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3 : 조선 그림과 글씨’를 하는 날이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여 독서모임이 아니라면 따라가기 힘들었을 책이다.
오늘은 독서지원단에서 사람이 나와 우리와 함께한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미리 알릴까 하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하여
알리지 않았지만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안 오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한 명 한 명 올 때마다 더더욱 반갑다.
숙희는 조상들의 삶에 대한 생각을 보며 ‘노후의 건강한 삶’에 대해 생각했다고 한다. 여유자적함도 좋고 작가로써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좋으나 어느 정도 노동으로 내 삶을 책임지며 통달 보다는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함께하는 삶 속에서 서로 기대며 나누는 삶을 꿈꾼다 했다.
다른 친구는 우리가 서양화 위주의 교육을 받았어서 동양화는 낯설게 보였는데 이 책을 읽으며 우리 옛 그림의 멋을 느끼게 되었다 한다.
초상화에 흉배 이야기가 나와 옥규는 “우리나라 고대 의상 연구가로 유일한 존재이며, 선생의 개인 수집품은 어느 것 하나 국보적인 존재 아닌 것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는 석주선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 지금 우리가 조상들의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이렇듯 뜻 깊은 분들의 피나는 노력에 의한 것이었음을 생각하니 숙연한 마음이었다.
정인이는 그동안 세계여행을 하며 서양미술사는 관심이 많았지만 정작 한국미술사는 잘 모르고 있었는데 우리 것에 대해 눈을 뜨게 되어 더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조상들이 그 옛날에도 비평이 있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정선의 박연폭포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한다. 관아재 조영석의 그림이 매력적이었고, 집에 걸어 놓고 싶은 그림들도 소개하였다.
다른 친구는 독서모임의 좋은 점은 ‘모르는 것을 배우는 즐거움’ 이라 했다. 이 말을 들으며 ‘우리 친구들의 삶의 태도가 참 멋지구나’ 했다.
이 책은 제1권 선사·삼국·발해, 2권 통일신라·고려에 이어 29장부터 시작한다. 조선시대 회화와 서예를 초기(1392~1550년 중종 연간까지),
중기(1550~1700년 숙종 연간까지),
후기(1700~1830년 순조 연간까지),
말기(1830~1910년 대한제국까지) 등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기존 미술사에서는 다소 미흡하게 다룬 궁중미술과 초상화에도 많은 비중을 두었다.
화가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고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지는 않지만
당대의 뛰어난 화원들이 제작한 조선시대 고유의 장르인 만큼
그 예술적 의의를 부각시킨 것이다.
조선시대 서화, 그중에서도 그림은 아름다움을 적극 표현한 본격적인 예술 작품일 뿐만 아니라 화가의 작가의식이 명확하게 들어 있어 한국미술사의 꽃이라 할 수 있기에 다른 장르보다 비중 있게 다루었다한다. 특히 조선시대 글씨와 그림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상 할 수 있게끔 생생한 도판을 실고 있으며 본문에 언급된 그림은 가능한 모두 수록하여 540여 컷의 도판은 한국미술사의 특징과 흐름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유홍준은 우리에게 인문학적 소양을 갖게 하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남겨 대중화에 앞장선 분이지만 여러가지 구설수에 관한 이야기도 나왔다. 사람은 어느 시점에서 잘못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배웠던 신숙주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나왔다.
옥규는 예전에 소개했던 <기적을 그리다>라는 이란 영화를 소개 했다.
폐쇄 된 환경 속에서 오십대에 우연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여인이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하게 되었을 때 외부의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대가들의 그림을 보고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라며 더는 못 보는 장면이 나온단다.
범인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경지! 해본 사람들, 아는 사람들이 아는 세계가 있는 것 아닐까?라는 말을 했다.
그런 느낌을 따라가려는 우리 친구들이 아름답게 생각된다.
다른 친구는 ‘그동안 우리 그림은 잘 안쳐다 봤구나.’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단다.
