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한선민
교회의 모임에서 종강을 하며...
제천기도동산을 갔는데, 기도동산 가까운 곳에
배론 성지가 있어서 나의 성당 다니는 친구들이 많은데 많은 공부 되겠습니다.. ...우리 가장 카메라에서 발췌
배론성지
배론성지 초입 십자가 탑
배론 성지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빛날 역사적 사건과 유적을 간직한 뜻 깊은 곳이다. 배론(舟論)은 치악산 동남 기슭에 우뚝 솟아 있는 구학산(985m)과 백운산(582m)의 연봉이 둘러 싼 험준한 계곡 양쪽의 산골 마을로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리어졌다. 1784년 이 땅에 천주교가 전례된지 얼마 안 되어 1791년 신해교란이 일어나자 교우들이 심심산골인 이곳으로 피난해 와서 농사와 옹기구이로 살아가며 6개의 교우촌을 이루며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던 곳이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의 광야를 돌아 약속의 땅에 이르렀듯이 여유있게 순례의 길을 걷도록 돕기 위해 마련되었다.
약속의 땅으로 가는 길
예수성심상
배론성당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성덕을 기리며 시복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건립된 이 성당은 배 모양으로 설계 시공되었다.
대성당의 의미는 첫째, 배론이라는 지명을 조형화한 것인데, 이 곳은 골짜기의 모양이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다.
둘째, 노아의 방주가 그러햇듯이 교부들은 초기부터 교회를 구원의 배로 이해하고 표현하였다. 사나운 세상의 풍랑 속에서 안전하게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항해하는 배를 지음으로써, 2000년기의 세기말적 불안에 떨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고자 하는 뜻과 2000년 대희년은 물론 제3000년기를 향한 희망의 뜻을 담았다.
셋째, 최양업신부가 입국하기 위해 몇 차례 승선했던 그 배를 상기하여 그분이 지니셨던 불굴의 선교의지를 본받고자 하였다. 대성당의 명칭은 이 배를 인도해 주실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삼아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기리는 바다의 별 대성당"으로 부르기로 하였다. 대성당의 규모 대지 2,930평, 연건평 616평, 수용인원 대성당 : 2,000 여명 소성당 : 300여명
최양업도마신부기념성당
대성당 내부 , 배 모양으로 되어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두 행악자.
올바른 신앙고백을 한 행악자(예수님의 우편)는 편안한 모습으로 운명하고,
다른 행악자는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운명한다.[눅 23:39~43]
배론성당
황사영 백서 동굴
황사영백서 토굴
성요셉성당
배론신학교와 항사영현양탑
배론신학교
M T 가서는 뭐했나?
하는 혜경이의 질문에...
그중 일부 제천의 배론성지를 보여주네.
박해받고 순교하신 그 분들의 신앙의 발자취를 들으며....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민방장~~~~
올린 사진과 설명을 보며 열린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더욱든다.
종교라는게 자칫 독선적으로 흘러 자기 교파 이외의 교는 인정하려 하지 않는데
천주교 성지도 둘러보는 여유는 보기가 참 좋다.
난 근 30년전에 베론 성지 다녀왔었는데
그땐 초기 신학교 였던 초가집과 과 성당 으로 아주 한적했었는데
지금 저 웅장한 성당과 기념물들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해준다
구경잘했네!
선민방장 사진 올리고 자료 찾느라 애썼네!.
선민언니,
형부께서 소상히 담아오신 배론성지 성전과 풍광들에
초기 천주교 박해역사에 관한 언니의 정성스런 설명이 합해져
저희가 이 아침 배론성지를 선물로 만나게 되네요
정말 감사 합니다.
이땅의 순교자들을 위한 기도 드립니다.
저도 어느날 찾아가 걸으며 보고 싶은 곳.
예수님께 매달리던, 가나안 여인의 굳은 믿음과 간절함 생각하며
씩씩하게 하루 시작 합니다
미선언니, 선민언니, 좋은 하루 되시기 빕니다
갈매못 성지도 꼭 가고싶은 곳.
언니, 8월에 태백 여행 가시면
예수원도 또 가시공~~~
나도 가고싶다
비오는 어느 늦은 밤에 찾아와 주고가신
처음 만드셨다는 이쁜 오이지
아작아작, 완전 맛있게 먹는 중. 다섯개 남았어요
가지는 낼 주말에 만들어 먹을라고 보관 중예요
옥순언니가 만들어 주신 향긋한 양념깻잎 까지...
나의 여름은 언니들 사랑담긴 먹거리들로
매일아침 넉넉해져요
언니들 섬섬옥수 손길에 무지 감읍해 하면서
잘도 먹고 있어요,
감사해요
사랑해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라고.....
선민아 이기사를 아주 흥미있게 읽었단다.
전혀 모르던 천주교 역사의 한면을 이렇게 자세히 올려줘서 감사하구나.
