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3일전,
선생님의 황망한 소식을 전해 듣고
동행도 없이
그 먼길을 어이 홀로 가실까
걱정에 눈물을 훔쳤습니다.
여고시절,
하나라도 더 가르쳐 주고싶어 하시던 선생님의 칼칼하고 단정한 목소리가 귀에 쟁쟁한데
"하라하라" 해도 머리가 나빠 늘 따르지 못한 것이 죄송할 뿐입니다.
공부는 못하고, 걱정은 되고 수업시간 중 눈이 마주치면 시킬까 봐 고개만 숙이고 있던 영어시간...
참으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내 마음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이
"너 왜 그렇게 공부를 안하느냐" 하고 꾸짖었을때
"정말은 저 정말 영어가 싫어요" 라고 했더니,
"그러면 영어 선생님은 좋아한다 생각하고 해 봐" 하시길래
"저 선생님은 더 무서워요" 라고 대답을 드렸더니, 또박 또박 대꾸하는 내가 한심한지 박장대소 하던 선생님......
"산학아, 너 하루에 세대만 매일 맞을래"
정말은 선생님은 우리 송림동에 같이 살고 계셔서,
우리 집에서 가을고사를 지내면 선생님댁에 갖다 드리고는 했지요.
그런저런 이유로 가끔 선생님의 도시락 심부름도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쩌다 하교길에 선생님과 함께 집에 가기도 했지요.
그때 제가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학생 한명 한명을 자세히 알고 계셔서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친구들은 선생님이 공부 잘하는 아이들만 좋아한다는 등 말이 많았지만,
절대로 그것은 선생님에 대한 편견이지
선생님은 알게 모르게 우리 모두를 챙기며 염려하고 계셨습니다.
40년이 지난 어느날, 우리 7기 모임에서 어느 친구가 말하더라고요.
집에까지 최광만선생님과 같이 버스를 타고 오면
선생님이 산학이 버스비만 내 줘서, 무척 섭섭했다 라구요.
그 말에 내가 말했지요.
그것은 다 오해라고요.
선생님이 무슨 돈이 있어 학생들 차비를 다 내주겠니?
그런데 나는 선생님이 심부름도 자주 시키니까 모른척 할 수가 없었던 거라고.
기억에도 없는 그런 사소한 일이,
어떤 친구에게는 두고두고 평생 잊지못할 야속한 사건이 되기도 했나 봅니다.
그리고 한번은
서울에서 이사와 주안에 자리 잡았을 때 동네 치과를 가서는 깜짝 놀랐습니다.
원장선생님의 목소리가 최광만 선생님의 목소리와 꼭 같았기 때문이지요.
내가 벌떡 일어났더니, 무슨 일이냐고 묻대요
그래서 우리 영어 선생님인줄 알았다고 하니까
웃으면서 제가 그 아들입니다 라고 하더라고요.
최길수 원장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그 옛날 선생님께 야단 맞던 기억이 자꾸 떠오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가요?
옛날에 그 꼬마가 의사선생님이라니...
그날 최광만선생님과 통화를 하며
"선생님 찾아 뵙겠습니다" 했더니 이렇게 소식들으면 됐지 하시며 쓸쓸해 하던 선생님........
그 때 선생님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요?
"여학생들 가르쳐봤자 은혜도 모르고 다 소용없다" 하셨을까요?
아니면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다들 잘 살고 있겠지" 하셨을까요?
얼마 전엔
사모님의 부축을 받으며 병원문을 들어 가시는 뒷모습을 보고도 뛰어가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선생님이 많이 약해지셔서 모습을 보이기를 꺼려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지요.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분이신데
내가 인사를 드리면 마음 상하실까 뒷모습만 보고 또 보고 돌아섰지요.
그것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이야.......
죄송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호된 꾸중과 가르침으로 이만큼 자란 제자가
이제 선생님이 가시고 나서야 그간의 소홀함을 뉘우칩니다.
최광만 선생님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던 인일여고,
그 교정이 오늘따라 무척 그립습니다.
이제는
이 세상의 모든 번뇌 다 내려 놓으시고
가시는 길 편안하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칠판 가득히 ,
영문법이나 영어문장을 써 내려 가시는동안 실컷 잠을 자는
나를 보고 왜 영어 공부를 안 / 못?하냐시며
i.q까지 들먹이시며 그 머리로 왜?
