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한선민
지난 일요일,
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 중 세 명인
김기복,박정님,조춘순과 만났다.
오랫만에 만났어도 바로 어제 만난 듯
허물없고 부담감 없이 반갑기만 하다.
셋 모두 손자나 손녀 둔 할미들이나
그 날은 그 걸 의심할 정도더라.
바로 40여 년 전 옛 모습들을 여지없이
발휘하는 게 아닌가!
인천역에서 만나 차이나 타운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거리로 나와 이런 저런 얘기로 히히덕 거리며 거닌다.
가게들 기웃거리다 아무렇게 담겨겨 있는 길가 노점에
내놓인 옥반지 바구니에 시선이 쏠리자
저마다 이것 저것 만지작 거리며 번갈아
손에 껴보며 웃기를 그치지 않으니
옆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던 여주인도 재미있는지
연상 같이 웃어주며 손님 놓히지 않기에 열중이다.
드디어 손가락에 맞는 게 없어 춘순이만 빼고
타이완 제라는 싸면서도 괜찮은 옥반지들
손에 끼고 좋아들 하는 걸 보니 마냥 천진스럽다.
다음 코스로 달동네 수도국산 박물관으로 옮긴다.
60,70 년대의 달동네 수도국산 관람하는 내내
타이머신 타고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 든다.
관람하며 <어머나 어머나 !>의 연발이다.
가볼만한 인천의 명소로 꼽히기에 충분하다 본다.
수도국산에서 보니 인천 시내 시야에 들어오고,
다듬어진 산보길에 공기도 맑고, 여름철 시원하겠다 싶다.
박물관의 달동네와 크게 다를 것 없이 보이는 송림동인지
아니면 송현동 골목 거리에서 나오니 현대 시장이
눈에 뜨인다. 구경하자 들어가 보니 일요일이라
쉬는 데가 많아 허전해 보이는데 할머님이
영업하시는 코너가 보이자 그리로 가서 자리 잡는다.
헤어지기 섭섭한데 김치전에다 막걸리라도 마시잰다.
옆 쪽에 자리잡은 중년 남자들이 우리를 힐끗 쳐다본다만
이 나이에 꺼릴 필요야 있겠는가?
막걸리 한 공기 마시더니 모두 시원하댄다.
<이 좋은 세상이 또 어디 있을까?>싶은 생각까지 든다.
흥겨워 하는게 너무 꾸밈없어 그저 흥겹기만 하다.
오래 지난 세월로 우리의 겉모습 변했을 지언정
우리의 우정은 변치않고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가?
세 가지 오랠수록 좋다는 게 우정, 바이올린, 포도주라는데
맞는 말이다.
이종심 선배님~
선배님의 글을 읽으면서 40년가까히 떠나온 인천에 향수를 느꼈습니다.
선배님께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수도국산에 대한 글이 있어 올려볼께요.
인천출신 오기철님이 2009년1월 29일자 적은글에서...
수도국산의 어제와 오늘
행정 구역 상으로는 송현동에 속하는 이 곳은 예전에 송림동과 송현동 사이에 솔고래라는 언덕이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큰 갯골이 내륙 깊숙히 이어진 수문통 지역이었다.
이곳은 원래 만수산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나,
1910년 12월 1일 수돗물 저장탱크를 갖춘 수도국 배수지를 산 정상에 개설하면서부터 수도국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후 1938년과 1940년 두 차례의 해면 매립 공사로 산 아래 저지대가 형성되었고
1950년대말 공작창(기차 제조 및 수리를 하던 곳. 구 조선기계) 설립과 함께
수문통 하천을 통해 다양한 물자들이 들어오면서 노동자들의 집단 거주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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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대표적인 영세민 주거 지역으로 알려진 수도국산은 최근 개발 열풍에 휩싸여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달동네의 끈끈한 인정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옥인 후배님 안녕 하세요?
댓글로 초면이네요.
올려 주시는 수많은 글과 사진들
보며 대단하시다 생각하며
지금껏 얌체같이 눈팅으로만 즐겼군요.
40년 가까이 고향 인천을 떠나셨다면
저만큼 오래 됐군요.
글을 통해 오지리 비엔나에 살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죽 거기서 살고 계시나요?
전 66년도 고교 졸업 후 도독하여
본에서 여짖껏 살고 있지요.
작년 퇴직하여 가을에 와서 아직
머믈고 있는데 4월 말 독일 가서
여름 지내고 가을에 다시 올 예정이랍니다.
