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여름에 카나다 언니(3유현애)가 왔을 때,
-나는 신안군 지도를 보여드려야겠고
-형부는 당신 큰형님 누워계신 부산을 가야겠고
-춘천 -1/유명애, 3유인애 언니들이 사시는 곳도 가야겠으니
우리 가족은 저절로 전국 여행을 하게 되었답니다.
어머니는 내심, 88세인 내가 이 긴~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염려하셨던 모양인데
여행 후에는 여행기 원고와 삽화를 내게 선물하시며, 여러모로 자신이 생기셨다고 합니다. "나는 건강하다, 여행도 가능하다~"
얼마나 기쁘셨을까... 싶죠~
여기 원고 머릿부분과 삽화들을 올리는 것은
3종심언니께서 어머니의 편지지를 전영희 싸부의 댓글에 사용해 주셔서 용기를 얻은 때문이랍니다.
8학년8반의 여행기
2010년 7월27일 (화요일):
대망의 날!
둘째딸사위가 카나다 빅토리아섬에서 태평양을 건너 날아온다.
아침부터 방을 치우다. 어머니 보러오는데 부담없이 자고,씻고 짐을 늘어놓고 챙기고 할 수 있어야지.
환영카드를 그리고 머그잔에다 작은 꽃을 꽂아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넷째딸 유교수의 수고로 [비행장에 도착했다. 차로 인천을 향해 떠난다] 식으로 보고해 주어, 앉아서 기다리는데 19시반에 순애차에서 내리는데 세상에 딸은 이렇게 삐썩 말랐고 사위는 머리가 하얗게 세고, 얼마나 고생스러운 날들이었나 짐작하게 해준다.
절을 받고 어머니 받으셔요 라며 봉투 2개를 주어 받고 (하나는 현애가 한국은행권 5만원권 10장 그러니까 50만원 진우댁의 편지와 만원권 30장, 30만원을 넣었더라) 며느리 솜씨의 저녁밥상에 앉는다. 안먹어도 되는데... 라면서도 맛있게 먹고 두사람은 피곤에 지쳐 쓰러져 잔다. 부부는 응접실에 막내딸 유교수는 안방에서 나와 함께 자다.
2010년 7월28일 (수요일):
6시에 일어나 기도드리려는데 유순애 교수가 “형부언니와 연안부두에 갔다와서 아침 먹을께요”한다. 나까지 네명이 연안부두로 떠났다. 인천이 많이 변했네요. 어디가 어딘지 기억이 안나요“라는 현애들을 데리고 해산물 시장엘 가는데 유교수는 형부가 좋아하는 멍게,조개 , 펄떡펄떡 싱싱한 회를 살 생각에 너무 좋아 흥분상태다. 나는 오랜 친구로 연안부두에서 돌고래 횟집을 40여년간 경영하고 있는 박정옥 간호사의 어머니를 찾아 그분의 안내로 해산물을 사기로 하였다. 그댁 큰아들 박인수는 마침 토론토 이민을 갔는데 인수 딸은 토론토 의대에 진학하여 현애 두 아들의 후배가 된 셈이다. 이른 아침이지만 핸드폰 연락에 정옥엄마는 눈을 부비며 나와 반갑게 맞아주었다. 방어회, 각종 조개, 게, 멍게, 소담한 갈치 등 가장 싱싱한 해물을 골라주었다. 그녀는 아들손주 자랑을 하고 우리는 칭찬을 하고 북돋워주며 해산물이 가득찬 스티로폼 박스 몇 개를 차에 싣고 귀가하였다. 두딸은 돈 지불을 할 때마다 서로 산다고 다투었다. 현애는 <나 돈쓰러 왔다> 하고 순애는 <여기는 한국돈만 받는다> 하면서 떠드레 하여 나는 누가 결국 지불했는지도 모르겠다.
집에 와서 광어회로 아침을 먹고 인일정보화교육에 늦지 않게 가야한다며 세사람이 떠났다. 점심은 손아래 올케에게 부탁을 하면서, 점심 식사 후에 통일동산으로 떠나 성묘하고 저녁밥은 통일동산 인근의 장단콩두부마을에서 먹기로 한다는 것이다. 모든 프로그램은 유교수의 지휘에 전적으로 따르기로 하였다.