제가 시집가서 밥하고 빨래하면서
영어문장에 영문법 쓸 일 없다하니
야! 이놈아,외교관부인 되면 어쩔래?
선생님 찿아 오셔서 나 공부 못했다고 하실까봐요.
대학3학년때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여행갔을때,
아이고, 선생님 말씀 들었을껄..
캐나다 이민와서는 가슴을 쳤내요.
졸업30주년때는 선생님 뽈에 찐한 키스마크를남겨 드렸는데...
선생님 사랑 우리 모두의 마음에 여울집니다.
주님!
선생님의 생전의 수고와 노력을 기억하시고
당신 품에 편한 쉼을 주시옵소서.
삼가 선생님영전에 조의를 전합니다.
용순아
너의 기습적인 진한 볼키스에 당황해 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생생하다.
왜 그 시절엔 그렇게 죽어라고 말을 안 들었는지....
그래도
용순아 선생님이 너를 얼마나 대견해 했는지
알고 있지?
지금은 산학 님이 그린 그 모든 것이 우리네 또래가 아련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은 기억들이지요.
우리 학생시절에는 그렇게 가끔 참 인생을 살면서 항상 선생님으로 저만치 앞에서 그리워지는 분들이 계시지요.
당시 선생님의 연세가 지금의 산학 님의 나이보다 아래였을 텐데 나이 먹고 되새겨보아도
그 분이 답답하거나 유치하고 부족해보이지 않고
늘 항상 나보다 어른으로 기억되는 분들! 사실 그런 분들이 많지는 않잖아요.
영어를 못했다는 산학 님의 말을 제가 액면 그대로 믿는 선에서 가장 자신 없다던
바로 그 영어를 가르치던 선생 님과의 추억이 아름다운 동화 같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33살정도의 젊은 모습으로 씩씩하게 저 다른 세상으로 걸어가셨을 거에요.
용상욱님
그 당시 선생님 나이가 40대 초반이 맞네요.
지금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려운 나이에 여학생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으니, 쉽지 않은 교사생활에 어려움도 많으셨겠네요.
한번은 창영동 막걸리 공장을 지날 때입니다.
술 찌개미 "모주"의 달디단 냄새가 진동해, "아, 맛있겠다" 하고 입맛을 다셨더니
"먹고 싶으냐?" 하더니 웃으시더라고요.
훗날 소풍날 선생님께서 선생님들 모인 자리에 저를 부르시더니
막걸리를 따라주며
"저 녀석이 막걸리를 아주 좋아해요"해서 저를 당황케 하셨지요.
겉은 차가와도
속정은 깊으신 분임을 그 때 알았지요.
용상욱님의 답글을 읽다보니 정말 동화 같으네요.
산학아, 넌 친구도 많은데 친한 선생님도 많았구나.
네가 주는 인상이 '호감'인 건 확실해. ^ ^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세세히 기억하고 그리워해 주는 제자가 있으니
흐뭇한 웃음 웃으며 가셨을 거야.
실은 난 최광만 선생님에게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 아무 기억이 없단다.
속정이 깊다는 인상은 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공감도 안 가니 댓글이 어렵네.
도산학 선배님이 돌아가신 선생님을
추모하며 잔잔히 써 내려가신 글에
마음을 내려 놓습니다.
진솔하게 당시를 그리시고
영어에 알러지를 일으키셨다는
말씀에 미소지으나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겠습니다.
겸손의 말씀이겠지요.
대학시절 제가 유학을 꿈꾸며
미 8군 존슨부인한테서 영어를 배울 때
웬즈데이 브로큰업 데이라고...
지금 이말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ㅎㅎ
아무튼 종강파티로 그 분 댁에 초대되어 남들은 유창하게
말을 하는데 나와 공대생하나가 먹통이 되어
애꿎은 그 집 세퍼트만 붙들고
"스탠드 업! 씩 따운!" 외치며
말을 시킬까 겁나 밖에서 고기만 굽다
매캐한 연기에 눈물콧물 범벅이고...
