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회 | 포토갤러리 | - 게시판담당 : 박화림
9월 / 헤르만 헷세
뜰이 슬퍼하고 있다.
비가 꽃 속으로 시원스레 빠져 들어간다.
여름이 그 마지막을 향해 잠잠히 몸부림친다.
잎 새들이 하나씩 금빛 물방울이 되어
높은 아카시아 나무에서 굴러 떨어진다.
죽어가는 정원의 꿈속에서
여름이 깜짝 놀라 피로한 웃음을 띤다
여름은 지금 잠시 동안 장미꽃과 더불어 잠들고 싶어 한다.
이윽고 여름은 서서히 피로한 그 큰 눈을 감는다.
The Rose Garden at Wargemont (Renoir)
부재(不在) / 김춘수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 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청석(靑石)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없이 세월(歲月)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Oarsmen at Chatou 1879 (Renoir)
가을날 / 헤르만 헷세
숲이 금빛으로 타고 있다.
상냥한 그이와, 여러 번 나란히 걷던 이 길을
나는 혼자서 걸어간다
이런 화창한 날에 오랜 동안 품고 있던 행복과 괴로움이,
향기 속으로 먼 풍경으로 녹아 들어간다.
풀을 태우는 연기 속에서 농부의 아이들이 껑충거린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노래를 시작한다
Monet painting in his garden at Argenteuil 1873 (Renoir)
저녁 무렵의 집들 / 헤르만 헷세
늦은 오후의 황금의 비스듬한 햇살 속에서
집들의 무리가 가만히 타오르고
소중한 짙은 빛깔들 속에서
하루의 마감이 기도처럼 꽃 핀다
서로서로 마음 깊이 기대어 서서
언덕에서 형제자매처럼 자라고 있다
배우지 않았지만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처럼
소박하고 오래된 모습으로
담장들 회칠한 벽, 비스듬한 지붕들 가난과 자존심,
몰락과 행복
집들은 다정하고 부드럽고 깊게
그날 하루의 빛을 반사한다
흰 구름 / 헤르만 헷세
오, 보아라,
잊혀진 아름다운 노래의 조용한 멜로디처럼
푸른 하늘가를 계속 떠도는 흰 구름을.
긴 여행 속에
방랑의 슬픔과 기쁨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흰 구름을 이해할 수 없으리.
나는 태양이나 바다나 바람을 사랑하듯,
정처 없이 떠도는 흰 구름을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자에게
그것은 누이이며 천사이기에.
conversation with the Gardener (Renoir)
멀어져 가는 젊음/ 헤르만 헷세
피곤한 여름이 마침내 고개를 숙이고
호수에 비친 그의 마지막 모습을 들여다본다.
일상에 지친 나는
먼지에 싸여 가로수 그늘을 방황하고 있다.
포플러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그러면 내 뒤로 황혼이 금빛으로 타오르고
앞에는 밤의 불안이 죽음과 함께 온다.
먼지에 싸인 채 지친 걸음을 옮겨 놓는다.
그러나 젊음은 머뭇거리듯 뒤로 밀려나며
고운 모습을 감춘 채 나와 함께 앞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
어디선가 모래바람 불어와 가슴 속 휑하니 들쑤시는 요즘
참 아름다운 시, 음악을 열어주시는군요.
평생 여성 찬미주의자이며 행복을 천착했던
르누아르 그림이 마른 가슴 적셔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