광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보냈다.
그것이 코로나 정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었다.
처음엔 하루에 만 보는커녕 오천 보 걷기도 힘들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걷는다는 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단단한 결심과 끈기가 필요했다.
혼자였으면 ‘작심삼일’도 힘들었을 텐데 친구들과 함께여서 가능했다.
우린 서로 의지했고, 경쟁했고, 격려했다.
나는 집 근처부터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차를 타고 다녔던 앞 동네 옆 동네를 걸어가 보았다.
낯설던 동네가 차츰 눈에 들어왔다.
내친김에 집 앞에 있는 실개천을 따라 탄천으로 나갔다.
걷는 길과 자전거길이 구별된 탄천은 예상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내 발로 밟고 다닌 모든 길과 내 눈으로 본 경치가 서서히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은 시나브로 잦아들었다.
매일 걸으면서 자연스레 새 동네에 정착하게 되었다.
걸어가다 사람을 만나면 얼른 외면하고 되도록 멀찍이 피했다.
마스크와 모자로 단단히 무장하고, 양산 겸 우산으로 쓰기에 요긴한 검은색 긴 우산도 항상 들고 다녔다.
날이 더울 때는 새벽이나 저녁에 그늘을 찾아 걸었다.
동지가 지난 후엔 해가 쨍한 시간에 햇볕이 있는 곳을 골라서 걸었다.
걷는 것은 다리 운동일 뿐만 아니라 뇌 운동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꾸준히 걸으면 치매도 예방된다고 했다.
실제로 내가 해 보니 머릿속이 깨끗이 비워졌다.
열심히 걷다 보면 잡다한 근심과 스트레스, 우울감, 걱정, 고립감, 불안감 등이 사라졌다.
마음도 편해졌다.
변화는 몸에서도 나타났다.
군살이 좀 빠졌고, 피곤해서 드러눕는 일이 줄어들었다.
밤에 푹 자고 일어나면 몸이 거뜬하고, 지루할 새 없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실제로 건강 검진 결과도 좋게 나왔다.
건강지표가 재작년보다 눈에 띄게 좋아졌다.
나이는 더 먹었는데 수치가 좋아진 건 ‘매일 만 보 걷기’ 덕분임이 분명했다.
요즘 유행하는 ‘걸생눕사’(걸으면 살고, 누우면 죽는다)라는 말이 딱 맞았다.
탄천에서 걷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멀쩡한 사람들이 걸으면서 혼자 웃고 떠든다.
그런 모습을 미친 사람 보듯 하던 나도 무선이어폰을 사서 귀에 꽂고,
좋아하는 음악과 강의를 들으며 걷게 되었다.
종종 친구와 통화하며 큰소리로 웃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엔 혼자 걷는 것 같아도 나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었다.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멈춰 세우니 사람들은 다른 경로로 소통했다.
집에서 컴퓨터를 통해 일하고, 비대면으로 국제회의와 콘서트도 하게 되었다.
세상은 지금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 있는 게 분명하고,
나는 간신히 그 대열 끄트머리에 끼어 걸어가고 있다.
여전히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고 있는 이 전장(戰場)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는 오늘도 전투화 끈을 단단히 조이고 집을 나선다.
보폭을 조금 넓게 하면 허리가 쭉 펴지고 걸음 속도는 빨라져 운동 효과가 높아진다니,
큰 걸음 만 보 정도 뚜벅뚜벅 걷고 와야겠다.
김희재; 계간수필 천료 (1998년).
저서; 산문집 <죽변 기행>, 러시아와 북유럽여행기 <끝난 게 아니다>, 4인수필집 <이상한 곳에서 행복을 만나다> 외
수필문우회, 계수회, 한국수필, 한국문협, 국제PEN 회원.
이 글은 <계간 수필> 2021년 봄호에 발표한 것이야.
지난 1년 동안 우리가 함께 한 일을 소재로 쓴 글이지.
친구들 덕분에 어려운 시간들을 잘 이겨냈고,
매일 걷는 습관이 들었어.
고맙고 또 고맙다.
앞으로도 계속 걷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