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돌틈에 돌돌 솟는 샘물처럼 차가운 계절
겨울 속으로 바람이 불어 옵니다.
12월 입니다
오늘은 하늘이 종일을 흐리더니 종내는 비까지 오시네요
이런 날이면 옛날 신포동 거리에 있던 "짐"다방이 생각납니다.
아무런 약속이 없어도 지나다 들르면,
꼭 한 두명 반가운 얼굴이 있고,
가벼운 클라식 음악이 있고
향기로운 커피 냄새가 있어 좋은 곳이었지요.
집에 축음기 시설이 귀하던 시절,
음악 다방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D.J는 신기하게도 우리의 신청곡을 기억하고는 반갑다는 듯 청하지 않아도 들려주었습니다.
정말로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하루를 죽치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 시절
그곳에서 자주 만나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친구의 동생들이라 참 편했습니다.
2살 아래였는데 "누나" "누나"하고 무조건 따랐지요.
여동생만 잔뜩 있는 나는 그 동생들이 무척 대견했습니다.
그 때, 그네들은 혈기가 왕성해 데모에 열심이었고 군대도 가야 할 입장이라
무언가 쫓기는 듯 앞날이 불안한 시절이었습니다.
옷도 맨날 군복을 까맣게 물들여 입은 그런 차림이었지요.
"유신시절"이었던 우리의 대학 시절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데모에 대학 생활이 지났으니까요.
손에 횃불을 들고 머리에 빨간띠를 두루고 일사분란하게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데모대와 마주치는 날이면
그날은 만사 재치고 골목으로 골목으로 숨어서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지요.
그 동생들은 의리상 그 행렬에 참가하기도 하고 더러는 잡혀가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기네들이 아니면 지구가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세상 근심 걱정은 다 안고 사는 열혈남들이었으니
어쩌다 보이지 않으면 "또 잡혀간 것이 아닐까" 해서 우리의 속을 태우곤 했습니다.
정작 부모님에게는 태산같은 걱정만을 안겨드린 사실은 외면한 채로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그 아이들은 우리들의 "작은 영웅"이었습니다.
위기의 시대에
일신의 영달에 연연하지 않고 기꺼이 나라를 위해 한몸 불사르겠다는 의지와 투지가 대단했으니까요.
감히 불심검문에 한번도 걸려 보지 못 한 우리네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어울려 다니며 그런 류의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는것만으로도 나는 우쭐했습니다.
겉으로는 "하지 마" 하면서도 속으로는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지"라고 부추킨 것은 아니었을까요?
만나면 허물이 없으니까 주로 신포 시장 안에 있는 우동집에서 우동에 소주 한잔이었습니다.
그 우동집은 "신신옥"으로 튀김 우동으로 유명했는데
돈이 궁한 학생들에게는 딱 맞는 집이었지요.
그곳에서 먹다가 발동이 걸리면
그 골목에 있는 서서 먹는 막걸리집 "백항아리"집으로 옮기곤 했는데
그 날은 무슨 큰 시국 사건이 터져 뒤숭숭하던 참에
무슨 치기가 났는지
누군가의 제안으로, 그 근처 유명한 무당집으로 점을 보러 갔습니다.
난생 처음 가게 된 무당집이라 좀 무섭기도 했습니다.
여자는 나 하나에 남자 세명이 몰려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던 할머니가 다짜고짜 하시는 말씀이
나와 한 아이를 가리키면서 "둘이 무조건 살아. 너무 잘 맞아" 하는 것이 아닌가요?
내 눈에 너무 어린 아이인데 배필로 삼으라니...
우리는 그 날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엉터리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어쩐지 우리 둘 사이가 이유도 없이 어색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까불던 그 아이도 자꾸만 이상해지고....
당연히 그 후로 "짐"다방은 피해 다녔습니다.
반대로 그 아이는 나를 찾아 다니고, 만나면 떼쓰고 싸우기를 반복 하다가 결국은 쫓기듯 군에 입대를 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가 가 버린 후,
한동안 "짐" 다방에 가면 만날까 두려웠던 그 아이가 얼마나 보고싶은지
함께 즐겨 듣던 "왕궁의 불꽃 놀이"에 눈물을 쏟기도 했습니다.
왜 좋아하면서도 싫다고 그렇게 모질게 뿌리쳤을까요?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순수했던 시절이었습니다.
현재는 모 방송국에 근무하고 있다고요.
그 아이도 내 소식을 어디에선가 듣고는 가끔은 나처럼 그 시절을 그리워할까요?
"짐" 다방,
그 신포동 거리를 걷노라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음악광도 아닌 내가 그 다방을 잊지 못 하는 것은 그 곳에 두고온 추억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요즈음도 신포시장엘 가면한번씩 둘러봅니다.
