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회 - 게시판담당 : 김성자
오늘 걸레를 빨다가 문득, 돌아가신 시 외할머님이 생각났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시 외할머님을 모시고 살았는데,
85세 되신 그분은, 걸레를 정말로 백옥같이 빨아 놓으셨다.
특별한 표백제를 쓰는 것도 아니시고 그렇다고 삶는 것도 아니신데,
누런 빨래 비누 한 장으로 행주보다 더 깨끗하게 빨아놓으시곤 하셨다.
할머님은 하얀 걸레에 엄청난 집착을 보이셨다.
사용안한 걸레도 틈만 나면 빨아놓으시고 흐믓하게 쳐다보시며 감시를 하셨다.
걸레 사용 후 시원찮게 빨아놓는다고 호통을 치시는 바람에
우리는 할머님 계실 때는 걸레를 사용할 엄두조차 못냈다.
걸레가 아니라 아주 상전이었다. ㅎㅎ
그래도 내게는 후한 편이셨는데,
그건 장바구니 속에 얹혀온 할머님의 간식거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열 여섯에 시집와서, 고급으로 먹고 살던 내가......."로 이어지는 같은 레퍼토리를
도망가지 않고 들어드린 공로 때문이었을까? ㅎㅎ
오 년 후 분가하면서,
철없는 손주 며느리는, 서툰 일에서 해방된다는 것,
특히 뽀얀 걸레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어찌나 홀가분하던지
할머님의 서운함 따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할머님은 운명하시기 전, 내 손을 잡으시고 힘들게 말씀하셨다.
"에미야, 복 받거라."
아, 마지막 가시는 길에도 부족한 손주며느리를 사랑으로 챙기셨던 분,
이제 그분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그저, 할머님 성품 닮은 뽀얀 걸레만이 기억될 뿐이다.
"할머님, 제가 빤 걸레 영 맘에 안드시죠?" ㅎㅎ
옥순아~!
재밋네.
할머님이 표백제도 안 쓰시고,삶지도 않으시고
깨끗이 빠시는것은 손힘이 쎄신분 이시네.
하하~~
위에 걸레 이미지는 어디서 가져왔누~~
옥순이 처럼~
손힘이 쎄지 않은 사람은 팍팍 삶으면 됩니다.
엄마랑 단 둘이 살다가 시집을 가 보니
점심 먹는 식구가 무려 스물이 넘는데, 한끼에 세번씩 상을 차려야 했지.
꼭 음식점에 취직한 거 같더라구.
그런데다가 방카C유를 쓰는 공장 안채에 살았기에 그으름 때문에 걸레질은 계속해야 하는데,
정갈하신 할머니 때문에 맘대로 걸레를 쓸 수가 없다보니 신경전을 벌였지.ㅎㅎ
옥순아
아이들이 벗어놓고 다시 찿지않는 티셔츠는 웬게 그렇게 많은지, 4~6장으로 잘라내서는 한장씩
발로 쓰윽 비벼버리는 나를 네 할머님이 보셨으면 진작에 뒤로 넘어 가셨겠나?
걸레질하며 할머니 그리워하는 네 모습 정겹다.
저의 시어머님도 그러셨거든요.
내가 쓰는 행주보다 어머님이 쓰시는 걸레가 더 새하얘서 주눅들던 기억이 나요.
우리 어머님의 청소하는 방법은 이랬어요.
창문 열기 - 총채로 털기- 먼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기 - 비로 쓸기 -또 먼지 가라앉을 때까기 기다리기
- 물걸레질- 마른 걸레질
물론 저도 그렇게 따라서 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때는 어머니께서 집안 공기를 비닐봉투에 담아 꽁꽁 묶어놓고
죽지 않을만큼 가끔 조금씩 여는 것만 같이 생각되었어요.
그렇게 숨이 막힐 거 같아서,
퇴근하고 아파트 앞까지 오면, 올라가지 못하고 서서 울던 생각도 나요.
이젠 다 지나간 일이고 어머니는 벌써 떠나신지 18년이나 되었어요.
제삿날 남들 절할 때 저는 부엌에서 그래도 그 어머니 생각하고 눈물 핑 돌지요.
모든 인생이 사실은 다 불쌍한 거잖아요.
그 때는 일기장 첫머리에
'나는 며느리 얻으면 이렇게 하지 않을 거야' 라고 수많은 얘기들을 썼었지만
이젠 내가 많이 부족한 며느리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선배님 덕분에 또 옛생각에 잠겼어요.
