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 “애야, 저 수차골 작은 할머니 댁에 떡 좀 갖다드리련?” 찹쌀을 불려 시루에 쪄낸 것을 허리 굽혀 물을 묻혀가며 절구질로 곱게 다진 것에 콩고물을 뿌려 인절미를 만드신 어머니가 인정 많으신 작은 할머니가 따끈할 때 드시도록 심부름을 시키셨어요. 그러나 동생과 용대는 그 떡 심부름이 정말 싫었어요. 뜨끈한 방안에 마련된 목간통에서 한해를 결산하는 묵은 때를 밀어낸 터라 으슬으슬 춥기도 하고 작은 할머니가 사시는 수차 골은 음지인데다가 가는 길목에 호랑이에게 물려죽은 조상을 모시는 집이 떡 버티고 있어 깜깜한 그믐밤에 그곳을 지나치려면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지요. 그 집 뒤뜰 처마 밑 보꾹에 호서랑 귀신을 위해 무엇을 걸어 놓았는지 흰 뭉치가 너무나 무서웠어요. 동물의 피를 묻혀 걸었다 하기도하고... 더구나 동네 상여막이 뒷산에 을씨년스럽게 있었는데 어른들이 이르기를 수차 골은 냉혈 터랬어요. 당시로써는 냉혈 터가 뭔지도 몰랐어요. 아무튼 그곳에는 육이오 때 인민군에게 끌려가다 무참히 놈들에게 살해되신 분이 아카시아 밭 덤불에 덩그러니 묻혀 있었고 그 아랫집에는 오촌 아저씨가 국군으로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하셨으며 또 옆집은 대동아 전쟁 때 일본군으로 끌려가 민다나오 섬에서 돌아가셨다는군요.
동생과 가위 바위 보를 했는데 운이 나쁘게 용대가 졌어요. 속상하지만 어쩌겠어요? 가야만하는 그 공포의 떡 심부름... 욕골산 부엉이는 한밤중 스산하게 울고... 가끔 왕배이 고개에서는 여우의 울음소리도 들리고... 여우가 세 번 구르면 동네에 초상이 난다하고... 양손에 떡 그릇을 들고 후다닥 달려갔어요. 그 무섭게 느껴지는 집은 절대로 안쳐다보려고 고개는 왜로 틀고... 정신없이 뛰었어요. “작은 할머이! 작은 할머이! 떡 가져왔어요. 어머이가 주셨어요.” “어서 오너라. 고맙구나. 그런데 떡이...” 떡 그릇을 받아 드신 작은 할머니가 떡의 상태를 가만히 살피셨어요. 오는 길이 얼마나 무섭던지 떡 그릇을 마구 흔들며 뛰어 떡이 한쪽으로 쏠려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용대가 보아도 주먹밥을 콩고물에 묻혀 크게 뭉쳐 놓은 것 같았어요. 그래도 인정이 많으신 작은 할머니는 빈손으로 돌려보낼 수 없다며 광에서 가을에 수확한 밤을 빈 떡 그릇에 수북하게 담아 주셨어요.
외길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걱정되었어요. 인사를 드리고 앞마당을 나와 다시 뛰는데 호서랑 귀신을 모신 집 돌담벼락에 빨간 불이 왔다 갔다 하지 않겠어요? 가슴이 철렁했어요. “저거 뭐야! 으이그 저게 뭘까?” 오금이 저려 다가갈 수가 없었어요. 속으로 외쳤어요. “저건 분명 호서랑 귀신이 호랑이처럼 빨간 눈을 뜨고 용대를 잡아먹으려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해.” 얼마 전에 귀신을 봤다고 동네 형이 말하던 생각이 났어요.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망설였어요. 그러나 그냥 서있으면 얼어 죽을 것 같고 떡 그릇을 내려놓고 용기를 내어 돌멩이 하나를 들어 힘차게 던졌지요. “아이고! 어떤 놈이야! 에고 아파라.” 글쎄 그 집 아저씨가 뒷간에 인분이 겨우내 가득 차 잠시 자연을 벗 삼아 담뱃불을 빨며 큰 것을 보고 계셨던 거예요. 다행히 그 분이 크게 다치지 않아 야단만 맞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요. 하마터면 호서랑 귀신을 돌멩이로 쫓아내다 사람하나를 잡을 뻔 했어요. 하필이면 그 시간에 왜 거기에? 그래도 사람이라 다행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아버지께 호들갑을 떨며 무용담처럼 들려 드렸더니 잠자코 들으시다 한 말씀 하셨어요. “내일아침 정초부터 여자애가 집에 먼저 들어오지 않도록 문단속 잘해라.” 어린 용대는 그 뜻을 이해 못했지요. 세배 돌집을 미리 머리에 구상하다 용대는 어느새 잠이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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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청안하셨지요?