두껍고 무거운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독서대’를 마련해 주기도 했단다. 그 엄마에 그 딸! 참 예쁘다!
또 다른 친구는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재밌는 세상에 감사하고 현재를 재밌게 사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했다.
또한 우리 선조들이 얼마나 노력해서 경지에 다다랐는지 그 일례로 추사 김정희는 칠십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내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고, 겸재 정선은 무덤을 쌓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여 우리민족의 자랑인 추사체의 형성 과정과 특징에 대해 박규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추사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에 뜻을 두었고,
북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당시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가 적은 흠이 있었다.
그 후 소동파와 미불을 따르고 이옹으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해 지더니
드디어는 구양순의 신수를 얻게 되었다.
만년에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고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을 이루니
신이 오는 듯, 기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그렇게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완성된 것이 추사체인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은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의 오늘도 힘들지만 서로 힘을 함께하며 부단히 노력함에 길이 생기는 것 아닌가 생각하며 나라의 큰 어른 위창 오세창을 소개한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이 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돌이켜보건대 위창은 자신의 안목을 민족을 위해 남김없이 베풀며 문화보국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그 위업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위창 탐방기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古物]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一石)을 차지할 만하도다.”
그런 점에서 유홍준도 '미술사의 사회적 실천을 위하여' 자료를 집대성하고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게 함으로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하겠다.
끝으로 독서지원단에서 나오신 분은
우리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대단하다. 덕분에 배우고 간다. 그런데 매우 진지하다. 하며
독서지원단에서 지향하는 바는
1. 누구든지 언제든 참여 할 수 있는 오픈 된 독서모임.
2. 독서모임을 하다보면 책의 수준이 점점 올라가서 새로 들어오는 회원은 적응하기 힘들다. 난이도를 조절해서 내가 관심이 없는 분야도 읽는 계기가 되기 바람.
3. 책을 다양하게 읽기위해 다양한 사람이 추천바람.
4. 모두 대화에 참여하고 표현 다 같이 나누며 우리의 삶의 이야기도 하며 정서적 체험을 중시하기 바람.
* 다음 모임엔 김인숙의 ‘화살 맞은 새 인조대왕’으로 하기로 했다.
그 날은 작가인 김인숙의 강의로 이루어 질 것이다.
* * 알림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
전시기간 : 2019-07-23~2019-09-22
전시장소 : 상설관 특별전시실
강의 : 7.23 14~16시 ㅡ 추후 심정인 안내
* 고궁박물관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6.28~9.22
오늘 점심 식사 후 관람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서로의 마음을 나누며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젊음 못지않게 멋지다.
자신의 자리에서의 역할을 생각한다.
다음 모임이 기다려진다.
- IMG_E3973.JPG (53.1KB)(0)
- IMG_E3969.JPG (59.5KB)(0)
- IMG_E3972.JPG (33.1KB)(0)
- IMG_E3999.JPG (167.7KB)(0)
- IMG_E3974.JPG (45.0KB)(0)
- IMG_E3975.JPG (43.5KB)(0)
- IMG_E3976.JPG (102.8KB)(0)
- IMG_E3979.JPG (78.6KB)(0)
- IMG_E3986.JPG (52.4KB)(0)
- IMG_E3987.JPG (63.8KB)(0)
- IMG_E3990.JPG (82.0KB)(0)
- IMG_E3991.JPG (69.0KB)(0)
- IMG_E3992.JPG (69.0KB)(0)
- IMG_E3993.JPG (82.5KB)(0)
- IMG_E3994.JPG (72.1KB)(0)
- IMG_E3995.JPG (81.0KB)(0)
- IMG_4072.JPG (128.1KB)(0)
- IMG_4072.JPG (128.1KB)(0)
위창 오세창에 대해 궁금한 분 참고하세요.
[유홍준의 안목](8) 나라의 큰 어른 위창 오세창 / 2016.07.18.
