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회 - 게시판담당 : 권칠화
소년의 기개는 펼칠 곳이 없었다.
어느날 오사까 성으로 전학년 졸업여행을 단체로 가게 되어 ,
드디어 일본 황제가 살았었다는 오사까성 앞에서 단체 사진을 한장 박고 돌아왔다.
돌아오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흘러, 그 소년의 셋째 딸이 경기도 양평에 신혼살림을 펼치게 되어,
근처에 항상 2등 이셨다던 아버지의 절친 아저씨 댁을 방문하였다.
"내가 1등이고 너희 아버지는 대대장을 했지."
누가 1등이건 시간이 흘러도 두 사람의 인간애는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진 한장으로 퇴학 결정이 내려지게 되었었다는, 우리도 언젠가 아버지께 들었던 이야기를 하셨다.
감히(?) 외람되게 대 일본제국 황제의 성 앞에서, 단체로 선 학생들 가장자리에 한 쪽 끝엔 담임선생님이, 다른 한 쪽 끝엔 대대장인 학생이 비스듬히 선...............
한 식민지 소년은 다른 모든 소년들처럼 학생 군모와 군복 밑에 갑바를 찬 군화에 차렷하여 바른 자세로 서 있지 않고,
한 다리는 밖으로 내밀고 한 팔은 옆구리에 지른 채로, 그야말로 피사체 질서에 위배되는 도발적인 태도로 서서 먼 산을 바라보고 박혀 있었다.
교장은 당장 퇴학시키려 하는데 한 스승이 대대장이며,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평소 모범이 되던 학생이니 퇴학 만은 만류하였다고, 우리 형제들도 익히 보던 사집첩 속의 그 사진의 설명이었다.
" 왜 그러셨어요?
아버지 답지 않게 태도가 혼자서 만 당돌한건가?
아님 자기 멋에 도취 되신건가?
당시의 시류로는 겁도 없이.......?"
돌아오는 아버지의 답은 여전히 아이구 정말 겁도 없이 어쩌시려고, 돌아가실 번 했네였다.
남의 나라를 침범한 일본의 황제가 살던 성 앞에 내가 비굴하게 차렷 자세로 사진에 박힐 줄 아느냐? 난 그렇게 하지 못한다.
너는 황제더냐 나는 구경하러 왔다란 생각으로 일부러 그런 포즈를 취하고 사진에 박혀 혼자 쌩뚱맞은 모습으로 반감을 드러내셨다는 거였다.
22년생 이셨으니 30년대 후기, 아직 대동아 전쟁이 터지기 전이어서 그랬겠지 퇴학 백지화는 어림 없는 결정이었던 듯 싶다.
후에도 여러번 우리 다섯을 가르치시며 누누히 이르시는 말씀이
"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일본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은 중국 사람들이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작은 나라가 두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 남으려면 끊임 없이 공부하고,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저네들보다 앞서 나가는 지식을 가지고 있어 저네들에게 지면 안된다."고 강조에 강조를 더하셨다.
-- 무디스에 이어 6일 피치가 한국의 신용등급을 ‘A+’에서 ‘AA―’로 한 단계 상향조정하면서 한국은 지난해 이후 2개 국제신용평가사에서 등급이 올라간 유일한 나라가 됐다. 주요 20개국(G20) 중 7위에 해당하는 등급으로 사상 처음 일본을 제쳤다.--
작금의 한국국가 신용등급이 일본과 중국보다 빠른 성장을 보였다는 소식을 접하며,
아버지께서 그렇게나 강조하시던 공부하고 또 공부하여 죽을 때까지 공부해서 주변국가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시던 말씀을
우리국민들은 방심 없이 익혀 실천하고 또 하고 있었다는 증거 아닐까 생각해 보며 지금 우리나라를 보시면 하늘에서도 기뻐하시리라
가늠해 본다.
다만 빈곤은 꿈을 꾸어 보거나, 어떤 일을 해보고 싶어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게 하더라는 지인의 경험담처럼,
겪어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고단한 세상을 탈피하려, 또한 겪어 보지 않아 모르는 더 나은 세상을 향하여 부단히 노력에 질주하는 현실을 우리는 이루어 왔다.
그러나 동전의 양면이 있어, 그 뒤의 모르던 세계를 새로이 겪고 가슴 아파 저리게 하는 일도 횡행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저 다시 열심히 치유하고 해결하려 노력하여 나아 갈 수 밖에 없다는 평범한 결론을 유추 해 본다.
세시유감, 우리들 사는 세상은 문제도 많고, 사랑도 많고, 해결하려는 의지도 강하고, 노력도 하고, 시행착오도 있으나 주어진 상황에 부단히 정진 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모여 정답게 살아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쟤네는 쓰나미 화풀이를 우리한테다 대고 하려고 만 하니 참 나.............
