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그리고 광기

 

전혜린

 

1934.1.1~ 196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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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그무엇을 추구하는 자세,

이를테면 평범과 피상의 것 저 너머의 절대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향해 한걸음씩 내딛는다는 것.

그자체는 아무 결실도 업적도 아니다.

우리 뇌에 불에 데인 것과 같은 강열한 화인을 남기고 홀연히 세상 저편으로 날아간 전혜린은

그의 생애에 이룬 업적 때문이 아니라

그의 "무섭게 깊은 사랑,심장이 터질 듯한 환희,죽고 싶은 환멸"등을 추구하는

무서우리만큼 비범한 삶의 자세 때문에 우리의 기억속에 살아 있다.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전혜린의 생을 통해 이룬   

몇 권의 번역서, 유고로 출간된 수필집,일기문 따위는 문학이전의 습작 수준이다.

"1세기에 한 번 나올까말까 하는 천재"라는 평가를 받았던 업적으로서는 너무나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다.

 

레닌로자 룩셈부르크 가리켜"로자는 혁명의 독수리였으며,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말을 빌려 우리는 전혜린을 이렇게 말 할수 있을 것이다.

"전혜린은 인식에의 갈망으로 불타오르는 독수리였으며, 영원히 독수리로 남을 것이다."라고.

한 지인에게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려줘!"라고 속삭였던 전혜린.

점성술과 운명학을 믿고 가끔 점을 치며"운명의 위대한 저울 위에" 내던져진 제 운명을

불안한 시선을 번득이며 가늠해보던 전혜린은 31세로 요절하며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을 휘발시킨다.

 

1965년 1월 9일 토요일

하늘의 푸름은 마치 수정처럼 맑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의 창가 자리에 밤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성이

오후 들어 몇 시간째 며칠 전에 내린 잔설을 이고 있는 바깥 풍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다보며 혼자 앉아 있었다.

대학이 방학중이었기 때문에 다방 안은 한산했다.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문을 열고 다방 안으로 들어섰고, 검은 스카프를 한 채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손을 흔들었다.

 

"세 시간이나 여기서 기다렸어!"

 

그날 약속 없이 학림다방에 들렀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덕희가  전혜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다방 한가운데에 놓인 난롯가로 자리를 옮겨 앉아 토요일 오후를 담소로 보냈다.

저물 무렵 학림다방을 빠져나와 명동에 있는 은성으로 갔다.

은성은 당시 문화 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유명한 대폿집이었다.

은성에는 소설가이자 <연합신문>문화부장인 명동백작 이봉구가 앉아 있었다.

명동의 모나리자나 돌체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음악듣다가도

"술 좀 마셔 봐야겠어요. 어떤 것인가를 음미해보자는 거지요."라며,

두부 집에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크고 검은 눈동자를 번득거리는 전혜린을 이봉구는 또렷이 기억했다.

 

여러 사람이 합석에서 두어 시간 동안 떠들어댔던  그날의 술자리는 매우 유쾌했다.

전혜린은 무척 고조되어 보였고,다른 날과 달리 더 자주 웃고 더 큰소리로 많은 말들을 했다.

곧 수필집을 낼 예정이고, 책제목도 정했다고 했다.

전혜린은 이덕희에게 귓속말로 "제목은 나중에 너한테만 알려줄게"라고 속삭였다.

그는 국제 펜클럽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 그 때문에 건강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거야."

 

짧은 겨울해가 지고,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뒤 은성에서 나온 전혜린과 이덕희,

동행했던 후배 등은 한잔을 더 하기 위해 신도호텔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성에서 신도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전혜린은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걸로 구했어!"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무척 달뜬 음성이었다.

신도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전혜린은 몇 차례나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젊은 소설가들이었던 김승옥, 이호철등과 합세한 전혜린의 일행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소음과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술을 마셨다.

전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 취한 눈치였지만,담배를 피우면서 다리를 건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것이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담배를 쥔 손톱 밑은 때가 까많게 끼어있고, 누군가는 그 불결란 손톱을 " 검은테가 둘러진 부고"라고 일컬었다.

10시쯤 되었을 때 전혜린이 홀연히 일어서더니 입구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는사라졌다.

그것이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다음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의 신문은 1단짜리 여섯 줄 기사에서 "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독일 문학가"인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헨 유학 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 미수 경험이 있던 전혜린의 죽음이 수면제 과용으로 말미암은 사고사였는지,

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 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혜린의 사후,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지만 그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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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혜린은 평안남도 순천에서 1934년 1월1일에 전봉덕의 8남매 중 맏딸로 태어났다.

전봉덕은 29세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행정 양과에 합격한 천재였다.