지나간 건 다 그립네요.
나는 지금이나 옛날이나 일이 영 어설픈 사람이거든요.
특히 대식구 손빨래가 어찌나 힘들던지.
훤하게 동트면, 밤새운 공장의 화부들 아침식사 드리고 나서,
가정부 아줌마와 빨래를 시작하는데, 날마다 웬 빨래가 그리도 많은지...
그 빨래 끝나면 우리 식구 아침식사 준비해야 하고.
설겆이 하면서 또 화부들 점심 준비, 그리고 또......
그래도 이 미련한 것이 시원찮은 며느리 소리 들을까봐 죽어라고 버텼죠.
바쁜 영주씨 붙들고 넉두리가 길었네요.
영주씨, 찾아줘서 고마워요.
옥순아!
지나간 일은 모두 추억으로 남는구나.
그런데 나는 걸레빤 생각은 없으니 청소를 안 하고 살았나?아님 어머니께서?
늘 무서워서 모든일에 신경을 곤두 세우고 살았던 시절이었지...
남대문 시장엘 가니 넓적한 쓰레빠 밑에 찍찍이로 걸레가 붙어있는 것을 보고
어느 머리좋은 사람이 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거금?을 주고 열개씩이나 샀지.
반은 덜어서 미국에 가져가고 나머지는 여기서.....
그걸신고 옛날 복도에서 스르륵 미끄럼 타던 실력을 발휘하면 그날 청소 끝.
그런데 시커먼 걸레 쭉 잡아 떼 아무리 빨아도 때가 안지워져 고민 중.
옥순아~~ 너네 할머니한테 여쭤 볼 수도 없고 워쩐다냐??
너의 시어머니 무남독녀 외동따님?
우리 시어머니보다 우리 걸레가 좀 나았었다.ㅎㅎㅎ
하늘 아래 첫동네에 사셨던 분이라 그쪽으로는 ......
밭 일, 논 일, 허드렛 일이 첩첩산중이라.
그 분은 이제 86세에 아무 것도 못하신다.
옥순후배 오늘 4회에서 이내가 자리핀것 같네
헌디 절대 걸레는 행주가 될수 없다고 말씀드리야 할것을 ㅉㅉㅉ
그래도 걸래는 행주보담 쬐께 색이 검어야 구별 되는것 하는것 아닌감
난 깨끗한 결벽증을 타고난분댁은 가면 조심스러워서
화장실을 쓴후에도 다시한번 돌아보게되지 총총
지난해 왔을때 그냥 무심코 4회이니깐 그저 학교에서 본 기억에 얼굴이거니 생각을 했으나
떠나고 난후 4기 방에 사진 오르는 얼굴이 그냥 지나칠수 없는 바로 "중앙 사진관"!!!!!!!!!!
아버님 한테 사진 찍었던 생각~ 글구 바로 위에 언니 하고는 좀 아는 사이로서
사진관 뒤에 개와집에 놀러 가기도 했었지 그간에 어머님 아버님 안부를 전한다면?????
그리고 바로 위에 언니도 ?
지난해 5월에 모국 방문중 추억 어린 금곡동을 갔었지 이십세기 약방은 폐허가 되였고
아직 남은것은 문화반점! 엔 울 동기들이 데빌고 가서 추억을 더듬었고
문화 극장도 없어지고 ~~~
금곡동 동회는 금창동으로 변경이 되여 그 자리에 아직 남았 있더군
난 금곡동 동회위에 윗집에 살았었으나 그집은 그간 2번이나 헐리우고 낮선집이 서 있더군
그래도 아쉬워 그집 앞 그리고 동회 앞에서까지 기념 촬영해 오곤 미국에 울 형제들 보여주면서
추억을 더듬었지 반가우이 총총
헌디 그 쓰레빠 밑에 찍찍이에 붙어 있다는 걸레 " 쓰찍걸" 탐난다
이 내도 평시 걸레를 밟고 왔다 갔다 발걸레질 지난 수십년 동안 해오던 짓인데
아무레도 머리에 두었다가 사 오도록 해야겠구먼
헌디 지금 퍽 떠오른건데 그 쓰찍걸 구하기전에
중간색 양말 남자것 큰것으로 여기 미국 사람들 발 보트 만하니깐 ㄲㄲㄲ
고저 한다즌쯤 사다가 내 실내화 신은 발에 끼고 왔다 갔다
와 ! 위대한 발견 ㅎㅎㅎㅎ 좋은하루 총총
시외할머니 맛난거 사다드리고
한얘기 또하고 또하시는거 들어드리는
너무 착해서 세련되지못한(?) 옥순아
할머니 말씀대로 꼭 복 받아야 돼.
