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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1,

인천의 용현동에서 태어난 저는 고향의 기억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동네의 정보통이 되었던 우물과 노래와 춤을 가르쳐 준 영란언니(연출가 최강지)의 어머니,

그리고 가마니를 깔았던 교회 정도 떠오릅니다.

제가 살던 곳인 용현동은 인천에서는 외곽이었는데요,

이웃에는 화교가 우리처럼(학교사택) 촌락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 중에 저랑 가끔 만나는 화교 친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쿌라라는 이름에~~저보다는 조금 위였습니다.

쿌라의 아버지를 어렴풋하게 기억하는데 똥지게를 지고 밭에 거름을 주는...

그런 아버지였습니다.

그 인상이 참 강했고 훗날 펄 벅의 <대지>를 읽으며 그 아버지가 떠올랐고

이번에 위화의 <인생>을 읽으며 쿌라의 아버지는 마치 주인공인 <푸구이>노인 같았습니다.

쿌라와 친해질 무렵에 그 아이와 노는 모습을 본 이웃의 어느 사모님은

저를 꾸짖었습니다.

화교아이랑 놀지 말라구요.....

왜???

암튼 그런 말을 듣고도(반항은 아니고 그냥요..ㅎㅎ) 저는 그 친구랑 자주 어울려 놀았는데

그만 제가 아버지의 승진과 함께 먼 곳으로(강화 교동) 이사를 가게 되어

자연스레 놀 수도 없고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아주아주 가끔 그 친구가 생각이 나곤 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앞머리를 자른 단발머리인 쿌라.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는지요?.....

 

에피소드 2,

초등학교 6학년 때에 소사(부천)로 전학을 왔습니다.

그 당시 소사에는 소설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펄 벅 여사가 세운 펄벅재단이 있었습니다.

저희 집과도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었죠^^

그곳에는 버들에 둘러쳐진 조그마한 호수가 있었고

제약회사인 유한양행의 공장과 펄벅재단이 나란히 있었다고 하는데

제가 이사하기 전에 유한양행은 이미 군포로 이사를 갔다고 하고

펄벅재단과 소위 <튀기>라고 불리우는 어린이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와 같은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런 중, 우리 반에는 김명자라고 하는 검은 얼굴의 키 큰 친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이 친구와 짝을 하기 싫어해서

그 문제를 놓고 고심을 하던 담임선생님은

먼저 우리 어머니가 만만하고 이해심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어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저와 짝을 시켜 주었습니다.

이 친구는 학업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로지 미국에 갈 수 있을 거란 희망 만이 그녀의 머리에 가득했습니다.

저에게도  미국에 곧 가게 된다고 자랑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는 진학을 하지 않았죠^^

그후로 어떻게 되었는지...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가끔 그녀의 지독한 곱슬머리와 흑단의 얼굴과 튼튼한 체격이 떠오르는군요^^

 

*****

두 에피소드는 어릴 적 제가 만난 낯선 이방인들입니다.

한 친구는 외국인이요,한 친구는 한국인입니다.

그러나 한국인 친구의 용모는 우리와 다른 혼혈....

우리는 그들에게 친절하거나 친근하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

그저께 광화문과 명동에 볼 일을 보러 나갔습니다.

광화문에도 낯선 외국인이 많았지만

명동에는 외국인이 더 많은듯 보였습니다.

외국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 납니다.

그리고 곳곳에 있는 상점에서는 소위 호객 행위라고 하는,사람을 부르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립니다.

명동의 골목마다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몰려 다닙니다.

 

광화문과 명동에서 만난 관광객을 보면서

이제 서울은 더 이상 우리만 사는 곳이 아니란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그야말로 국제도십니다.

우리가 대책도 못세우고 준비도 못한 채 그렇게 되었지요^^

 

그런데 국제도시에 걸맞는 요소들이 많은 지...곰곰 생각해 봅니다.

저는 도시학자도 아니요, 관광을 연구하는 관계자도 아니어서

이런저런 문젯점을 이성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며 당장에 솔루션을 적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 추억과 경험으로 

우리가 외국인에게 친근하게 하고 있는지는 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명동의 이방인이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친절하게 할 것이고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좀 깔볼 것입니다.

(유감스럽고 부끄럽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속성이 있는 것을 부인하진 못하죠^^ㅠ,ㅠ,)

 

우리 이러지 말자구요...

공평한 자세로 그들에게 미소라도 좀 날려주고

그들이 무엇을 물어올 때면

조금은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반대로 우리가 다른 나라에 갔을 때 그들 나라 사람들의 태도를 연상하면서 말이죠^^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상냥하고, 캄보디아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순수해 보이며,

영국의 런던에서는 자세하게 잘 가르쳐 준 인상을 떠올리면서요...

(물론 각 개인의 느낌이 다 다르겠죠만...)

 

우리는 대체로 첫 단추인, 웃는 것부터 잘 못하는 편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잘 웃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부터 외국인에게 잘 하면 그들은 우리 한 사람의 웃음으로

나라 전체를 기분 좋게 떠올릴 지도 모릅니다.

 

사소한 것이지만 우리가 잘 했음 좋겠습니다.

웃지 않으면 화난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구조적인 부분이나 행정적인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으나

웃으며 대하고 친절한 것은 각 사람이 충분히 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관광객에 대한 여러가지 제도와 구조도 좀 시급한 문제입니다. 

모쪼록 쫀쫀하게 잘 구축되어지길 바라게 됩니다.

 

서울은 우리가 미처 정책을 확립하기도 전에 이방인과 관광객이 넘쳐나는

국제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깐만 생각을 해보고 길거리에 나가봐도 이런저런 문젯점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웃는 것만은 그래도 어떤 장치없이,또 돈을 안들이고 우리가 잘 하면 되는 것이니

그것부터...좀 개선이 되면 좋겠더군요^^

 

국제 도시에 걸맞게 이제 우리도 국제인이 되어야겠습니다.

모든 외국인에게 좀 너그럽고 친절한 국제시민으로 말이죠^^

아울러 노동하러 들어온 외국인을 적어도 우습게 깔보기만 하지는 말자구요..

 

펑펑 왔던 눈이 그대로 쌓여있는 이 아침에,

어릴 적 만났던 두 소녀,에뜨랑제를 떠올리면서 국제도시인 서울을 생각해 봅니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해서 비약이 너무 컸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