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기 오신옥 언니 사진>
그 친구와 나는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
그녀 어머니의 오빠가 우리 아버지였으니 우리는 고종사촌간이다.
가난한 시골에서 살다가는 앞날이 없다고 생각했던 우리 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혼자 상경해 낮에는 공장을 다니며 밤에는 학교를 다니셨다는데.
어쨋든 인천에서 자리를 잡게 된 오빠를 따라 올라 온 아버지의 여동생들인 나의 고모들도
나의 어린 시절 우리집 언저리에서 늘 같이 살았다.
그 당시에는 이런 일이 많았다.
우리는 거의 같은 식구처럼 살았는데, 특히 나와 동갑이던 그 친구네 집은
늘 우리 집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어린 시절 우리는 잠만 따로 자는 자매와 마찬가지였고 많은 것을 함께 했다.
나와 동갑이었으므로 친척이지만 친구라는 생각이 컸다.
선머슴처럼 하루종일 뛰어 놀기만 하는 나와 달리 그 친구는 아주 곱고 착하고 순했다.
눈물도 많았고.
내가 한 달 먼저 태어났는데 그래서 내 맘 속에는 내가 살짝 언니인 것 같은 생각도 있었던 것 같다.
그애가 너무 여리고 순해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같기도 하다.
어느 날 우리집에서 술래잡기 하던 일이 생각난다.
내가 오빠방으로 숨었는데 그애가 나를 찾으려고 문을 여는 참이었다.
그 방 아래에는 아주 작은 마루 밑으로 아궁이가 있었고, 그 아궁이에는 뜨거운 물이
들어있는 솥이 있었다.
숨어있던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깨물며 문을 활짝 열고 뛰쳐 나오다가
그만 어떻게 된 건지 미끄러져 솥을 엎으며 내팽겨쳐졌다.
그 순간은 자세히 생각이 안 나는데 내가 악!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안방에서 낮잠을 주무시던 아버지가 번개같이 뛰어나와 나를 안았다는 기억만 남아있다.
그 화상으로 두 세 달 정도 학교에 못 갔다.
다행히 엉덩이부터 종아리까지 입은 화상 자국은 시간이 가면서 없어졌다.
하지만 그애는 그 일로 우리집에 한참 동안 안 왔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철이 없어서 얘가 왜 안 놀러 오지? 공부하나? 엄마가 못 가게 하나?(걔네 엄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만 했지
이 일에 대한 자책감으로 그런다는 생각을 못 했다.
순하고 착한 그 아이가 얼마나 마음이 두렵고 괴로웠을까.
그 친구는 힘든 사춘기 시절을 거치면서 점점 뭐랄까 거칠다 할까 세졌다 할까
뭔가 성격이 변해갔다.
성취욕과 소유욕이 지나치게 강한 엄마로부터 놓여나는 일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고 또 반드시 해야 할 과제였다.
그 시기 우리는 또 성장통을 따로 또 같이 겪었다.
졸업 후 분방하고 씩씩한 남자를 만나 연애를 하더니 결혼을 하고
덩달아 더 아주 씩씩해졌다.
두 딸을 낳았고 그 아이들도 부모들의 분방함을 닮아 어린 시절 웃음보 터지는 일을
많이 저질렀다.
이 친구는 자기 애들의 솔직함과 자유로움, 씩씩함 이런 것들을 동경하는 모습이었다.
자기가 가져보지 못한 어린 시절의 즐거움,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 이런 것들을.
이 친구가 암벽 등반을 시작한 게 20년 전이었다.
15년을 했다.
그리고 5년 전에 사고로 다른 길을 갔다.
고무줄도 잘 못 하던 아이였는데 암벽이라니....
그때 나는 이틀 연가를 내고 그애의 빈소를 지켰다
고 3 담임이었고, 당시 우리반에는 심한 중복장애 아이가 있어서
이틀을 연가낸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었는데 그러고 싶었고 그래야 했다.
그런데도 뭔가 규정할 수 없는 감정의 뭉텅이가 가슴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슬픔과는 다른 뭔가 답답한 기분이 질기게 나를 잡아매고 있었다.
이듬 해에 떠난 여행에서 나는 베낭을 매고 일주일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걸으며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했다.
뭐지? 뭐지?
그러다가 나는 깨달았다.
맞다!
아이 다섯에 삼촌까지 와서 공부하고 가끔은 엄마의 조카까지 와서 머물던 우리집은
항상 쪼들렸고, 당연히 나는 새 옷을 얻어 입을 여유가 없었다.
그 친구의 엄마는 친구의 옷을 살 때 항상 다른 옷을 두 개 사서 나에게 먼저 고르라고 했다.