빨래 중에 제일 호강하는거
그게 바로 걸레 아니겠니?
다른 빨래 다 세탁기에 들어가도
걸레만은 손빨래 해야하는
귀하디 귀한 몸이지.
옥순언니 저하고 닮았었다고 전에 썼었는데 이제 취소하고 싶어집니다.ㅎㅎㅎ
그렇게 착하시고 그렇게 열심이셨다는 언니하고 비교가 안되네요.
전 맨날 불평만 하고 살다 이렇게 나이 먹었는데 말이에요.
.
그리고요. 전 취미에는 전혀 안맞지만 시험삼아 삶기도 하고 표백제에 넣기도 해봤지만
어딘 가에는 얼룩이 남던데.........................그렇게 하얗게는 절대로 안되던데요......................
열심히 살려고 노력은 했지만 누군들 자기 인생을 대충 살겠어요?
더구나 착한 사람은 절대로 절대로 못돼요.
식구는 많아도 할머님 시중들 사람이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분가시키겠다는 어머님 마음 바뀔새라 도망치듯 내뺏지요.
삐질삐질 나오는 웃음 참으면서요.
그런 인정머리 없는 손주며느리를
착한 손주며느리로 소문내고 돌아가셨으니 죄송할 뿐이죠.
그리고 우리 걸레가 그렇게 깨끗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할머님이 안 쓴 걸레도 빨고 또 빠시니
더러워질 사이가 없는 거죠. ㅎㅎ
명옥씬 아주 깔끔한 사람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귀한 손은 아끼며 사세요.
제가 생각해도 제가 좀 깔끔한 편이긴해요.(진짜로 웃기지요?)
근데 뭐 치우고 하는 거는 전혀 아니고요.
약속이라던가 숙제라던가 그런 할 일은 마무리를 꼭 하지요.
그러다보면 집안은 언제나 난장판이에요.
먹고 싶은 거 생각나면 먹을 꺼 많은데도 시장에 뛰어 가고 약속시간 늦을까봐 청소하다말고 빗자루 집어 던지고 나가니까
집안이 깨끗할 새가 없어요.
게다가 남편이 시간맞춰 칼처럼 식사하는 타입이 아니다보니 부엌도 항상 어질러져있고요.
대신 언제나 먹을 게 있다는 장점도 있답니다.
우리집에 안 와 보신 분들은 제가 엄청 깔끔하리라고 생각하시더라구요. ㅎㅎㅎ
저도 할 말은 있어요.
피아노 연습만 해도 그렇지요.
클래식도 모짜르트 베토벤 쇼팽~~~~~~~~~~~~~~~~~~
영화음악에 뽕짝도 악보 늘어놔야지요.
성가곡 연습해야지요.
그걸 다 정리해서 넣어 놓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으러 다녀야 하쟎아요?
화가가 물감이랑 다 치워놓으면 그림 어찌 그리겠어요?
주방기구도 다 널어놓고 필요에 따라 쓰려니~~~~~~~~~~~~~~~~~~~~~~~~
우리집 식구들은 게을러서 뭐든지 손이 닿는 곳에 놔두고 살아요.
오늘 교회에서 헌금 특주 했는데 연습할 시간이 좀 모자라서 어찌나 쫄았던지...........................
늙었다는 걸 정말 실감했어요.
옥순언니가 올리신 글이 반가와서 이리 주저리 주저리 수다가 나오네요.
나도, 없는 솜씨지만 요리에 관심은 엄청 많지만 청소는 영 ~~.
그래서 어쩌다 손님 치르려면 대청소 하다가 기운이 다 빠진다니까요.
점점 더해서 큰일예요.
요즘 부활 준비로 바쁘죠?
그 교회는 복덩이 반주자가 있어서 좋겠어요.
우리 반주자한테, "반주자님, 수고했어요." 인사했더니
"형님, 나 오늘 두 번이나 실수했어요. 챙피해요."