일제 식민지의 악랄한 수탈에 모두들 헐벗고 굶주렸던 그 시절에

혜린은 백러시아계 양복점에서 소공녀가 입을 것 같은 흰 원피스를 입었다.

그의 부친은 서너 살부터 한글책과 일어책을 읽을 수 있도록  손수 가르쳤다.

맏딸에 대한 극단적인 편애 때문에 그의 부모는 자주 심하게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어린 혜린에게 아버지는 신이었다.

훗날 전혜린은 "내 한마디는 아버지에겐 지상 명령이었고 나는 또 젊고 아름다웠던,남들이 천재라 불렀던 아버지를,

나를 무제한하게 사랑하고 나의 모든 것을 무조건 다 옹호한 아버지를 신처럼 숭배했다"라고 회고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전혜린은 조선총독부 고급 관리인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떠나

한반도의 북쪽 끝자락의 신흥 도시인 신의주로 이주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46년 다시 서울로 돌아와 경기여중에 입학하여 학창시절을 보냈다.

전혜린의 천재성은 부친의 영향과 천혜의 환경,

그리고 "절대로 평범해서는 안된다" 는 사춘기 시절부터의 정신 속에서 키워졌다.

 

범용함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전혜린이 보여준 처절한 고투의 정신은 '전혜린 신화'의 가장 중요한 원소이다.

언제나 극점을 추구하는 전혜린의 정신은 범속한 일상이 주는 권태를 못 견뎌했고,

언제나 " 미칠 듯한 순간,세계와 자아가 합일되는 느낌이 드는 찰나, 충만함이 최고조에 이른 순간"을 갈망했던

그의 눈빛은 광기로 번득였다.

"물질.인간. 육체에 대한 경시와 정신. 관념. 지식에 대한 광적인 숭배, 그 두 세계의 완전한 분리"는

"영아기부터 싹트고 지금까지 붙어 다니는 병" 이었다.

그 때문에 젊은 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한때 홍역처럼 전혜린 신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1952년 전혜린은 피난지 부산에서 서울대 법대에 들어간다.

서울대 법대 진학은 부친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전혜린이 서울대 법대에 들어갈 당시 수학 과목은 0점이었다고 전해진다.

과락이 있을 경우 불합격 처리되는 것이 서울대의 관례였으나 다른 성적이 워낙 출중했던 터라

전혜린은 사정위원회를 거쳐 극적으로 구제되었다.

수학을 0점 맞았는데도 전체에서 2등이었다는 얘기는 이제 전설이 되었다.

 

전혜린은 대학 교육에 관한 전시 특별 조치령에 의해 부산에 세워진 전시연합대학교 임시 가교사에서 수업을 받았다.

법학에 권태를 느낀 전혜린은 경기여고 시절의 단짝 주혜가 다니는 문리대에서

오든이나 엘리엣 같은 시인에 관한 강의를 도강했다.

법학 과목의 강의 기피와 도강, 그리고 온갖 것에 대한 광적인 탐닉은 법학에 대한 혐오와 철학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된 것이다.주혜와 헤어진 지 6년이 지난 뒤의 일기장에 전혜린은 다음과 같이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다.

 

   주혜와의 우정, 회색 노트, 영도 가교사에서의 산보, 배, 바다, 부두..... 그리고 서울에서의 같이 보낸 시간....

   산집, 해바라기를 한 송이 저 바구니에 넣어서 나의 동굴같은 방에 갖다 주었던 주혜....

   그리고 주혜가 떠나던 날에 나의 마를 줄을 몰랐던, 한없이 흐르던 눈물. 결국 그때가 영 이별이었던 모양이다.

   편지는 아무 소용없다. 아름다운 꽃이나 손수건 같은 힘밖에는 없다.

   주혜가 보고 싶다.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더라도... 그래도 꼭 만나고 싶다. Before I shall die....

 

마침내 21살 되던 해인 1955년, 전혜린은 독일 유학을 떠났다.

그가 에어 프랑스에서 내렸을 때 뮌헨 하늘은 축축한 습기를 가득 머금은 회색빛이었다.

전혜린은 학교 근처에 방을 얻었다.

강렬한 인식욕과 날카로운 감수성을 가진 전혜린은 뮌헨대에서 그토록 동경하던 문학과 철학의 세계로 깊이 빠져든다.

 

뮌헨대에서는 독일 학생들뿐만이 아니라 그리스. 터키.이집트 등지에서 온 유학생들도 많았다.

대부분의 학생은 검소했다.

남학생들은 거의 스웨터 바람이고 여자들은 검은 스커트에 검은 양말,검은 머릿수건, 길게 늘인 생머리가 제복이었다.

훗날 전혜린의 저 유명한 검은색의 옷과 검은색의 스카프는 그 시절 습관의 연장이었다.