어릴 때인데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왜 이렇게 착하지? 나라면 내가 먼저 고르고 싶을 텐데....'
그애는 옷을 고르는 내 모습을 보면서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20대에도 당연히 주머니가 빈 나를 만나면 늘 그녀가 사 주곤 했다.
고맙다는 말을 안 한 것이었다!
잘난 척까지는 아니지만 결국은 잘난 척을 한 것이었고, 뭐든지 앞서서 하고, 마치 내가 무언가를 판단하고 해결해 주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한 것이다.
세상에......
친구야, 넌 나에게 정말 고맙게 잘 해 줬어. 너는 정말 착하고 좋은 친구야.
난 네가 정말 고마워.
이 말을 했어야 했던 것이다.
감사함을 진심으로 한 번도 표현하지 못한 일이 내 마음을 그리 답답하게 만든 것이었다.
얼마 전에 그 친구 딸이 전화를 했다.
이모 저 결혼해요 ㅎㅎㅎ
그래? 아이구 우리 해원이.....
하는데 목이 메었다.
신랑이랑 우리집에 와서 밥을 먹고 갔다.
지난 번에 인천에 갔을 때 연안부두에서 사 온 젓갈이랑 대합으로 끓인 국을 잘 먹었다.
통신 회사에 다닌다는 신랑은 무척 어려워했지만 주관이 있으면서도 순해 보여 좋았다.
그러기를 바란 건지도 모르겠다.
곱게 차려 입고 오늘 그 아이 결혼식에 갈 것이다.
친구야~
네 자리만큼은 못 하겠지만 네 딸, 쓸쓸하지 않게 딸 주위에서 떨어지지 않고 어른대다 올게.
하이 인옥~~
미쿡식으로다가 하와유?
아임 화인~~^^
실은 결혼식 이틀 전부터 마음이 너무나 이상하고 힘들어서
몸도 힘들고 부잡지를 못하겠더라.
전날 밤에 포도주를 한 잔 마시면서 마음 속으로 건배를 했단다.
이 글을 쓰고 나서 엎드려 조금 울었어.
결혼식 가서 안 좋은 모습 보이면 안 되잖아.
그러고 나니 좀 마음이 안정이 되더라.
결혼식은 무척 즐거웠어.
애들이 워낙 엽렵하고 털털해서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잘 만들더라.
오랜만에 친척들도 만나 반가웠고.
나도 내 생전 처음 진주목걸이를 하고 갔단다.
우리 학교 선생님이 결혼식에 이 정도는 하고 가 줘야 된다나 하면서 빌려 주었단다.ㅎㅎ
그런데 목걸이를 낄 줄은 알겠는데 뺄 줄은 몰라서 끼고 잤다는 거 아니니ㅎㅎ;;;
나 진주목걸이 한 여자여 시방~
잘 지내다 와.
여기는 완연한 가을이고 아마 곧 겨울이 올 것 같아.
창문을 좀 열어 놓고 자다가 새벽에 써늘해서 깼단다.
너의 외로움과 자유에 한 표!
아이 엔비 유~~
?읽으면서 눈물이 나왔어요
~~
"목걸이를 낄 줄은 알겠는데 뺄 줄은 몰라서~~"
아~이부분
옥규언니~~
더욱 더 사랑합니다.
왜 이리 가슴이 찡할까?
딸아이 결혼식 잘 했다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사람이 사람에 대한 관심은 어떤 형태로든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 같다.
그래서 가슴 뭉클하면서도 미소가 지어지네.
난 요즘 내가 주로 하고 다니는 목걸이 고리가 고장 나는 바람에
악세사리들을 정리하게 되었는데
맨날 어디가면 사다준 것들이 상자에 그냥 들어들있더라.
그래서 덕분에 이것 저것 하나씩 꺼내서 하고 다니는데
왜 진작 하질 않았을까? 미안한 생각이 들더라.
아무리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곤하지만
현세에서도 감사와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나를 깨우는 것도 큰 일이네 했어.
아름다운 가을날, 아름다움을 느낄 기회를 준 것 고마워!
하이, 옥규야
이 글을 읽는데 내가 왜 눈물이 나려하니?
사촌지간의 가족들과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럴가?
어렸을 때의 느낌과 기억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 뭉클하게 하는 이야기.
네 글은 평범하면서도 마음 속 깊은 울림이 있어.
미동부는 허리케인 요하킨으로 며칠째 비오더니 다행히
우리동네는 큰 피해없이 지나간 거 같애
가장 아름다운 계절,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를 흥얼거리며
외로움과 자유에 도취해 본다.
잘 지내셔, 친구들...(옥규식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