제일 먼저 달려오시어 반기고 마음을 나눠 주시니
선배님의 따스한 배려가 오늘 내린 눈을 모두 녹일 정도로
훈훈하군요.
감사드립니다.
댓글로 인해 많은 생각을 하였답니다.
그저 인천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로가 이웃담장을 넘어 당시를 회상하며
동 시대를 살고 호흡하였기에 추억을 되살려 찾다보니 의외의 변수에
놀라곤 했지요.
마침 오늘 아침 이인선 선배님께서 설교가 역사하는 동영상 자료를
정성스레 보내주시어 설교를 듣다보니 제가 너무 세상 것에 연연함을
느꼈어요. 반성의 기회도 되었고요.
일희일비가 다 부질없음을...
마음을 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인연의 소중함도 다시한번 생각하는 시간이었어요.
용선배님,
미련없이 주저앉을 준비는 하지마세요.
멋지신 선배님이 저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답니다.
해박하신 선배님의 좋은 글을 기다리시는 소중한 인연의
분들이 많이 계시다는 것이 사실이지요.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찾아와 선배님과 온라인상에서라도
교감을 나누고 싶군요.
설 명절 잘 보내세요.
인고동상 올림.
안녕하세요? 용혁님
제목이 이상해서 들어와 보았더니 아무 상관도 없이 제목을 그리 붙이셨네요.
강화 시골 이야기는 늘 들어도 재미가 납니다.
그런데 우리 동네 우리집에서는 여자 괄세를 그리 안했는데
그쪽 동네는 이상하네요.
이제까지 거의 모든 것이 비슷했었는데 그것은 다르군요.
아니, 우리 집만 안 그랬었을까요?
울 아버지는 전혀 안그러셔서 몰랐거든요.
구정이 닥치니 옛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설날 지내세요!
그리고 박사님 간증을 듣고 감동을 받았다니 참 기뻐요.
원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보내드리고 싶어요.
용선배님께도 보내 드릴까요?
제목에 혹시 놀라시지는 않았는지요?
행여 불편하시면 제목에서 선배님 이름을 지우겠습니다.
복귀의 변으로 선배님을 무례히 거명하였으나
돌아올 명분과 용기를 제게 주셨어요.
이로인해 제가 다시 글을 올리게된 동기가 되었지요.
글 소재도 떨어져 가고 가끔 의외의 댓글로 인해
마음도 편치 않아 쉬고 싶었답니다.
오늘 선배님께서 보내주신 귀중한 동영상을 보면서
속 좁은 저를 발견하였지요.
하찮은 세상 것에 연연하는...
그리고 소중한 인연을 냉정히 몰라라했던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구요.
이희돈 박사님의 간증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더군요.
찬양은 어찌나 은혜스럽던지요...
이자리를 빌어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당시 강화에는 왜 그리도 여자분들이 설날 아침에
남자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을 금기시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갑니다.
당시 민주주의적 사고의 아버지와 형도 이 사고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더군요.
요즘의 생각이 어떠신지는 관심 밖이랍니다.
시대착오적 발상이기에 더욱 그렇죠.
금메달 목메달 이야기도 그저 웃자는 이야기일 뿐이구요.
저 자신도 약국에 온 어머니들이 남자애의 좋은 이름을 놔 두고
"아들~~" 하고 부르는 것이 성차별 같아 귀에 거슬린답니다.
제가 딸아이 하나라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고
남녀 평등사상을 가진 아니면 페미니스트라 그런 것 같군요.
설 명절 잘 보내시고 아주 가끔 씩 뵐께요.
고운 시간되세요.
반갑습니다.
이곳 동산에서 다시 소식을 나누게 되어서......
지난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슬히 멀어져간 지난 세월이......
기축년 새해에 좋은 추억담 부탁해요.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이름을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역시 올리신 글도 정겹고요.
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는 늘 상처로 안고 살지요.
툭 툭 떨어낼 줄 아는 용혁님이 오늘 커 보입니다.
누구나 쉬운 일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으니까요
기축년 새해에 건강하시고
뜻하시는 바를 이루도록 기원합니다.
윤용혁님, 글은 벌써 올라오자마자 읽었지요.