"온갖 물질의 결핍과 가난과 노동, 식사 부족, 수면 부족에도 그들의 그 하늘을 찌를 듯한 패기,

오만한 젊음, 순수한 정신,촌음을 아껴 노력" 하는 독일 대학생들을 부러워하며 그들과 경쟁했고,

"목적을 가진 생활, 그 일 때문이라면 죽어도 좋다는 각오가 돼있는 생활" 에 대해 전혜린은 만족했다.  

 

전혜린은 독일 유학 중 결혼을 하고, 딸을 낳는다.

싸구려 번역과 고국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는 늘 빠듯했다.

한 번은 생활비가 완전히 바닥이 나서 그는 한 주일 동안 일생 처음으로 완전히 굶었다.

훗날 혜린은 " 물을 마시니까, 죽지는 않더라" 라고 했다.

그것은 그녀가 처음으로 체험한 굶주림이었다.

 

전혜린은 1959년 독일 유학을 끝내고 귀국하여 서울대,이화여대,성균관대에서 강의를 맡는 한편 번역 작업을 했다.

헤르만 헤세, 하인리히 뵐, 에리히 케스트너,루이제 린저 등의 독일 작품들이 전혜린의 번역으로 

나라 안에 소개되고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4년 독일 유학 중 결혼한 남편과 합의이혼한 후 전혜린은 몇 번 열병과도 같은 사랑에 빠졌다.

인습과 사회적 규범을 벗어난 연하 제자와의 사랑도 있었다.

독일 유학에서 막 돌아와 모교인  서울 법대 강단에 선 '교수' 전혜린과 질풍노도와 같은 스무살의 '제자'법학도는

독일어 강의가 있는 매주 수요일에 만났다.

그들은 가장 첨예한 정신과 정신의 맞부딪침에서나 일어나는 스파크를 일으키며 서로에게 다가갔다.

청년은 시를 써서 갖다 바치고,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여교수는 편지를 써서 제자이며 연인인 청년에게 건네줬다.

그들은 서로의 타오르는 혼에 경탄했고 서로를 찬미하며 정신의 충일 속에 취해 있었다.

어느 날 청년에게 가문의 모든 꿈을 걸고 있는 시골의 어머니가 찾아왔다.

전혜린을 만난 이 어머니는 무릎을 꿇고 제발 자신의 아들과는 헤어질 것을 호소했다.

청년은 그 모친의 간곡한 만류를 받아들여 전혜린과 결별을 선포했다.

그때 전혜린은 시니컬한 미소를 얼굴에 담고

"네가 날아올 땐 난 네가 독수린줄 알았는데,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새에 지나지  않았어!"라고 했다.

 

 

   나는 왜 너를 이렇게 좋아할까? 비길 수 없이.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너를 좋아해.

   너를 단념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택하겠어.  

   너의 사랑스러운 눈, 귀여운 미소를 몇 시간만 못 보아도

   아편 흡입자들이 느낀다는 금단현상이 일어나는 것 같다.

   목소리라도 들어야 가슴에 끓는 뜨거운 것이 가라앉는다.

   너의 똑바른 성격, 거침없는 태도, 남자다움, 총명, 활기, 지적 호기심, 사랑스러운 너의 얼굴

   나는 너의 모든 것을 사랑한다.

 

 

죽기 사흘 전 전혜린은 '장 아제베도'라고만 알려진 익명의 누군가에게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중략)... 나도 생명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 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중략)...나를 살게 해줘"라고 썼다.

그것은 익사 직전의 사람이 구조를 요청하는 외침이고, 절규였다.

일찍이 인생의 악덕을 눈치채고 지식의 황홀경 속에서만 헤엄치며

" 식은 숭늉같고 법령집 같은 나날"을 탈출하는 꿈을 하루도 쉬지 않고 꾸었던 전혜린은 너무 빨리 이 세상을 떠났다.

세상이 그의 재능과 광기에 가까운 열정을 그 내면에서 남김없이 갉아먹어 버렸던 것일까.

전혜린이 익명에게 썼던 두 통의 편지는 끝내 부쳐지지 않은 채 죽었다.

1934년 1월 1일 일요일에 태어난 전혜린은 1965년 1월 10일 일요일에 생을 마감한다.

 

 

 

 

 

     장석주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하여 서른해 넘게 시인, 소설가,문학비평가, 방송진행자, 대학교수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처  나는 문학이다 ....장석주 저 (나무처럼) 

 

 

참조:

윗 본문을  퍼올수가 없어서

직접 전체문장을 타자치며  쉽게 읽게 줄띄기를 했습니다.

몇몇 부호와 한자는 저의 문자판에 없어서 생략했습니다.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