그걸 누가 알기나 하나요? ㅎㅎㅎ
(하긴 친정집도 늘 북적거리긴 했어요. 그게 다 엄마몫이었지만)
세상에는 공짜도 없고 손해보는 것도 없다는 말처럼 요리도 안무서워 하고 대강 해치우게 됬고
밥 얻어먹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그 때 이야기 하면서 들락이고 있네요.
제 경험으로는 뭐 잘해지는 것도 조금은 있겠지만 손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손님들이 안와요.
다 밖에서 만나더라구요.
자기들도 결혼하고 살아 보니까 힘든 걸 알게 됬나봐요.
게다가 제가 아프고 나니까 힘이 딸려서 큰 일은 엄두가 안나고요.
그리고요 전 주일에는 반주 안해요.
혼자만 다니는 교회에 종일 매일 수도 없고 이 나이에는 경조사가 많은데 거의 토, 일이쟎아요?
수요예배 반주해요.
어머니 성가대가 있는데 벌써 12,3년이나 됬네요.
이제는 제손님들 불러서 노래도 하고 식사도 하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술 좋아하는 남편과 사는 것도 닮았네요.
이젠 술 안마신 남편은 내 남자 같지가 않다니까요.ㅋㅋ
가까이 살면 나도 명옥씨 손님이 되어
노래도 하고 식사도 하고 남편 흉도 보며 지냈으면 좋겠네요.
명옥씨가 피아노 연주도 들려주겠죠?
후배는 달란트가 참 많은 사람이예요.
언니 제 메일로 핸드폰 번호 좀 알려 주실래요?
그럼 저도 언니 메일로 보내 드릴께요.
wonnymom2003@yahoo.co.kr
요즘 음악도 여러가지 하느라고 연습을 제대로 못한답니다.
가리늦게 무슨 색소폰 반주 할거라고 그 책도 두권이나 받아놓고(아는 노래는 다 들어 있네요).
사실 반주기로 다 되는데 한번씩 라이브로 하고 싶은 가 봐요?
이렇게 늙었는데도 불러주는 게 고마워서 잘해주려고 노력하지요.
근데 시간이 좀 아깝긴 해요. ㅎㅎ
이리저리 외도는 해도 클래식이 역시 최고거든요.
연습부족이라 날이 갈수록 힘이 든답니다.
어제부터는 찬양곡 리듬 화음 바꿔보는 숙제하는데 시간 너무 걸리네요.
학생 때는 왜그렇게 연주하는데 인색했는지 (자신이 없어서 그랬어요. 잘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서 ).....
이제는 그런 건 졸업했지요.
멋진 연주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전 그냥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요.
마이 갓! 김 영순 후배 ~
난 돌아 가신 후배 아버님하고 추억이 있지
그때 내가 인천여중 합격겸 6학년이라 졸업 선물로 돈을 아버지한테
탓는데 그 돈으로 나으 염원이였던 내 막내 남동생 사진을 찍어주러 사진관엘 갔더니
아버님께서 어린 여자아이가 4살짜리 사내 아이를 데빌고 사진관에 와서
지불을 하는 특별한 모습에 이것 저것 물어 보시더라고 그때 울 아버지하고 후배 아버님 하고는
아시는 사이란것을 내가 간접적으로 알리는 역활을 신나게 말씀 드렸지
신난 이유는 늘 사진관 앞을 지나가면 울 동생만한 사내아이 사진이 크게 걸려 있는데
동생만큼 인물이 없는것 같아서 동생을 그 사진관에 가서 찍게 되면
당연히 윈도에 동생 사진을 걸어 줄것이라는 어릴때에 야심과 즐거움이 곁드렸었지
허나 끝내 동생 사진은 걸리지 못했고 난 사진 찍던날 후배 아버님으로부터
받았던 칭찬은 평생을 두고 잊혀지지 않는 추억으로 남아 있지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얼마나 웃읍던가는 유난히 뻣뻣한 동생 머리에 앞에만
물칠을 해서 옆 가름마를 강제로 만들어 한없는 멋쟁이를 만들었지만
전문인이 보기엔 절대 걸어 놓을수 없는 작품이였겠지
내 동생은 지나가는 사람들도 잘 생겼다고 돈을 주고 가기도 해서
그 돈으로 알사탕을 사서 누이인 내게 한알 주기도 했으니
이렇케 만나서 반가워 우리 언젠가 만날수 있겠지 총총
전 영숙 후배 꾸벅 미안혀
헌디 헷갈리게 옥순 순옥 영숙 영순 명옥~~~~
나같이 호문이 웃탓타타 총총
정말 헷갈리게도 됐습니다.
