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묵상본문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니라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그가 첫째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그 후에 욥이 백 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대를 보았고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욥기 42장 7-17
해석도움
욥의 중보
하나님은 세 친구에게 우매하고 정당하지 못한 말로 욥에게 가한 언어 범죄에 대해 욥을 중보자로 하는 번제를 요구했습니다
친구들에게 요구하신 예물은 제사법에 비춰보면 매우 큰 것으로,
이것은 그들이 욥에게 범한 죄가 심히 큼을 잘 보여줍니다
엘리바스는 주관적인 영적 체험에 근거하여, 빌닷은 사람들의 전통적인 견해로, 소발은 자기 나름의 개인적인 확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욥을 심하게 정죄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욥은 그 친구들을 용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빌어 주었습니다
이것은 욥이 자기를 비방하던 친구들마저 축복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 것을 보여줍니다
또한 자기를 위한 중보자를 찾지 못해 탄식하던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자가 되고 있는 모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사람이 무엇인지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자 다시 하늘이 열리고 갑절의 위로가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사람과의 사이에서 묶인 것을 풀어야 하늘이 열리게 된다는 진리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도는 언제나 용서의 도구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화해의 통로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한편 하나님은 고난받은 욥을 네 차례나 "내 종"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은 욥이 후일 인류 구속사역의 완성자로 오실 고난 받는 종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함을 보여줍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한 중보자로 부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땅에서 묶인 것을 들었을 때 하늘에서도 풀어지는 역사를 체험하고 있습니까?
넘치는 은총
하나님은 물질적인 축복과 더불어 단절되었던 모든 대인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내에게조차 외면받던 욥에게 그를 알던 모드 사람들이 금을 가지고 와서 그를 위로하게 하셨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재물과 자녀와 수명에서 욥이 받은 축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모든 소유물에서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자녀는 두 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딸들에게까지 분깃이 주어진 것은 당시로는 특별한 일로 욥의 부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욥은 장수의 복까지 받아 손자를 4개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연단을 잘 통과한 자에게 영적인 부분뿐 아니라 현실적인 부준에서도 갑절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준비를
잘하고 있습니꺼?
중보기도 - 중앙아시아 김 성엽, 박성실 선교사
김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는 양로원이 전기요금을 내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전기요금을 낼 수 있는 후원교회나
개인이 생길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또한 노후한 양로원 시설들도 수리할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그리고 하키캇병원에 필요한 약품도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세요
출처-생명나무 GT
최후의 승자와 함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못함이라
~
~
~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누구에게는 노하실 수 있고
누구에게는 기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들이 섬기는 하나님이시라는게 참으로 새롭습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행위가 아닌 순전히 사람들이 당신께 한 말들을 가지고 노하시기도 하고 기뻐하시는 걸 보니
진짜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욥이 고통 중에 얼마나 많은 말들로 하나님을 원망했으며 그분의 통치하심에 의혹을 품었으며
분노를 발했는가를 ,
나아가 그는 선하게 살아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극단적인 허무함까지 보여 준 것을 보면
과연 하나님 앞에 말조심만으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기도 하고 그분의 노여움을 받을 수 있는건가?
묵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하나님을 가리켜 한 말만 두고 따져 본다면 욥보다는 욥의 세 친구들의 말들이 훨씬
더 예의 바르고 신앙적이어서 하나님께 불경스럽거나 그분의 신성을 모독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허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가리켜 말한 것들로 인해 노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굳이 욥을 들먹거리시면서 너희들 말은 욥의 말 같이 정당하지 못하다고 판정해주시니
더욱 묵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폭풍우로서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이르길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운 자가 누구냐며
이미 욥을 옳지 않다고 말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근데 이제 와서는 욥의 말은 정당하고 너희 세 친구들의 말은 욥 같이 정당치 않아 너희에게는 노하나,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욥은 기쁘게 받겠다 하니 참으로 안개 낀듯 하지 않습니까?
오늘 내가 새롭게 눈여겨보는 것이 있다면 여호와께서 세 친구들에게 말씀하시길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입니다
물론 세 친구들이 자신들의 잘못을 속죄하기 위해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욥에게 와서 번제를 드릴때
마땅히 욥은 그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오늘 새롭게 묵상되어지는 것이 있다면 욥은 결코 그런 제사적인 강요나 율법적인 의무에 의해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심지여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기도한 것도 아닐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리고 그런 생각이 순전히 나로부터라면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맞는 생각일까요?