[경향신문] ㆍ한국 서화사 홀로 집대성…문화로 나라를 지키다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
이 분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점점 잊혀져 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위창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격동기에 살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고 ‘만세보’ 사장을 역임한 초기 언론계의 리더였다. 3·1독립운동 때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이었고, 1945년 일제가 패망한 뒤 남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주인 잃어버린 조선왕조의 옥새를 대한민국에 넘겨줄 때 국민을 대표해 인수받은 나라의 큰 어른이셨다.
해방 공간에서 우후죽순으로 정당이 난립할 때 앞다투어 위창을 고문으로 모셔갔고,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이 미군정을 자문하기 위해 결성한 ‘민주의원’ 28명 중 한 분이었다. 1953년 동란 중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났을 때 대구에서 사회장으로 모신 분이 위창 오세창이시다. 위창 자신은 근대의 서예가로 전서(篆書)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했으며, 당대의 안목으로 뿔뿔이 흩어져 있는 옛 그림과 글씨 수천점을 집대성해 <근역화휘(槿域畵彙)> <근역서휘(槿域書彙)> <근묵(槿墨)> <근역인수(槿域印藪)> 등을 편찬했고,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이라는 불후의 고전을 남기셨다. 뿐만 아니라 고미술계의 지도자로서 민족미술인들의 단체인 서화협회 고문이었고, 간송 전형필 선생의 고서화 수집품은 거의 다 위창의 안목과 지도 아래 이루어진 것이었다. 위창의 유작 중에는 문화로 나라를 지킨다는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작품이 있는데 당신이야말로 ‘문화보국의 위인’이라 할 만한 분이다.
■개화파에서 민족의 지도자로
위창은 대대로 역관을 이어온 중인 집안의 자제로, 아버지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은 역관으로 정2품에 오른 초기 개화파 지도자의 한 분이었다. 위창은 1880년 17세에 사역원 시험에 합격하여 대를 이어 역관이 되었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스승인 유대치와 연루되어 수난을 겪었고 1886년엔 박문국 주사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 기자를 지냈다. 1894년 김홍집 내각의 갑오경장 때는 군국기무처 낭청(비서관)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정3품에 올라 우정국 통신국장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1897년 34세 때엔 일본 문부성의 초청으로 1년간 일본에 머물면서 도쿄 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를 지냈다. 귀국 후에는 개화파로서 활동하다 1902년 6월 개화당 사건 때 일본에 망명해 5년을 보냈고, 이때 위창은 천도교 손병희의 참모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06년 1월 손병희와 함께 귀국한 위창은 6월에 천도교의 항일언론지인 ‘만세보’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이듬해 강제 폐간되자 1909년에 창간한 ‘대한민보’의 사장이 되어 친일단체 일진회에 대항하는 언론운동을 펼쳤다. 이때 위창은 우리 언론사상 최초로 창간호부터 1면에 시사만평을 실었다. 관재 이도영이 그린 만평은 대개 위창이 정하고 쓴 것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미련한 놈이 도끼를 잘못 써 제 등에 찍히는 그림을 그리고는 “완용 자부 상피(頑用 自斧 傷皮)”라고 썼는데, 음을 바꾸면 “이완용이 자부(子婦)하고 상피(相避·근친상간) 붙었다”라는 야유가 된다. 그러나 1910년, 결국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위창은 칩거하며 우리 서화사 자료를 집성하는 작업에 전념했다. 춘곡 고희동의 증언에 따르면 “언행은 은인자중하며 지내다가 기회를 당하면 놓치지 않고 와락 출동을 하여야 하네. 두고 보게”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천도교의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3·1독립운동을 준비하면서 기독교계, 불교계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한 후, 독립선언서 제작에 들어갔다. 기미독립선언문은 육당 최남선이 쓰고 위창이 감수한 것이었다.
