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며칠만 여유가 생겨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늘 훌쩍 떠나 주위 사람들로 부터,
       "언제 돌아왔어요?"
라는 인사를 자주 받던 나같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자주 떠났기에 나의 일상을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할른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 사이에도 자주 떠났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그렇듯이, 무슨 강연을 위해, 무슨 무슨 회의를 위해, 혹은 안풀리는 생각을 다듬으러, 일이나 쓰는 글에 도움을 줄 사람들을 만나러, 가족을 즐겁게 하기 위해.....짧고 긴 이런 떠남들은 일상에서 피할수 없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들은 모두 여행으로 치지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여행, 내가 여행으로 치는 여행이란 여행 그 자체 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는 그런 떠남이다.
집에 돌아오면 여행의 여정만이 고스란히 되살아오는 여행,
여정에서 만난 풍광이나 거리, 바라본 사람들 속에 내 자신을 고스란히 내주어 실제 여행자인 나자신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고 없는 그런 몰입의 여행을 우리는 그리 자주 경험하지 않는다.

  
  학생시절의 여행은 늘 빈곤했고 그 때문에 많은 것을 놓쳤을 뿐 아니라 불필요하게 아슬아슬한 순간들이 많았기에 성인이 되어 돈을 벌어야하는 가장 설득력있는 이유 또한 내게는 여행이었다.
나는 한 번도 무전여행이나 배냥여행같은 낭만적인 여행의 예찬자인 적이 없다.
그걸 예찬하기에는 할만큼의 여행고생을 했기 때문이리라.

  
  나는 그래서 자유가 침해받지 않을 정도의 편안한 여행, 다음 날이 짐스럽지 않을 정도의 안정된 잠자리, 한두 번의 예외적인 식도락이나 문화행사를 현지에서 즐길수 있을 정도의 여유있는 여행을 선호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마다할 여행자가 있겠는가.
나의 문제는 여행에서 돌아와 그 여파로 몇 달간의 경제적인 불안정을 감수하고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여행이었다면 그 대가를 치루는 고난의 기간은 길이가 길어도 오히려 감미롭다.
  

   내가 여행에서 찿는 것은 나를 완전히 비우는 것,
설령 그런 상태에 온전히 다가가지는 못해도 그 비슷한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무슨 불교도의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비운다는 것은 사실 채운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상식과 고집과 습관과 편견을 비우거나 잊을 때, 새로운 지방, 새로운 세계와 사람들과 거리가 있는 그대로 다가오고 그 속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서 수혈을 가득 받아 내 피가 맑아진 느낌을 나는 여러 여행에서 받았고 바로 그런 드믈고 귀중한 기억이 나를 또 떠나게 한다.
  

   이런 여행이 꼭 나 혼자 한 것만 같은 왜곡된 기억을 남기는 것은, 동행했던 친구들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그렇지만 그런 느낌이 드는 그 자체가 그들이 여행의 진정한 동반자였다는 하나의 증거다.
여행은 이처럼 덤으로 평소에 인식하지 못하던 우정의 깊이를 확인시켜 주기도 한다.

  
   내가 찾는 것은 꼭 여행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옆 자리의 동료나 이웃, 매일 걷는 골목도 여행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에게 조금만큼의 용기와 관용의 여유가 있다면.
그러나 그 간단한 일이 그토록 어렵다. 일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선이 습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외적인 절대 시간인 여행이 필요한 것이다.
  

   딱하게도 부산한 의무 때문에 당분간 여행을 떠나기는 틀렸다.
대신, 가만히 앉아서 여행 떠나는 것을 시도해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머리가 싸해지게 맑은 계절이 벌써 반이나 지나있기 때문이다.