어느교든지 처음엔 그렇게 어려운 시기가 있었든것 같네.
???선민아!!!!
긴글 올리느라 수고했어.
그 옛날 순교 하신 분들의 얘기 너무 감명 깊게 읽었어.
우리 나라에도 저런 성지가 있었구나.
천주교는 김 대건 신부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황 사영님도 알게 되었다.
읽는데도 한참 걸렸는데 올리는데는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렸을까?
우리 홈피가 이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일까? 하고 생각 했단다.
선민 언니! !
베론 성지는 15년 전에 성당 터를 다듬을때 갔었는데
성당 내부의 배 모습 경이롭습니다.
한번 꼭 찾아 가야겠습니다.
정약현의 사위 순교 당하신 황사영 집안 유래
가슴 아프게 읽었습니다
순교자님들께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합니다.
좋은 자료 올려 주신 선민언니! !
고맙습니다.
장문의 글 잘 읽었어
얼마나 긴 시간 공들였을까?
짐작이 간다
나는 불자이지만 어느 종교나 순교자가 있어
대중의 우상과 믿음의 종지가 되지 않을까?
숙연해 지면서 모두가 착하고 배려하며
사랑으로 살아야 겠다는 생각든다
수고했어
다음에 또 좋은글 기대하며
건강하길..........
정숙부회장님~~~~~~
이 아침 벗과 더불어 마시는 한잔의 커피가 생각납니다.
신앙이란 걷는길은 달라도 마지막 종점은 같은거란 생각에
저는 열린마음으로 광신도적인 믿음이 아니면 다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님들 책도 읽고 요즘은 혜민스님이랑 법륜스님 글과 방송접하는시간 갖으려고 노력하지요.
정숙 부회장님의 신심에도 깊은 존경을 보냅니다.
성불하소서!!~~~
<2011년벽송사에서 촬영>
이런 글은 정독을 한 후에 댓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좀 늦었습니다.
덕분에 한국의 근대사도 공부하고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저 긴장했나봐요.
말투도 정중해지고 ㅎㅎㅎ
암튼 대강 쓰면 안될 것 같은데 안쓰면 선민언니가 서운해 할까봐서리..........................................
제가 좀 소심한 구석이 있걸랑요.
한 13년 쯤 전인가.
남편의 가장 친한 친구가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서 그 49제에 갔었어요.
전 절이란 곳은 수학여행 때 빼고는 가 본 적이 없는지라 혹시 제 행동이 실례가 안될 까 엄청 조심스럽더라구요.
그런데 여름의 끝자락이라서 모기가 막 날아다니는 거에요.
드디어 제 무릎을 물기 시작했는데 전 살생금지를 가르치는 절이라서 (불교에 대해서 그 정도밖에 모르니까)
고 놈의 모기도 못 죽이고 여기저기 물렸다는 거 아닙니까?
나중에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는 마구 웃는 거에요.
모기 정도는 잡아도 된다고!!!!!!!!
배론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한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또는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에 소장돼 있다.
백서는 흰명주에 가로 62cm, 세로 38cm, 122줄을 13,384자를 가는 모필로 깨알처럼 곱고 정밀히 써진 것이다. 비록 황사영 자신이 쓴 글이나 자기 이름은 숨기고 황심(토마스) 등이라 했음은 우선 사영의 겸허한 마음의 표현이요, 사영의 판단에 황심이 북경 내왕이 잦고 이미 여러 차례 그곳 주교와 신부들을 만났으므로 누구보다도 신임을 더 받을 것으로 생각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제1부분은 신유년 박해에 순교한 이들 중 중국인 신부 주문모를 필두로 30여 명의 빛나는 사적을 열거하고, 제2부분은 박해의 동기와 원인이 벽파와 시파의 골육 상잔의 당쟁(黨爭)이었음을 필역하고, 제3부분은 빈사 위기에 처한 교회의 희생과 동족학살의 구원책으로 외세에 원조를 청하는 등 자신의 사견을 진술하였다.