그때 위창은 육당의 초고를 검토하면서 이런 일화를 남겼다. 선언문 앞머리에 일제의 부당한 처사를 쭉 나열한 유명한 구절 “아(我) 생존권이 박탈(剝奪)됨이 무릇 기하(幾何)이며”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위창은 육당에게 박탈은 ‘빼앗아 가는 것’이고 ‘빼앗겨 잃어버린’ 피동태는 박상(剝喪)이라며 교정을 보고서는 “요즘 젊은 애들은 한문을 잘 몰라서 큰 일”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3·1독립운동 후 위창은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언도받고 2년8개월을 복역한 뒤 1921년 11월에 가석방되었다. 그때 나이 58세였다. 이후 위창은 다시 칩거하며 서화사 자료 집성에 전념하게 된다.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
위창은 서화 감정에서 움직일 수 없는 권위였다. 진위 판정에서 위창이 맞다면 맞는 것이고 작가 추정에서 위창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 지금 시대엔 그런 권위있는 안목이 없어 요즘 미술계가 그렇게 시끄러운 것이다. 위창은 부친의 학통을 이어받아 서화사를 집대성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부친 오경석은 추사 김정희의 말년 제자로 금석학의 학통을 이어받아 <삼한 금석록>을 펴냈으니 위창의 작업은 추사로부터 이어진 것이었다.
이런 사실은 퍽 옛날 얘기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리나라 옛 그림>을 펴낸 이동주 선생은 생전에 위창을 찾아뵙고 안목을 많이 배운 바 있는데 추사에 대해 강의를 하시면서 “추사는 성격이 아주 까다로웠대요”라며 추사의 인간상을 풀어나가셨다. 강의가 끝난 뒤 내가 동주 선생에게 그 사실이 어느 책에 나오느냐고 여쭈었더니 “위창 노인이 역매 어른에게 그렇게 들었대요”라는 것이었다. 순간 추사, 역매, 위창 모두가 꼭 옆집에 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들처럼 다가왔다.
위창의 이 작업은 1916년 12월 매일신보에 5회에 걸쳐 실린 만해 한용운의 위창 오세창 방문기인 ‘고서화의 3일’에 자세하다. 만해는 첫날 <근역화휘> 화첩과 금석문 탁본을 감상했고, 다음날에는 23첩으로 된 서첩 <근역서휘>를 보았고, 사흘째에는 육당 최남선과 함께 <근역서휘, 속편> 12첩을 큰 감명 속에 오래 배관했는데 특히 위창이 여기에 머물지 않고 서화가들의 색인 작업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했다.
위창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바로 이 역대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의 편찬이다. 신라, 고려, 조선 상·중·하 5편으로 나누고, 이를 출생연도순으로 배열했는데 수록 인명이 서예가 576명, 화가 392명, 서화가 149명 등 총 1117명이다. 각 서예가와 화가의 성명에 이어 자·호·본관·가계·출생 사망연도 등을 밝힌 다음, 각종 문헌에 나오는 해당 예술가에 대한 기록과 논평, 제시(題詩) 등을 있는 대로 찾아 싣고 그 서목을 다 밝혔다. 이를 위해 인용한 문집이 총 270종이나 된다. 이 밖에 읍지·족보·비명·서화 작품의 제발(題跋)까지 견문이 닿은 것은 모두 수록하고 전해지는 작품의 이름과 소재까지 기록했다.
이는 실로 방대한 인명사전이고 백과사전이다. 육당 최남선은 이 저술을 일러 ‘찬연한 등탑(燈塔)’이고, ‘암흑한 운중(雲中)의 전깃불’이라고 했다. 이런 방대한 작업이라면 몇 십 명의 연구자가 몇 년에 걸쳐야 할 수 있는 것인데, 홀로 해내신 것이었다. 그동안 한국 회화사와 서예사는 이 <근역서화징>이 있음으로 해서 후학들이 그다음 단계의 연구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이 책은 1917년에 탈고되었고, 1928년에 계명구락부에서 출간되었으며 2009년에야 한글 번역본이 나왔다. 책 원본을 보면 <근역서화사>라 되어 있는데, 자료 모음이라는 뜻으로 ‘징(徵)’이라 바꾼 것은 위창의 학문적 겸손이었다.