딸들과 사위가 등교한 후 나는 10시부터 김미옥, 유애저, 유순희, 이언희, 목인자 제씨와 함께 리샨샤씨 라는 도라지꽃을 그렸다.
오후2시에 화평동을 출발하여 먼저 도착한 곳은 서곶 신사장 연구실이었다. 미생물배양장이라고 하는게 옳겠는데, 관절염이 심한 언니를 위해 우선 신사장이 만든 산삼침을 맞게하고 여러 가지 보강제를 받는 것이었다. 딸과 사위는 병투성이라는게 옳다. 신사장의 조언에 두사람은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겠다고 마음먹는 듯, 우리는 신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남대문시장 유교수 단골안경집으로 향했다. 오후4시경 안경집에 도착하여 안경테의 풀어진 나사를 조이고, 누진다촛점렌즈를 맞추고, 오랜 렌즈들은 깨끗이 때를 벗긴 후 오후 다섯시쯤 통일동산으로 출발하였다. 늦여름의 햇살은 따갑기 그지없고 늦더위 기승은 대단했다. 통일동산에 도착한 여섯시 경에는 더위가 조금 가신 듯 하다. 평안남도 묘역을 찾아 2열94번에 가니 날이 갑자기 환해져 마치 아버지(유영호 박사)께서 “너희들 왔구나, 반갑다, 고맙다”라는 것만 같다. 기도하고 아버지 좋아하시던 찬송을 골라 ‘예수는 나의 힘이요“, ’만입이 내게 있으면‘을 넷이서 아버지를 마음에 품고 힘차게 불렀다.
장단콩집은 손님이 꽤 많았다.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딸들은 아버지 유택에 새꽃을 사다 꽂아놓고 빛바랜 꽃을 교체하고 왔다 한다. 맛난 두부음식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어느덧 밤9시반이었더라. 집에는 세모 임과장(예순씨)이 로드베키아를 잔뜩 꽂아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깡마른 현애는 예순씨에게 딸노릇을 대신해주니 고맙다고 치하하였다. 현애 내외는 신사장이 준 약을 먹으며 식사도 잘하고 세 손주를 돌보는 일로 시달리질 않아서인지 몸 아픈 것은 좀 나은 것 같다고 하였다.
2010년 7월29일 (목요일):
아침식사는 현애가 차림 시리얼로 먹고 세사람은 인일정보화교육에 갔다.
유교수는 자기 볼 일 본다고 상경했고 현애 내외는 동창들하고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나는 딸 내외와 함께 택시를 불러 松庵기념관으로 향했다. 외조부의 기념관 전시실에서 현애는 ‘이것들 내가 어린시절에 보던 것들이네’라며 반가워 했다. 귀가길에 숭의4거리 태양식당에 들러 보쌈 하나, 비지 하나를 시켜 셋이 나누어 먹었다. 남은 것은 싸주니 고맙기 그지 없다. 저녁8시, 돌아오는 길에 대동백화점에 들렸다. 마침 회장부인이 카운터에 앉아 있었다.‘언니, 나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하니 ‘아니 이게 누구야, 현애 아냐?!’하며 서로 얼싸안고 반가워들 한다. 어린시절 함께 한집에서 살았으니 오죽이나 반가우랴~ ‘왜 이리 말랐어? 그래도 하나도 안변했네’ ‘언니는 더 예뻐졌네’ ‘그래?’ “응. 보기 너무 좋아요, 언니는 성공했네요‘, 식으로 끝도 없이 정다운 대화가 오간다. 현애는 가방에서 한국에서 사갈 것 목록을 적어온 메모를 꺼내어 체크하며 주문을 한다. 전승호 사장(전회장 맏아드님)이 과장을 불러 최저가로 드리라 일르고 회장님까지 나와서 그야말로 대단한 서비스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노인이라고 앉아서 구경만 했다. 딸 내외는 끝도 없이 물건을 고르며 18만 여원을 지불하였다. 언니(전회장부인)는 우리집 가까이까지 바래다주며 석별의 정을 나누는 것이었다. 현애는 ‘어머니가 저 어니 결혼시킬 때 많이 애쓰시던 생각이 나요.’ 옛날을 회고하면서, ‘정말 언니는 성공했네요’라고 칭찬하는 것이었다. 땀을 흠뻑 흘리면서 쉴 새 없이 다닌 우리는 밤 열시에 씻고 단잠을 잤다.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아침 여섯시반에 현애는 일어나 시리얼 아침상을 준비하였고 두 내외는 조반을 먹고는 인일정보화교육 강의들으러 갔다.
