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폭설로 시댁에 가지 못하고~
모처럼 한가한 구정 날,
가족이 함께 보았답니다..
남편이 소띠라서,
더욱 의미(?)를 갖으며 봤죠~~^*^
소와 더불어 가족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던 영화였습니다.
소가 아니라~
그 어느 자식 보다 효심 깊은 가족의 일원이지요~~
인간도~가축도~~정이 깊어 지면~~
말을 하지 않아도
눈 빛만 보아도 소통이 되지요~~
어쩌면 한 수 위일른지도 모를 일이지요~~*^^*
어제도 영화 한 번 보려고 벼르다가 결국은 가지 못했어요.
이사람 저사람 하도 '워낭소리'를 말하길래 보려고 했는데......
시간도 없는 김에 권오인님 글 읽으면서 상상하는 걸로 대신해야겠어요.
그래도 2월 안에 영화관 한 번은 꼭 가야지.
너무 오래 되었거든요.
요즘은 다큐형태의 영화가 돈이 좀 된다 하네요
저도 이런 류의 다큐성 영화가 참 좋더군요
흥행몰이 여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영화가 좀 떳다 하면
그 가족이 일상적으로 살지를 못한다 합니다.
집으로, 맨발의 기봉이, 등등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영화 주인공들의 일상에 대단한 지장을 주고 있다네요.
워낭소리의 노부부가 제발 영화상영을 중지 시켜달라고 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기사보기
노부부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일홈피 출신의 감독님들,
다큐 한번 도전해 보세요. S, L,K,H,J...감독님들.^^
도산학선배님.
5분나오는 영상에 하루 왼종일 한 행동 또 해달라고 하여 반복하는 짓을 해본 적 있어요.
청소하는 장면 찍는데 청소기를 몇번이나 돌렸는지...
텔레비젼에 나온다 하니 소시민의 마음은 콩딱거리고 흥분되어 열심히 응했지만
오후가 되니 녹초가 되어 촬영이고 뭐고 다 귀찮던 기억이 납니다.
1시간짜리 특집영상물 찍는데 제작진들은 1년을 촬영하고,
제가 나오는 부분에서는 오전8시부터 날을 세워 새벽2시까지 강행군 한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시간 아낀다고 모든 식사는 도시락으로 전 스텝들이 때우더군요.
분명 70넘은 저 노부부도 그런 부분이 있었을거에요
좋은 결과물을 위한 감독의 욕심이 있었을 겁니다.
덕분에 관객은 감동을 하고 오래도록 기억을 하고요.
배우나 감독이나 모두 대단하게 생각됩니다.
몰지각한 사람들이 문제죠.
최원균 노인은 경북 봉화에 사는 79세의 농사꾼이다. 한 평생 깊은 산골에서
오직 농사만을 지으며 살아왔다. 그는 평생 동안 쉬지 않았던 힘든 농사와
노쇠한 나이로 인해 망가진 부실한 몸을 이끌고 지금도 농사를 짓고 있다.
식구라고는 같이 늙어가는 부인과 소가 한 마리 있다. 소의 나이는 정확하지는
않지만 마흔 살 정도가 된다. 소의 나이 마흔이면 사람으로는 백세가 넘는다고
한다. 노인은 이 둘을 데리고 농사를 지어 아홉 남매를 키워내 대처로 보냈다.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이제는 좀 쉬고 싶다. 몸도 성치 않은 형편에 이 나이에
이르도록 일손을 놓지 못하는 신세가 원망스럽다. 자식 다 길러냈으니 이제는
딱히 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건만 영감은 동만 트면 부스스 일어나 소를 끌고
밭으로 나간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따라나서면서 원망스러운 것은 영감이지만
애먼 소에게 투정을 부린다. “저 놈의 소가 죽어야 영감이 일을 놓을 건데---”
노인은 젊어서 팔 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다. 동트기 전 새벽같이 일어나 일을
시작하는 것이 몸에 배어 그 버릇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놀면 뭘 해.