"신신옥"그 아드님이 현재 운영하고 있으며
규모는 반으로 줄였으나 튀김우동과 더불어 요즈음은 장어튀김도 유명합니다.
"백항아리집"....
서서 먹던 막걸리집이었지요.
현재는 그곳에서 바로 옆쪽으로 이사해,의자 몇개 탁자 3개 놓고 영업을 하고 있는데
운이 좋아야 바로 앉아 먹게 됩니다.
빈대떡이 또한 일품입니다.
이렇게 잘 꿰고 있으니
남이 보면 대단한 술꾼인 줄 알겠지요?
그래도 궁금해 자꾸 찾게 합니다.
아! 그리고 답동관....
밤새 술에 찌든 남자들이 어린 여자를 데리고 새벽에 들러 해장국 먹던 집으로 유명했지요.
김혜경 선배님
황추 선생님은 아마도 개성에 있던 송도중학교에서
피란을 나와 자리잡은 인천 답동의 송도고등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셨지요.
저는 무식하게도 그 분이 인천을 대표하는 화가인 줄은 몰랐습니다.
다만 말이 적고 인품이 높은 분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
모습도 좀 남달랐지요?
산학 후배,
짐 다방에 얽힌 사연들이 이러 저러하게 많겠지만
산학후배의 이야기도 정말
독특합니다.
스치고 간 사람들이 모습이 간간히 생각 날 것 같아요.
학교를 졸업하고 과연 우리가 무엇 이 될른지 오리 무중일때.
비가 오면 비가 와서 구름이 가득하여 하늘이 낮으면 또 그래서
우리는 브람스를 많이 들었지요.
아름다운가 하면 처절하고 그런가하면 쓸쓸하고 또 가슴을 누르는
깊이 모를 무게에
그저 기회만 되면 브람스를 틀라고 조르던 때 가 있었습니다
여기 브람스 더블 콘체르토 도 그 중에 하나 였지요.
김혜경 선배님
선배님은 그곳에서 브람스를 즐겨 들으셨네요.
음악에 문외한인 나는 음악이 나오면 척척 누구 곡이라고 알려주는 사람들이 정말 신기했습니다.
나는 몇번을 들어도 몰랐으니까요.
얼마전 지휘자 함신일님이 들려주던 말이 생각납니다.
클라식만 들으면 잔다고 하니까
당연한 현상이라고요.
가장 편안하고 마음의 안정을 주는 음악이니 졸음이 오는 것 뿐이라 하더라고요.
어디가서 록을 들으면서 자는 사람 보았는가 하면서요.
그 지휘자가 갑자기 위대해 보이고
나도 무식한 것은 아니구나 위로를 했습니다.
선배님 맞지요?
브람스....감사드립니다.
혜경언니는 이 더블콘첼르토를 좋아했고 난 베토벤의 트리플 콘첼르토를 좋아했어요.
우리의 추억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치 끝말잇기처럼 기억잇기를 하고 있지요?
난 학창시절 말할 수 없는 답답이로 살아서 막걸리집은 커녕 식당조차 별로 가본 곳이 없어요
혜경이 언니나 3기의 현수언니는 나의 답답한 외면에 가려있는 뜨거운 속내를 알아차려 준 몇 안되는 분들이지요..
그래서 지금까지 오랜세월 안만나고 살아도 어제 헤어진 사람들처럼 그냥 지나간 시간이 없어져버릴 수 있는 것 같아요.
근데 산학아!
말하다 보니 왜이렇게 존대를 썼을 까? ㅎㅎㅎㅎㅎㅎ
?? 명옥씨~~
춘자후배와 명옥이가 '짐 다방'의 물꼬를 틀더니 원 세상에 막혔던 둑 터지듯
여기저기서 추억의 샘물이 마냥 마냥 솟아나고있네!~~~~~
짐 다방, 은성다방,태양다방, 별 다방,흙 다방등등........
거기다 머얼리 비엔나에서꺼정 김옥인후배의 폭넓은 인천의 그당시 예술인들 활약상까지~~~
뭐니뭐니해도 '짐 다방'추억의 백미는 김 혜경후배가 올려놓은 다방음악!!! 프레터즈의 등등~~~
어찌나 반가운지! 서울로 기차통학하면서 오며~가며~
늦은 시간에 내려올때는(방과후 학생들 렛슨마치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고 지쳐,
서울역 대합실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이 왜 그렇게 처량맞던지~~~
산학이의 가슴아픈 추억도 '짐 다방'에 더해지고~~다 20대 순수시대의 옛 정이 묻어나는 순간이죠?
그러고보니 '인일 대처 순영'이의 '짐 다방'이네그려!!
