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기 선배 장현심 언니의 수필집 <반그러니에 물들다>를 읽었다.

읽는 내내 강한 물살이 솟구쳐 올라오듯이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작가는 황해도에서 출생하였고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리고 전쟁 등의 우여곡절 끝에 강화도에 정착하게 된다.

8남매였다.

지금은 원주 치악산 근처 반그러니에 살고 계시다.

 

조금은 다른 듯 하면서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우리 어린 시절의 생활 모습이

깨알같이 그 책에 담겨 있다.

우리보다 10년 선배시니까 우리보다는 더 힘든 상황이었겠지만

그런 많은 역경을 이겨내 오는 온 가족의 모습과,

그 가족의 막내로 자기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모습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사실적이고 솔직하고 객관적이고 명확하고 간결한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 엮어 가정사와 개인사를 풀어나가는 글의 자연스러움에

물 흐르듯 시종 미소지으며 매우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누구나가 가난하여 가난이 흉이 되지 않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 우리의 성장에 발목을 잡지 않았던 그 시절을 생각한다.

지금이었다면? 당치 않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자녀들을 모두 공부 시키려 했던 부모님의 의지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행운이었다.

 

속옷까지 큰언니로 작은언니로부터 물려 받아 입고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었던 어린 시절을

나는 너무 풍요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손재주가 많고 재밌고 음악을 좋아했던 오빠,

늘 우리집에서 살다시피한 오빠 친구들.

오빠 방에서 흘러나오던 음악들.

주로 팝송이었지만 가요에서 클래식까지.

그 음악으로 나의 음악적 감수성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늘 내 귀에 들어오는대로 들리는 팝송을

늘 입에 달고 살았으니까.

 

우리들은 늘 모여서 오빠가 만든 장난감, 나무와 고무줄로 만든 자동차,

요지경 같은 이상한 기구를 갖고 놀았고,

큰언니가 그려주는 인형을 가지고 오려서 갖고 놀았고

모여서 지도를 펼치고 위치와 장소를 찾는 게임을 지치지도 않고 했고

음악책을 펴놓고 화음 맞춰, 돌림노래도 쉬지 않고 했다.

오빠는 늘 하모니카로 반주를 했고.

 

큰언니가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사춘기가 와 시를 맨날 쓰고 외울 때

우리는 덩달아 외웠다.

지금도 외울 수 있다.

 

님이라 부를 수 없는 당신입니다.

님이라 부르고픈 당신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언니는 ㅁ을 항상 세모로 썼는데 어린 마음에 그것도 멋져 보였다.

 

그런 풍요로웠던 기억은

6학년 때 돈도 받지 않고 1년 내 과외팀에 끼워 주셨던 담임선생님에 대한 묘한 민망함이나,  배다리 중앙시장에서 산 석유 냄새나는 중고 교복을 입고 인천여중 입학식을 하던 날의 어색함이나, 중. 고등학교 내내 등록금 안 낸 사람 행정실로 오라는 말에 시달리던 나의 사춘기 시절의 쓸쓸했던 기억을 간단히 묻어 준다.

재미있게 지낸다는 것은 이렇게 힘이 센 건가 보다.

 

 

 

장현심 언니는 중년에 이상하게 자꾸 머리가 아프고 몸이 아팠다.

오빠가 나랑 글공부 해 볼려? 하는 말에 시작한 게 수필 모임이었다.

 

너무나 많은 여러 활동을 했지만, 결국 언니의 중심을 잡아주고

인생을 엮은 것은 바로 그 수필 활동이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그것의 결과다.

 

친구들에게 권하고 싶다.

나는 교보에서 샀다.

쓸 데 없는 미사여구가 없고, 감정에 지나치게 치우치지도 않게 담담하게 쓴 글이

내 마음을 청소시켜 주는 듯 했다.

내용을 상세히 말하면 책 읽을 때 재미가 없을 테니 이정도만.

 

이 책은 수필집이지만 일종의 자서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난 자서전의 의미를 아주 중요하다고 늘 생각하고 있고,

학생들에게도 일 년에 한 번씩은 나름대로 자서전 쓰기를 하게 한다.

자신을 들여다 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일 수도 있다.

게다가 그것을 글로 풀어낸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일 것이다.

대단한 내공과 끈기와 용기가 필요한 일이고.

 

이 언니는 그것을 해냈다.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