영어가 객지에 나와 저 때문에 고생이고...
갑자기 그 때가 생각나 쓴 웃음 짓습니다.
존경하시던 선생님의 부음에 얼마나 슬프셨어요.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윤용혁님
이런 슬픈 소식에 눈물 흘리는 까닭은
제 설움에 겨워 우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제게 말했지요.
이제는 슬슬 우리 차례인가요?
세상을 열심히 살아 온 수고를
우리들이 모를 이 없건만
그 길을 우리도 그대로 따르겠거니 해서 더 가슴 아픈 오늘
천둥까지 동반한
잠깐
가을비가 창문을 때리며 갑니다.
도산학 후배님, 영어라 하면 할말이 많지요.
우리집안엔 일찍 부터 유학파 삼촌들이 계셨지요.
지금 건강하시고 운전도 하시고 하는 친삼촌은 89세
또 외삼촌은 79세 이신데 아주 어렸을때 동네 어른들이 너는 언제 미국가니? 하고 물으시면
네, 이담에 크면 갈거예요 라고 대담하곤 했지만 영어를 중 1년은 재믿게 했지요.
헌데 점점 어려워 지는 영어에 흥미를 잃곤 어느때인가 삼촌한테 편지하기를
저 미국 가고 싶은데요 하니까.
네가 오는 유일한 방법은 유학 시험뿐이니까 그리 해라 그것이 답장 이었답니다.
그래서 그럼 이제부터 준비다 하고 책방에 가서 보기에도 멋지고 두둑해 보이는 책한권
사서 열어보니 한글짜도 이해를 못하여 그날 몇시간을 사전을 찾아 단어를 새까많게
적어놓고 얼마나 한심했던지 휴우 하고 그냥 몇달을 덮어 두었던 생각이 나는군요.
그래서 먼저 윤용혁씨의 글을 읽고 많이 많이 웃었담니다.
이제 이곳에상당히 오래동안 살아왓지만 예전엔 틀리는것도 모르고 영어를 했지만
이제는 말할때 틀리는것을 알고 하니 더욱 한심이지요.
도산학 후배는 정말 선생님들과 인연이 많으시네요. 저는 돌아가신 황연자 선생님이
몇집걸러 옆에 사셨지요. 잠시 같은동네 살아서 특별한 인연을 없지만 그분이
가르치시는 세계사 시간에 흥미는 있으나 짧은시간에 가르치시니 그때 이해못한것을
늧게 이책 저책 찾아 즐겨 보고 있답니다. 영어 이야기로 옛날 이야기를 했군요.
저, 도산학 후배의 글을 너무나 좋아 합니다. 항상 푸근하고 여유있는 글들 정말 좋아 하지요.
김숙자 선배님
감사합니다.
아마 선배님이 멀리 떨어져 계셔서 고국 소식이라면 무엇이라도 반가우실 것입니다.
인천이 많이 변했지요.
저녁이면 집집마다 생선 굽는 냄새가 진동하던
그 골목길에 담긴 옛사람들의 사연이 애달프고
마냥 아름답지만
그 풍경속에 가난함을 알기에 슬픈 인천의 이야기들을
선배님은 누구와 나누시나요?
그럴 때마다 우리 홈피를 찾으시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저같은 사람은 선배님같은 분들이, 모자라도 그런 향수때문에 예쁘게 봐 주시기에 오히려 수혜자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말없이 보아 준다는 사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고가 모교인 저의 남편과 그 친구들은 얼마나 은사님을 끔찍이 여기고 챙기는지요
제가 그것을 보고 느낀 점은
선생님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훌륭하고나 였습니다.
명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선배님
영어 이야기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선배님의 옛날 이야기
고국이 그리울 때면 가끔 들려주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산학후배~
선생님과의 진솔한 추억의 글 잘 읽었어요.
우리 글에 빠져있던 사람들은 영어가 낯설기만해서 미래에 맞을 실용적 이익이고 무엇이고,
어리석게도 이해타산 제로 상태로 영어를 멀리하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지금은 영어를 좋아하시는지? ㅎㅎ
지난번에는 얼마나 재미난 시간이었을까 궁금합니다.
늦가을에 기차에서 보게 될 것 같은 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