유교수는 어제 상경하여 인천에 내려오지 않았다. 오늘 수업은 결석하는가보다. 온누리교회-인터넷TV방송에서 나에게 인터뷰를 청했었는데 PD들이 오후2시경 화평동에 왔다. 8월6일 금요일 18:30 방영분이라 한다. 딸 내외도 인터뷰에 응하면 좋겠단다. 마침 도라지꽃을 그리러 왔던 김미옥 씨(동화구연가), 정애연씨(유치원 선생님) 김민정 어린이(5학년)까지 인터뷰에 참여하였다.
사위는 압구정동 마포막국수집에서 해병대 동기들이 환영회를 열어준다 하여 CGN-TV PD(홍승후씨 내외분)들이 상경하는 차편에 동승했다. 우리 모녀도 동승하여 압구정동 신구초등학교 옆에 있는 세나미용실(유교수 단골집)에 갔다. 순애의 목적은 솜씨좋은 한국미용실에서 언니에게 파마를 권하려는 것이었고 게다가 마침 미장원 주인이 현애의 둘째아들(카나다 의사)을 중매서겠다 하여 우리는 그 송양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는 외국같은 낯선 옷차림의 젊은이들 구경을 흠씬 하면서 <엄마 손맛집>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인천 숭의동의 태양식당이 그리웠다. 압구정동의 식사는 비싸기만 한것 같다. 핸드폰으로 계속 연락을 하던 순애가 <엄마 손맛집>앞에 당도한 것은 저녁 8시반, 우리는 그 차로 강남의 야경을 구경하면서 운전기사의 설명을 즐겼다. 예술의 전당을 바라보면서 현애는 ‘여기가 우리 난희가 다니는 곳이야? 한국은 정말 대단해졌구나. 이 자동차들 물결, 빌딩 숲, 세계적인 도시야!’라고 연발 탄성을 올렸고 불야성인 서울대 캠퍼스를 한바퀴 돌 때에는 격세지감을 느끼는 듯 했다. 제2경인고속도로를 달려 집에 오니 밤 10시, 현애는 쓰러져 자고 순애가 아래층에서 형부의 귀가를 기다려 주었다.
2010년 7월 31일 (토요일):
사위는 어젯밤 12시경에야 귀가한 모양이다. 어제 환영식장에 걸려있던 <김명정 회원 쾌유, 고국 방문 환영>이라는 커다란 프랑카드를 가지고 와서 우리 안방에 펼쳐 보였다. 아침밥은 여전히 시리얼로 현애가 조반을 차려 먹고, 인일여고 동창회의 정보화교육 마지막 날이어서 쫑파티까지 하고 늦게야 온다며 셋이 함께 나갔다. 귀가는 오후4시경이었다. 쫑파티는 호텔에서 트위스트 경연대회를 했는데 사위가 호랑나비 한 마리 노릇을 톡톡히 했단다.