반가워요.
다음 한국 오시면 수도국산 박물관
꼭 가 보세요.
예~반가워요 선배님,
서면으로 만나지만 그간에 저도 선배님을 홈피에서 자주 뵈어서
낯설지가 않어요.
저는 이곳에서 계속살 것같아요.
한국에 어르신네들이 안계시니까 자주 안 들리게 되고요...
그래도 다음에 한국가면 인천을 두루두루 다녀볼려고요.
요즘 홈피보면서 잊었던줄 알았던 기억이 되살아 나네요^^
Bonn은 여기서 대학 공부할때,
베토벤 논문쓰며 그옛날 문헌을 두루두루 읽으면서 친해졌지요.
베토벤의 두번째 비엔나방문이 하이든에게 음악공부하려던 원래 계획이었는데,
영원히(f?r immer..) 머물게 되었다는 전기를 보면서 동감하였었지요.
살다보면 계획대로 삶이 이어지는 것은 아니잖아요..
라인강을 떠올르며 비엔나 숲에서 '전원교향곡'을 썼답니다..
저처럼 고국을 떠나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사연을 대하면 더욱 감동하게 되지요.
35년간 비엔나에서 살다가 삶을 마쳤지요.
선배님도 인생의 반이상을 독일에서 지내셔서
독일 가시면 고향기분도 드시겠어요.
건강히 독일여행 다녀오시기를 바래요.
어쩐지 음악에 무척 조예가 깊으시다
생각하고 있었지요
아직 본에는 안 오신 것 같은데
오실 기회 되면 제게 연락하세요.
만일 베토벤이 작은 도시 본에
머믈렀다면 그처럼 위대한
음악가가 될 수 있었을까요?
들은 얘기로 그 당시 베토벤 장례식 때
학생들도 장례식에 참석시키기 위해
빈에 있는 학교들이 휴교였다 하던데요.
장례식 광경을 그린 그림이 본에 있는
그의 생가에 오시면 구경할 수 있지요.
Bonn에는 동서베를린 장벽이 열리기전 행정수도였을때 잠깐,
그리고 논문쓸 때 다시한번가서 베토벤 관련된 곳을 샅샅이 ^^돌아 보았었어요.
오스트리아 여왕 마리아테레지아의 막내 아들 막시밀리안 후란츠가
(Maximilian Franz, Kurf?rst und Erzbischof von K?ln)
쾰른 성당 대주교이며 레지덴츠를 본에다 두었었으며
1784~1794까지 뮨스터(M?nster)의 주교까지 겸했었으니까 ,
18세기의 흔적이 아직도 있더라고요 ^^
당대 엠마누엘 칸트의 계몽철학에 심취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었는데
특히 본 아카데미를 본대학으로 승격도 시켰고요....
누나 앙트와네트의 부르봉 왕조의 붕괴되는 시기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황가가 정치적으로 심각해지면서
그 대주교님도 다시 본국인 비엔나로 돌아왔지요.
그 주교의 후원으로 주교의 고향인 비엔나 유학을 하게된 것을 감사해서
베토벤이 그 대주교님에게 "솔렘니스 미사곡'(Missa Solemnis) 을 헌정하였지요(음악사에서 종종 언급되는 내용)
아무래도 제가 비엔나에서 공부를해서 이쪽과 관련된 것을 언급하네요...이젠 Stop할께요~~
Bonn 측에서는 다를수도 있겠지요? ㅎㅎㅎ
비엔나에 있는 베토벤 장례식 성당이 제가 사는 집에서 전차로 2정거장...
도보로 10분이면 갈 수있는 곳에 있어요.
혹시 선배님께서 비엔나 오시게 되면 연락주세요.
제가 그곳 안내해 드릴께요^^
인천 수도국산 박물관은 인테넷 뒤져서 많이 보았어요,
연탄쓰던 시대가 보이는데 코가 싸아~하니 연탄냄세가 나는 듯하기도...
세월이 참 많이 지났구나 싶어지더라구요.그 동안 한국이 무척 발전했지요.
담에 인천가면 꼭 가볼려고요.
그날 세 친구들 만나서 달동네 수도국산도 가보고 옥반지도 끼워 보고
이리저리 다니며 즐거운 예기와 김치전과 막걸리로 정말 재미 있었겠다.
그 세 친구들 정말 졸업후 종심이 덕에 처음 보는구나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옛 모습은 그데로 이네. 소식 감사하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