쓰나미 재해성금 보낸 어떤사람도 참 나.............
언제 철 들 나지?
철 나니 늙더라는데......................대마도 가져 와야 할려나...............?
Ambroise Thomas - Mignon - "Connais-tu le pays" (Magdalena Kozena)
지금은 한 아이가 결혼했으나, 아직 아이들 중학생 일 때, 서울에서부터 유레일패쓰 끊어 들고 우리 가족이 자율적으로 일일이 찾아나선 유럽여행.....
첫 기착지인 로마 바티칸 성당 등등을 돌아보고는 생경한 문화의 충격에
...아아.... 하느님은 1350년대에 로마에 이런 성당을 짓게 하시고, 우리나라는 기와 지붕이나 얹은 궁궐의 이씨조선을 창건하게 하셨으니,
고려 말에 문익점은 목화씨 세알을 붓뚜껑에 넣고 돌아와 목화솜으로 옷을 지어 입기 시작하고,
근 700년이 지났어도 우리나라는 아직도 힘이 적은, 작은 경제국가로 남게 하시니,.........
순간 나는 하필 왜 이런 작은 코리아에서 태어났을까고 분통이 터졌다.
(위안화는 달러로 교환이 되었으나, 원화는 아이에 환전소에서 취급도 안하던 시절이다. 지금은? 내일 떠나 알아보련다 )
하느님을 향하여 분노의 울화가 가슴에서 휘몰아치는 것을 말로는 드러내지 못하고 끙끙 앓으며 열흘 간의 유럽 기차여행을 마치던 날,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공항에서 하느님께 대한 불경스러운 불만을 불식시켜야 하겠기에 끌어 낸 생각이...
" 아아, 하느님도 이스라엘에서 가까운 주변 국가부터 돌보셨으니 이제 먼 우리나라도 차차 돌보시겠구나 !! "
풀어 스스로 위안하고 돌아왔다.
최근에
" 아아!,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것에 감사해야 할 때이구나 !!"
생각했던 때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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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도둑들 > 을 보고 일어서며 ..........였다.
그 시대에 그들은 그들의 성전건축과 장식미술을, 그들의 가장 뛰어난 문화로 꽃피워 이루고 살았거늘 ,
작금의 우리는 첨단 IT 산업의 최고봉을 이루고 살고 있음이니.....................................!!!!!!!!!!!!!!!!!!!!!!!!!!!!!!
ㅎㅎ 김미숙님, 그 시절......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해
저의 어머니도 이렇게 말씀하시죠. 일본사람들 한명은 너무도 다정해, 간도 빼줄거 같지. 그런데 셋이 모이면 괴물이 되어
한국사람을 어떻게 괴롭히고 고통을 주는지... 놀라울 정도다. 일본인을 조심하라. 결코 잊혀지지 않는 말씀....
울 언니가 일본에 40년쯤 살고 있는데 ...
딱 한번 조카가 결혼식이 있어서 동경에 다녀왔고
에릭아빠가 오사카에 한번 가고 싶다고 했었는데 .... 요즈음은 일본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 흠 ... 좀 그러네
애와 증의 인간사...
나의 시외조부님은 일제의 압정기, 일본유학 한 후 귀국하시어 평양에서 독립군 군자금을 몰래 조달 하시곤 했었다는데
( 이북에서 내려오셔 지금은 퇴임하셨으나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시는 서울대 북한학의 교수이셨던 분, 그 노부인의 경험담으로는
이북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암암리에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시시때때로 십시일반으로 보내주곤 했었다고 하시더라. )
어느날 일본경찰에 의해 수배되기에 이르러 용정으로 피신 하셨었으나,
그곳에서 붙잡혀 한달간 고문 옥살이 후 감으신 눈을 뜨지 못하고 석방되시어, 두달여를 회복하시지 못하고 옥고에 의해 병사 하셨다고,
시외할머니께서 아픔을 토로하시곤 했었지.
지녔던 문전옥답은 공산화된 이북 정권에 의해 몰수 당하고야 마니 남은 자식들과 48년에 남하하시어,
이어진 고통의 세월을 한탄 했어야 만 했으나,
참으로 명민하셔 양가의 어머니 부재인 내게는 더 없이 다정하기만 하셨던 시외할머니....
시대는 바뀌어, 시외할아버님에 이어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시아버님도, 남편도, 아들도 잠시지만 일본에서 연수하고 돌아와 나름의 길을 살고 있으니, 애와 증의 인간사.........
조상님들의 나라사랑하는 마음이 뚝뚝 묻어나는 좋은 글 잘 읽었어.
그런 일도 있었구나.
역사는 흐르는데 정말 나라를 위하여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할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