오후7시반경에 대전에서 전학수 박사(심천사혈 전문가)가 왔다. 내외가 함께 대전에서 심천사혈연수원 일을 하고 있는데 전박사는 53세, 부인은 49세란다. 전박사는 현애의 회갑 시에 순애랑 토론토까지 동행하여 현애내외를 치료한 적이 있다 한다. “그때부터 꾸준히 사혈치료하였으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을 어찌 이토록 병을 길러 가지고 오셨나요?”, 라고 하면서 전박사는 현애의 손마디마다 뭉툭하게 된 류머치스를, 사위의 腎臟에 대한 사혈을 받았고 나는 귀가 좀 안들리게 되는가... 싶어서 청각혈 사혈을 받았다. 두렵고 아팠다. 순애는 “아이구 저토록 끈적끈적한 어혈이 나왔으니, 점점 잘 들리게 되실 거에요”라고 하니 그렇기만 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아프더라도 이 치료를 몇 번 더 받으리라, 마음 먹었다. 유교수는 그림구경을 하는 전박사에게 느닷없이, “어머니 그림 중 마음에 당기는 것 있으면 하나 고르세요”, 하였고 전박사는 “아까 도라지꽃 그림을 봐두었는데...”, 하면서 두리번거리며 그림을 찾는 것이었다. 그 도라지꽃 그림은 3호 소품으로 아직 표구도 안한 것이어서 선물로 드리기엔 너무 소하다. 현관에 걸어 두었던 <여름국화와 찻잔> 액자를 선물하겠다 하니 좋아하신다. 이 그림은 인천시 동구 예술인협회전에 출품했던 것으로 화려하고 품위있는 그림이어서 오늘 수고해주신 답례로 제격일 것이다. 밤 10시에 우리는 집 바로 아래 있는 고향냉면 식당에 가서 냉면과 만두를 전박사 내외에게 대접하였다. 뜻밖에, “아 시원하다. 맛있다, 김치가 참 맛있네요”라며 드시고는 인천에 사는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겠다며 황황히 출발하였다.
2010년 8월 1일 (일요일):
승진엄마의 극진한 솜씨로 조반을 대접받고 순애차로 집을 나섰다. 오늘부터 긴~ 여행을 한다고 한다. 넷째사위 김장군도 화평동에 도착하여 함께 움직였다. 주일아침예배 시간이 한시간 가량 남았기에 우리는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을 먼저 보고 교회에 가기로 하였다. 화도감리교회 임용혁 목사님의 주일설교는 이사야서 28장을 토대로 한 <그날>이란 제목의 말씀이셨다. 믿음으로 인내하며 살면 그날이 온다, 하나님께서 잘했다 칭찬하실 그날. 말씀 중간중간에 아멘하며 감동을 표한다. 예배 후 교회에서 성도들 모두 함께 국수를 먹고, 우리는 김포 고척교회로 향했다. 나의 사촌중 가장 막내인 박정신 극동방송 상담실장과 그 부군 우광덕 박사(강화문화원장, 치의학박사) 부부를 만나고, 최근 결혼하여 아직 신혼인 둘째아들 우성원,유은희 내외의 인사를 받았다. 결혼선물로는 그림 한점을 선물했었는데, 오늘은 유학중인 미국의 대학에 돌아가면 보라고 나의 책 <사랑의 육아일기> 한권을 주었다. 우리는 다같이 강화도 우박사네로 갔다. 모두 바다의 NLL전망대로 갔고 나는 정신이와 집에 남아 얘기를 하면서 그집 마당의 도라지밭을 그렸다.
저녁무렵 귀가한 일행과 함께 박씨네 조카들이 경영하는 마라칼슘온천을 지나 큰 복요리 전문점에 가서 맛난 별미로 저녁식사를 했다. 원래 계획은 오늘 밤 송암 기념사업에 대해 얘기도 할겸 우박사 집에서 1박할 계획이었는데, 현애가 눈짓을 하며 ‘김장군이 화가 난 것 같아요, 서울로 가겠다는데요', 하니 저절로 출발하게 되었다. 내일 아침 일찍이 교동과 강화를 연결하는 다리공사의 진척상황도 보고 남쪽의 여행지로 가려던 계획을 바꾸고, 또 나는 사촌동생 정신이와 밤새 만리장성을 쌓으려던 꿈도 접고, 두 딸사위와 함께 차에 올랐다. 밤중이지만 화평동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강화읍에서 김장군은 혼자 내려서 고속버스 편으로 서울로 가기로 하고 우리는 화평동에 돌아왔다.
순애는, “내일은 연대와 이대를 돌아보고 큰아버지댁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남대문시장 안경점에 맡긴 안경 찾고 양수리 찜질방으로 갈 계획입니다. 그런데 나는 제천 한방엑스포 관계로 제천을 다녀와야 하므로 중간에 헤어졌다 다시 만납니다”, 하였다. 화평동에 도착한 시간이 밤11시반, 씻고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2010년 8월2일 (월요일):
아침6시반에 넷이 차에 올랐다. 유교수는 새벽4시에 일어나는 사람이어서 벌써 PC방에 가서 인일여고 총동창회 홈페이지에 올라온 정보화교육 쫑파티 사진과 동영상을 보았다며 싱글벙글 그 재미를 전하는 것이었다. 박광선 원장(현애의 친구)이 모임의 유일한 남자참석자인 둘째사위를 붙잡고 입에는 노란 꽃을 물고 춤을 춘 이야기에 나도 그 사진들을 보고 싶어진다. 현애는 “난 밤낮이 뒤바뀌어 하나도 못 알아듣고 졸기만 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남편) 나가서 피리를 불고 춤도 추고 잘 놀더군요” 란다.