사람은 살아 있는 한 꼼지락거리면서라도 뭔가 해야 해.“
할머니의 불만은 일을 하는 것 자체에 그치지 않는다. 남들은 농약을 친다,
비료를 준다, 농기계를 산다, 영리하게 힘 안 들이고 농사를 짓건만 영감은
그런 것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소가 병든다고 농약은 절대 못 뿌리게 한다.
기계로 농사를 짓는 것이 어디 손으로 하는 것만 하냐, 아무래도 대충대충 하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손해가 많다는 이유로 기계도 마다한다. 이런 노인의
고집 때문에 그의 논밭에는 메뚜기 물방개 등 갖가지 곤충 벌레들이 모여 든다.
“내가 세 살 땐가 저 소가 집에 들어 왔어. 저 소가 우릴 키우고 공부시킨 거나
마찬가지야.“ 추석에 집을 찾은 둘째가 삼겹살을 먹으며 하는 말이다. 마흔이
가까운 둘째이니 소의 나이가 짐작 된다. 그 때부터 소는 노인으로부터 농사를
배우고 일을 했다. 어디 농사뿐일까. 소는 노인과 모든 생활을 같이 했다. 노인이
읍내에 일 보러 갈 때면 자가용이 되기도 한다. 한 번은 읍내에서 만취한 노인이
수레에 타고 잠이 들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뜬 노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기가 집에 누워 있지 않은가. 읍내에서 집까지 소가 혼자 돌아 왔던 것이다.
이미 소는 그냥 소가 아니었다. 한 식구였다.
이제 소는 늙어 버렸다. 젊었을 때는 동그랗고 까맣게 빛나던 눈은 이제는
반 쯤 내려 감겼다. 살은 빠져 등뼈가 드러났다. 튼실하던 발굽도 이리저리
갈라졌다. 관절도 고장 나 노인을 실은 수레를 끌고 가는 것조차 힘에 겹다.
그러나 매일 아침 노인을 따라나서면서도 군소리 하나 없다. 노인은 이런 소가
소중하기 그지없다.
“그럼. 장사 지내 줘야지. 내가 상주 될끼라.” 노인의 소를 아끼는 정성은 남
다르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소 먹을 꼴은 꼭 챙긴다. 새참을 먹을 때도 소와
막걸리 한잔은 나눠 먹는다. “저 영감은 나보다 소가 더 좋은 기라.“ 할머니의
푸념을 못들은 척 하는 것은 꼭 귀가 어두워서만은 아니다. 이렇게 노인과
소는 일과 더불어 늙어 가고 있었다.
소가 점점 힘이 빠지자 노인은 젊은 소를 한 마리 샀다. 좁은 외양간에 소
두 마리가 동거하자니 힘이 든다. 젊은 소에게 밀려나 여물을 먹는 것조차 힘
겹다. 그 때 마다 노인이 거들어 주지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 보다
더 큰 문제는 노인이 두 마리의 소를 키울 여물을 댈 힘이 없는 거였다.
설상가상 젊은 소가 새끼를 낳았다. 생각다 못해 노인은 소를 팔기로 했다.
집을 떠나는 날 아침부터 소의 힘없는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흐른다. “죽으러
가는 거 아니다.“ 할머니가 달래 보지만 눈물은 그치질 않는다. 소시장에
가서도 계속 운다. 늙은 소의 흥정은 쉽게 성사되지 않는다. 소가 워낙 늙은
이유도 있지만 소시장개방 때문에 소 값이 떨어져 좀처럼 노인이 만족할 만한
값이 나오지 않는다. 화가 난 노인은 다시 소를 끌고 돌아오고야 만다.
집에 돌아오고 얼마 되지 않아 소가 주저앉았다. 수의사를 불러 왔으나 별 수가
없다. 이제 이별의 시간이 왔다. 노인은 병든 소에게서 코뚜레며 워낭을 풀어
준다. 어릴 적 송아지 때 코를 뚫고 꿰어찬 코뚜레다. 워낭도 그 때 달았다.