갸가 갸 같지요? ㅎㅎ
우리 어머니가 '희경'으로 개명해 주셨는데,
우리 남편이 촌스런 얼굴과 옥순이가 딱 어울린다고
그냥 그렇게 살라네요.
근데요 ~~,
웃탓탓타가 무슨 뜻이예요?
저도 한번 선배님 흉내 좀 내보려구요. ㅎㅎㅎ
저희는 음악하다 보니 같은 거 하는 애들끼리 몰려 다니쟎아요?
2기는 최희순언니 혼자 독주,우연히도 3기에는 김수경, 김혜경 박숙경으로 경자언니들이었고요
4기는 이춘원(이 언니는 예고로 진학),오은숙, 허옥선, 이혜원, 바이올린의 김봉희 언니로 각각!
저희 5기는 박혜옥(이 친구도 예고) 유명옥,
6기도 남원옥 남효옥, 그리고 이화여고로 갔다가 연대 영문과로 간 안경원( 이 후배가 참 피아노를 잘쳤는데)
콩쿨은 거의 중학교 때 몰려 다녔지요.
그당시 교대부국 출신중에 현악하는 애들이 많았는데 혜숙이 영숙이~~~~~~~~~4명이 숙자돌림이라
바이올린 선생님이 한꺼번에 4숙아! 하고 부르셨대요. ㅎㅎ
부산에 와서 처음에 이름 때문에 아주 황당했어요.
애들 이름을 끝자만 부르더라구요.
영자면 "자야" 은정이는 "정아야" 혜진이는 "진아야"~~~~~~~~~~~~~~~~~~.
전 당연히 진아는 김진아. 정아는 이정아............................ 라고 생각했거든요.ㅎㅎㅎ
유정희 선생님 노래 하실 때
반주를 도맡아 했던 최희순 언니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우리 친구 4명 모두 밴드부 출신.
예쁘고 얌전하던 허옥선이를 잊고 살았네요.
미술부로 가겠다는 나를 억지로 아코디온을 시키신 박준교 선생님도 그립고요.
음악 감상을 기막히게 시켜주셨죠.
초등시절, 우리 반에 옥순이가 넷 이었던가?
김. 이. 유. 박(?)
이름은 흔해도 성이 유씨라,
내가 제일 덜 촌스럽다고 억지 자부심을 가졌죠. ㅋㅋ
명옥후배 덕에 추억에 젖어보네요.
유 명옥 후배 덕분에 그 3기 경자 돌림중 김 수경이가 뉜가 가물하야 엘범을 보니 바로 키가 컸었던
친구였네 글구 5 박 혜옥이는 지난 나성 동문 파티에 참여해 피아노 반주를 했었다는것을
이 내도 말만 들었다네 총총
그 이름도 심심찮케 흔하지?
내 이름 특이하야 고등학교때 펜팔이 내 이름 검색하니 인일에서 내가 대화 나눈것이
떠서 이닐 홈에 의뢰를 했더니 미국 동문회 전화번호를 주어서 그 동문회에 본인 전화 번호를
남겨서 찿게 되였지 이럴때도 우탓타타 웃어야 하지?
한번 후배가 내 이름넣고 검색해봐 무엇이 먼저 뜨나 ????
그말듣고 나도 한번 흔한 이름을 넣었더니 말마 한 50명쯤 같은 이름으로 뜨는데
그것 일일이 조사 하는것은 벌에 속해서 집어 치웠거던 총총
싸이월드 사람찾기에서 유명옥 치니까 3명 밖에 없어요.
촌스럽긴해도 성이 유씨라 그리 흔하지는 않은가봐요.
전에 보니까 가수 나미의 본명이 이명옥인가 김명옥인가 뭐 그렇더라구요.
저도 이름 디게 맘에 안들어서 배우자 선택의 첫번째 조건이 이름 멋있을 거였다니까요.
언젠가 봄날에서도 썼는데 제 결혼조건이 글씨~~~~~~~~~~~~
1) 이름 멋있을 것
2) 시력 좋을 것
3) 머리숱 많을 것
우리 남편은 이 세가지가 만족하리만큼 충족되는 사람인데요.