이른 아침 7시반, 아범이 공부했던 연세대학 캠퍼스에 도착하여 돌아보는데, “여기가 이렇게 변했구나, 저 건물은 옛날 그대로네” 하며 추억을 되살린다. 순애는 연세대학이 인천송도신도시에 1학년을 위한 캠퍼스를 새로 마련할 만큼 신촌의 캠퍼스는 현재 터질 지경으로 좁다는 보고를 해주었고, 세브란스병원은 너무너무 커져서 이제는 세계에 병원을 수출하기도 한다는 것도 알려주었다. 아범은 “난 해병대에 입대하느라 대학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어”라며 씁쓸한 옛이야기를 들여주었다. “새벽이라 이 정도지 얼마나 복잡한지 말도 못해요! 외국인 학생들도 수천명일걸요”‘ 유교수는 연대 동창회관도 가르키며 알려주니, 그곳에서 연전에 시각장애우 학생들이 <송암>연극을 공연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우리는 연세대학교에서 나와 이화여자대학교 후문 쪽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아침 8시, 아직 학생들과 직원들이 등교하지 않은 이른 시간이다. 차를 주차하고 오겠으니 휴게실에 들어가서 뭘 좀 드세요~라기에 따듯한 차 한잔씩 마시고 화장실도 사용하였다. 밖에는 안개처럼 비가 내리고 있었는데 한참만에 휴게실에 돌아온 유교수는 ECC라고 유명한 구조가 서울시 건축상을 탔다기에 알아보니 바로 이 밑 지하6층 구조물이네요! 이화 캠퍼스 콤플렉스라는 ECC구조를 구경하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놀라운 일이에요! 고려대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할 때, 운동장 지하에 큰 주차장이 건설되었다고 하더니 이대는 지하 6층건물이 주차장과 강의실, 상가 등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네요 라며 감탄에 감격을 더하는 것이다.
“우리 ECC 보러가요” 하면서 현애는, “한국에 전쟁이 날지도 모른다고 걱정하고 왔는데, 그 소문과는 달리 평화스럽고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네요, 놀라와요!“ 하는데, ECC는 과연 놀라웠다.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화장실도 기웃거리며 보니 이른 아침인데도 학생들이 골똘히 자기 일에 몰두하고들 있었다. 이화대학원은 남녀공학이란다! 남학생들도 캠퍼스에 보이고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학생도 있다.
아침10시가 넘었기에 우리는 황급히 등촌동 큰아버지댁(유영희 장로님/문운란 장로님 댁)으로 향했다. 유장로님은(1916년생) 95세, 문장로님은(18년생) 93세 고령이신데도 건강하시고 눈에 기운이 넘치신다. 귀국인사를 드리니, “용타, 손주가 3형제야? 에구 손주들 돌보느라 애쓰누나. 난 숨만 쉬고 있어. 다 죽은거야. 난 할렐루야 기도원 물을 바르며 믿습네다, 아멘 하며 산단다. 교인들 중에도 기도해 달라면 기도해주곤 한단다. 냉면준비 했으니 먹고 가라.” 성룡 부부가 노부모님 모시고 지내는 모습이 좋다. 큰아버지가, “빨리 개오지 뭐하냐”, 라고 고함을 치시니 큰어머니가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나가시더니 냉면이 준비되었다. 오늘 아침 조반을 제대로 안먹었으니 11시에 먹는 냉면은 아점으로 너무나 맛나다. 후식은 삶은 옥수수를 대접하시며 싸주기도 하신다. 할렐루야 기도원 생수도 PET병에 3개나 주셔서 받고 우리는 길을 떠났다. 유교수는 제천 한방엑스포 관계로 제천행을 하였고 우리 셋은 성룡의 차로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보는 한강변 아파트들은 아름답고 도로는 차로 붐비니 자랑스러운 정경들이었다.