욥기서를 가지고 씨름하던 24살 이후
36년이 흐른 오늘 이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금 욥기를 묵상하는 이 순간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욥기 일, 이장에 잠깐 등장하신 이후 37장까지 침묵하시다 다시 38장부터 42장까지 등장한 것을 봅니다
2장과 38장 사이 36장이 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욥과 세 친구들과 엘리후가 실컷 치고 박으며 하고 픈 말들을 다 하도록
가만히 나두는 것을 봅니다
내 생애를 욥기와 더불어 견주어 나누어보니
하나님의 등장으로 병도 낫고 깊은 은총의 임재속에 들어간 24살까지가 욥기 1,2장이 아닐까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다시 또 한번 그 때 그 여호와의 임재하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36년간 지금껏 살아 온 삶은
욥기 2장이후부터 37장까지가 아닐까 합니다
24살 이후-
욥기 3장을 넘기는데 일 년
욥기 4장을 넘기는데 또 일년
욥기 5장을 넘기는데 또 일년
그렇게
그렇게 하니
욥기 37장까지 넘기는데 걸린 세월이 36년입니다
이제 나는 또다시 타오르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이후부터는 38장에서부터 다시 등장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욥처럼 모든 것들이 회복된 삶을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욥의 회복은 육신과 물질이전에 영혼과 심령이였습니다
몰론 지금 내 안에는 말씀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내 안에 거하고 나는 말씀안에 거합니다
허나 나는 이것으로 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다시 나는 24살 그 때로 돌아가 여호와의 충만한 임재의 영광속에 그분을 맘껏 찬송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맘껏 느끼며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소원인 것인가?
이조차 신앙의 딜렘마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그래주길 바라는 이 현상을 두고 만일 이단적인 소원이라면 나는 가쁜한 마음으로 포기할 것인가?
이렇게까지 오고보니 내게도 참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특히 제사나 기도를 의무나 강요나 순종적인 차원에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율적으로,
무엇보담 더 내 주권적인 자유와 사랑으로 기꺼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세계가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전혀 충돌을 일으키지 않은채 내게로 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에게 상처를 받은 사람들....
그리고 나로인해 힘들었던 사람들...
그들을 놓고 누가 기도하라고 시키는 것도 아닌데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욥이 자신의 주권적인 자유를 사용하여 친구들의 잘못을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극대화시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권적으로 자유를 사용하여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은 것과 같게 된다는 것입니다
욥이 주권적인 자유 의지를 깊이 자각할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고통때문입니다
그 고통이 아니였으면 하나님의 형상 중 가장 하나님다운 속성인 주권적인 자유 의지가 자신안에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선했음에도 불구하고
악인이나 당할 고난을 겪으면서 욥은 율법으로부터 강요 당하지 않는 자신의 원형을 회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신에게조차 강요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는 자신의 원형을 되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나는 주권적인 자유라고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하나같이 율법에 의해 강요되는 말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을 가장 강력하게 강요하는 세력은 율법입니다
그럼에도 욥은 깊어지는 고통속에 오히려 율법의 강력한 저주로부터 자유로워진 숨결로
고통을 표현함에 솔직대범해지는 걸 봅니다
결국 그는 율법이나 사람이나 그 어떠한 세력들로부터의 강요된 말들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의 고통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말들을 쏟아붓습니다
그런 말들은 하나님께 너무나 도전적이고 불경스러워 보여 비신앙적인 말들이기도 하였습니다
허나 하나님의 관점은 그게 아니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얼마나 자신에게 정직한 반응으로 대응하고 있는가를 보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그러한 반응이 곧 당신께도 더없이 정직하게 반응하고 있는 거라 보신 것입니다
우리들의 고통스런 숨결들을 정직하게 다 드러내면 과연 누구라서 저 사람 참으로 신앙적인 사람이야하고 인정해줄까요?
그 사람의 속사정을 아는 이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그런 정직한 자리로 데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주님!
오늘로 욥기 묵상을 마칩니다
말씀과 함께 오시는 하나님께서 오늘 제게 들려주시는 말씀은 정말 기다리고 기다리던 말씀이였습니다
당신께서 나를 회복시켜주시는 것이
내가 무언가를 행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당신의 주권적인 자유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걸 배웁니다
나도 이제 당신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며 가는 이 세월이 율법의 강요나 그 어느 세력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은총으로 인해 회복된 주권적인 자유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걸 고백합니다
뭘 바래서가 아니라 그저 당신의 주권적 자유가 조건없이 날 사랑한 것처럼
나 역시 조건없이 나의 주권적인 자유로 당신을 사랑하기까지 걸린 과정속에 만나기도 하고
헤어지기도 하고 또한 늘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을 이 순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복합니다
특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널리 널리 선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