근데 36년간 살면서 30년은 죽자사자 싸웠으니 왜그랬을까요? ㅎㅎㅎㅎㅎ
첫째조건은 뭐 그렇다치고 눈이 너무 좋으니까 제가 허구헌 날 발로 물건 걷어차고 다니고
몇번 본사람도 못알아보는 걸 이해 못했지요. 부주의 하대나 뭐래나....................
(대신 전 육감이 무지 발달되서 느낌으로 아는게 많구먼)
요즘 자기가 돋보기 써야 하니까 절 이해하게 됬대요.
세번째 ! 샴푸도 각각 다른 거 써야 해요.
난 어떡하면 조금이라도 숱이 많아 보일까를 신경 쓰는데 그 사람은 되도록 눌러서 납작하게 만드는게 일이었어요. ㅎㅎㅎ
아침에 일어나면 성난 숫사자 같았다니까요.
예전에는 포마드라고 하는 거 있었쟎아요? 일명 찍꾸라고도 하고!
그걸 발라서 막 누르는데 그걸 바르면 베개가 더러워진단 말이지요.
그게 싫어서 앙앙 잔소리 하고~~~~~~~~~~~~~~~~~
그것도 요즘 나이먹어서 점점 머리숱이 줄어드니까 절 이해하게 됬어요.
근데요. 전 30대후반부터 염색머리인데 그 쪽은 60대 후반인데도 염색 안해요.
요즘들어 감고나면 좀 희끗희끗해졌는데 그것도 영양제조금 발라 손질하면 다시 까매지대요.
친구들모임에 가면 민망해서 그냥 염색했다고 한다네요.
일부러 말할 필요도 없이 다들 염색머리로 단정지어 버리길래 가만 있는거래요.
전 피부가 지성인데 그 쪽은 건성이라 항상 비누며 로션이 맘에 안든대요.
지금처럼 두가지 놓고 쓰면 될 걸 왜 그리 별거 아닌 거 가지고 티걱태걱 했는지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니까요.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는데 30년 걸리더라구요.
황혼이혼도 많다는데 30년 걸려서라도 이해하게 됬으니 그만하면 성공한 삶 아니겠어요?
수다의 마무리는 총총언니 버전으로 우탓타타~~~~~~~~~~~~~~~총총!
유 명옥 후배
그분 머리칼은 씨 받을 머리칼이구먼
딴것은 없어도 살지만 이것은 내게 꼭
1] 머리염색
2] 앵경[언제나 2벌씩 동행함
3] 요지[소지품 여기 저기에 널려 있음
후배 좋은 하루 총총
결혼조건 세가지 정말 재밌네. 특히 1번.
생각해 보면 인연이 따로 있는 거 같애.
난 명옥후배 처럼 필요충분조건 따질 새도 없이
홀리듯이 대가족의 맏며느리가 돼버렸지.
그리고 보니 별로 큰 싸움 없이 37년을 살았네그려.
나 때문이 아니라, 그사람이 원래 평화주의자라서 싸움이 도통 안돼요. ㅎㅎ
엄청 재미없게 살은 거죠.
부부싸움을 하던 남편이 몹시 화가 났다.
남편: "당장 나가 버려!"
아내: "흥, 나가라면 못 나갈 줄 알아!"
그런데 아내가 한참 후 돌아왔다.
남편: "왜 다시 온 거야!"
아내: "소중한 걸 두고 갔어요."
남편: "그게 뭔데?"
아내: 바보처럼 바라보며 "그건 바로 당신예요."
남편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렇고 그렇게 살다가
이 부부가 황혼이혼을 했다네.
그런데 이 노부인은 위자료 받은 돈으로
철없는 늙은 남편을 도로 살려고
법원에 매수청구를 냈다고 하네. ㅎ
되도록 욕심 줄이고 편안함 맘으로 살려고 노력하지만 인생에는 항상 걱정꺼리며 갈등의 씨앗이 자라고 있네요.
그 내용이 비록 건전하고 바람직 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과정에 필요한 것들이 충족되지 못함에서
자유롭고 평안해질 수 없다는 건 엄연한 현실이구요.
사실 욕심을 줄인다는 게 까딱하면 노력하지않고 발전없이 살아가는 걸로 빗나갈 수도 있쟎아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고뇌하는 것이라고 스스로도 애들에게도 타이르고 있는데 ............................................
"어유, 저 녀석은 아직도 걸레 하나 똑바로 못 빠는구먼."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