이름 보자마자 댓글 쓸 말이 줄줄이 나오는데 쓰지 않고 다른 일 먼저 해야 했어요.
'맨발 벗고 뛰어나가 맞는다' 말이 제일 먼저 떠올랐었답니다.
그리고 또 아까는 긴댓글을 써놓았는데
중간에 하늘 같은 인일 선배님의 전화를 받는 바람에
댓글 등록을 하지 않은 것도 잊고 홈피를 닫았었답니다.
당연히 다 날아갔지요.
오신 게 반가웠는데도 댓글이 늦었다는 설명이 이렇게 장황했습니다.
잘 오셨어요.
문 앞에서 손잡고 들어오게 하신 이인선 선배님이 감사합니다.
용혁용범님의 주고 받는 댓글을 보고는 또 웃음이 나와서 혼났습니다.
친구가 대단하다지만 아무래도 형제애만은 못해요.
두 분 함께 즐거운 명절 되시기 바랍니다.
기축년 새해가 구정을 지나 새롭게 잉태하는군요.
그간 청안하심을 여쭈옵니다.
이웃의 정이 무언지 결국 글 쓰기를 좋아하는
이웃 사촌은 선배님같이 좋은 분들을 못잊어
고심끝에 찾고야 말았군요.
그런데 어떤 때는 제가 왜 이곳에 있는가하는
우문에 젖곤 한답니다.
제가 인일여고 출신도 아닌데...
그렇다고 제 가까운 주변에 여고출신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단지 꿈 많던 고교시절을 인천에서 같이 보냈고
두런두런 지난 세상사와 추억이 그리워 글을 통해 찾았지요.
글의 소재로 인해 혹독한 비판도 감내하며 가끔씩
당황스런 댓글로 마음의 상처도 입으며
절필을 다잡다가도 찾는 이유는 그저 내 글을 나누고
공유하며 좋은 분들과 온라인상에서라도 사랑방되어
소중한 인연을 맺어나가게 되는 것이 좋은 이유랄까요?
글쎄요.
자주 머뭇거림이...백선배님같이 좋은 분들에게는
죄송스러움도...
행복하세요.
선생님이 서정성과 향토의 아름다움이 배인 글, 그것도 관념이 아니라 실제 경험에서 이뤄졌던 일들을 뽑아내는 그 능력이 탁월하여 참 글 쓰는 것을 좋아하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는데, 이 글을 보면서 도대체 이 형제분들은 글을 올리면서 어쩌면 이렇게 자기 기분에 취하여 남에 대한 배려를 이토록 안 하시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간년 오는 년의 그 년이 해 年이 아니라는 것은 초등학교 2학년이라도 알 것임에도 그리 쓰시는 분이나(만약 그리하다면 굳이 그렇게 표현하지 않지요, 연꽃을 보고 하는 농담 아시죠? 이년 저년 보아도 저 쌍년이 가장 아름다구나 하는 농담 말예요. 여자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면 그 농담을 들으면서 왜 웃을까요?)
그런 농을 아무렇지 않게 하시고 그것에 대해 불쾌해 하는 후배를 이상하게 몰았지요.
그렇지요. 선생님 말씀대로 여자가 정초 아침부터 먼저 들어오면 재수없다는 말, 우리 잘 듣고 자랐죠. 무심하셨죠? 관계없으니까요.
그 말에 깊은 내상을 당한 저희들의 모습 따윈 별 관심이 없으셨겠죠.
제 말은 선생님이 밑에 썼듯이 그런 생각이 이상했다면 그런 말은 명토 박아 쓰지 말으셔야 했다는 거지요.
정초에, 여자 고등학교 홈페이지에 오랜만에 글을 올리면서 덕담은 커녕 재수없는 여자 애들 못들어 오게 하라는 존경하는 아버님의 말씀을 쓰시는 무신경이 어디서 오는 건지 참으로 의아했습니다.
더구나 문학성으로 포장된 글이라서 더욱 생경했습니다.
선생님이 편안하게 글을 쓰셨듯이 저도 저의 불쾌감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도 되겠지죠?
우리 학교 홈페이지잖아요.
미국의 흑인과 한국의 여자와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계속 생각하다가 글 올립니다.
건필을 바랍니다.
저 웃자고 재미있게 제 어린시절 추억담을 들려 드린다고 해년을 계집년으로 오해를 불러 일으켰던 사람입니다.
덕바위라고 해요.
지난 해에 그 일에 대해서는 제가 분명하게 사과를 드려서 일단락이 되었지요.