왕조사회가 붕괴되고 근대적 시련이 시작되는 시점에 위창 오세창이라는 분이 있어 미술사 분야는 전통의 단절없이 구학(舊學)에서 신학(新學)으로 자연스럽게 넘어왔으니, 근대적인 학문체계로서 한국미술사의 아버지가 우현 고유섭이라면 위창 오세창은 한국미술사의 할아버지다.
■위창의 서화 수집
위창은 고서화의 연구뿐만 아니라 수집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1915년 매일신보의 한 기자는 위창 선생 방문기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근래에 조선에는 진귀한 서적과 서화를 헐값으로 방매하며 조금도 아까워할 줄 모르니 딱한 일이로다. 이런 때에 오세창씨 같은 이가 있음은 가히 경하할 일이로다. 씨는 10 수년 이래로 조선의 서화가 (일본으로) 유출되어 남을 것이 없을 것을 개탄하여 재력을 아끼지 않고 부지런히 구입하여 현재까지 수집한 것이 글씨 1125점이오, 그림 150점이다. … 씨는 앞으로 100여점만 더 구득하면 조선의 유명 서화는 누락됨이 없으리라 하며 부지런히 수집 중이다.”
이때 위창은 아마도 우리나라 서예사와 회화사를 실작품으로 보여주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위창은 이렇게 모은 서화를 체계화해 <근역화휘> <근역서휘> <근묵> 세 묶음으로 펴냈다. 편저에 모두 무궁화 근(槿) 자를 쓴 것에는 나라를 잃은 아픔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때는 조선도 아니었고 대한민국도 아닌 무궁화 산천이었던 것이다.
<근역화휘>는 천(天)·지(地)·인(人) 3첩으로 여기에는 신사임당의 ‘백로’, 겸재 정선의 ‘만폭동’ 등 명화 67점이 들어 있다. <근역서휘>는 총 37책으로 정몽주, 안평대군에서 동시대 이도영에 이르는 1306인의 시와 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참으로 엄청난 컬렉션이 아닐 수 없다. <근역화휘>와 <근역서휘>는 훗날 다산 박영철의 소유로 되었다가 그의 유언에 따라 1940년 서울대에 기증되어 서울대박물관이 건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창은 옛 문인들의 편지인 간찰 총 1136점을 묶어 <근묵>(34책)을 펴냈는데 이는 성균관대 박물관 소장으로 2009년에 영인 번역되어 5책으로 간행되었다. 또 위창은 고서화 감정의 필수인 인장을 모아 ‘도장 모음’이라는 뜻으로 <근역인수>도 펴냈다. 여기에는 자신의 것 225개를 포함해 총 850명 3912과(顆)의 인장이 실려 있다. 이는 사진판이 아니라 직접 작품에서 오려 편집한 것이니 그 귀함을 가히 알 만하다. <근역인수>는 국회도서관 소장으로 1986년에 영인 출간되었다.
실로 놀라운 일이다. 한 사람의 노력으로 이처럼 엄청난 작업을 해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을 정도인데 위창의 위대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간송 전형필, 다산 박영철, 오봉빈 등을 지도해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데로 나아가게 했으니 나는 이를 위해 ‘안목’의 한 장(章)을 더 할애하지 않을 수 없다.
돌이켜보건대 위창은 자신의 안목을 민족을 위해 남김없이 베풀며 문화보국에 평생을 바친 분이다. 그 위업에 대해 만해 한용운은 위창 탐방기 마지막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그 나라의 문화유산[古物]은 그 국민의 정신적 생명의 양식이라고 듣고 있다. 나는 위창이 모은 고서화들을 볼 때에 대웅변의 연설을 들은 것보다도, 대문호의 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큰 자극을 받았노라. 만일 훗날 조선인의 기념비를 세울 날이 있다면 위창도 일석(一石)을 차지할 만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