남대문시장은 그야말로 사람많고 물건 많고 정신이 없었다. 더워서 모두 헐떡 대고 있었다.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이런 북새통에 온 셈이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걷는 형편이니 유교수 없이 내가 길안내를 맡은셈이라 난감하다. 우선 안경점에 가서 맡겼던 안경을 찾고 다음 힐튼호텔에 있는 현금기로 외국통장의 돈을 꺼내는 일을 했다. 카나다에서 온 시골 노부부라 할 딸사위는 남대문시장에서 살게 많다고 북새통 속으로 들어갔다.
하나은행 앞에 벤치가 있기에 나는 거기 앉아 두사람이 사무를 다 보고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시장 속으로 사라졌다. 유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대문시장에서 볼 일을 다 보면 중앙선 전철로 양수리 국수역까지 온 다음 택시로 국립영화제작소를 지나 리버팰리스 찜질방에 와서 찜질을 하면서 만나자 하였다. 자기도 제천 일을 다 본 후 그리 오겠다는 것이다.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을 보고 있으려니 윤시온 목사님이 오늘 서울에서 일을 보신다고 하던 생각이 났다. 전화를 거니 마침 시청 인근에 계시다고 하며 남대문시장 앞으로 와주어서 반갑게 만났다. 양수리행이 염려되는지 순애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윤목사님께 전화를 건네니, 알아들으시고 양수리까지 전철로 잘 가시도록 태워드리겠다 약속하시는 것이었다.
자동차에 앉아 고속도로를 달리니 고속도로 정경도 신기하셨던 듯.
지도에 가는 길에 해남 녹우당에 들어, 윤두서/윤선도 등의 그림과 고택을 구경했구요
해남 두륜산 유선관에서 1박하면서 만남 저녁상은 남도의 식사대접다웁게 참 대단했답니다.
그리고 지도에서 만난 염전과 함초밭~~
부산에서 볼일 본 후에는 불국사를 들렀죠~
대단히 아름다워요!
그리고는 중앙선을 달려 춘천으로 행했습니다. 안개와 비를 고속도로에서 만나니, 예예동산에 도착할 즈음에는 쌍무지개가 떴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을 손끝으로 그리시고
마음으로 느끼는 세상을 손으로 기록을 남기시는
8학년 8반 박정희할머님의 부지런함...
5학년 6반은 그저 부끄럽습니다.
일기 내용 중에 정보화 교육 이야기가 여러번 나오네요
이 모든 것이 따님 유순애선배님의 손을 통해서
또 한번 피어납니다.
종심언니께,
연전에... 3유현애언니가 회갑이던 생일에 축하전화를 하니, "그런데, 난 아파"라기에
대체의학을 공부하는 저는 무조건 연수원장님(내게 대체의학 실습을 가르쳐 주는 분)을 납치하여
토론토에 갔었습니다. 그때 언니는 부황사혈 등 무서워 하고, 효험을 믿지도 않았어요.
이번에 왔을 때 손가락 마디마디가 장독의 허리처럼 울퉁불퉁 굵어진 언니 손을 보고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하는 공부로 기필코 치료해 보고저 합니다. (현대의학으로 관절염치료는 어려우니...)
조금씩 좋은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도해주시고요 (언니랑 마라톤식 장거리인생경주하기로 했습니다. 늙어 죽을 땐
태어났을 때처럼 병없이 이쁘게 만들고 가자고- 그때까진 모든 병을 다 없애야만 함다)
밀알학교는 유명한 장애자학교라는데, 저도 인터넷에서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찾으면 여기 올려드릴께요.
???8학년 8반.
이일기가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되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그 때까지도 감성이 살아서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시고
글을 쓰실 수 있으시다니, 얼마나 훌륭하신지 .....
이렇게 훌륭한 어머니를 가진 순애가 무척 부럽구나.
우리 모두 우리 얘들에게 훌륭한 부모로 기억 될려면
더 노력 해야겠다.