왜 정초부터 다시 문제를 삼으시는지 그리고 형제들까지 연루를 시키시는지 조금은 불쾌합니다.
이곳에서 옥규씨하고 논쟁하고 싶지 않습니다.
글을 쓰다보면 본의 아니게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겠지요.
조금 이해하고 모른척 넘어 간다고 세상이 뒤집어 지지는 않겠지요.
모르겠습니다.
어릴적 가정교육을 잘 못받아서 남에 대한 배려가 좀 부족하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이제 뒤늦게 나마 철이 좀 나네요.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다고 다짐도 해 봅니다.
따뜻한 마음으로 남의 실수나 상처까지도 감싸 주겠노라고....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부족하고 흠이 많은 인간이라서....
그리고 글의 전체 맥락은 이런 결론이었지요.
전체 맥락을 다시 한번 살펴 보시지요.
"기존의 우리 전통사회에서 남아선호사상에 의한 남녀차별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이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해 못할 관행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이제는 남녀 평등사회가 되다 못해 여자 상위시대가 되었다."
이런 논조였지요.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를 올리는 것 같군요.
지적하신 부분에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먼저 유감을 표하고자 합니다.
오랜만에 찾아와 글을 다시 올린 제 불찰도 인정하고요.
글이 굳이 진솔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 1960년도 초의
제 어릴 적의 시골 풍속도를 가감없이 그렸고 사실상 그러 했기에
또 아버지께서 그런 사고방식을 가지시고 말씀하심이
님처럼 넘 생경하고 어머니도 누나도 여자인데
어린 제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기에 반어법적 의미로
당시를 회상한 것이지 문학성을 가장해 추호도 정초부터
여고 홈피에 들어와 여성을 비하하거나 폄훼하려는
것이 결코 아니었음을 널리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이인선 선배님의 댓글에 제 사고가 드러나 있지 않나요?
번거로움을 덜어 드리려...
"당시 강화에는 왜 그리도 여자분들이 설날 아침에
남자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을 금기시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안갑니다.
당시 민주주의적 사고의 아버지와 형도 이 사고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더군요.
요즘의 생각이 어떠신지는 관심 밖이랍니다.
시대착오적 발상이기에 더욱 그렇죠.
금메달 목메달 이야기도 그저 웃자는 이야기일 뿐이구요.
저 자신도 약국에 온 어머니들이 남자애의 좋은 이름을 놔 두고
"아들~~" 하고 부르는 것이 성차별 같아 귀에 거슬린답니다.
제가 딸아이 하나라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고
남녀 평등사상을 가진 아니면 페미니스트라 그런 것 같군요."
그리고 제 글만을 탓하지 아니하고 제 형까지 싸잡아
불쾌함을 드러냄도 온당치 못하다 생각되는군요.
아마추어적 글쓰는 이의 부족함도 열린 마음으로
웃어 넘길 수 있는 도량도 저 혼자만의 바램인지 몰라도
정초부터 지적된 신고식에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군요.
이글은 인천여고와 제 사랑하는 인천고의 홈피에도
동시에 올려진 글이나 글쎄요..
그분들도 님처럼 같은 생각인데
주저하여 말이 없는지...
아니면 글쓰는 이만이 갖는 순수한 표현의 존중과 글 전체맥락을 이해하려는
독자로서의 관대함이 우러나옴인지요.
미국 흑인과 한국의 여인과 비교를 제게 물으심도
의아하군요.
페미니스트(feminist)인 저도 언제나 여성을 존중하고 제 어머니 제딸 제 누이를
사랑하는 한 평범한 남성임을 알리고자 합니다.
건필을 빌어주시니 감사드리며 언제든 여고 홈피에 누가 되면
이웃 사촌 나그네는 훨훨 나는 자유인이고자 합니다.
청안하세요.
如山!
정말 반갑소이다. 역시 글이 참 아기자기하고 童詩를 읽는 느낌입니다.
덕암의 남녀차별하는 까치 글과 함께 어울려 왜 그리 옛날, 그쪽 강화에선
그렇게나 남녀를 차별했는지... 가 이해도 되고 그 한 밤중
무서움에 내달렸던 용대의 심정이 그대로 보이는 듯싶습니다.
앞으로 자주 등장하세요. 이제 덕암도 該謔을 하되 雅謔을 주로 할 테니...
그래야, 이 사람 무딘 글은 이제 미련없이 주저앉을 준비를 할수 있겠지요.
설 가족분 들 모두 모여 행복하고 즐겁게 보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