코뚜레며 워낭은 소에게는 노동의 상징이다. 그런데 죽음을 앞 둔 이제야 소는
일에서 풀려난 것이다. 어쩌면 노인과 그렇게 닮았을까-- 노인 부부가 지켜보는
가운데 소는 눈을 감는다. 노인은 포크레인을 불러 양지바른 산 끝자락에 소를
묻어 준다.
소가 죽은 후 노인 또한 들어 눕는다. ‘아이 아파.’ 끙끙 앓는 노인의 손에는
워낭이 들려 있다. 노인의 귀에는 함께 일하던 소의 목에서 나던 워낭소리가
들려온다. 환청이 들리는 것을 보니 노인은 혼미한 가운데서도 소를 만나고
있는가 보다.
자연, 사람, 일------
이 영화를 보고 떠오르는 단어들이었다. 자연이 위대하다고 하지만 이쯤 되면
사람도 못지않게 위대하다. 이름 없는 산골에서 평생 농사만을 지으며 살아 온
이 노인이 이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농사의 힘, 땅의 힘이 이렇게 크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삶이 이렇게 소중하고 값져 보일 수가 없었다. 노동의
가치가 이렇게 돋보일 수가 없었다.
농사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재화의 창출이다.
이 노인이 농사를 지어 자식들 아홉을 길러낸 것이 바로 재화창출의 힘이다.
그것이 땅의 힘이요 농사의 힘이다. 요즘 세계적인 경제위기의 실체가 바로
재화창출에 힘쓰는 것이 아니라 손쉽게 돈을 벌려는 경제구조에서 비롯되었다는
얘기가 공감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금융은 재화를 창출하는 경제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남이 생산한 재화를 빼앗아 가는 본질적 속성을 가지고 있다. 돈을 아무리
돌려 봐라. 쌀 한 톨 생기나. 금융은 남이 생산한 쌀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들 생산은 팽개치고 돈놀이에 골몰한 결과물로 생긴 것이 오늘날의 경제
위기라고 한다. 유명한 잭 웰치의 GE도 가전은 제쳐두고 돈놀이에 골몰하다가
파산했고 GM도 자동차는 소홀히 하고 돈놀이를 하다가 발목이 잡혔다고 하니
맞는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경우 땅을 버린다는, 농사를 도외시하는 정책을 세울
때부터 잘못은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아무리 공업이 발달하더라도 농사를
버리면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일본을 보면 된다. WTO체제에서 농사
보조금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되어 있지만 눈 딱 감고 보조금을 주어 농업을
살려나가고 있다. 아무리 미워도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일류 대학을 나와 좋은 회사를 다녀도 자식교육 무서워 자녀를 갖지 못하는
현실을 보면서, 경제 위기에서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쩔쩔 매는 것을 보면서
내 귀에는 워낭소리가 짤랑짤랑 들려온다.
얘기가 샛길로 빠져 버렸다. 전에 영화 얘기를 하면서 다큐멘타리 수법을 써서
효과를 보았다는 얘기를 여러 번 한 적이 있다. 이 영화는 다큐멘타리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극영화 수법을 써서 성공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순수한
다큐멘타리 영화는 건조할 수밖에 없다. 실제의 영상, 실제의 대사, 실제의 음향
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소리라는 요소를 효과를 높이는
장치로 이용했다.
끊임없이 짤랑대는 워낭소리, 새소리, 벌레소리, 빗소리, 바람소리, 할머니의
군시렁대는 화면 밖 대사 등이 느낌을 풍성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 한다.
원칙적으로 말한다면 다큐멘타리의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허나 그게 뭐 그리
큰 흠일까. 작가는 과감하게 그런 흠을 각오하였다. 그래서 관객과의 원활한
소통을 이루게 되었으니 그것으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우리가 받는 감동의
상당 부분 그 덕이었으니까.
한 시간 십분 남짓의 짧은 다큐 영화인데도 인기가 대단하다. 나는 동네 CGV
극장에서 보았으니 가까운 CGV극장에서도 상영할 것이다. 강력은 아니지만
추천한다. 가족들과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