여행을 하시고 여기저기 다니시기도 힘드셨을 텐데
이렇게 글과 그림으로 남기시다니, 순애 어머님에 대한 존경심이 샘솟네요.
어느 가족이 있어 순애네 흉내를 낼 수 있을까요?
부지런한 순애, 넘치는 힘은 어머니로부터 받은 선물이 맞네요.
모든 것이 놀랍지만 순애가 그 중 제일 대단하게 생각돼요.
그렇게 새벽부터 일어나서 언니와 형부를 모시고 곳곳을 다 다니고
모든 것을 경험하게 하는 순애의 형제애와 효성이 제일로 놀랍습니다.
대단하다 순애야. 넌 정말 멋진 여자야.
염주쌤~~
<엄마와 딸>로 만나다....
<언니와 동생>으로 만나다.
우주에 이런 인연이 있나.... 최선을 다하여 좋은 만남이 되도록 해야죠.
그리고보니 우리도 소매끝을 6년이나 부딪고 살았네.....(그후 잇대어 34년도! 계속)
전영희 싸부 아랫글에서 보니... <나는 어떻게 생겼나, 아 내게 이런게 있었네> 나도 열심히 파악하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만남이 허락된 분들, 귀한 이분들이 가진 존점 보는 눈도 밝게 늘 닦고요)
그런데 <나는 좋은 딸인가?> 대답에, 나 자신은 비교적 점수를 후히 주지만, 엄마는 엄마자신이 딸로써 받은 점수보다는
내게 박하게 주실 듯. 즉, 어머니는 딸로서 분명, 대단히 좋은 딸이셨음
유순애 선배님 !
8학년 8반 제목을 읽고,한국에 초등학교 가
바꿔졌나 ? 했지요.
사랑스러우신 어머님 글 잘읽었어요.
그림도 아주 잘봤어요 .우리엄마 생각 하면서요.
휴가 받아서 부모님 방문했을때. 우리 엄마 ,잠시도 저와 떨어지기
싫어서 제 뒤를 종종 따라다니셨어요.
어머님이 아직 계셔주시니 , 얼마나 감사할까요?
박정희 할머님의 여행기 아주 재믿게 읽었습니다.
여행기를 보통 글정도로 쓰지만 이렇게 여행기를 예쁘게
그림으로 보여주시니 너무나 부럽고 88 연세에
정말 대단하시다는 생각이람니다.
만수무강 하세요!!!
어제밤에 답글을 드리다가 날리는 바람에,,,
아니 88세에 이토록 정교한 기행문을 쓰시다니 대단하십니다,
타고난 기록가이십니다,
그 바쁘신 삶속에서 자식들 각각의 육아일기를 챙겨두시던 그 열정이
조금도 퇴화된 기색이 없으시네요,
그 여행일정에서도 지치시는 기색이 없이 또 다음날 새벽 여섯시에 여전히 함꼐 나서시는,,,,,
하하하하 그 노시는데는 안 빠지신다는 할아버지(현애버젼)꼐서 장모님 그림속에
피리부는것으로 박히셨네요,,,
우리에게는 다 건성으로 보이는 일상이 박정희어머님꼐는 다가 그림으로 환생되네요,,
참으로 대단하시지만, 또 그 열정이 그분을 그리도 건강히 사시게 하시나 봅니다,
우리 모두에게 참으로 훌륭한 귀감이 되십니다,
또한 따님하나 잘두셔서 더 꽃이 피시네요,,,,,
유 순애 선배님!!!
1972년도 처마 끝에 고드름이 주렁 주렁 매달리던 겨울날.
신포동의 이 현숙과 우리4명의 친구들이 선배님께 수학을 배운적이 있지요.
그때 당시 선배님댁에 가는 날마다 반갑게 맞아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은 참으로 지적이셨기에
아직도 생생히 제 가슴에 남아있으시죠.
지금 생각하니 여~~~~ㄱ시!!!!! 그런 분이셨군요.
연세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림까지 남기시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선배님가족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양수리 찜질방에 모시고 갔는데, 어머니는 강가에서 그림을 그리시고
형부는 장모님 옆에서 피리를 부시고.... 어머니는 또 그 모습을 그리셨답니다.
대전의 넷째딸 연구실에서 가서는 아름다운 갑사 구경을 안할 수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