백서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배론 교우촌은 신분을 속이면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55년 무렵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그 해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첫 신학당이었던 배론 신학당은 철종 재위시에 비교적 평온했던 시기동안 교우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선의 사제양성을 위해 세워진 한국 최초의 신학교였다. 장주기(요셉)의 집을 빌어 신학교로 사용하던 배론신학당은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한 채 사라지고만다. 단 한명의 사제도 배출하지는 못했지만 최초의 신학당으로서 드디어 한국교회에도 사제를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당시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1856년에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는 아주 열성적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배론 신학교는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신학생 중에서는 임 빈첸시오가 1864년에 소품을 받았고, 이 바울리노가 삭발례를 받았으니, 더 있었으면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얻을 수는 없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이곳에도 몰아쳤기 때문이다. 3월 2일,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푸르티에 교장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면서 신학교도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두 신부는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한편 장주기 회장은 신부들이 체포되어 간 뒤 이웃 마을에서 체포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수영)으로 옮겨져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배론은 또 다른 의의를 갖게 되었으니, 신학 교육의 요람지가 순교자들의 요람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장주기 회장이 훗날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배론 순교사의 의미는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 순교현양탑
황사영순교 현양탑 황사영 상
황사영 알렉시오(1774-1801)
황사영 알렉시오는 그의 선조 10여 대가 판서 벼슬을 지낸 명문가 태생으로 부친 황석범 역시 진사 시험에 합격돼 한림 학사로 있었다. 하지만 황석범은 1774년 병사하고 사영은 유복자로 태어나게 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으로 불릴만큼 영리해 1791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에 합격해 정조(正祖)는 그를 친히 궁으로 불러 손목을 어루만지며 치하했다. 그래서 그는 국왕이 만진 손목에 풍속에 따라 붉은 비단을 감고 다니기도 했다. 황사영은 당대의 석학들을 만나 학문을 넓히던 중 다산 정약용 일가를 만나고 마침내 정약현의 사위가 된다. 처가인 마재 정씨 집안으로부터 천주교의 교리에 대해 전해 들은 황사영은 그 오묘한 진리에 깊이 매료되어 입교를 청하게 되고 중국인 주문모 신부에게 알렉산데르라는 본명으로 영세하게 된다. 1801년, 신유박해시 황사영은 조선의 상황을 북경 교회에 알리고 도움을 청하는 백서를 썼다. 그러나 밀서를 지니고 가던 황심(黃沁)이 사전에 관헌에게 체포되고 황사영도 역시 관헌에게 붙잡힌다. 그는 즉시 의금부에 끌려가고 그가 쓴 백서는 조정으로 알려진다. 이를 받아 읽은 조정 대신과 임금은 크게 놀라 그를 극악 무도한 대역 죄인이라 하여 참수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시신을 여섯으로 토막내는 처참한 육시형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인 정 마리아는 제주도 모슬포 대정골로, 그의 두 살배기 아들 황경헌(黃景憲)은 추자도로 가는 비운을 맞게 된다. 황사영의 묘는 의정부교구인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속칭 가마골 홍복산 자락 아래에 있다.
황사영은 초기 교회의 지도자급 신자 중의 하나로서 창원 황(黃)씨이며 남인(南人)의 명문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1790년(정조 14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했다. 그의 됨됨이와 재주를 높이 산 정조 임금은 친히 그의 손을 붙잡고 격려했으며 이에 그는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고 한다. 명문의 배경과 출중한 재주로 탄탄한 출세의 길을 앞둔 청년 황사영은 학문의 길을 위해 찾아 든 정약종의 문하에서 일생일대의 변화를 겪는다.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장녀 명련(命連)과 혼사를 치른다. 천주교인으로 명도회(明道會) 회장이던 약종은 사영의 빼어난 재능에 반해 장차 교회의 큰 일꾼으로 삼을 것을 다짐한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듬해인 1791년 그는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는 한편 정약종, 홍낙민 등과 함께 천주학에 대해 진지한 토론을 나눈다. 결국 천주학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된 그는 알렉산데르란 세례명으로 입교한다.이로써 그는 부귀 공명이 기다리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죽음의 길로써 진리를 찾는 고통스런 일생을 선택했다. 그는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이래 측근으로 주 신부를 봉행(奉行)하며 명도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발한 전교와 신앙생활을 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수많은 교우들을 희생시켰고 정약종 등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됐다. 역시 체포령이 내려진 황사영은 박해의 손길을 피해 서울을 빠져 나와 탐스럽고 아름답던 수염을 깎고 상복으로 갈아입고서 충청도 제천 배론으로 숨어든다. 황사영은 배론의 옹기 가마골에서 숨어 지내며 자신이 겪은 박해 상황과 김한빈, 황심 등으로부터 수시로 전해지는 바깥의 박해 상황에 대해 기록하던 중, 그 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치명 소식을 듣게 된다. 낙심과 의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가는 모필로 명주천에 적는다. 옷 속에 이 비밀 문서를 품고가던 황심이 붙잡힘으로써 백서는 북경 주교에게 전해지지 못한 채 사전에 발각되고 황사영은 9월 29일 체포된다. 이것이 유명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이 백서 사건은 조야(朝野)를 발칵 뒤집어 놓았으며, 그는 나라를 팔아 넘기려는 대역 죄인의 오명을 쓰고 11월 서소문 밖에서 처형된다. 이 때 그의 나이 27세였다. 이 사건으로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敬憲, 일명 경한)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된다. 가산은 모두 몰수당했고 한때 명문 세도가였던 가문은 풍지박산이 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파는 16명의 또 다른 순교자들을 탄생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