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것이라고 했던 어느 사람의 말이 생각납니다.
잘나고 못나고를 떠나 생로병사의 길을 가야만 하는
인생은 한마디로 고통이니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무기수라는 말이지요.
이 허무주의적인 말을 들었을 때
원죄이구나 했습니다.
장마가 끝나고 길고 무더운 이 여름
이 말들이 새삼 가깝게 다가오는 것은 왜일까요?

 

늘 마음 한 켠에 묵혀두었던 일들을 이제는 처리하리라 마음먹고 서울대병원을 찾았습니다.
이것저것 의심했던 것들의 MRI 결과 엉뚱하게도 다른 곳의 병명이 나오고 "이까짓 것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시술을 했습니다.
투시 MRI에 선명하게 찍힌...3번과 4번 사이의 까만 물체가 선명하게 에메랄드처럼 박혀 있는 디스크!
신경이 내려가는 혈관에 1mm의 가는 주사바늘을 50cm정도 밀어넣어 약 15분정도 스테로이드 용액을 주사하는데 흔히들 신경성형술이라고들 하나봅니다.
이곳에서는 혈관조영술이라고 쓰여있는데
창경궁이 마주보이는 암쎈타내에 시술실이 있기에 다른 곳과 달리 너무 조용해 기분이 좀 묘합니다.
앞으로 5시간을 기다려 시술을 받으니 커피점에서 한잔의 커피를 뽑아들고 하릴없이 경복궁을 마주하고 앉아 우두커니 시간을 죽이고 있다 이곳저곳을 둘러봅니다.
최근에 지어진 암쎈타는  굉장히 신경을 쓴 흔적이 곳곳에 역력합니다.
특히 한쪽 벽면에 동판으로 새겨진 후원자들의 명단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5억원 3억원 1억원 1천만원을 기준으로 죽 나열된 명단이 벽을 채우니 이런 후원자들의 정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일까요.
이런 후원자들이 있기에 MRI 찍으러 들어갈 때에도 빳빳하게 풀멕인 환자복을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후 3시30분 드디어 내 차례입니다.
과장님과의  면담후, 대기실에 앉아있다 시술실로 들어가니 4명의 의료진이 영상을 보면서 마취를 하고 시술을 합니다.
마취때문일까요? 끝나고 곧장 가지 못하게 하고 10분간 쉬었다 가라합니다.
걸어나오는데 다리가 가뿐합니다.
이 시술이 요술방망이인가? 했더니 마취때문이라나요.
5일간은 아프고 20일이 지나야 약이 완전히 스며든다는  설명서 한장을 들고 귀가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만약 3주가 지나도 차도가 없으면 다시 예약을 하고 오라고요.
3주! 그 날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 때는 정말 몰랐습니다.

 

5일까지는 그럭저럭 아팠고
그 후 3일은 허벅지가 터져나가는 듯한 통증에 가만히 있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팠고
10일 동안은 조금씩 나아지는지 어떤지 일어나서 발을 디디는 순간 통증에 일어서서 걷는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으니
통풍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닐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이 실감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자기들의 생활에 불이익이 되는 것을 원치않아 냉정하니 그 설움이 또한 가슴 아팠습니다.
통증을 잊으려 하루에 한권의 책을 읽어대는 나에게
"엄마는 행복한 줄 알아. 아파도 밖에 나가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편하게 누워 좋아하는 책을 읽고 있으니......."
얼마전 시술을 끝내고 귀가길에 동생의 타박이 떠 올랐습니다.
"제발 미련스럽게 아픈데도 기어다니면서 일 좀 하지마"
"무조건 이불 뒤집어쓰고 누워 못 일어난다고 해. 다 큰 아이들이 밥 하나 해결 못 할까?"
그 말을 안 듣고 질질 끌고 다니면서도 밥을 해 주니 결국 이런 말까지 듣게 될 줄이야......
병원에 갈 때마다 새벽 6시에 나와
하루종일 이리저리 예약을 하고 수납을 하고 보호자 역활을 한 동생에게 새삼 고마왔습니다.
딸이 서울대병원에 근무한다는 그 죄 하나로 방학임에도 제 볼일도 못 보고 따라다녔는데 아이들이 아무리 철이 없기로서니 이렇게 말을 하다니요.
모든 것이 다 겪어봐야 아는 이치인가 합니다.
물론 나도 예전엔 당연히 그리했겠지요.
그러면서 인생을 알아가고........


큰 산을 넘으면
작은 산을 넘을 땐 수월하다는데
산 너머 산이라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듯 구비구비 한숨쉬듯 세월은 갑니다.
회심곡의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문밖을 나서니 벌써 저승길이라고.
일직사자 월직사자 내 말 좀 들어보소.
잠든 날, 병든 날 다 빼고나니 인생이 몇년이냐고요
 
물론 이 또한 언젠가는 지나가고 말겠지요?
5월 말, 제주도 여행을 함께 한 선배가 갑자기 쓰러져 입원을 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궁암 대장암으로 긴 투병생활을 끝내고 3년전부터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활기찬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3개월 전에 다시 재발을 하고 고심끝에 절대로 치료를 안 하겠다고 선언을 했답니다.
그냥 이대로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요.
그래서 올레길을 함께 걷고 깔깔거리며 웃다 왔는데 아마도 힘에 겨웠던 모양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재발 소식을 그동안 전혀 몰랐습니다.
치료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포기를 했을까요?
그 선배를 위해 도대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요?

이래저래 힘든 여름이 가고 있습니다.
암 선고를 받고 포기할 수 밖에 없는 분도 있는데
이까짓 허리디스크로 아프다고 날밤을 새우는 내 자신도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이들 말대로 그래도 나는 행복한 축에 속할까요? 

 

얼마전에 타계한 토지의 작가 박경리도 생각이 납니다.
"내가 행복했다면 문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학은 불행의 편이고, 문학은 끊임없는 단련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불행을 일부러 자초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문학보다는 삶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1969년 작가는 토지를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한 이래 무려 25년, 온갖 불행과 맞서 싸웠습니다.
43세, 용공이라는 이름 아래 행방불명된 남편
암과의 투병(토지를 쓸 때 아픈 가슴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고 썼다)
그리고 남편을 형무소에서 잃은 작가는 형무소에 들어가 있는 사위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외손자를 업어  키우며 썼던 토지.......
결국 작가의 시대적수난,  가족사의 불행은 "한의 미학"을 뛰어넘어 "생명의 존엄성"이라는 문학의 한 핵심적인 길을 우리에게 던져 놓았습니다.

 

고통이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원죄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