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 홈피에 들어갔더니  내 친구  S가  사진 한 장을 올려놓았다.

그녀의 옥상에서  빨래줄에 시래기를 널고 있는 모습이  둘러선 아파트를 배경으로 하여  대조적인 모습으로 들어오고있었다.

시퍼런 무우청들이  그녀의  건강해보이는  팔뚝을  연상하게 해주었고  돗자리에 가지런히 누워있는 호박들이 마치  길가에 핀 들꽃들처럼  아름답다.

 

음악을 전공한 그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피아노학원을  수 년간 하더니  이제는  교회에서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지휘자가  되었다고 한다.

어느 날 옥상딸린 집으로 이사하고는  우리 친구들을 불러  고기를 구워먹자고 하였다.

"얘들아, 나는 이 옥상이 너무 좋단다. 여기서  이불 빨래를 말릴 때면  참으로 행복하지."

 

그 날 밤 우리는  옥상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 도시 한복판에도 뜨는 별들을 바라보며  여름밤을 즐겼었다.

고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창문을 열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우리는 하늘을 바라다보고.

 

빨래줄에 널린 시래기를 보니 이민오던 날이 떠올랐다.

유난히도 시래기국을 좋아하는 나는  이민 가방을 싸면서  그 것들을 넣어오려고 생각하였었다.

그 해 겨울 김장을 하고 남은 무우청들을 말려놓은 것이 있었는데  이민을 오기 전 겨우내  국을 해먹고도  남은 것이 좀 있었다.

남편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나의 계확은 무산되고 말았지만......

 

지금도 한국마켓에 가서 좀 시들시들한  무우청을  보면  꼭 사가지고 오게된다.

 

사진 속에서 구수한 된장냄새를 맡은 나는 어느 덧 나의 어린 시절의 뒤뜰로 걸어들어가고 있다.

넓다란 앞마당과 연결된  뒤뜰에는(어린 시절 우리는 그 곳을 "뒤란"이라고 불렀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황해도에서 피난오신

아버지의 고향 사투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줄에 매달린 시래기가 널려있었다.

 

시절로는 가을이 온다는 "입추"가 벌써 지났지만 우리는 아직도 나무 그늘을 찾아 공기놀이를 즐기고있을 때,  부모님은  김장 씨앗들을 준비하곤 하셨었다.

어린 마음에 아직도 이렇게 더운데 김장은 무슨 김장?

 

의아해하는 나의 이런 느낌은  텃밭에서  씨앗들이  싹잎을 띄우는 날   환호성을 지르며 그 의심의 조각들이 사라지게된다.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 고추잠자리가 날아오면   학교에 갈 개학날이 가까와지고 머지않아 겨울이 온다는 것을 어린 마음에도 느낄 수 있었다.

 

연초록의 연하디 연한 싹잎으로 올라오던  두 이파리가 어느 날 가보면  네 잎이 되고  자꾸 옆으로 퍼져나가면서 진초록의 건강한  얼굴로  아침인사를 하며  다가온다.

노오란 속이 꽉 차면서 올라오는 배추를  아버지는  가느다란 새끼줄로 묶어주시고  땅 위를 박차고 맨살을 드러내며 허리까지 올라오는  무우도 가지런히 묶어 주시곤 하셨었다.

 

김장을 하기 위하여 부모님이 무우, 배추를 거두어 들이실 때 에는 우리 삼 남매도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밭으로 나가서 심부름을 하면서  달리기 놀이도 하면서 그렇게 흙냄새를 즐기곤 하였었다.

김장 속을 준비하시며 무우를  채칼에 가시는 어머니 곁에서 남은 무우 조각을 얻어먹기도 하고  고추 가루를 버무리시는  한 쪽에서 연신 재채기를 해대면서도 우리는  마냥 즐거웠었었다.

 

어머니가 이렇게 집 안에서 김장 준비를 하실 때 아버지는 마당에서 남은 무우청들을 새끼줄에 엮고 계셨다.

마치 굴비를 엮듯이 한켜, 한켜 씩 매달린 무우청들을  아버지는   뒤란으로 옮겨 지붕 아래  대롱대롱 매달아 놓으신다.

 

겨울 바람이  몹시 부는 저녁이면  시래기는 "서걱서걱" 소리를 내다가

눈 내리는 저녁이면   '사각사각"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겨우내 어머니는  시래기를  넣고 멸치 된장국도 끓여주시고  어쩌다 운이 좋은 날에는  뼈국물에 우린 시래기국도 해주시곤 하셨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시래기국을 참 좋아하였지만 국보다 더 좋아하였던 것은 "시래기 무침" 이었다.

설날이 지나고   대보름이 오면  어머니는 가으내 말리셨던 여러가지 나물을 무쳐주셨다.

호박 나물, 가지 나물, 고추잎 나물, ...

 

어머니가 여러가지 나물을 따뜻한 물에 불리실  때면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었다.

저렇게 볼 품없이 말라빠진 저 것들이 무슨 반찬이 될 수 있는 것 일까?

그래도 다른 것들은 그나마 본래 그대로 지니고 있지만  시래기는 마치  그냥 버려진 "쓰레기" 같았었다.

 

가끔 동생들은 장난삼아  나를 놀리곤 하였다.

우리 누나는 "쓰레기국을 좋아한다고......"

 

친구가 올려 준 사진을 바라보며 오래 된 추억 속으로 여행을 하고 돌아오니 마음이 촉촉히 젖어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래, 오늘 저녁은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