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명진이와는 같은 반을 두 번 정도 한 것 같다. 어쩌면 한 번이었을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같이 놀러다닌다거나 그런 적은 없지만, 키가 비슷해서인가 그애를 가까이에서 많이 볼 수 있었고 얘기도 편하게 나누었다.
명진이는 무척 부지런했다.
교복도 언제나 깨끗하고 단정했고, 머리도 늘 깔끔했다.
여러 면에서 매우 적극적이고 씩씩한 아이였다.
당시 학교의 지원이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 무용을 배우고 대회에 나가고 할 정도였으니.
집도 부평이라 통학하기도 어려웠을 텐데 어찌 그렇게 힘든 일을 씩씩하게 해냈을까?
중 3때였을까 고 1때였을까.
그때 그애가 정말 맛있는 도시락을 싸오기 시작했다.
양파와 돼지고기를 볶아서 매일 볶음밥을 해 왔다.
어찌나 맛있는 냄새가 나고, 실제로 한 입 얻어 먹어 본 그 밥은 얼마나 맜있었던지.
아직도 그 냄새와 맛이 생각난다.
내가 너네 엄마 바쁠 텐데 매일 아침마다 이걸 어떻게 만들어? 물었더니
내가 일찍 일어나서 만들어. 이렇게 말해서 굉장히 놀란 적이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명진이에게는 세 명의 여동생이 있었으니 아마 그애들 것까지 다 만들어 놓고 왔을 것이다.
우리 친구들 모두는 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길로 떠났고, 아주 친한 친구들 외에는 아니 친했던 친구들조차 잘 보지 못하고 거짓말처럼 잊고들 살았지.
그 당시 명진이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세 명 동생들을 거두며 생활하였다고 하니 명진이의 힘들었을 행보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이 졸업 30년 후에 만나고, 그러고도 몇 년이 지난 후 명진이는 우리에게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무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우리 친구들은 많이 놀라워하면서 기뻐했다.
유능한 직업인으로 바삐 지내고 있었는데 그런 중에도 저렇게 몸과 마음을 관리한다는 게
보통 성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존경 비슷한 마음도 들었다.
속이 깊고 다정한 성격이라 드러내지는 않으면서도 힘들고 어려운 친구들을 챙기고
마음을 나누는 일을 뒤로 미루지 않았다.
동기 임원을 맡아 조용히 열심히 도왔던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려움을 겪고 아픔을 이기고 있는 친구들에게 늘 안부를 전하고,
마음을 표현하고 힘을 주었다 한다.
명진이는 외모도 아름다웠지만, 노래며 연주며 춤이며 운동이며 너무 다양한 면에 탁월한 재능이 있어 또한 우리를 감탄하게 했고 즐겁게 했다.
언젠가 우리 모임에서 그애가 <누구 없소?>라는 노래를 진짜 멋있게 부른 적이 있다.
난 지금까지 그 노래를 그렇게 맛깔나게 부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보고 듣는 우리까지 어깨를 으쓱하게 했는데.
아, 그런 모습을 다시 볼 수 없다니......
정말 누구 없소?라고 되묻고 싶다.
얼마 전에 아버지상을 당한 어떤 친구의 상가에 문상을 와서는 힘내라고, 건강 살피라고
하며 따뜻하게 손을 잡아주고 갔다는 명진이.
그 친구는 그게 너무 안타깝고 고마워 명진이의 두 딸을 꼭 안아 주었다고 한다.
뭐라 할 말이 없어 안전벨트 잘 매라고 했다던가....
3주 전에 우리는 명숙이를 멀리 보내고 무너진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믿기지 않게 명진이의 비보를 듣게 되었다.
명숙이의 상가에서 나는 나가고 그애는 들어오며 눈으로만 인사를 했는데, 아니다 그 와중에도 반가워서 내가 그애의 어깨를 만지며 인사를 했다.
슬픔으로 어두워진 그애의 얼굴이 잔영으로 남아 있어 마음이 아프다.
우리 나이가 이렇게 된 거겠지.
친구들이 우리에게 너무 공부를 시키고 가네.
아름다운 친구 명진아
나이가 많이 들어서라도 만날 수 있어서 고맙고 기뻤어.
너의 깊고 솔직하고 따뜻하고 진중한 눈빛을 볼 수 있어서 기뻤어.
멋지고 좋은 모습을 보여 줘 고마워 명진아.
그래도 이건 좀 반칙이다.
고 이명진 친구의 명복을 빌며,
황망한 슬픔에 싸여있을 가족에게 마음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
이런 단어들이 떠오른다. 지난 24일 산행 중에 갑작스럽게 입적하신 적명스님의 기사를 보며
우리의 동기 명진이의 비보가 오버랩 된다. 아래 마음에 와 닿는 스님에 관한 기사를 링크해 놓을게.
https://news.v.daum.net/v/20191229070045008
깨달음은
일체가 자기 아님이 없음을 보는 것입니다.
남이 바로 자기 자신이며
자신과 다르지 않습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이
깨달은 사람입니다.
중생이 불행하면
자신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중도의 깨달음은 사랑
진정한 사랑입니다.
- 적명스님 법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