아무래도 또 한 턱 쏴야겠다! 순영아~~~사랑의 큐피트가 이루어진 곳이니말야~~~
신포시장안의 답동관 바로 앞에 우물이 있었잖니? 거기 가서 내가 우물물을 (드레박 올리는 재미에)길었었는데 ㅎㅎㅎㅎㅎ
튀김우동이 너무 맛있어서 (어느 골목안인지는 모르겠구~) 여러번 친구들과 드나들고..........
발자취 닿는 곳은 다 그립구나!! 담뿍 정이어린 추억 떠올려 준 후배들~다들 정말 고마워~~~~~
최희순 선배님
말씀하신 우물 주변은 지금은 민어회집으로 유명한 신포횟집, 경남횟집이 조르륵 모여 있습니다.
얼마전엔 미국에서 온 친구가 민어회가 꼭 먹고싶다해서 다녀왔지요.
민어껍질, 부레등 귀한 것을 같이 참석한 유명한 평론가때문에 덤으로 막 줘서 잘 먹었습니다.
선배님께서 물을 뜨러 다니셨다니, 집이 그쪽이셨나 봅니다.
산신옥도 좋아하시고....
선배님 말씀처럼 윤순영 선배님의 사랑이 짐다방에서 시작해 결실을 맺었으니 그 사건이 특종입니다.
그런데 김혜경 선배님
"짐다방"이란 명칭에 사연이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사연인가요?
궁금합니다.
산학,
재미있는 추억담 이구먼.
난 고등하교 졸업 후에 인천에 자주 안가서 짐다방 출입은 몇 번 정도밖엔 없다우.
그래도 쏟아지는 댓글을 읽으며 절로 대학 시절로 빠져들게 된다.
최희순 선배님
이 글을 읽다가 "최희순"이름이 나와 깜짝 놀라 전화를 했다며
혹시 "최희순"이라는 분을 아느냐고요?
혹시 그 분이
경동 마루턱에 있던"한내과"의 큰딸 한혜주를 기억하는지 궁금해 하더라고요.
제 친구 언니인데 서울대 음대를 다녔습니다.
아시는지요?
최희순선배님도 오셨네요?
반가습네다~~
희순언니는 피아노만 잘 치시는게 아니고 글도 참 구수하게 잘 쓰세요.
글속에서 언니의 화끈할 것 같은 인품도 보입네다.
희순언니!
참 좋아요~~
옥인후배!
희순언니 넘 매력있는 선배님이신것 잘 알지요?
잘 모시시라우요~~
?? 어!~ '한 혜주'선생님을 누가 알지?
내가 중학교~고교1년때까지인가 그 분한테 렛슨 받은 거 맞는데.......
경기도 내 음악콩쿨에 쇼팡 즉흥곡을 갖고 나가게 되어 그 선생님과 곡을 들으러
어느 (기억은 안나는데) 인천의 음악 감상실을 같이 가 들었던 기억도 있어요.......
동방극장 지하 다방이었나?..........
얼굴이 상아빛 나는 분이시고 손가락이 가늘고 길어서 기억에 더 남으네요!
미국으로 가신 걸로 아는데.......
병원 살림집으로 렛슨가면 으례 선생님 부모님이 반갑게 맞아주시고.....
참, 유복한 집 따님이시구나!했어요~~ 김원복 선생님 제자셨어요~~
근데~산학씨 동기가 그 분 동생이면 ???
난 그 분 형제분들은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혜원씨가 누구지?~~
암튼, 사랑스런 후배님들!
이 선배를 이처럼 챙겨들 주니 이걸 어쩌나~~~몸 둘바를 모르겠네~~~
춘자씨는 또 무슨 표현을 이리도!!!~~~덕분에 행복 플러스+++~~~
최희순 선배님
제 친구 혜원이가 기억하는 바로 그 분이시네요.
선배님이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쁜 여학생이라며 모습까지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무척 궁금해했습니다.
언니들이 모두 피아노를 잘 쳤는데
너는 왜 못했을까 라고 놀렸더니 큰언니에게 배웠는데 맨날 싸워서 그랬나보다 라고 하더라고요.
물론 집안이 다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런데 혜주언니의 아들이 미국이 주목하는 천재라
언니는 그 뒷바라지에 꼼짝을 못 한다고 들었습니다.
선배님
인천이 너무 좁지요?
아마 선배님도 기억을 더듬다보면 아주 예쁘고 귀여운 하얀 얼굴의 갈래머리 소녀가 생각나실 거얘요.
어디 섞여 있어도 예뻐서 눈에 확 띄는 아이였지요.
김옥인님이 올린 글을 보니
2008년도에 쓴 글 "짐다방....." 과 너무 일치하는 장소가 많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반가왔고요.
같은 세대인 우리는 추억도 거기에서 거기로, 어느 순간에는 스쳐갔을 인연은 아니었을까요?
반가운 마음에 예전에 올린 것을 다시 복사해 올려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